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 다시 말해 말씀의 성취과정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이 다니엘과 그의세 친구들이다.
여호야김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전 기구를 약탈해 가고 사람들도 포로 잡아갔다. 이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사 39:6-7, 렘 25:9-11)대로 때가 되어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들 중 인재들을 선발해서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시켜 바벨론에 충성하는 자로 키우려 했다.
여기에 선발된 자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왕이 먹는 음식이 제공되었고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했다. 그만큼 왕이 심혈을 기울여 교육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유다에서 잡혀온 소년들이 왕이 제공하는 음식과 음료를 거절한 것이다. 이들을 보살피는 관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어떻게 하든 설득해서 왕의 명령대로 이들이 왕의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왕이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하셨는데 너희들이 그 음식을 먹지 않아 다른 소년들 보다 얼굴이 초췌한 것을 왕이 보시면 우리들의 목숨이 위태하다'면서 사정했다. 이때 다니엘은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라고 요구했다. 우겨대는 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관리들은 일단 열흘을 시험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 보다 채식과 물을 마신 이들이 더 얼굴이 아름답고 윤택하였다. 더 이상 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관리들은 이들의 요구대로 채식과 물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교육 과정이 끝나는 시 점에 왕이 이들의 학문을 시험해 보니 다른 소년들 보다 월등히 뛰어나 이들에게 왕을 모시게 했다.
그럼 왜 이들은 왕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였을까? 본문을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8절) 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한다. 과연 왕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이 더러워지는가 하는 문제다. 흔히 여기서 왕의 음식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후 제공되는 음식이기에 먹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합당한 해석이 아니 다. 본문 어디에도 이 음식이 우상에게 드려졌다는 흔적은 없다. 어떤 이는 이방인의 음식이기에 불결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다니엘이 요구했던 채식과 물은 이방인의 음식이 아닌가? 이상과 같은 풀 이는 전혀 본문을 오해한 해석이다.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은 '내가 비록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살아가지만 나는 바벨론 왕 당신이 제공 하는 음식을 먹고, 당신이 요구하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겠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바벨론 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였다.
이런 해석은 다니엘을 계속 공부해 가면서 더욱 뚜렷이 밝혀질 것이다. 미리 잠깐 언급하자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왕의 명령을 거역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왕의 명령을 거절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데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왕이 시키 니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결단을 1장에서 "뜻을 정하여"라는 표현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을 보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지 만 우리는 세상의 요구대로 살아 갈 수는 없는 자들이다. 마치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 서 살았고 왕궁에서 교육받아 왕의 신하로 키워지지만 그는 결코 왕의 요구대로 산 사람이 아니듯이.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살 땅이 아니라면서 무조건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이는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다니엘이 무조건 왕의 명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산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관리로서 자기의 소신을 다했다. 열심히 일했고 충실히 직무에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어 기는 일은 목숨을 걸고서도 거절했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갈 삶의 모습이다.
다니엘 2장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었는데 너무나 희한한 꿈이어서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꿈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 불안하기도 한 왕은 평소 자신에게 신의 뜻을 알려 주었던 박수, 술객, 점장이들을 불러 그 꿈의 신비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왕에게 「꿈의 내용을 말씀해 주셔야 우리들이 꿈을 해석해 드리겠다」는 답변이었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왕 자신이 물론 꿈 내용을 전혀 기억할 수 없거니와 왕의 생각에는 이들이 정말 신의 뜻을 알고 신과 교제하는 자들이라면 자기에게 나타난 이상한 계시를 알 수 있어야 하고, 만약 모른다면 이들은 그 동안 자신을 속여왔다는 얘기가 된다. 왕의 명령은 단호했다.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고, 시위대 장관은 박사들을 죽이려고 찾아 나섰다. 이때 다니엘이 나타나 슬기로운 말로 '잠시 기한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다니엘은 친구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그후 밤에 왕의 꿈꾼 것이 이상으로 나타나 보여 모든 내용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왔다. 만왕의 왕 되신 주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에 다시 한번 감격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것이지 거짓 신을 섬기고 그들과 교제하는 우상 숭배자들이 깨달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로서 참 신과 거짓 신이 밝혀졌다. 그리고 참된 신앙인이 누구인지가 구별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이 참 신이라고 자랑한다. 그러기에 잡다한 신 가운데 참 신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니엘 시대에도 수많은 박수, 술객, 점장이, 술사들이 있었다. 왕이 생각하기에는 다니엘도 그 많은 자들 중 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정말 계시를 깨달아 안 자는 다니엘 뿐이었다.
