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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게임
-오정희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 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구조라는
것을 원망하는 시늉으로 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썼다. 그래도 가스렌지 주변의 흘리듯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
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 거품으로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어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된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 라고 말했었다. 실내의 바람으로 군용항고에 콜타르처럼 꺼멓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사였다.
약을 달이는 동안 내내 누릿하고 매움한 냄새는 집안 곳곳에
스며들고 비단개구리의 살과 뼈는 독한 연기로 피어올라 마침내 낙진처럼 무겁고 끈끈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빈혈증과
구역질로 헐떡이며 건성의 피부에 더럽게 피어나는 버짐과
잔주름으로 거울 앞에 매달렸다.
얼룩은 변질된 스테인리스로 기억보다 독하고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잘되었다. 부엌 선반의 시계는
다섯시 반을 가리키고 밥은 한참
뜸이 들어가는 중이고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에서는 비늘 타는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서향의 창으로 비껴든 햇빛은 젖은 도마의 잘게 파인 홈마다
끼인 찌끼를 뒤져내고 칼빛을
죽이며 개수대의 물에 굴절되어 물속의 뿌연 앙금을 떠올렸다.
굳이 발돋움을 하지 않아도 눈가에 걸리는 낮고 길다란 창을
통해, 사역을 마치고 빈터를
가로질러 돌아가는 소년원생들의 행렬이 보이는 것은 여느날과 다름없다. 칠, 팔십명 정도는 좋이(족히) 될 그들은 한결같이 바랜 듯한 회색 작업복에 같은 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수의라는 이쪽의 선입견이 작용한 탓일까, 아니면 빈터에
흐름직한 바람을 짐작한 탓일까. 나는 늘상 헐겁게 걸친 작업복 아래 소름이 돋은 깔깔한 맨살을 만지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귀가 맞지 않게 잘라진 낡은 천조각처럼 펄럭이며 느리게 움직이는 그 행렬은 시멘트로 다져 빚은 거대한
수레바퀴가 느리고 둔중하게 굴러가는 모습이나 어쩌면 길고긴 라단조의 휘파람소리 같기도 했다.
행렬의 앞과 뒤에는 각각 한걸음 정도 떨어져 감시원인 듯한. 잠바 차림의 사내가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면 나는 부근 어딘가에 아마 군인들의 막사가 있는 모양이라고 무심히 보아넘길 뿐 축도 없이 느릿느릿 굴러가는 시멘트 바퀴나 인과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한없이 돌아가는 지옥의 연자맷돌 따위 어린아이와 같은 공상으로 발돋움질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개를 끌고 저녁 산책에 나갔다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문득 멀지 않은 야산을
끼고 돌아앉은 소년원을 떠올리며. 아, 뜻 모를 탄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본능적인 수치심으로 개줄을 팽팽히 끌어당기며 외면을 했다. 행렬의 가운데에서 깜짝 놀랄 만큼 앳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소년의 눈빛은 선연하도록 맑았다.
단지 제복에서 문득 느껴지는 청신함 때문이었을까 둥근 보에 떠오른 차가운 핏기에서 문득
자각되어진 자신의 노추에 대한 의식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곧 한때의 무리로 뒤섞여 내 곁을 지나쳤다. 나는 그애의 얼굴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 전체를 한 줄로 세워놓고 살핀대도 나는
그 애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연하도록 맑은 눈빛은 하나의 느낌으로 남아 매일 그 시간이면 부엌 창문을 통해 그애가 있음직한 위치를
어림해보는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들판을 거의 다 지날 무렵 중간쯤에서 조그만 동요가
생겼다. 한 소년이 벗겨진 신발이라도 고쳐 시는 시늉으로
엎드린 것이다. 소년의 뒤로 갑자기 행렬이 주춤하고 곧 뒤에서 따라가던 잠바 차림의 사내가 다가갔다. 나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그 소년이 집어올려 소매 속에 재빨리 집어넣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신발 속에 감추었을지도. 소년은
사내가 다가가자 허리를 펴고 손바닥을 털었다. 그들은 더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마치 수화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내는 다시금 세 자리로 돌아가고 그들은 잠시 벌어졌던 거리를 메우느라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실 햇빛을 거둔 들판에 반짝거릴 무엇이 있을
것인가. 들판이 끝나는 산등성이 드문드문 이미 공사가 반쯤
되었다가 추위가 오기 전 마지막 손실을 서두르는 집들이 서
있던 택지들 끼고 그들은 시계에서 사라졌다. 길고 긴 휘파람 소리도 둔중한 수레바퀴도 사라졌다.
