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파병 한국군 생환 포로의 25시
25일 구정에 부모님 차례를 지내기 위해 제수용품을 사기 위해 30여분을 달려
한국수퍼를 찾아 나섰다. 장보기전 미장원에 들러 집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동안
미장원 티테이불에 쌓여있는 신문을 들춰보다가 깜짝놀랄 만한 내용을 발견했다.
그기사 내용은 63세의 차씨라는 사람이 한국군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월맹군애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나온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기록을 200백자 원고지에 써서
미주중앙일보로 보냈다는 설명이 있었다.
생각나는 대로 옮기는 차씨의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씨의 아버지는 낙동강전투에 참전했던 인민군 장교로 폭격으로 사망하고
그의 어머님은 쌍동이 형제와 형을 데리고 핀난길에 피살되고 그와 쌍둥이였던
형제와 형은 피난길에 서로 헤어저 이산가족이 되였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S대학 영문과 2학년때 입대해 월남으로
파병되어 월맹군 포로가 되였다. 월맹군에 끌려간 그는 임시포로 수용소에서 자신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미해병대 장교 포로를 만났다. 그는 바로 차씨의 쌍동이 형제로
전쟁중에 해어진후 미국으로 입양되여 미해병대 장교가 되여 월남에서 월맹군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힌 한국군을 회유해 북한으로 끌고 가기위해 하노이 파견되였던
북한 외교관이 차씨를 회유하는 과정에서 그북한 외교관이 바로 한국전쟁중
피난길에서 헤어진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삼형제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세가지 성을 가지고 헤어져 살다가 월맹의 포로수용소에서 만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념의 골은 깊어 북한행을 거절한 차씨는 처형 되기전 미국과 월맹의
협상이 이루어져 그의 쌍둥이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차씨는 그를 심문하던
월맹군 여자가 그를 사망으로 처리해 보고를 한 후, 그녀와 잠시 동거를 하다가
헤어져 태국으로 넘어가 캄보디아 크메루즈에게 무기를 팔아 돈을 꽤벌었다.
모든것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그는 한국에서 월남전 전사자로
처리가 되어 국립묘지에 묻힌지 오래 되고 인터폴에서 무기밀매상으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여서 어떤나라로도 출국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무기밀매 혐의에 대한 사면을 받은후 차씨는 미국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차씨 3형제의 이야기는 우리민족의 뼈아픈 상처를 상기시켜 이글을 쓰면서
가슴이 아파와 몇번이나 뒷뜰로 나가 담배를 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래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 검색으로 얻은 월남전 한국군 포로에 대한 글
* 월남전의 포로들 *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 머나먼 이국땅 베트남에서 그리운 얼굴들이 돌아왔다. 돌아온 병사들과 가족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으로 온통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73 년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당당한 개선식과 함께 베트남 에서의 철군을 완료했다. 이세호 주월 사령관의 귀국 보고에는 단 한명의 포로나 실종자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런데 철군5일후, 장안을 떠들썩하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전사한줄 알고 무덤까지 버젓이 만들어 놓았던 파월용사 유종철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월맹군과 한국군 최대의 혈전이던 안케패스 전투! 유종철은 그 안케패스 전투에서 팔과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포로로 끌려간 유종철은 11개월간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는 시체를 확인하지 못한 명백한 실종자였다. 그러나 유종철은 바로 전사 처리됐다.
당시 주월사에서는 실종자나 포로에 대해 단 한번도 발표한적이 없다. 32만명의 한국군이 8년동안이나 참전했던 베트남전은 단 한명의 포로도 실종자도 없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유종철이 일으킨 파문은 국립묘지에 마련돼있던 그의 묘지를 철거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리고 유종철의 호적엔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문구가 새겨졌다.
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전 포로문제를 여론화 시킨 박정환씨 그 역시 월맹군의 포로였다. 베트콩 게릴라와 월맹군이 베트남 전역에서 총궐기했던 구정 대공세, 태권도교관 이었던 박정환은 그때 시내 한복판에서 월맹군에게 사로잡혔다.박정환은 분명히 포로였지만 실종자로 처리됐다.
박정환은 캄보디아로 탈출했다가 천신만고끝에 극적으로 귀환했다. 살아 돌아왔을때 그의 병적기록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68년 베트남의 연대휴양소에서 수영을 하다가 없어진 김인수상병 김인수의 실종 처리과정은 월남전에서 실종자처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말해준다.