이상으로 나타나 왕의 꿈을 알게된 다니엘은 왕 앞에 나아가 당당히 말했다.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시려고 꿈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입니다. 왕의 꿈에 나타난 것은 큰 신상인데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르는 돌이 신상을 쳐서 부서지고 그 신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상의 머리는 왕이십니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결국은 이 나라들이 망할 것이요, 그 나라들을 망하게 하신 분이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데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꿈에 다니엘이 깨달은 바와 왕이 느끼는 점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 꿈을 통해서 세상 나라는 잠깐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마저 바꿔버린 처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고 그 나라는 망하지도 않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들의 힘만 자랑하는 이 세상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얼마나 힘이 솟고 감격스런 일인가. 현재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이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세우시고 파괴하실 나라이다. 그러니 나는 여기에 안주하며 살 수 없는 백성이다. 그리고 왕을 두려워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자.
그러나 왕은 우상이 부서지고 망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기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며 그 금 머리가 자신이라고 다니엘이 이야기하니까 너무 기뻤다. 자신 다음의 나라는 은의 나라요 그 다음은 놋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듣는 이 마다 차이가 남은 웬일일까? 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의 차이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미래 일을 보여 주신 것이기에 그 미래를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은 미래에 관심 없고 현재 자기가 가장 강한 신상의 금 머리에 해당되니 그보다 더 신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을 모습 아닌가?
그럼 과연 우리는 현재 이 땅의 삶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은 준비하는 자인가?
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나게 큰 금 신상(높이 약 27M, 넓이 약 2.7M)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각 지방의 관원들을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였다. 낙성 예식에서 악기 소리가 울리면 모인 모든 무리들은 그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도록 했고 만약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이때였다. 모두들 악기 소리를 듣고 공손히 엎드려 절하는데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은 왕에게 알려졌고 왕은 분노하여 이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끌려온 자들에게 왕이 말하였다.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감히 누가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지금 왕의 명령을 조롱이라도 하듯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들이 바로 문제의 인물들이다. 왕의 말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16절)고 말하는 이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의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다. 죽어도 문제될 것 없다. 절은 안 한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3장을 정리할 수 있다. 우선은 왜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세웠느냐? 는 것이고, 다음은 세 유다 소년들은 왜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 풀무불 속에 던져졌는가? 하는 것이다.
왕이 금 신상을 세운 이유부터 생각해 보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꿈 해석을 오해하고 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이 세상나라는 강하고 찬란하게 보여도 결국은 부서지고 없어질 나라라는 사실을 말했다. 또 세상나라가 멸망한 후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이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러나 왕은 미래에 신상이 부서져도 현재 자신의 위치가 금 머리에 해당된다는 다니엘의 말(2:38)에 흡족해 했다. '미래는 어떠해도 좋다. 지금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상의 금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니 만족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해서 금으로 신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왜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 죽음의 길을 선택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이 꿈을 꾸고(2장) 그 내용과 해석을 알기 위해 바벨론 모든 박사, 술객들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친구들에게 기도하기를 부탁했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왕의 꿈과 그 해석을 깨닫게 하셨다. 이 꿈은 한 개인의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을 계시하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이방 나라에 포로 잡혀 살아가는 신세지만 이 나라는 언젠가는 멸망할 나라요, 세상나라 멸망 후 하나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진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이들은 꿈의 해석을 통해서 알게된 것이다. 그러니 잠시 후면 무너질 세상 왕이 두렵지 않았고 육신의 죽음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금 신상에 절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며 살겠다는 것인데 어찌 미래를 아는 이들이 멸망할 세상 권력에 복종하며 살겠는가?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에게는 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가?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주신 미래는 바로 우리의 미래요 그 영원한 나라는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갈 나라 아닌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아 멘.