나는 개수대의 마개를 뽑았다. 그렇다, 막힌 구멍은 낮에 수선공이 와서 뚫었다. 개수대 구멍에서는 물이 빠지지 않아
늘 썩은 냄새가 났었다. 깔대기 모양의 압축기로 몇 번 펌프질을 하자 끌어올려진 것은 섬유질만 남은 야채줄기와 뒤엉킨 머리칼 뭉치였다. 어느새 등뒤에 온 아버지는 거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여섯시가 되어가고 있다. 부엌이 한쪽 벽에 붙여놓은 식탁에
습관적으로 세벌의 수저를 놓다가 깜짝 놀라 한 벌을 다시
수저통에 넣었다. 수선을 떨 건 없어 오빠는 오늘도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면서도 손은 관성의 법칙을
이행한 것뿐이니까.
ㅡ 얘야. 까치가 어느 쪽을 보고 우니?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소년원생들이 사라진 빈터의 키높은
포플라를 올려다봤다. 누릿누릿
물들기 시작한 이파리 사이. 나무의 우듬지 끝에서 까치가
울고있었다.
ㅡ 렌즈를 빼버렸어요.
나는 그릇소리들 내며 대답했다. 콘택즈렌즈가 없으면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ㅡ 까치가 우는 쪽으로 침을 뱉아라. 저녁 까치는 재수가 없단다.
ㅡ 잘 안 보인다니까요.
ㅡ 렌즈는 어쨌니. 또 잃어버렸구나. 그러기에 안 쓸 때는
꼭 물에 담가두랬잖니?
렌즈를 빼버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동공에 정확히 부착된
렌즈를 통해 나는 우듬지 끝에 앉아 이 편을 보고 우는 까치의 저녁 빛에 기름이 묻은 듯 검게 빛나는 깃털이며 강철처럼 단단해 뵈는 날개 터는 모습까지 확연히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햇빛이 물러가 어둑신한 마루의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잠깐 눈살을 찌푸려 바라보다가 선반에 올려놓은 녹음기의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정작 아버지에 대한
짜증은 없었다. 낮에 들었던 코다이의 관현악 서주부가 귀에서 뱅뱅 돌았다. 스륵스륵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느리고
약하게 들려왔다. 녹음이 안된걸까 의아해 하는데 느닷없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마 희망음악 시간이었나 보았다. 라디오에서 쉬에 익은 곡이 나오자 나는 갑자기 그것을 녹음해볼 생각이 났다. 녹음기는 구형 소니였는데 오빠의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처박아둔 그것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역시 서랍을 뒤져 빈 테이프를 찾아 걸었을 때는 이미 서주부가 끝났을 때였다. 오래된 음반인지 원음보다 잡음이 더 많았다. 중간에
끄지 않은 건 순전히 귀찮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용 테이프는 반도 감기지 않아 끝이 났다. 십 분쯤 듣다가 스위치를
눌러 끄고 나는 조금 딱딱한 음성을 만들어 말했다.
ㅡ 저녁준비 됐어요.
귀를 후비던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엄지손가락과 맞부딪쳐 탁탁 털고난 뒤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쏴아 물 트는 소리.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한 겹
벽 너머로 들으며 나는 말끔히
닦인 식탁을 다시 행주로 문질렀다.
ㅡ 수건 있니?
아버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휙휙 뿌리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ㅡ 목욕탕에 있는 걸 쓰시지 그래요
ㅡ 더럽고 축축하더라
그건 거짓말이다. 낮에 개수대를 뚫은 수선공이 쓴 수건을
새 수건으로 바꿔 걸었던 것이다. 까치는 여전히 포플라 꼭대기에서 울어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종내 그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지 창으로 눈길을 주며
ㅡ 아무래도 부엌이 잘못 앉았어. 저녁해가 드는 게 좋지 않아.
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이태 전 위장을 반 넘게 잘라낸 뒤로 아주 식사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되도록 느릿느릿 먹기에 신경을 써도
언제나 아버지가 식사를 반도하기 전에 숟가락을 놓게 되곤
했다. 햇빛은 점점 물러가 어느새 문께에 한줄기 엷은 금으로 남았다. 그것마저 곧 스미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완강히 드러나는 턱뼈와 무력하게 늘어진 목덜미의 주름이 눅눅하게
그늘 속에 잠기는 것을 나는 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가을 해는 짧아 저무는가 싶으면 이내 어둠이 온다.
ㅡ 불을 켤까요?
나는 가시를 바른 생선을 아버지 앞에 밀어 놓으며 물었다.
ㅡ 국이 식었어.