당시 김인수와 같은중대에서 서무를 맡았던 이병화는 자신의손으로 직접 김인수를 전사 처리했다. 그러나 김인수는 92년,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생사가 불분명한 경우에도 무조건 전사로 처리되었다. 참전 군인들에게 <실종>이라는 단어는 금기였다. 현재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월남전 사망자는 5068명, 혹시 그들중에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제삿밥을 받아 먹어야하는 실종자들은 더 없을까?
얼마전까지 우리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베트남전의 실종자는 8명이다. ...... ......
어떤 전쟁에서든 포로나 실종자는 발생한다. 월남전이 끝난후 월맹은 591명의 미군포로를 석방했다. 포로들은 전쟁영웅 대접을받으며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국군 포로는 없다는것이 우리정부의 입장이었다.
1973년 종전협상을 하면서 미국과 월맹은 포로교환에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군 포로에대한 언급은 어디서도 찾을수 없었다. 8년의 참전기간 동안 한국군이 파병한 연인원은 모두 32만명, 300만명을 파병했던 미국에 이어 연합군중 최대의 파병규모였다.
파병인원은 미국의 10분의1이나 되는데 한국군 포로,실종자수는 미군 포로,실종자의 400분의1도 안된다.
포로에 줄그어질때 그나마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의문이 아닐수 없다!
월남전은 전선이 따로없는 게릴라 전이었다. 한국군의 주요임무는 정글에서 활동하는 베트콩 게릴라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실종자가 더 많이 발생할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군은 수색전만 벌였던게 아니었다.
월남전에서 벌였던 크고작은 작전이 약 6만회, 그 중에는 앙케패스전투,짜빈동전투등 월맹 정규군과의 치열한 접전도 많았다. 그 와중에 집계된 8명외에 실종자가 더 발생했을수도 있다. 실종자 문제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국에서도 뜨거운 이슈다. 미국은 종전과동시에 포로와 실종자 명단을 공개했다. 3천여명에 달하는 미군 실종자와 전쟁 포로문제는 한동안 국민적 관심사였다.
헬기 조종사였던 프랭크 안톤씨 역시 전쟁포로였다. 5년간 월맹군에게 잡혀있다가 공식 포로교환때 풀려난 안톤, 취재팀은 그에게서 새로운사실을 듣게된다. 포로로 끌려다닐때 한국군 포로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건강해 보였고 ...한국군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죽을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포로생활의 경험담을 엮은 안톤의책에는 한국군 포로와의 만남이 생생하게 기록돼있다. 안톤이 만났다는 한국군포로는 <우리 >라고 분명히 말했다. 적어도 2명이상이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살아있을까? 그가 죽은걸 확인하지않은 이상, 내게는 살아있는사람!"
안톤이 봤다는 한국군 포로들은 분명히 실종자였다.그들역시 실종후 바로 사망처리 되었을것이다.
한국군 포로의 흔적은 또 있었다. 얼마전 기밀해제된 미국CIA첩보문서, 월남전 전쟁포로에 관해 조사한 CIA문서에서 한국군포로의 실마리를 발견할수 있었다.
문서에는 언제 어디서 목격되었고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 중의 한문서에는 심지어 한국군 포로2명의 인상착의와 신분까지 나타나 있었다.
CIA와 미국방성 문서곳곳에는 한국군 포로에대한 기록들이 많이나와 있었다. 이들의 실종시기와 인적사항중 우리 국방부에서 발표한 실종자 8명과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모두 확실한 추가 실종자들인 것이다.
취재팀은 2통의 마이크로 필름에서 10 여명의 한국군 포로에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미처 조사하지 못한필름이 400 여통이나 더 남아있다.
한국군 포로는 66년부터 70년까지 베트남 전역에 걸쳐서 꾸준히 목격됐다. ...... ......
프랭크 안톤이 목격했다는 2명의 포로들까지 적어도 18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베트남 전 지역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국군 포로들은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CIA문서에서 한국군 포로들이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기록된 베트남 하오 유엔 마을을 찾아가 봤다.
월남전 당시 이 지역의 베트콩 책임자였던 사람을 만날수 있었다. 당시 베트콩 고위간부중 한명이었던 <무어>는 한국군 포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66년 한국군 포로를 잡은적 있는데 그는 맹호사단의 고위장교였다." "포로들은 당시 베트콩들이 군수품과 병력을 보급하던 이길을 통해 이동했을 것이다."
취재팀은 안케패스 전투에대한 월맹군 3사단의 전투상보에서 한국군 포로에 대한 또다른 기록을 찾을수 있었다.