다니엘 4장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신비한 꿈도 해석할 뿐 아니라 풀무 불 속에서도 자기 백 성을 보호하시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지켜내시는 놀라운 능력의 신이었다.느부갓네살은 자기 신하 중에서 그런 강한 신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그런 신의 도움이 있다면 자기 나라를 더욱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이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땅 한가운데 큰 나무가 섰는데 그 나무를 사방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 하늘에 닿을 만큼 커, 땅 끝에서도 보이는 나무였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가 많아 만민이 식물로 삼을 만하고 공중의 새들과 짐승들이 깃들였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한 순찰자가 내려와서 그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 버리고 남은 그루터기는 쇠사슬로 묶어 잡초가운데 버려 두고 일곱 때를 지내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뭔지 모르지만 그 꿈 때문에 왕은 두려워했고 번민했다. 그 꿈의 해석을 위해서 나라의 모든 박수, 술객, 점쟁이들이 불려왔다. 그런데 아무도 왕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 후에 다니엘이 과거처럼 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 첫 번째 '신상의 꿈'(2:31-35)이나 이번에 '큰 나무의 꿈'이나 같은 것이었다. 물론 왕은 첫 번째 꿈을 오해해서 금 신상을 세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다시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의 운명을 경고한 것이다. 신상의 금 머리부분이 왕이지만 멸망할 것이고, 땅 중앙에 서있는 큰 나무도 역시 왕이지만 잘린다. 이는 바벨론이든 어느 나라든 인간에게 권세를 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참 왕이지, 사람이 한 나라의 왕으로 세워졌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보이신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인간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듭 꿈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이 아는 하나님과 흡사하다 하겠다. 이들이 아는 하나님은 모두 자기에게 유익을 주고, 필요한 것을 요청할 때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주저 없이 찾아와 응답해 주는 신이다. 이런 자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즉 자기 언약대로 일하시고 인간의 바램과는 무관하게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신다(25,35절)는 사실을 알려주면 엄청나게 분노하며 '이단'이라고 몰아세운다.
다니엘이 아는 하나님과 느부갓네살이 아는 하나님은 너무도 다른 분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과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만 그분이 찾아오셔서 나타내 보이시고 깨닫게 하셔야만 바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보고 배우며 지냈는가.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지고 끌려가실 때 단 한 사람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모두 살기 위해 제 갈 길로 갔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인간의 지혜, 지식으로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드러나는 현장이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눈을 열어 주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뒤늦게 메시야로 믿게된 것 아닌가.
꿈을 꾸고 번민하는 왕. 왜 번민하나? 이유는 하나 뿐이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근심이다. 자기는 꿈처럼 가장 힘있는 자가되어 온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정한 왕으로 군림하고 싶은데 그 바램은 자신이 잘려 버림으로 무산되고 만다. 얼마나 허탈하고 맥빠지는 일인가.
하나님을 바로 알자. 하나님은 인간에게 우리 자신의 꿈과 욕망이나 채우라고 힘을 제공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교만한 인간에게 힘을 빼시는 분이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힘을 축적하기 위해 땀흘리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뛰고 또 달린다. 내게 힘이 될 만한 무엇이 없을까해서 두리번거리고, 이것보다는 저것이 나을 것 같아서 쥐었던 것을 놓고 다른 것을 잡는다. 이런 어리석은 짓거리를 오늘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보아라. 그런 허망한 꿈을 가진 자가 어떻게 되는가를.
성도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가진 것을 믿고 사는 자는 짐승이요, 이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다니엘 5장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의 극치를 달리던 벨사살 왕은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 싶어 부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기명으로 술을 부어 마시는 패역함을 서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바벨론의 신에게는 패했고 그러기에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끝까지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다. 잔치의 흥겨움에 젖어있는 그들에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씀으로서 더 이상 그들의 추태는 계속될 수 없었다. 웃음 가득한 얼굴들이 창백하게 변했고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사지를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왕궁 벽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가 쓰여졌다. 이를 해석하면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그리고 바사'란 말이다. 즉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바사가 세워질 것이다' 이런 말씀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그기에 목을 맨다. 그래서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힘을 추구하게 되고 강한 힘 앞에는 누구든 머리 숙이고, 그 힘을 이용해 자신도 강자로 군림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벨사살 왕은 벽의 글씨를 해석하는 자에게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엄청난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제공하는 예물이나 상급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무를 다했다.
벨사살 왕은 이 세상이 잠시 잠깐 보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한다.(약4:14) 눈에 보이는 현실 배후에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다니엘 성경을 상고하면서 큰 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부서지는 것(2:31-35)을 알았다. 또 큰 나무가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에 의해 잘리는 것(4:19-27)도 보았다. 이는 세상 나라가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 아닌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가?