나는 가스를 틀어 국냄비를 얹었다. 어둑신함 속에서 일정한
불꽃으로 새파랗게 타오르는 가스불은 늘 마법의 불을 연상시켰다. 쉿쉿쉿......열기는 없고 다만 금속의 반사처럼 차가운 가스불꽃. 아버지의 얼굴은 어둠 때문에 좀 침통해 보였고 끝이 조금 쳐진 콧날은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내
얼굴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것이 나를 까닭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데워진 국냄비를 식탁에 놓고 나는 우정 그러하듯 조용히 일어나 녹음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다투듯
소란스런 선율에 아버지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놓았다. 안단테의 3악장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씹고 조금씩 국을 마셨다.
음악이 끝나고 빈 테이프가 돌아갔다. 한 시간용의 테이프는
곧 끊기고 멈춤 스위치가 올라갈 것이다.
- 물을 다오.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트림을 하며 컵을 내밀었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나는 흠칫 손을 멈추었고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마루를 바라보았다. 인기척도 없이, 탁하게 갈앉은, 밤새의 끽연으로 쉬고 갈라진, 그러나 명료하게
그 소리는 들려왔다…….
……이렇다 할 취미나 재미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의 유일한 도락은 권총에 있었다. 만물이 잠들기를 기다려 벌거벗고
5연발의 총알이 장전된 총을 귀밑에 들이대는 것은 단순히
절대적 긴박감과 자유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유가
아니라 유희일 것이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혹 누군가
불시에 문을 연다면, 혹 어디선가 엿보는 눈을 발견한다면
혹 뜻하지 않게 등허리 부근을 모기에게 물린다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거의 반사적인 행동으로 방아쇠를 당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이르면 머리의 혈관은 수만 볼트의 전류로 충전되고…….
방문객은 갑자기 사라졌다.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3인용 식탁의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빈 테이프는 다시금 스륵스륵 돌아갔다. 나는 컵에 물을 마저 따랐다.
그것이 오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재생되어지는 소리는 다 그런걸까. 오빠의 목소리는 마치 망자의 혼백처럼 먼 곳에서부터.
그러나 이상한 절박감으로 우리에 찾아왔다. 오빠는 종종 자신이 쓴 글을 녹음해서 들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뒤처리는 항상 깨끗했기에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긴 부분이 있으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ㅡ 불을 켤까요?
스륵스륵 돌아가던 테이프가 다 감기고 털거덕 멈춤 스위치가 튀겨오르자 나는 갑작스런 어둠에 눈을 껌벅이며 한결 조심스러운 어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남포 모양의 갓을 씌운 전기 불빛으로 식탁은 느닷없이 튀어오르고 냉장고, 벽선반, 갈포를바른 벽은 마치 암전된 무대의 소도구들처럼 갓그늘 뒤로 사라졌다.
아버니는 물로 우우 입가심을 한 뒤 방에 들어가 화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내가 식탁을 치우는 동안을 참지 못해
탁탁 신경질적으로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둥근 불빛 아래
부얼부얼한 털스웨터를 입은 두꺼운 어깨가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ㅡ 다 저물었는데 뭘하러 재수패는 떼어요?
와락와락 그릇을 씻으면 나는 물었다.
ㅡ 저물었대도 끝난 건 아니잖느냐
끝나지 않다니요! 무엇이요! 속으로 반문하면서도 예사로운
말투에서 예사롭지 않은 암시를 캐내려는 이쪽의 과민성이
우스워졌다. 씻은 그릇들을 찬장에 넣고 앞치마를 벗으며 돌아서자 아버지는 늘어놓았던 화투를 모두었다.
ㅡ 뭐가 떨어졌어요?
ㅡ 손님이야
아버지는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ㅡ 과일을 깎을까요?
ㅡ 커피를 마시겠어.
아버지의 치켜뜬 눈에서 조바심이 번뜩였다. 어서 내가 앉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찻물을 불에 얹고 맞추앉았다.
ㅡ 너부터 하랴?
ㅡ 어딜요. 선을 봐야죠
나는 아버지가 쌓아놓은 화투를 듬뿍 떼었다. 매화 다섯끗이
나왔다. 아버지가 흑싸리 껍질을 들어보이며 내게 화투를 밀어놓았다. 이미 두껍게 부풀어오른 마흔 여덟 장의 화투는
한 손 가득 잡혔다. 낡을 대로 낡아 처음의 그 차르륵 쏟아지는 신선한 감촉은 없이 눅눅하고 끈끈하게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ㅡ 고루 쳐야 한다. 재수를 봤으니 한 덩어리로 뭉쳐있을 게야.........그만 쳐. 또 너무 치면 도로 제자리로 가버린다니깐
내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아버지는 뒤집혀진 맨 위의
화투장을 가볍게 튀기는 시늉만으로 떼었다. 나는 우선 한
장씩 차례로 나누는 것으로 쓸데없는 껍데기가 겹쳐 들어올
것을 겁내는 아버지의 조바심을 풀었다.
