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녹향의 역사를 대충 정리 했습니다

녹향 (綠香) 古典音樂室 음악을 좋아하셨던 선친(이창수)께서는 해방 직후 몇몇 지인들과 藝育會라는 음악동호인회를 만드시고 당신이 소장하고 계시던 SP 레코드로 음악 감상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동호인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찿으시다 1946년에 대구 향촌동 소재 본가에 직접 지하실을 만들어 당시 소장하고 계시던 SP 레코드 500여 장과 축음기 한 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고전 음악 감상실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향촌동 주변에 茶房이 여러 군데 영업을 하고 있었고, 음악실도 茶房의 형태로 하게 되면서 상호를 ‘綠香’(음악의 푸르름이 향기가 되어 널리 퍼지라는 뜻)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녹향의 이름 옆에는 藝育會라는 이름도 함께 새겼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대구의 녹향은 서울에서 내려온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때부터 녹향은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계의 大家들께서 함께 하시는 최고의 예술 작품 산실이 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전설적인 이야기는 바로 詩人 양명문선생께서 ‘명태’ 라는 詩를 녹향에 남기신 일입니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때로 컸을 때 내 사랑 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 중 략 -----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약주를 즐기신 양명문 선생께서 귀경하시던 날, 부친께 훗날 유명해질 터이니 잘 간직하시라며 남기신 시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예술인들이 떠나고, 대구에 남게 된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매주 개최하던 예육회 음악 감상회에는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감상실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출입구와 계단에 서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1958년 향촌동의 집을 팔고 남일동(당시 한국은행 뒤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전 향촌동의 지하 공간보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을 하면서 녹향은 LP 시대의 본격적인 스테레오 음악 감상실로 변모하게 됩니다. 지금도 녹향의 무대 위를 지키고 있는 한 쌍의 스피커는 그 당시에 어렵게 땅을 팔아 마련한 최고의 스피커였습니다. 한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두 개의 스피커에서 각각 다른 소리로 울려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당시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이러한 신기한 음향에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차츰 줄어들었고, 때맞추어 팝송 음악 감상실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음악을 찾아 발길을 돌리는 바람에 녹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부친께서는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음악실에 다시 보태어야 되는 형편이 되었고 음악실 경영은 날이 갈수록 더욱 힘겨워지기만 했습니다.   1960대년 후반에 녹향은 거의 폐점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부친께서는 남일동의 집을 팔아 중앙통(당시 서울은행 3층)으로 이전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200석 규모의 음악실로 확장하여 문을 열고, 팝송과 고전음악을 병행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까닭인지 음악실은 이전보다 번창했지만, 부친께서는 음악도들이 악보를 들고 찾아와 음악을 신청하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시며 무척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팝송 음악실 주변에 많은 건달패들이 득실거렸고, 눈만 뜨면 신문에서는 사회 악의 씨앗이라느니 하며 모든 음악 감상실을 싸잡아 비난하였습니다. 녹향도 이런 사회적 지탄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은행 측에서 음악 감상실에는 세를 놓을 수 없으니 건물을 비워 달라고 요청했고, 이후부터 녹향은 계속 장소 이전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한일극장 옆 소방서 앞 태화빌딩 2층과 3층으로 이전을 하게 되고, 다시 포정동 목마다방 3층으로 이전을 하게 됩니다. 이 장소에서는 고인이 되신 작곡가 김진균 선생의 제2회 창작 가곡 발표회(1971. 11. 25.)