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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충헌공파 통안가족
 
 
 
카페 게시글
密城朴氏 忠憲公派 자료실 스크랩 함평 기성가
매곡 박지희 추천 0 조회 25 13.07.13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함평 역사 숨쉬지만 전수되지 못해 아쉬움
19세기 말 호남가와 함께 유림민초들 사이 유행
52개 마을 54명 인물 등 소개된 서사시적인 노래

 

함평 기성가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고향(光州故鄕)을 보려하고” 까지는 거의 부를 줄 안다. 그래서 ‘호남가’의 제목은 몰라도 ‘함평천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노래 제목이 ‘함평천지’인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호남의 수많은 고을을 두고 첫머리에 함평이 불리게 된 것을 함평사람들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호남가가 불리기 시작한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헌기록에서의 호남가는 1821년부터 1823년까지 함평현감을 지낸 권복(權馥)의 함산가(咸山歌)에 처음 찾을 수 있다. 첫 구절(호남의 여러 고을 노래하는 호남가도)에 보이듯이 호남가는 이미 1800년대 초 이전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지식인인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정조 17년(1793)과 순조 20년(1820)에 걸쳐 두 차례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민요로 구전되던 것이 경복궁 낙성식(1867년) 때 전국명창대회에서 전라도 대표가 호남가를 불러 장원을 하면서 비로소 전국에 퍼지기 시작해서, 호남가는 민초와 선비들이 함께 음유(吟遊)한 우리의 유일무이한 곡으로 전래되었다.

‘咸平’ 한자의 의미를 본다면 ‘평화롭고, 모자람 없이 화평하게 고르고 바르게 되는 곳’이란 의미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요즘 함평에서는 국향축전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호남가 경창대회가 열린다. 그러나 함평에는 함평을 노래하는 기성가(箕城歌)가 있다. 우연하게 호남가 아닌 기성가를 알아보려고 함평군청에 관계자들에게 문의 했으나,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기성가는 나산면 삼축리 출신의 박봉혁(朴奉赫, 1873~1935)이 38세에 지은 단가조 또는 민요조의 노래로 유림들 사이에 애창 되었다고 하는데 단가 풍으로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래가 전수 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젊은 선비들의 우국충정이 담겨 내 고장의 의미와 충효와 경관을 노래한 것으로 풍수지리에 연계한 유교적 사상을 근간으로 만들어 52개 마을, 54명의 인물, 그리고 14개의 산과 18점의 유적·유물이 소개된 서사시적인 노래인 샘이다. 따라서 기성가를 외우면 함평의 역사를 알게 된다.

춘삼월 호 시절에 (春三月好時節에) 춘복(春服얼)을 떨쳐입고, 기성관(箕城 함평현의 객사)찾아가니(차자가니), 착산통도(鑿山通道) 그 가운데, (산을 뚫어 길을 냄 국도32호) 읍기(邑基읍터,) 가개량하여(하야) (어질고 착함이 발하여) 부귀인 많이(富貴人 만니) 나나. 선왕전패(先王殿牌) 어디(어듸)가고(관청의 객사에 군주를 상징한 전(殿)자를 새겨는 패) 객사(客舍)가 공사되어(空舍되야)격설성만 나는구나(난구나). (일본말 또는 일본관헌의 구두소리)

기산사 바라보니(箕山祠 일명 유애사로 억울하게 파면된 현감 6명을 모신 사당 1868년 훼철) 박동호(朴東湖), 오석문(吳石門)(동호 박정원(朴鼎元)의 호, 1617~1618 재임, 인목대비 폐모 상소론 자들을 향교에서 퇴출, 석문 오이익(吳以翼)의 호. 1657~1658 재임) 장구적(유명한 사람이 머문 흔적)만 남았구나(나머구나).

기산산정(箕山山頂) 올라가서(가셔) 전후좌우(前後左右) 돌아보니(도라보니), 남녀노소 왕래변(男女老少 往來邊)에 만화방창 호접무(萬化方暢 蝴蝶舞 꽃이 피고 벌 나비가 춤추고)와 만수녹음(萬樹綠陰) 금조성은(禽鳥聲언 숲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고 날짐승이 운다)변치 않고(變치아코) 전 같구나(前 갓구나).