ㅡ 물이 끓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몫인 열장이 다 모일 때까지 뒤집혀진 채로의 화투에 손을 대지 않는다.
주전자 주둥이로 쉭쉭 물이 넘쳤다.
나는 화투장을 놓고 준비해둔 두 개의 찻잔에 물을 부었다.
스푼으로 젓는 동안 아버지는 뒤집혀진 내 패를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ㅡ 내겐 사카린을 넣어라
ㅡ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그러한 주의가 없어도 내가 설탕을 넣지 않으리란
것을 물론 알고 있다. 단지 내것을 훔쳐보는 손의 움직임을
은폐하려는 시늉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중중의 환자이다. 겨우내 고유의 처방으로
비약을 장복해도 아침마다 변기에는 누렇게 거품이. 당질의
소변이 괴어 있었고 아버지는 그곳에 우울한 얼굴로 검사용
테이프의 끝을 담그곤 했다.
찻잔을 들고 식탁에 돌아와 내 몫의 화투를 거둬 쥐는 것을
보고야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모두어 쥐고 낡은 부채를 펴듯
조심스럽게 한 장씩 펴나갔다. 아버지의 입가로는 만족한 웃음이 지나갔다. 식탁에는 여덟 장의 화투가 현란하게 깔려있다.
ㅡ 낙양은 꽃밭이로고. 밭이 암만 걸어도 뿌리 씨가 없으니
어쩐다?
아버지가 곁눈질로 내 패를 흘깃거렸다. 나도 화투장을 움켜쥔 채 단단히 진을 친 아버지의 것을 넘겨보았다. 굳이 넘겨다볼 것까지도 없었다. 뒷면만을 보아도 무슨 패인지 환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로로 비스듬히 금이 가 있는 것은 난초다섯끗. 왼쪽 귀가 뒹굴게 닳은 것은 목단 껍질. 오른쪽 모서리가 갈라진 것은 멧돼지가 그려진 붉은 싸리 열끗이다. 뒤집어 들고 있는 것보다
그림이 그려진 앞면을 서로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이 속임수가 가능할 만큼 아버지와 나는 화투장의 뒷면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ㅡ 단. 약. 칠띠. 사광 모두 보기다
ㅡ 물론이죠
청띠를 두른 목단 다섯끗도 단풍 열끗도 쥐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머물고 있는 것은 깔려 있는 팔공산 스무끗이다. 그리고 얌전히 엎어져 들취 줄 것을 기다리는 것은 역시 공산껍질이다. 댓바람에 스무끗을 내놓고 껍질을 뒤집어 맞춰 쓸어
가기가 민망해서 음흉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한참 궁리 끝에 정말 이렇게 팔 수밖에 없다는 듯
억울한 얼굴로 공산 스무끗을 내놓고 뒷장을 맞춰 쓸어갔다.
ㅡ 벌써 스무끗이네. 아버진 배짱이 좋으셔. 사광을 하실래요?
나는 염치를 배짱으로 바꿔 말했다. 아버지가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풀썩 던지듯 붉은 싸리 다섯끗을 먹었다.
ㅡ 칠띠를 하겠구나
ㅡ 이제 하난걸요. 어디 맘대로 되나요. 든 게 없는걸요
하지만 단풍을 깨뜨리고 아버지가 들고 있는 목단 청띠를 내놓게 해야지. 그런대로 삼약을 깨든가 아니면 해야 한다는
계산으로 머릿속은 바빴다.
ㅡ 천끗내기를 하랴?
ㅡ 좋지요
가을이 깊어지고 밤이 깊어지면 천끗내기 정도로야 어림도
없을 것이다.
머리 위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칭얼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그것을 달래는 여자의 웅얼거리듯 낮은 자장가 소리가 들려왔다.
창은 먹지를 댄 듯 새카맣고 불빛 아래 아버지와 나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마치
먼 옛날부터 이렇게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화투 놀이를 해왔던 것 같다. 그 이전의 기억은 마치 유년시절의 꿈처럼 현실과 공상이 뒤섞여 멀고 아리송했다. 패가 막히거나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일단 변소를 다녀오는 노름꾼의 풍속대로 오빠는 자기의 패를 점쳐보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뜬 것이다.
ㅡ 밤에 우는 건 나뻐. 애들이 극성을 떨면 꼭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든
ㅡ 저도 몹시 울었다면서요?
수국 껍질을 모아들이며 나는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잘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이 창파에 다가올 때까지
ㅡ 네 에민 목청이 좋았었지.