세상이 당신의 목표인가. 이런 자들은 기도해도 세상 것을 구하게 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해도 그 주님이 세상 것을 채워 주시기만 기대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발 좀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세상 것을 구하는 자는 우상을 섬기는 자요 이방인이다. 마치 절에 가서 부처에게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은 무엇을 구하며 사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성도는 육체의 일, 세상 것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상은 곧 허물어질 우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사40:6-8) 그러나 정작 이들의 관심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 그리고 영원한 나라, 천국이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의 의'를 바라는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 하셨다고 해서 성도 아닌 자가 구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만이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명령'처럼 보이는 말씀(~하라, ~하지 말라)이 있으나, 인간에게 억지로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에(요19:30)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하신 일을 믿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염려한다면 아직도 주께서 못다한 일이 있어서 내가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왕 앞에 나아가 '왕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포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속에 이런 당당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참 성도라면 ---
다니엘과 벨사살 왕. 이들의 차이는 단순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과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자의 차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다. 이 땅이 전부인 자는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요 인도자임을 믿고 살아가는 자는 그분이 마련하신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할 것이다.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의 뜻에 순종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가 성도이다.
다니엘 6장
왕의 신임을 받은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이 왕의 계획을 안 다른 신하들은 다니엘을 시기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든 약점을 찾아서 그를 끌어 내리려했다. 우선 다니엘이 맡은 국사에 대하여 고소할 것이 없을까 하여 찾았으나 전혀 비리나 허물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업무에서 흠 잡을만한 것을 발견치 못한 이들은 이제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트집을 잡아보려고 모여서 의논한 끝에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다니엘의 생활을 아는 이들은, 앞으로 30일간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다. 왕은 이 법이 다니엘을 죽이려는 다른 신하의 궤계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높이는 일이기에 그 법령에 어인을 찍었다.
다니엘은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 다른 신하들이 자신을 모함하려고 이상한 법을 만들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다니엘은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평소 자신이 행하던 대로 하루 3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보란 듯이 열린 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시기하던 신하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함정에 다니엘이 빠진 것에 쾌재를 부르며 왕에게 달려가 고소했다. '당신이 그렇게 신임하는 유다 자손 다니엘이 왕의 금령을 어기고 자기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이는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요, 법대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허락한 법령이 사랑하는 신하 다니엘을 죽음으로 몰아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당장 그 법을 폐지하고 싶으나 왕의 권위에 손상되는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든 다니엘을 살려보려고 궁리하는 왕이지만 계속되는 신하들의 고소에 왕은 손을 들고 말았다. 법대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다니엘이 다리오 왕에게 신임을 받는 충실한 왕의 신하로만 생각했다. 우리의 생각처럼 만약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신하였다면 왕이 도장을 찍어 금한 일을 굳이 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종이기 전에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자신의 왕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기에 그는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자 굴에 들어가더라도 왕(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바벨론 아닌가. 더 큰 힘을 추구하고, 더 안락한 생활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 이 땅의 삶이 전부이기에 여기서 넉넉하고 평안하게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인간들. 만약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 땅의 영광이요 부귀요 쾌락이라면 나 또한 바벨론 백성이다.
다니엘은 왜 높은 지위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고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왕이 일시적으로 금한 일을 함으로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던가?
30일 동안만 기도하지 않으면 왕의 계획에 따라 바벨론이란 강대국에서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 기회를 차 버렸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 땅에서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이 그가 원하는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 차례 꿈을 통해 보았듯이 이 세상은 우상의 나라요, 짐승의 나라요, 잠시 후면 멸망당할 그건 임시적인 것이기에 여기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을 알고 있다. 이 세상이 바로 소돔 고모라이다. 언제 불탈지 모르는 곳. 이런 곳에 무슨 애착과 소망을 두겠는가? 무너지고 파괴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자가 이곳에 무엇을 쌓고 모으기에 힘쓰겠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일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세상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15:13)이란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단5:21)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만약 당신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당신도 다니엘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6) 아 멘
다니엘 7장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계속 다니엘에게 앞날의 될 일을 나타내신다.