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 년이 멀다하고 옮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녹향은 다시 코리아백화점 2층으로 옮겨 가게 되었고, 백화점 보수 공사 때문에 다시 향촌동 명시당 금은방 2층으로, 또 다시 동성로 코스모스 아케이드 2층으로 전전하게 됩니다.   1970년대 초 대학생들 사이에 고전 음악 동호회 결성이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이름만으로 존재해오던 예육회 음악 감상회가 1972년에 다시 부활하게 되어 대학생들과 시민이 함께하는 모임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매주 한 차례 회원들의 릴레이식 음악 해설에 전문 음악 선생님들의 초청 해설이 곁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녹향은 그런대로 명맥을 다시 유지해 나갈 수는 있었지만 치솟는 임대료로 인해 장소 이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녹향은 현재의 장소 인근에서 몇 차례의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2년 현 장소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예육회를 비롯한 음악 동호인들의 모임 등으로 겨우 녹향의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고전 음악 음반와 음향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회원들의 모습도 하나둘 사라져 갔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그나마 모이던 고전 음악 동호회의 모습들도 모두 사라지고 하루에 한 명도 녹향을 찾아오지 않는 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는 문을 닫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선친께서는 녹향과 함께해온 세월을 생각하시며 ‘ 내 생의 마지막까지’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녹향을 지키셨습니다.   1996년 3월 원로 음악가들께서 부친의 이러한 생각을 전해 들으시고 대구 지역 원로 음악가회를 조직하면서 그 본부를 녹향에 두고 정기적인 음악회와 감상회를 녹향에서 열기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 행사는 녹향 창립 50주년(1996. 3. 5.)을 기념하여 많은 음악, 문학, 미술, 방송인들이 참여하여 성대히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녹향을 찾으셨던 원로들께서 직접 해설을 하시면서 정기적인 음악 감상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5월에는 계명대 김원경 교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음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녹향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원로들의 건강 문제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2009년 부친께서는 건강 악화와 운영의 어려움으로 마침내 음악실 폐업을 생각하시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지역 언론에서 “녹향의 LP판은 계속 돌아야 한다”(2009. 3. 26.)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간의 어려운 사정을 지역에 소상히 알리게 되어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지자체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몇몇 뜻있는 젊은 음악인들께서는 “마에스트로 녹향으로 가다”(2009. 11. 17.)라는 행사를 준비하였으며, 대구시향의 지휘자 곽승 선생님을 비롯하여 대구와 경북을 대표하는 다섯 분의 지휘자들께서 이 행사를 위해 무료로 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5일 동안 계속된 이 행사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호응은 놀라웠고, 선친께서는 행사 기간 동안 매일 노구를 이끌고 무대에 올라 우리 가곡을 한 곡씩 부름으로써 그 고마움에 답했습니다. 이 행사를 주관한 박향희 단장은 수익금 전액을 녹향을 살리는 데 보태 달라며 부친께 기부하셨습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다시 힘을 얻어 이듬해에는 “아티스트 녹향으로 가다”(2010. 6. 13.) 행사를 추진하였고, 이때 세계적 첼리스트 정명화 선생님을 비롯하여 강충모, 이영조, 김남두 등 많은 유명 교수님들이 행사를 빛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떠났던 예육회의 회원들도 하나둘 다시 모이게 되어 녹향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매달 정기 음악 감상회를 통해 녹향 살리기에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행사를 할 때 뿐 녹향의 운영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구순의 노인 혼자 신청곡을 받고 음료수를 대접하기엔 건강이 따라 주질 못해서 간혹 아들이 나와 돕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찾아주는 사람 한 사람도 없는 날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친께서는 2011년 2월에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쳐 겨우 걸음을 걸으시면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음악실에 나와 음반을 돌림으로써 녹향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애정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앙일보 홍권삼 기자께서 “녹향을 살려야 하는 이유”라는 제하의 기사(2011. 6. 2.)를 싣게 되었고, 이 기사를 보신 경북외국어대학교 이영상 총장님께서 임대료에 보태라며 일 년 치 임대료를 부친에게 보내주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 10월 6일 아침 온천에 가신다며 집을 나서신 부친께서는 오전 11시 온천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소천하셨고, 그렇게 사랑했던 녹향과도 영영 이별하고 마셨습니다. 소천하시기 전날 오후에도 음악실에 나오셔서 앞으로의 녹향 운영을 걱정하시며 몇몇 분들께 전화를 드리고 하셨는데……. 선친께서 떠나시던 날, 녹향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서 녹향을 찾아오셔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음악과 눈물로 고인을 배웅해드렸습니다.   지금 녹향 음악실에서는 한평생 음악이 좋아 음악과 함께 살다 가신 선친의 뜻을 잇고자 하는 셋째 아들(이정춘)이 선친의 자리를 지키며 음반을 돌리고 있습니다. 녹향의 LP판은 오늘도 계속 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