그건 사실이었다. 유치원 보모였다는 어머니는 퍽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고 목소리가 고왔던 만큼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금자둥이 은자둥이 구슬같은 눈을 감고
별빛 같은 눈을 감고 꿈나라로 가거라.
ㅡ 네 차례다.
아버지도 역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 문득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붕 위에서 여자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메트로놈의 움직임처럼 정확하게 베란다의 한쪽 난간에서
다른 한쪽 난간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넉 달 전인가 새로 이층에 세를 들어온 그 여자를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바깥쪽으로 나 있고 또 세를 든 사람은 셋문을 이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투정이 심한 아이는 초저녁부터 울어대기 시작하고 우리가
화투를 하고 있는 동안 밤이 깊을 때까지 그 여자는 낮고 단조로운 노래로 우는아이를 달래며 머리 위에서 발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손안에 남은 석장의 화투를 차례로 더듬다가
아버지가 들고 있는 홋끗짜리 오동을 흘겨보며 오동 열끗을
팽개치듯 내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얼른 그것을 가져가며 아버지는 희희낙락 엉구렁을 떨었다.
ㅡ 첫끗발이 개끗발이더라니........
ㅡ 첫술에 배부를까요
ㅡ 불빛이 흐리구나. 트랜스를 써야 할까부다
ㅡ 시력이 나빠지신 탓일 거예요
아버지와 나는 낡고 너덜너덜해진 각본으로 끊임없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 각기 열장씩 화투로 진을 치며 날씨를 걱정하고 건강을 염려하며 모든 사람의 안녕에 마음을 쓰고 신문의
사회면이나 텔레비전 뉴스의 불확실하고 조잡한 정보망을 통해 세상을 개탄했다.
ㅡ 여태 뭘 하고 있었담. 밑천은커녕 약값도 못 대겠어
나는 팔을 뻗어 아버지가 해간 약과 단. 그리고 끗수를 헤아렸다. 아버지가 질겁을 하며
손을 치웠다.
ㅡ 끝나기도 전에 남의 밥을 보는 법이 어디 있니. 나도 한
게 아무것도 없다
ㅡ 파장인데 어때요. 난 손 털었어요
마지막 패를 내밀자 아버지는 사꾸라 열끗을 호기롭게 던지며 판을 쓸었다.
ㅡ 손에 든 게 없으면 선도 말짱 헛거라니까요. 뒷장도 이렇게 안 맞을까
나는 종이에 끗수를 적어놓고 화투장을 모아 아버지 앞에 밀어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화투를 섞는 동안 마루에 놓인
텔레비전을 틀었다. 화면은 연기가 낀 듯 흐릿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잠깐 머뭇거리다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ㅡ 전압이 낮아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거야.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냐?
ㅡ 영아원에 불이 났대요. 어린애들이 죽었다는군요
ㅡ 죽일 놈들. 오래 사는 게 욕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ㅡ 그게 어디 우리 탓인가요?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억누르듯 이 사이로 낮게 말했다.
정말 그게 우리 탓인가. 아가 우리 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어머니는 꽃핀을 꽂고 노래를 불렀다. 네 엄마에게 다산은 무리였어. 아주 조그만 여자였거든.
ㅡ 보세요 화투가 끼었잖아요?
비닐막이 반 넘게 갈라진 틈에 낀 또 하나의 화투장을 가리키며 나는 조금 날카롭게 말했다.
ㅡ 너무 오래 썼거든. 새 걸로 바꿔야겠어.
아버지가 화투를 빼내며 히죽 웃었다. 동자 혼이 쓰인 거라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 엉터리 기도원에 두는 게 아니었어요. 전도사도 박수도
아닌 사내는 어머니를 복숭아 가지로 후려쳤다. 살려줘. 아가 날 살려줘.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복숭아가지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생활이 문란해서 그런거야. 머리통이 물주머니처럼 무르고 크게 부풀어 오른,
연골체의 갓난아이를 가리키며 어머니는 조숙한 중학생이었던 오빠에게 노래하듯 말했다.
란도셀의 끈이 끊어져 퉁퉁 골이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햇빛이 드는 창가에 거울을 놓고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아기는?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고드름처럼 차가운 손가락을 목덜미에 얹으며 말했다. 인형을 사줄게. 병원에서
호송차가 왔을 때 어머니는 식탁 아래로 기어들었다.