7장에서도 다니엘이 침상에서 꿈을 꾸었다. 그 꿈에는 네 마리의 짐승이 나오는데 첫째는 사자와 같고, 둘째는 곰, 셋째는 표범, 넷째는 열 뿔을 가진 무섭고 강한 짐승이다. 그런데 이 짐승들은 엄청난 힘으로 정복하고 짓밟으며 위세를 떨치나 얼마 후 사라지고 또 다른 짐승이 등장한다. 마지막 짐승인 넷째도 한창 위세를 떨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소유하는데 그 권세는 옮기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다. 그 나라는 임시적인 나라가 아니요 영원히 폐하지 아니할 그런 나라이다.
하나님은 꿈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종 다니엘에게 미래의 일을 나타내 보이신다. 느부갓네살의 '큰 신상의 꿈'(2장)이나 "큰 나무의 꿈'(4장)을 다니엘이 해석하게 될 때에도 역시 하나님은 그 꿈을 통해서 미래의 일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벨사살 왕의 잔치 중에 벽에 씌어진 글씨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장래 일을 하나님은 계시하신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세상 나라가 잠시 잠깐 존재하다 사라져 버릴 임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강하고 무서운 나라 바벨론도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거듭되는 계시로 다니엘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되고 세상일에 얽매여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의 생존 법칙은 오로지 힘이다. 짐승의 나라에서 볼 수 있듯이 무섭고 강하며 무자비한 철 이빨로 먹고 부숴뜨리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큰 힘을 소유해야 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약자를 지배하고, 자기 보다 강자를 만나면 머리 숙여 복종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고, 높은 직위를 탐하고, 권력을 잡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 아닌가.
성도의 관심은 이 땅이 아니다. 만약 이 세상이 우리가 누려야할 영원한 곳이라면 당연히 이 땅에서 목표를 세우고 매진해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은 짐승의 나라요 잠시 후 없어지는 임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영원한 것으로 여겨 어찌하든 힘을 길러 강자로 군림하기를 원하고, 높은 위치에서 좀더 많은 자유를 향유하기를 바란다. 이런 자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뻐하셨는데 인간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창조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 하나님은 타락해 버린 창조세계를 만족해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부셔 버리고 새롭게 창조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이다. 성도가 살 곳은 바로 이 새로운 세계,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천국이다.
다니엘 말씀에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은 듣는가? 이 세상은 허상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상이란 사실을. 이것을 의심치 않고 믿는 자라야 신앙인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히11:11).
미래의 일이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 같으나 약속하신 분이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조금도 의심치 않는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며 성도는 이 땅을 산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할 이유가 없다.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간다.
목자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 산이든 들이든 물가든 상관없이 묵묵히 목자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따라간다. 자신의 생명을 던지면서 까지 자기 양을 사랑하고 보살피시는 목자가 계시는데 뭘 염려하고 뭘 두려워하는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다니엘 8장
다니엘이 본 이상과 그 해석에 대해 8장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본 것은 두 뿔을 가진 수양인데 두 뿔이 다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었다. 이 수양은 강한 뿔로 사방을 공격했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었기에 교만하여 멋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수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을 휘젓고 다녔는데 두 눈 사이에 뿔이 있었다. 그것이 두 뿔 가진 수양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그 수양을 쳐서 그 두 뿔을 꺾었는데 수양에게는 상대를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패하고 짓밟혔지만 아무도 그 수양을 구해내지 못했다. 이 수염소는 스스로 더욱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다.
그런데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하늘 군대를 대적하고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성소를 헐었다. 그때에 천사들이 말하기를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2,300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다.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세상 끝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시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두 뿔 가진 수양은 메대와 바사 왕들이다. 그리고 수염소는 헬라 왕이다. 어느 나라이든 힘이 있을 때는 정복하고 위세를 떨치지만 다른 힘있는 세력에 의해 정복되고 마는 세상 권력의 임시적이며 허망함을 다니엘에게 보이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세력은 하나님의 성소를 파괴할 만큼 강한 권세를 가졌으나 결국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고 만다.
