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에서의 아침 **
늦은 밤에 마신 맥주 두 잔 탓인가. 아침에 눈 뜨니 입안이 깔깔하다. 박쟁은 곤히 잠들어 있다. 세상 모르고 자는 사람의 얼굴은 평화 그 자체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자리에 눕기만 하면 금세 잠들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단잠을 잤었다. 조금 뒤척이다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서는 심한 하수구 냄새가 역겹다. 해변은 온통 쓰레기 천국이다. 벌써 7시 가까이 되었는데 청소가 안 되어 있다. 일요일이서 환경미화원들도 쉬는 것일까. 나는 내 집 지저분한 것은 견딜 수 있는데 공공 장소가 지저분하면 신경이 쓰인다. 걸음을 서둘러 동백섬으로 갔다. 이곳은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운동복을 입고 아침 산책 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청바지차림으로 40여 분 걸었다.
그랜드호텔 목욕탕은 한산하다. 실내 구조도 좀 바뀐 듯하다. 예전의 붉은 장미탕은 이제 초록의 솔잎탕으로 바뀌었다. 천정은 유리로 되어 있다. 그 땐 붉게 물드는 내 몸을 바라보며 관능의 내밀한 떨림을 상상했었는데 이번엔 초록으로 물드는 내 몸을 바라보며 그런 상상을 하지 못했다. 붉은 색과 초록색의 차이일까, 나이 차이일까. 다만 황토찜찔방과 맥반석찜질방을 번갈아 가며 창밖의 바다풍경을 즐겼다.
박쟁은 이미 출발 준비를 다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콩나물국밥을 먹으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아침은 느긋하게 호텔에서 먹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여행지의 아침’은 어쩐지 낮과 밤과 다른 기분을 자아낸다. 노보텔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커피도 반 잔이나 마시는 호기를 부렸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 부산가나아트 **
부산 가나아트는 노보텔 4층에 있다. 해운대 주변 풍경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박쟁의 ‘우미갈’ 카페 회원들이 찾아와 일행이 늘었다. 지아님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합류했다. 전시 주제는 ‘오아시스’다. 배병우의 물결 사진이 인상적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은 운동성을 지녔을 텐데 사진 속에서는 오히려 고요해 보인다. 작품들 어디에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아시스란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산과 바다와 숲속이다. 정말 그럴까. 도심의 일상을 버릴 수 없는 현대인에게 오아시스가 그리 멀리 우장 찾아가야 하는 곳에 있다면 우리는 불행하다. 삶터와 가까운 어디쯤에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비밀의 공간이 오아시스여야 한다. 물론 이 오아시스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과연 나의 오아시스는 있을까? 스스로 물었지만 스스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 고은사진갤러리 **
해운대구청에 주차를 하고 ‘고은 사진갤러리’에 갔다. 아침에 맡은 하수구 냄새는 온 데 간 데 없고 아주 향기로운 향기가 사방에 퍼져 있다. 지아님이 은목서 나무에서 나는 향기라고 일러주었다. 은목서는 수형도 참 아름다운데 꽃향기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모두들 감탄하였다. 고은사진갤러리는 해운대구청 주변의 낡고 오래 된 건믈 사이에 있지만 리모델링을 잘 해서 미감이 뛰어났다. 이정진 사진전을 보았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도무지 구별을 못하겠는데 박쟁은 사진이라고 금세 알아본다. 화선지에 사진을 인화할 수 있나? 화선지 위의 흑백 풍경들과 버려져 쓸모없어 보이는 연장들은 쓸쓸하면서도 다감하게 다가온다.
** 조현화랑 **
달맞이고개 갤러리 순례에 나섰다. 조현화랑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어째 콧대가 높아 보인다. ‘죠르쥬 루쓰’의 작품은 처음엔 아주 난해하였다. 그런데 그가 공간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고 나니 참 재미있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비디오로 보았는데 이건 거의 막노동 수준이다. 예술은 노동의 결과라더니 맞는 말이다. 그는 3차원 입체 공간을 2차원 평면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그 과정은 완벽한 수학적 계산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버려진 공간을 찾아가 새롭게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연출한다는데 그의 작품이 조현화랑에도 있었다. 벽에 걸린 작품에서는 나무 계단 사이에 분명히 둥근 원이 있었는데 그가 작업한 실제 공간을 보면 둥근 원은 온 데 간 데 없다. 착시 현상이다. 우리가 무엇을 아름답게 느낄 때, 완벽하게 느낄 때 우리 눈은 정직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착시현상을 일으킬까. 놀라운 작업 방식이었다.