위생병 티엔이 돌진하고 있는데 죽은척 하고있던 적군병사가 튀어나와 저항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다. 티엔은 적의등을 눌렀다. 그리고 적의 입안에 총기손질용 헝겊을 쑤셔넣은 후 진지로 끌고왔다. ...... ...... ...... ...... 그날밤 우리부대는 또 한명의 적군을 잡아왔다. 그들은 남한의 맹호사단 제8기갑 중대소속 이었다. <월맹군 전사>에서 밝혀진 두명의 포로외에 안케패스 전투때 또 한명의 한국군 포로가 있었다.
기갑연대 1중대 1소대가 수색을 나가다가 제일 앞서가던 부인호상병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기록이다. 현재 부인호는 안케패스 전투의 사망자75명중에 포함돼있다.
638고지 탈환을두고 월맹군과 맹호부대가 한달간 접전을 벌였던 안케패스 전투! 그때 적어도 3명의 실종자가 발생한게 분명했다.
만약 그들이 포로가 되었다면,그 후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월맹군은 간이감옥에 포로들을 잠시 가둬뒀다가 계속 이동시켰다. 포로들은 그 와중에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탈출하고 나서가 더 문제 ....모두 베트콩 .... 나가도 잡힌다!"
탈출하다가 잡힌 박정환역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과 함께 한국군 포로들은 뜻밖의 권유를 받았다."북한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소위 북에가면 편하다." "한국군 양자택일, 죽거나... 북한!"
월맹군은 포로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월맹의 군수물자 및 인력보급로였던 호치민 루트, 포로들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연결된 호치민 루트를통해 북베트남까지 끌려갔다.
호치민 루트를통해 하노이에 도착한 미군포로들은 일명 '하노이 힐튼'이라 불렸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 포로 수용소에도 한국군 포로의 자리는 없었다. 당시 월맹군으로부터 용병취급을 당했던 한국군은 포로로서의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월맹군은 어떻게 한국군 포로들을 북한으로 보냈을까? .......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60km정도 떨어진 <랑장>지역, 호젓한 마을 어귀에는 오래된 기념비가 하나 있다. 북한군인 묘지다. 왜 북한군인의 묘지가 베트남에 있는 것일까?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은 비밀리에 월남전에 참전했었다. 북한군들은 주로 공군과 심리전요원으로 활약했다. 월맹군은 한국군 포로들을 참전한 북한군에게 넘겼을 것이다. 월남전때 민사심리전 장교로 참전했던 김영시는 안학수와 박성열이 북한에 있다는 증거를 갖고있다. 베트남에서 수집한 북한의 선전용 전단, 그 전단 사진에 있는사람은 분명히 실종자 박성열이었다. 귀국을 일주일 앞두고 외출 나갔다가 실종된 안학수 역시 박성열과 함께 북한에 있다는것이 밝혀졌다.
결정적인 증언은 또 있었다. 70년 귀순한 정차랑은 북한에서 박성열과 안학수를 봤다고 했다.
"안하사와 박병장은 월남에서 자진해서 북한 왔다고..."평양에있는 세뇌교육 시설에서 만난 안학수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67년 헬기 추락사고로 실종된 박우식 대위. 국방부는 얼마전 박우식대위를 사망처리한후 실종자 명단에서 마저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북한에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8명의 실종자중 북한에 있다고 추정되는 네사람, 국방부는 이들중 일부가 자진 월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기서 어떻게 자진월북? "잡혀왔다는 소리못해"
"월남간건, 조국이 가라고 해서 ...." "북에 가려는게 아니었는데, 살고싶어서 북한에 ...." ...... ...... ...... ...... ......
한국군포로의 존재는 미국의문서 곳곳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다. 미국방성의 의뢰로 월남전 전쟁포로에 대해 조사한 '랜드' 보고서. 이 보고서에도 20명이나되는 한국군 포로의존재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실종자에 대한단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었다.
"찾을수 없었던것이 아니라 다만 찾지않았을 뿐이다!"
지난 30년간 실종자는 8명 뿐이라고 되뇌였던 국방부, 그나마 얼마전 박우식과 김인수를 사망처리해 실종자 숫자는 오히려 6명으로 줄었다.
북한에 있다고 알려진 실종자에 대해서도 어떤 공식적인 대책도없다. 월남전 실종자문제는 30년동안 제자리걸음 상태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실종자 가족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년에 한번씩 국방성 당국자와 가족들이 공개 간담회도 갖는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실종자에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와서 국방성을 채찍질한다.
실종자 문제에대해 전국 유가족연맹은 강력한 주도권을 갖고있다. 덕분에 96년에는 실종자를 찾는절차를 명문화한 <특별법>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가족들은 아직도 만족하지 않는다.