천사에 의해서 이상의 내용을 깨닫고 알게된 다니엘은 너무나 두렵고 놀라 혼절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겪었던 일들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는데 앞일을 보니 더 엄청나고 무섭다. 그렇게 강한 나라 바벨론도 더 큰 세력에 의해 무너진다면 그 힘은 어느 정도의 힘일까!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면 모를까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만을 좇으며 길을 간다면 다니엘처럼 사자 굴에도 던져지고, 그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 불에 들어갈 일도 생기는 것이 성도의 현실이다. 이상을 보며 두려워하고 혼절하는 다니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배고프면 먹어야하고, 추우면 입어야하고, 평안을 원하지 고통을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다니엘에게 나타나 세상 끝에 관한 일을 세세히 일러주시면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용기와 힘을 북돋우고 계신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또한 소망을 갖게된다.
신앙인 이라고 해서 육신을 팽개치고 살수는 없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내 육신의 필요를 세상 권력에 의지해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방법을 선택한다면 쉽게 내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히2:15)자로, 평생을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넉넉지 못하고 늘 부족하여 아쉽고 모자라도 예수님 이 땅에서 사실 때의 모습을 생각하며 참자.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의 나라가 아니질 않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이다. 나그네이기에 본토 사람들에게 푸대접받고 멸시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고 하셨다. 지금이야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니 고난이지만 우리 고향 천국가면 나그네로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웠든 시절과 비교도 안 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내 목숨을 위협하며 주님과 멀리 떨어져 살기를 획책하는 마귀의 궤계를 우리는 순간 순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무서워 말라. 주님이 우리를 사단의 세력에서 건져 주셨다. 더 이상 죄의 종으로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자녀 삼으셨으니 이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품에서 자녀답게 살아가자. 마귀가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무기는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주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골3:3) 내 생명은 주님의 손에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혹시 오늘도 육신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내 삶의 이유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삶은 아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이다. 만약 당신이 성도라면 내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다니엘이 본 이상이 오늘도 내 앞에 말씀으로 생생히 보여지고 있는데.
다니엘 9장
어린 소년시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평생을 이방 나라에서 살아야했던 다니엘. 그는 항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얼마나 고국을 생각하며 성전을 그리워하는 세월을 보냈을까?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서책을 통해서 깨닫고는 재를 무릅쓰고 금식하며 통회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 동안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던 의문들 (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 되어 식민지 생활을 해야하나? 또 언제쯤 우리 나라가 해방되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등)이 한 순간 풀렸건만 그는 왜 베옷을 입고 자복하는 자가 되었을까?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크시고 두려운 분이시다. 자기 백성이 범죄하여 주의 규례를 떠났을 때 사정없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시고 수욕을 당케 하셨다. 주의 종 선지자들의 입으로 그렇게 외치고 부르짖었건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니 회개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완악한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과 자비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은혜에 대한 감격. 정말 오묘한 하나님이다.
다니엘은 깨달았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일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황무한 성소에 주의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니엘은 주의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했다.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황무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지체치 마시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소서'(17-19절)
다니엘은 자신의 죄와 자기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며 여호와 앞에 간구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지혜와 총명을 주어 이상을 깨닫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는데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24절)
포로된 이스라엘이 70년 만에 황무함이 마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70 이레가 끝나고 완전한 회복과 황무케하는 자에 대한 심판으로 끝을 맺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이제 다니엘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흔히 기도의 내용을 중시하기 보다 방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나를 찾아서 흉내 내기를 즐긴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막1:35)는 구절 때문에 새벽기도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철야기도를 해야 한다고 외친다. 또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눅22:39)를 내세워 산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기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질 어떤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어떤 방법의 기도가 가장 효과적인 응답이 올까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란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하는 일치된 마음이 진정한 기도이다. 다니엘이 서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에는 오직 그 약속에 근거한 기도를 드렸을 뿐이다.
다니엘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기도는 모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가 표준이다. 성경을 잘못 보면 인간의 바람을 기도해서 주님이 들어주신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있다.(예,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원대로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이기에 허락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없는데 인간이 필요를 요청하니 어쩔 수 없이 주시는 것은 없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아버지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일치되는 상태를 말한다.
현재는 아버지의 계획하심과 내가 바라는 것이 차이가 있는데 기도하는 중에 내 생각이 포기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그분의 계획하심에 동참해가는 과정이 기도하는 것이요, 평소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믿고 바라며 살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기도의 삶이다. 무릎 꿇고 눈감아야 기도인줄 아는 자들은 기도의 의미를 모르고 기도의 방법에 관심두는 자이다.