아가. 난 싫어. 좀 알려줘. 그리고는 호송인들에게 반쪽 어깨를 들리워 나가며 내가 안보일 때까지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며 소리쳤다. 왜 웃어. 심한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르는 소리야. 달리 무슨 수가 있었니, 넌 아직 어렸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
갓난애도 그렇게 없애지 않았니? 넌 마치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모두 내 탓이라는 투로구나. 잘 보살펴 드릴 수도 있었어요. 외려 네 엄마에겐 그곳이 편한 곳이야. 친구들도 있고 가족이란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너부터도
내심 네 엄마를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니? 그전에 번번이 네 혼담이 깨지던 것도
에미 탓이라고 원망했을걸.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화투장 뒷면의 가로질린 금을 손톱으로 긁어 지우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
ㅡ 어서 나누세요.
ㅡ 그러자꾸나
아버지가 한장씩 화투를 나누었다.
그런 기미는 너를 낳을 때부터 보였지. 온전했던 건 네 오빠
때문이었어.
ㅡ 뭐 좀 할만 하니?
비 스무끗을 젖혀 맞히며 아버지가 나를 건네다 보았다.
ㅡ 고름이 살 되겠어요?
송학을 집어오며 나는 문득 귀를 기울였다.
들판 건너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바람결에 묻어오는 마른 꽃냄새가 코끝에서 감지되는 듯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ㅡ 왜. 영 신통치가 않니?
ㅡ 천만에요
그애가 휘파람 소리로 나를 찾아오던 것이 십년 전의 일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꿈속의 일인가. 늦은 밤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휘파람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면 그애는 마른
꽃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애가 오지 않게 되면서부터
나는 종종 자운영이 핀 논둑길을 열아홉 살 그애와 나란히
걷는 꿈을 꾸었다. 대개 잠옷 차림에 머리에는 붉은 리본을
묶고 있었는데 늘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흐릿한 꽃냄새가 풍기었다. 벗은 채로인 발바닥 아래에서 부드러운 흙이 갯지렁이처럼 미끄럽게 꿈틀거렸다. 종달새 소리가 자욱이 눈 위로
덮이어 그애는 눈을 껌벅이며 내게 말했다. 리본이 안 어울려요. 그래. 나는 붉은 리본을 묶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어. 미치광이나 창부뿐이지. 나비를 잡으러 가겠어. 그애가
해맑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에민 나비 같았지. 나는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 사꾸라를
보았다.
ㅡ 굳은자를 가져가는 거야
ㅡ 그렇게 사정없이 몰아가면 전 뭘 먹으란 말이예요?
오빠는 어딜 가 있을까.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이 생기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어. 아버지는 둘이서 하는 화투가 셋이서 하는
것보다 재미가 덜하다는 것 때문에 오빠의 부재를 노여워하는 걸까. 더러운 게임이야. 오빠가 어느날 갑자기 식탁을 떨치고 일어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한끝을 놓아버렸을 때 삼각의 구도는 깨지고 아버지와 나는 힘의 반동으로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나도 오빠처럼 훌쩍 나가버릴 수가 있을까. 침몰하는 선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결사적으로 탈출하듯 그렇게 달아나버릴
수가 있을까. 나는 매조를 먹을까 칠띠를 깨뜨릴까에 긴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좁고 긴
얼굴. 매처럼 구부러진 코끝은 볼의 살이 빠짐에 따라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아가. 날 데려가다오. 여긴 무섭고 쓸쓸하단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화투는 아버지의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갔다.
ㅡ 개발에 땀날 때가 있구나.
거푸 두 판을 이기자 아버지는 심술난 얼굴로 야비하게 이죽거렸다.
나는 되도록 화투장에 눅눅히 배어 있는 온기를 의식치 않으려고 빨리빨리 손을 놀렸다.
아버지의 손에서는 늘 땀이 질척거렸다.
마지막 패인 국진 껍데기를 맥없이 내던지자 아버지는 호기롭게 화투장을 그러모았다.
ㅡ 옜다. 사광이다. 넌 뭘 하고 있었니.
나는 종이에 아버지의 득점을, 그 무의미한 숫자를 기입했다. 텔레비전에서 10<행복의 쇼>
프로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끗수가 천을 넘자 나는 화투를
거두었다.
ㅡ 약을 잡수셔야죠.
나는 탁자 모서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ㅡ 왜 그러니?
화투장을 놓은 아버지는 이상하게 늙고 음울해 보였다. 코는
더욱 길게 늘어져 거의 인중을
덮고 입술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ㅡ 좀 어지러워서 그래요
먼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싸르륵 싸르륵 머릿속의 혈관이 텅텅 비어가는 듯한 악성 빈혈의 증세에도 환청은 늘 휘파람 소리였다.
ㅡ 어느 몹쓸 놈이 밤중에 휘파람을 부나. 망할 세상이야.
어서 집들이 들어서야지. 온갖 뜨내기 불량배들이 득실거리니...........