국방부산하에 있는 <포로 및 실종자 담당국>에서는 500 여명의 전문가들이 포로와 실종자를 찾기위해 세계각국에서 활동 하고있다.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다"는 이 문구는 우리와 유가족단체들이 결코 잊지않는다는 의미다.
<앞서가신 전우의 명복을 빕니다.>
하노이 현지에있는 실종자 사무소에서는 현지인의 증언과 각종자료를 분석해 실종자를 찾고있다. 실종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는것도 이들의 주요임무다. 발굴된 유해는 DNA 분석 등을 통해 신원을 파악한 후 가족에게 보내진다. 이러한 노력덕에 지금까지 미국은 실종자 566명의 행방을 찾아냈다. 현재 남아있는 실종자는 2017명, 이 숫자역시 앞으로 계속 줄어들것이다.
가족들의결의 역시 단호하다. 그들은 비밀해제된 국방성과 CIA문서를 자체조사해 많은 실종자를 찾아내고 있다. <전국 유가족 연맹>은 더 많은 비밀문서를 공개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호응하고 있으며 재정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하는 자식과 형제를 찾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
우리나라의 실종자 가족들에게 지난 30년은 잔인하기만 했다. 연대 휴양소에서 수영을 하다가 실종된 김인수, 그의 실종사실이 알려진 날부터 이집안에선..... 한숨이 그칠날이 없었다.
"생때 같은 맏아들을 잃은 후 부모님속은 숯검정이 됐다." "참. 1년 내내..부모가 밥도 안먹고 ...못찾는다는데 우야겠습니까?"
"어머니는 그예 심장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얼마전 돌아가셨다." "찾아가봐라 .....그카미 돌아가셔... "
눈을감는 마지막그날까지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있을거라는 희망을 버리지않았다.
김인수보다 더 딱한 경우도있다. 섬마을 고향을 등지고 베트남으로 떠났던 하사 정준택, 그는 실종경위도 행방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채, 그저 실종자로만 분류돼있다. 정준택이 실종된지 30년이 넘었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옛날집을 떠나지않고 있었다. "어디서 왔소? 오매오매 감사허요. 우리집을 찾아오셨소?"
유복자였던 정준택,아들을 잃은후 노모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바깥출입도 안하고 사람도 피하게 됐다.
"가슴이 두근두근 .미쳐부러! 미쳐부러!....질긴것이 목숨이야"
30년간 공백으로 남아있는 준택의 호적, 그는 살아있는것도 아니고 죽은것도 아닌것이다. 준택을 불렀던 국가에선 30년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남의나라 문서에 희미한 실루엣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실.국가를 위해갔는데 ....책임져야지...."노모가 울음으로 세월.
베트남에서 준택이 보낸돈으로 마련했다는 앞동산의 보리밭, 올해도 보리는 누렇게 익어가는데 이보리밭의 주인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것일까?
"생전..어디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 "
올해 나이 아흔 셋, 자식의 얼굴을 보지못해 어머니는 차마 눈도 감을수 없다. 오늘도 먼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이 어머니에게 반가운소식을 전해줄사람은 없는것일까?
스무살 꽃다운 청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피를 흘려야 했던 베트남 전쟁! 정겨운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을 등지고 사지로 떠나야했던 젊은 병사들!
그들이 순결한손에 총을 들었던 이유는 단 하나! 조국이 그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아직도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애타게 조국의 이름을 부르고있다면,
"이제 조국은 그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전우님들! 이러한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겠습니까? 진정 이것이 '우리의 조국'이란 말입니까? 정말 너무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전우를 찾아야합니다!
월남전 포로와 실종되신 분들을
지금이라도 당장 찾아서 모셔와야 합니다
월남과 외교 관계가 맺어진 만큼
정부 차원에서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머나먼 월남땅에 누워계신 그 분들의
유해를 꼭 찾아야 합니다
그분들이 누구입니까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가족부양 하겠다고
목숨걸고 전쟁터로 가신 분들입니다
자유? 평화? 조국?이었을까요?
이분들이 목숨을 바쳐 벌어온 달러가 밑받침 되서
조국은 이리도 잘 살고 있는데...
제안 합니다~!!!
중년사랑행복 카페 회원님중에
컴터로 청원과 탄원에 자신 있으신 님중에
아고라 청원방에 명문의 글을 올리셔서 서명을 받아
육군본부로 국방부로 국무총리실로 청와대로
탄원을 넣어 월남전에서 전사하고 유해도
못찾은 분들을 지금이라도 찾도록
강력한 촉구를 해야 합니다
군대이야기방에
청원과 탄원에 나서주실 회원님 안계십니까
(제가 하고 싶어도 컴맹 수준이라 나서지를 못합니다 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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