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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줄중앙,루미스, 뒷줄좌 녹스,중앙 이수정 |
6.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이수정의 개종과 최초 세례자
이수정(1842~1886)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일어났던 임오군란(1882.6.9)의 위기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비를 구출, 충주로 피신시켰다가 무사히 환궁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고종은 황후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치하하면서 그 보답으로 벼슬을 내리고자 했지만 그는 이를 정중히 사양한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근대적인 법률과 체신, 농법을 공부하여 나라의 장래를 위해 기여하겠다며 일본 신사유람단 제2진에 편승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고종의 특혜를 입어 박영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신사유람단 제2진에 합류하게 된다.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면 신사유람단의 일정과 별도로 움직이면서 농업, 체신, 법률을 공부할 계획을 세운 그는 개화의 시대에 애국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도착 후 가장 먼저 친구 안종수의 소개장을 들고 일본의 농학자이며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쓰다젠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일본 농학자 쓰다젠은 미국유학을 통해 서양의 농업기술을 일본에 적용하여 농업기술 혁신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일본기독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발휘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런 쓰다젠이 안종수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이수정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면서 “공자의 빛이 이 방안을 비취는 등불이라고 한다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이 세상을 비취는 태양과 같아서 이 세상 그늘진 곳까지도 다 밝게 비치일 수 있다”고 소개하며 복음을 전했다. 공자와 예수를 호롱불과 태양으로 비유하는데 놀란 이수정은 받은 성경을 그날부터 심취해 읽으며 크게 감동을 받는다.
일본에서 법률과 체신, 그리고 선진화 된 농법을 공부하여 조선의 미래를 위한 인물이 되고자 했던 이수정은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며 예수를 영접하고 7개월 만에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을 거쳐 1883년 4월 29일 로월정교회에서 야스까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니 이로써 조선의 선비이수정은 일본에서 최초 세례교인이 된다.
최초 한글성서번역과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은 믿음의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선교의 열정이 불 일 듯하였다. 그리고 조국에도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복음이 전해지고 일본처럼 서양문화로 개화될 수 있다는 가슴 벅찬 꿈을 꾼다. 그래서 우선 자기가 읽고 있는 한문성경을 조선의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글성경번역을 착수하면서 또한 불타는 선교열정으로 미국에 조선선교사요청의 편지를 썼다.
“미국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은 아직도 선교의 문이 닫혀있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채 어두움 속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주시오.” 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선교사 파송 청원의 편지를 1884년 7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 보냈다.
이 편지는『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미국선교잡지 12월호 성탄특집으로 기사화 되었다. 그것은 생명의 구하는 호소요 절규였다. 마침내 미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실업인 맥 윌리엄스가 선교사 두 사람이 조선에서 2년간 사용할 비용으로 5,000달러를 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당시 미국방문 조미사절단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이 시카고, 워싱턴을 시찰할 때 동행했던 감리교 목사 까우처 박사도 흔쾌히 2,000달러를 조선선교를 위해 내놓겠다고 편지를 일본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보내 왔다. 한편 그 글을 읽은 미국신학생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앞 다투어 조선선교사가 되겠다는 운동이 일었고 마침내 혜론과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선교사 파송을 받아 일본에 도착을 하였다. 그들은 이수정에게서 조선의 풍속과 언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이수정의 성서번역 작업도 탄력을 받아 마침내 1885년 1월 한글성경 1,000부가 발간되었는데, 이것이 한국 사람의 주도로 최초 번역된 신약마가젼 복음서언해이다. 이렇게 발간된 성경은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사로 제물포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이 책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으니 이것은 세계기독교선교역사에 유래가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전도여행 중 들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소리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과적으로 유럽에 찬란한 기독교문화가 꽃피우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미국에 두 번씩이나 조선선교사요청의 편지를 보내고, 이로인해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조선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 신학생들 속에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이수정이 ‘조선의 마케도니아 사람’ 이란 칭호를 들었다는 것은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다.
이 밖에도 그는 조선 국비유학생 30여명에게 미국선교사들을 통하여 영어성경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조선인 선교사역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수정은 1886년 5월 조정의 소환 령에 의해 귀국한 후 개화에 반대하는 정적들의 칼에 순교를 당하고 만다.
이와 같이 ‘조선의 마케도니아 사람’ 이수정은 한국기독교역사의 초석을 놓으며 빛나는 업적을 남기었다.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에서는 이런 사실을 오늘 뿐 아니라 후세에도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기독교선구자이수정기념비” 를 2006년 6월 20일 한국최초교회인 소래교회를 복원해 놓은 용인총신대신대원 캠퍼스에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복음 선교를 위해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이들을 후세에 알리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제일리 산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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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 신대원캠퍼스에 세운 이수정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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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 진흥홀리투어 대표 박경진 장로 | < 저작권자 © 감리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