대화를(大華을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 남망(南望)하니 산포야연(山抱野蓮) 그 가운데(그가운데, 산을 안고들을 곳, 수산봉 앞의 들을 말함) 모장령(牟掌令으)의 태지(胎址)되고 (장령은 모달겸(牟達謙)호, 탄생지. 1789년 문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을 지냄) 해동(海洞얼)을 바라(바)보니, (함평읍 수호리 해동) 조율재(曺栗齋으)의(율재는 조정(曺艇)의 호. 인조 때 급제하여 군수를 지냄) 세지(世址)로다.

걸음을 재촉하여 (거름얼 재촉하야) 영수정(潁水亭) 내려가서(나려가셔) (함평공원과 접한 하천 영수정 또는 영파정. 정자는 현 함평 공공도서관 동편 쪽에 있었음) 관덕정(觀德亭) 구경하고, (이안이 건립한 영파정이 소실된 후 지은 정자. 관덕정으로 고침) 청정(淸淨)한 백석상(白石上)에 (하얀 돌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여울) 낯도 씻고 귀 씻으니 (낫도싯고 귀싯치니), 음독하는(飮犢하난) 저 노인(져老人)이 (송아지에게 물을 먹임) 소부(巢父) 거동 분명(分明)하다. (중국 고사의 선비. 요 임금이 중책을 맡기려 했으나 사양하고 기산에 들어가 나무 위에서 기거했다)



함읍시(咸邑市)에(지금의 기각리 구시장) 중화(中火)하고(길을 가다가 지어 먹는 점심) 향교촌(鄕校村)을 지나(니)가니, (대동면 향교리 향교) 이씨의 세거(世居)로다(함평이씨 이덕일(李德一)가의 세거지) 장단문행(莊壇文杏) 바라(바)보고, (향교를 말함.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친데 유래) 대성전(大成殿)(향교 내 공자를 모신 사당) 들어가서(드라가셔) 주오성(周五聖)(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송육현(宋六賢)(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장재, 소옹(邵雍))과 오동(五東)의 십팔현(十八縣얼)(우리나라 18현,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흔, 김장생, 김집, 송시열, 조헌, 송준길, 박세채)을 차서(次序)로 배례(拜禮)하니, 일월산두(日月山斗)(해와 달, 북두칠성. 인간의 근본적인 의례) 분명하다. 중략

산고수회(山高水廻 산은 높고 물이 휘감아 돔)하온 중에 윤노파(尹老坡노파는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의 주역 윤황의 어진(으어진夫人) 부인 정열분명 배씨 같다(貞烈分明裵氏 갓다) 고막원(高幕院 학교면 고막리 고막원. 옛날 원(院)이 있어 부르는 이름. 원터는 지금 정자터)남견(南見)하니 어염선(魚鹽船고깃배와 소금배)이 만포(滿浦포구에 그득함. 고막포에는 1960년대까지 배가 드나들었다)하다, 날이 이미 저물거늘(날이 이무 져물거날) 몸 곤(몸困)하고 기갈(飢渴허기지고 목마름) 하여(하야) 십 여 면 방방곡곡(十餘面 方方谷谷) 귀경을(歸景얼) 못 다하고 걸음을(거름얼) 바삐 하여(밥비하여) 장파평(長波平옥동에서 나산에 으르는 들 이름) 순식 지나(瞬息지) 축동 폐려(杻洞弊廬저자의 집. 나산면 삼축리 동축) 돌아오니(도라오니) 노처는(老妻난) 맥반(麥飯) 짓고(아내는 보리밥 짓고) 치자는雉子(어린 자식들)난 후문(候門문밖에 마중 나와 문안 인사드림)하니 이십남유 강회(二十南遊江淮20여세에 회강(하남성에서 발원하여 강소성을 거쳐 황해로 흐르는 중국의 3대강의 하나. 회수) 남쪽을 유람함)하던 사마자장(司馬子長중국의 역사학자 사마천) 완연(完然)하고 율리송국(栗里松菊 밤나무,소나무,국화 등 전원생활을 말함) 직거하던(즐겨하던) 도원량(陶元亮중국 동진말 오류선생이라 자처하던 도연명을 말함. ‘귀거래사’를 남김. 저자 자신을 사마천과 도원량에 비교함)이 흡사(恰似)하다. 함평땅 모든 청년 이 노래 불러 보소(이노불러보쇼) 낭유보다(浪遊보단) 유조(有助)하리. 하면서 기성가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함평의 노래인 기성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알리고 보급했으면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이들이 아직도 기성가 자체를 모르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호남가 경창대회보다는 기성가 같은 함평의 노래를 보급하는 그런 마음이 필요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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