아버지의 손이 버릇처럼 화투에 가 닿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가 닿는 내 눈길을 의식하며 슬그머니 움츠려 주머니에서 힘겹게 종이 조각을 내놓았다.
ㅡ 이걸 봐라. 벌써 며칠 째나 편지함에 있던 거다. 제 날짜에 안 내면 괜한 돈을 더 물게 된다는 걸 알잖니. 일이란 그때그때 처리해야 뒤탈이 없는 거야. 웬 전기세가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기는 쓰기에 따라 얼마든지 절약할
수도 있어
아버지는 언젠가 전기세 가산료를 물었던 것을 또 들추어내는 것이다.
ㅡ 냉장고는 벌써부터 안 돌리잖아요.
괜한 짓이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화가 나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기세 고지서가 며칠째 편지함에서 자고 있었다는 건 아버지의 억지다. 아버지는 최소한
하루에 열 번쯤은 우편함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날아오는 전기나 수도세 고지서 외에는 결코 어떠한 편지도 담겨본 적이 없는 늘 배고픈 듯. 텅텅 입을 벌리고 있는
편지함 앞에서 공연한 손짓으로 서성이는 아버지를 나는 공범끼리의 적의와 친밀감으로, 그리고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배반감으로 몰래 지켜보지 않았던가.
아버지는 고지서를 식탁의 모서리에 던져 놓고는 단단히 화투를 잡았다. 그리고는 피라밋 형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에 턱을 받치고 앉아 늘어놓는 화투장을 하나씩
젖혀가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화투 하나를
가지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온갖 게임을 다 알고 있다.
ㅡ 뭐가 떨어졌어요?
님이 떨어지고 산보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문득 다정하게.
그러나 음침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지럽니? 피곤해 뵈는구나. 들어가 자거라
빈들을 질러오는 휘파람 소리는 어둠을 뚫고 더욱 명료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화투를 새 걸로 한 벌 장만해야지. 패를
알고하는 게임은 재미가 없어.
자박자박 여자의 발소리는 머리 위에서 잠시 머물다가 멀어져 갔다.
ㅡ 밤새 업고 재울 모양이군. 버릇이 고약하게 들었어.
나는 커다랗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ㅡ 먼저 들어가겠어요. 너무 늦게 계시지 마세요. 약은 여기
있어요. 문단속은 제가 할 테니까.
나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세차게
틀어 오래오래 손을 씻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거나 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엌에서 내비치는 불빛을 피해 발소리를 죽이며 벽에 몸을 붙이고 걸었다.
현관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몇 개의 디딤돌을 건너뛰며 대문을 나왔다.
아직도 자장가를 웅얼거리며 이층의 베란다를 서성거릴 여자의 눈길이 어디쯤 가있을까에 조바심을 치며 담을 끼고 걸었다. 들판이 끝나는 곳 야산의 밋밋한 언덕바지의 주택 공사장에서는 밤일을 하는지 군데군데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마쳐야 할 공사를 서두르고 있는 걸까. 나는
되도록 화톳불과 쓸쓸하게 매달린 알전구의 불빛을 멀리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반쯤 지어진 집의 곁 머리높이까지 쌓여진
시멘트 벽돌과 모래더미사이에 그는 서 있었다.
ㅡ 기다리고 있었지. 좀 늦었지.
먼발치에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듯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발부리로 모래더미를 쑤셔대며 말했다.
- 어제아 마찬가진걸
나는 베일 속에서 말하듯 낮게 소곤거렸다.
- 올 것 같아 일부러 일을 일찍 끝냈지.
그의 목소리에는 술기가 묻어 있었다. 이슬이 내리는 걸까.
모랫더미에서는 이내 축축한 한기가 배어들었다. 그가 잠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 손을 잡았다. 손의 안쪽 마디마다 박힌 못 조각처럼 딱딱했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낮이라면 아마 대단히 더럽고 거칠게 보이는 손일 것이다.
여긴 춥다구. 집이 비어있어. 야방은 한참 술집에서 노닥거리는 중이야.
술기에도 불구하고 흥분 때문인지 그는 떨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축축이 땀이 차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잡힌 채 깨진 시멘트 벽돌과 각목 토막들을 밟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제기랄, 그는 상스럽게 내뱉었다.
- 뭐가?
- 배선공사가 안 됐어.