** 숨 갤러리 **
이진관 나전칠기 작품 전시회, 소재의 전통성을 현대적 형식으로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꿈, 은하수, 세계로 등등의 작품은 놀라웠다. 벅차도록 아름답고 신선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숨이 멎는 듯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찌르르 떨렸다. 갤러리 옆 카페에 매달아놓은 둥근 의자를 타고 아이처럼 웃었다. 밖엔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코리아 아트센터 **
‘싱단웬’중국 작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중국작품이라면 그저 사회적 리얼리즘 작품만이 떠올랐는데 이 작품들은 전혀 달랐다. 미니어처를 사진으로 찍어서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거리와 고층아파트와 상점들이 중심이다. 가끔 한 두명의 사람이 보이는데 그들은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서 술을 한 잔 하거나 창문에 기대어서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 누군가가 쓰러져 피를 흘리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다. 망망대해 고립된 섬처럼 점점이 흩어져 홀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외로움이 짙게 배어났다. 문득 죽은 최진실 씨가 떠올랐다. 잠시 우울한 감정에 빠졌다. 도록을 한 권 샀다. 자주 들춰 볼 것 같다.
이 곳 4층은 꽤 비싼 음식점이다. 마침 이 곳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국대호 화가를 박쟁이 알고 있다. 그가 전화로 연락해두었으니 꼭 4층에서 차를 마시고 가라고 했단다. 4층은 환상적이었다. 절제된 선만이 빚어낼 수 있는 고급한 아름다움이 쾌적한 공간을 연출한다. 바다를 다 보이도록 통유리를 쓸 법도 한데 건축가는 그리하지 않았다. 세로는 짧게 가로는 길게 내어놓은 유리창은 딱 보고 싶은 만큼의 바다를 보여준다. 그래서 질리지 않았다. 절제된 창 자체가 풍경이 되어 준다.
** 이듬 갤러리 **
갤러리 관장과 지아님이 잘 아는 사이라 잠시 아픈 다리도 쉴 겸 차 한 잔 마시며 관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주 멋있어 보인다. 외모가 멋지려면 내공이 있어야 한다.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정제된 기품이 우러난다. 황용진 작품을 보았다. 인상적이었다. 작품 속 어디에도 인간이 없다. 구름 둥실 떠 있는 하늘, 어두워 오는 산과 노을지는 하늘, 컴컴한 숲, 도로 등을 배경으로 자동차, 책꽂이, 술병, 찻잔 등이 떠 있다. 자동차만 보았을 땐 욕망을 읽었는데 전시된 작품을 다 보고 나니, 화가가 말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위안이지 싶다.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텅 빈 집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책을 읽고, 가끔은 술 한 잔을 마시기도 하고 차를 나누기도 하지 않던가. 그것은 모두 현대인에게 위안이 돼주는 사물이다. 결국 현대인들은 어떤 사물과 그를 사용하는 행위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외로움을 잊는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 채스아트센터 **
이 곳 관장도 지아님과 친구란다. 이 건물은 원통형으로 온통 하얗다. 마치 지중해 어디쯤에 와 있는 듯하다. 집주인은 집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인들을 만나는 곳에서 정말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주었다. 그녀는 달변가였다. 나는 피곤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달변이 불편했던 것일까. 맞장구도 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였다. 언제라도 와서 손님방에서 머물다 가도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머물 일이 있을까 싶다. 이곳에선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를 그린 신장식 화가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포스터의 원본 그림은 포스터가 주는 미적 감수성만 못햇다.
일행 중 두 사람은 먼저 떠나고 지아님과 박쟁과 그리고 울산에서 온 사회 초년생 초등학교 교사와 나, 4명이 청사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지아님 덕분에 승용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어서 참 많은 곳을 다녔다. 나도 언젠가 그녀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감사한 우정을 베풀 날이 오겠지.
지하철 표 사는 데 실패하였다.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된다. 까딱하면 7시 5분 기차를 놓칠 것 같다. 그냥 개구멍으로 빠져나오듯이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부산역에서 제지하는 역직원이 없어 무사 통과하였고 기차도 놓치지 않았다.
참 긴 하루였다.
첫댓글 자리에 눕기만 하면 금세 잠들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ㅍㅍㅍㅍㅍ,.ㅍ 그래도 이번엔 지지향때 비하면 약과지요? 그 여행은 정말이지 잠의 여행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이 나요. / 여행지에서의 아침, 작년엔 파라다이스에서, 올핸 노보텔 엠버서더에서, 내년엔 달맞이 고개로!!
한편의 버디영화를 보고난 소감입니다.
내년엔같이찍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