기도는 이미 응답이 확정되어 있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기도 응답 내용이요, 그 것이 아버지가 바라고 원하시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구하여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은가?
다니엘 10장
힛데겔 강가에서 다니엘이 본 이상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이상(계1:13-)과 동일했다. 이 둘은 모두 말일의 일로서 전쟁에 관한 것인데 심판의 주께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를 보여주신 내용이다. 따지고 보면 전쟁은 굳이 말세의 현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미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로는 계속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과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만군의 여호와'란 말씀이 많은데 이 용어 자체가 전쟁의 용어이다. 이스라엘을 지칭해서 '나의 군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역시 이 세상은 성도가 마귀와 싸우며 살아갈 전장이란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사역이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고(요일 3:8)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고 하셨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가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일 하시는데 그 어느 누구도 약속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정없이 멸하시는 분이다.(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 당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며 주의 일을 방해했을 때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하셨다. 마16:21)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성도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면,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며 주님의 적대자가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충성 봉사하면 하나님이 늘 내편이 되어주셔서 하는 일마다 잘되고 형통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혀 성경을 모르는 인간의 잘못된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언약(약속)을 취소하거나 변개치 않으셨다. 앞으로도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돌이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는 분명해 졌다. 성도라면 내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상을 본 다니엘은 몸에 힘이 빠졌고 아름다운 빛이 변해 썩은 듯 하였고 땅에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 추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서니 두렵고 떨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상의 내용 속에 나타난 것이 또한 다니엘을 염려와 근심으로 몰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의 와중에서 지냈고, 그 전쟁 때문에 포로로 잡혀와 식민지 생활을 해 왔는데, 잡혀온 나라 바벨론 마저도 침략을 받아 정권이 바뀌는 혼란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또 전쟁에 관한 이상을 보여 주셨다. 자신이 속해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헬라)에 의해 멸망된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공포의 소식이요, 듣고싶지 않은 비보였다.
불안에 떨고있는 다니엘에게 천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하신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니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성도는 어떤 환경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환경을 주께서 인도하고 계시기에 염려와 두려움이 필요치 않다. 환란이 없어 평안이 아니라 주님 함께 계심에 평안이다. 세상은 돈이 있어야 안심이고 어려운 일이 없어야 평화라고 말하지만, 성도는 세상의 그 무엇이 있고 없고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계시기에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는데, 그리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는데 무엇이 염려스러운가? 만약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면 내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데 불안해한다면 하나님을 도대체 어떤 분으로 여기는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걱정이고, 빚을 졌는데 이자가 계속 올라 언제 이 빚을 다 청산할지 암담하고, 구조조정 한다는데 직장에서 쫓겨날까 불안하다. 또 나이는 점점 차 가는데 결혼할 상대는 나타나지 않고 이러다가 늙어버리지 않을까 마음이 뒤숭숭하다. 이런 저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루종일 궁리하고 근심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17)
다시 한번 말씀을 기억하자. 그렇게 싫어하고 치가 떨리는 전쟁의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는 다니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의 형편을 주께서 다 알고 계신다. 염려치 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 하셨다.
다니엘 11장
계속되는 전쟁이야기 중에서 11장은 남방 왕과 북방 왕이 싸우는 장면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부유하고 강하여지면 여지없이 약한 나라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이기기에 벅차다고 판단되면 재빠르게 다가가 화친을 맺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화친을 위한 수단으로는 왕의 딸을 상대국 왕과 결혼시키는 방법이 취해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권력 유지와 번성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서로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전략상 화친하는 것이지 진정 평화를 원하거나 상대국을 아끼고 사랑해서 화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수호해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기에 어쩔 수 없다. 이들의 생각은 피차일반이다. 자신들이 강해졌을 때 다른 나라를 침략했듯이 상대국이 강해지면 자신들이 집어 삼켜질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지혜와 방법을 총 동원하여 힘을 기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로 살아가는 세상나라 법칙에는 창조주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세력의 신에게만 복종할 뿐이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자신들이 피조물이기에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보탬이 될까 해서 믿는 것뿐이다.