그러나 안은 두 벽에 반 넘게 차지한 틀만 짜넣은 창문과 뚫린 지붕으로 그닥 어둡지 않았다. 그가 대팻밥과 각목토막들을 발로 지익지익 밀어치워 자리를 내었다. 딱딱한 손이 스웨터 소매로 파고들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흥분을 부끄러워하듯 몹시 성급하게 서둘렀다. 두 개째의 스웨터
단추를 벗기는 데 실패하자 그는 빌어먹을 하며 스웨터를 걷어 올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다리 안쪽에는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겨드랑이까지 드러난 맨살에 시멘트 바닥이 아프도록 차가와 등을 옴츠렸다 그가 작업복 윗도리를 벗어 등에 받쳤다. 뚫린 하늘에서 크고 맑은 별들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늘 마른 꽃 냄새가 났다.
안드로메다, 오리온, 카시오페이아, 큰곰, 너는 무슨 별자리니? 전갈좌. 당신은 벽이 두껍고 조그만 창문이 있는 주택을
갖게 되며 카섹스를 즐깁니다. 수줍고 내성적이나 항상 로맨틱한 사랑을 꿈꿉니다. 꽃이 안 어울려요. 그래, 꽃을 꽂기에는 너무 늙었어. 미친 여자나 창부가 아니면 머리에 꽃을
꽂지 않지.
- 날이 추워지는군. 더 추워지면 한데서는 안돼. 공사가 끝나려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해. 허지만 그때까지는 그닥 춥지
않겠지.
그가 으레 그래야 할 것처럼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추운 건 싫어.
나는 킥킥 웃었다.
- 다른 건 좋고? 당신 바람난 과부 아니야?
그도 키들키들 웃었다.
멀리서부터 여럿이 어울려 되는대로 불러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들 오는군.
그가 일어나 등에 받쳤던 윗도리를 탁탁 털어 걸쳤다.
- 내일 또 오겠어?
그가 멈칫했다. 나는 내쳐 말했다.
-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을 먹어야 돼. 많이 달라곤 안 해.
그가 잇 사이로 찌익 침을 뱉으며 낮게,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 첨부터 순순히 굴더라니, 세금 안내는 장사니 좀 싸겠지.
그가 부시럭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시늉으로 성냥을 그어 길게 오는 불꽃은 내 얼굴 가까이 대었다.
나는 불꽃을 보며 길게 입을 벌려 웃어보였다.
- 제기랄. 철지난 장사로군. 오늘은 없어. 모레가 간조니 생각있으면 그때 와.
그는 몹시 기분이 상한 듯 함부로 침을 뱉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술취한 노무자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엇비껴 지나갔다.
대문은 열린 채였다. 이층의 여자는 여태껏 칭얼대는 아이에게 자장가를 웅얼거리며 베란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 나는 몸에 배인 찬공기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 뭐가 떨어졌어요?
- 님이다. 어서 자거라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투덕투덕 화투를 쳤다.
방에 들어와 전기 스위치를 올리고 나는 잠시 어쩔 줄을 몰라 멍청히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이 책상서랍을 열었다.
아가, 날 데려가줘, 여긴 무섭고 쓸쓸하단다. 어머니는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처럼 크고 비뚤비뚤한 글씨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여백마다 동체는 없이 공기처럼 둥근머리와 나뭇가지같이 뻗은 팔과 다리로 물구나무 선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나는 종이뭉치를 코에대고 그 흐릿하게 피어나는 마른 꽃 냄새를 들이마셨다. 장식없는 팬던트의 뚜껑을
열면 희끗희끗한 잿빛 머리털에서도 역시 마른꽃 냄새가 풍기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관 뚜껑에 못질이
시작되었다. 그 소리는 상상처럼 우람하지도 않았다. 시취(屍臭)를 풍기기 시작한 어머니에게서는 역시 연기처럼 매움한 꽃냄새가 났다. 뙈년들보다 더 더러웠지. 죽자고 목욕을
안 해도 향수는 꼭 뿌리곤 했어. 워낙 사치하고 허영심이 많았거든. 그렇다면 살비듬 내와 뒤섞인 향수 냄새일까.
나는 찬 방바닥에 몸을 뉘였다. 아버지가 아직 방에 들어가는 기척이 없다는 걸 떠올리며 나는 빈집에서처럼 스커트를
끌어올리고 스웨터도 겨드랑이까지 걷어올렸다. 자박자박 여전히 아이를 재우는 여자의 발소리는 머리위에서 들려왔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세상에서 귀한 아기, 나는 누운 채 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은 조용한 어둠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 전체가 수렁같은 어둠 속으로 삐그덕 거리며 서서히 잠겨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에 꽂힌, 구조를 청하는 낡은 헝겊쪼가리처럼 밤새 헛되고
헛되이 펄럭일 것이다. 나는 내리누르는 수압으로 자신이 산산히 해체되어 가는 절박감에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득 사내의 성냥불빛에서처럼 입을 길게 벌리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워드작업을 해주신 재희.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