어쩌면 우리들도 하나님을 이런 관계 때문에 따르고 있지는 않는가?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니 힘겨운 일이 많다. 돈을 버는 일도 한계가 있고, 자녀들의 미래도 부모인 내가 확실히 보장해 줄 능력이 없다. 아울러 지금은 내가 건강하고 직장이 있으니 그럭저럭 살만하나 나중에 늙으면 어찌될지 막막하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나의 미래나 자녀의 장래 모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전쟁 이야기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 세상의 법칙은 힘이 지배한다. 힘이 길이요 진리이다. 그 누구도 힘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정 힘이 모자라면 강자에게 굴복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고 기회를 엿보면서 나도 힘을 키워 그 강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자유롭고 평안하다.
그러나 성도가 살아가는 방법은 힘의 논리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 있어야하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히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에 포로된 자는 세상 사람들이 힘이라고 여기며 떠받드는 것들이 배설물처럼 생각될 뿐이다.
거듭 다니엘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이 세상 나라는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서로 싸우고 다투지만 결국은 모두 패배자요 실패자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강하고 무서운 나라 바벨론도 메대 파사에 의해 망했고, 메대 파사도 헬라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헬라 역시 또 다른 권력자에 의해 부서진다.
이 세상 권력자들은 한창 자신의 힘이 강하다고 여겨질 때는 심지어 하나님마저 대항해서 싸우고 성도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들의 최후는 완전한 파멸이다.
성도여! 세상 권력 부러워 말라. 이런 것들은 언젠가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 임시적인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분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의 나라이다.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나라. 이 나라가 우리의 본향이다.
오늘의 잠시 잠깐 평안을 위해서 영원한 나라를 포기할 것인가, 영원한 나라를 위해 잠시의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려는가?
다니엘 12장
마지막 장인 12장은 종말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국 이래로 없던 큰 환란이 일어나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잠자던 자 중에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영벌에 처해질 자도 있다. 한 때 두 때 반 때(이는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는 기간, 즉 성도가 고난받는 기간을 말한다. 마흔 두달(계11:2), 1260일(계12:6), 사흘 반(계11:9),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계12:14), 1290일(단12:11)등 모두 같은 표현이다)를 지나기까지 이 환란은 계속된다. 이런 환란을 통해서 성도는 연단 받아 정결케 되거니와 악한 사람은 더욱 악을 행할 것이다. 제사가 패하여지고 ---'
우리는 다니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만 가장 큰 핵심은 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입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해로는, '이 땅은 우리가 잘 가꾸어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아가야 할 생존의 터전입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든 서로 힘을 합쳐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손을 맞잡고 뛰어야 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공존의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방해거리로 존재한다면 그는 인류의 적이며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할 무가치한 인간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종말의 상황을 깨닫지 못한 자들만의 견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요,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이런 의식과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산다면 이런 자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믿는 자로 여겨야 할 것인지, 불신자로 취급해야 할 것인지.
사랑하는 여러분! 혹 우리 중에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면서, 내 세계관이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라 세상적 세계관은 아닌지요? 더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까? 다니엘의 말씀처럼 멸망할 세상이요, 심판받아 마땅한 세상으로 생각합니까. 그리고 이 땅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 아니요, 잠시 잠깐 머물다 떠나야할 처소라고 생각하며 나그네처럼 살아갑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기도해서 현재보다는 더 안락한 환경을 꾸미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존경받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우리 자녀들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출세하는 사람으로 키워보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흔히들 말세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말세구나' 하고 푸념을 합니다. 아버지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이제 세상이 멸망할 때가 되었구나' 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념들이 과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말세관과 동일한 개념인가요?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세의 현상이 그런 모습인가요. 우리의 모든 판단 기준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 인간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유대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희생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존경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대단히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마태1:21) 그 일을 위해 죽으신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불신자가 예수님을 좋아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좋으신 분으로 생각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한다면서 전혀 복음이 아닌 엉뚱한 것을 이야기했기에 그들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알게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아 역시 좋은 분이구나' 하고 잘못 알게된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혜가 없는 자들은 성경을 읽어도 분별력이 없어서 자기 멋대로 예수님을 평가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성도라면 성경적인 안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안개와 같은 세상, 나그네로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은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심판하실 것임을 그 나라 갈 때까지 온몸으로 전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복 달라고 기도하고, 성공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그런 엉뚱한 생각 버리고, '주여! 주님가신 그 길 따르기 원합니다. 믿음 잃지 않게 해 주세요. 홀로 버려두지 마시고 늘 인도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간구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야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영생을 누릴 천국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