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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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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대전충남 교육시민단체 일본 구마모토현 방문대표단(단장 송인준)은 6월 21일 오전 여장을 푼 스이젠지 호텔(水前寺共濟會館)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1층 호텔식당에 비치된 조간 <구마모토일일신문>을 보니 어제 대표단 활동사진과 함께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다. 교포2세로 현남팀을 인도한 주영덕 선생이 번역을 해줬다. 객관적인 기사였다. 오전 8시 곧바로 시정촌 교육위원회로 향했다.
가는 방향에 있는 일본의 3대 성(城)의 하나인 구마모토 성(城)을 잠깐 들렸다. 2007년 구마모토성 400주년 기념을 앞두고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검이 전시됐다고 알려진 구마모토 성내 천수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에게 '병사 한 명당 한 되의 조선인의 코를 잘라오라'고 해 실행에 옮겼던 주인공의 칼이 전시된 그 곳. 생생한 역사를 통해 밝혀진 비극의 칼을 보려 구마모토성 천수관(박물관)을 1층에서 5층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일정이 촉박해 곧바로 나와야 했다.
바로 21일 오전 9시30분이었다. 이 시간이후부터 대표단은 각각 8명씩 나뉘어 구마모토현의 남쪽 있는 시정촌 교육위원회와 북쪽 시정촌 교육위원회로 향했다. 현북팀은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이 통역을 겸해 안내(운전)를 했다. 좀더 많은 시정촌 교육위원회 방문하기 위해 현북팀도 둘로 나눴다.
최 사무국장이 운전한 차에 탄 대표단 일행은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만든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미래를 여는 역사> 책이 중국에서 4번째 인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최 사무국장은 어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회담내용을 궁금해 하는 대표단들에게 그 결과를 알려줬다.
"역사교과서 공동연구에 노력하기로 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1급 전범들과 따로 분리해 검토하기로 노력한 것 같다. 하지만 회담이 끝나고 야스쿠니 참배와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검토 노력하는 것인지, 노력할 것인지 잘 판단하라는 등 고이즈미 총리가 합의 내용과 관련해 애매한 해석을 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한 대표단 관계자는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1급 전범들을 수상 자격으로 참배하는 것 자체가 전쟁 희생자 가족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고 했고, 또 다른 관계자는 1급 전범자 후손들이 각료로 있기 때문에 총리(수상)의 신사참배를 정당화 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민단 최 사무국장은 일반 국민들은 후소샤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등 역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큐슈지역에서 구마모토현이 가장 보수적인 도시라고도 소개했다. 전차(덴샤)가 지나가자 화제가 그곳으로 옮겨졌다. 최 사무국장은 나가사키, 히로시마, 구마모토 외에는 별로 전차를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버스는 시영과 민영으로 구분해 운영하고 있지만 전차는 땅값이 비싸 민간 전차는 없고 구마모토시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 승용차 창문으로 보인 구마모토현 전차(덴샤)가 왠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60~70년대 서울역에서 화신백화점(현재 국세청건물)까지 전차를 타본 경험을 갖고 있는 터라 더욱 그랬다. 구마모토현민들은 출퇴근 시 버스보다 전차를 이용한 경우가 많다고. 전차 레일은 차도의 중앙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유골 발굴 전문가인 강동환(천안오성중, 충남역사교육연구회) 선생은 전기를 이용한 전동차와 전차를 간단히 비교했다. 량(輛)이 많은 것은 전동차고 한 대로 운행된 것은 전차라고 말했다. 기차는 증기기관차, 기선은 증기선(배)의 약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열차를 현재도 기차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이날 명성황후를 재조명하겠다고 자료를 들고 나온 후로사와 지요카츠(84)씨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얘기들을 들려줬다.
"명성황후 시해범 구리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와 시해범 이에이리 가키치의 손자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 씨 등 일행 12명이 지난 5월 10일 남양주 홍릉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했다. 경기도 여주 황후 생가, 시해 궁전 등도 돌아봤다. 시해범 44명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다. 명성황후 시해를 진두지휘한 미우라 공사 후손이 야마구찌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못 찾았다. 야마구찌는 현재 유력한 수상후보로 알려진 아베 신따로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현북팀과 시종일관 함께하면서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공동집필한 <미래를 여는 역사>책을 각각 시정촌 교육위원회에 교육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21일 정각 10시 마시키마치 교육위원회 3층 대회실에서 도착했다. 오까베 마사노부 교육위원회 교육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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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시키마치 교육위원회 오까베 마사노부 교육장(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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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이 자리에서 홍순승(용남고등학교 교감) 대표단 부단장은 "우리 국민들이 후소샤 중학 역사교과서 채택과 관련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근대화를 도왔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논리의 후소샤 교과서 채택을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특히 홍 부단장은 "교과서에 가미가재 특공대 사진과 유서를 실은 것은 한국민의 민족적 감정과 동시에 일본청소년들에게는 과거 군국주의 동경을 불러올 수 있게 할 수 있다"며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요청서를 오까베 마사노부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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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오전 오까베 마사노부 교육장과 대화를 하고 있는 대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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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오까 마사노부 교육장은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라서 친근감을 갖고 있다"며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신중히 검토하고 난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후로사와 지요카츠 씨는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전달했고, 후소샤 교과서 채택 반대의 뜻을 담는 요청서를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와 민단을 대표해 최상철 사무국장이 각각 오까베 마사노부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10시 30분 마시키마치 교육위원회를 떠나 다음 코스인 니시하라마치로 향했다.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 채택을 위해 이 지역에서 옴부즈맨 활동을 하고 있는 호시코(여성운동가)씨의 승용차를 탔다. 우리나라 마티즈와 같은 경차였다. 구마모토현에서는 유난히 경차가 눈에 많이 띄었다. 니하라마치의 타지마 케이지 의원과 황석균(논산대건고등학교, 충남일본어교육연구회) 선생이 함께 탔다. 이 자리에서 황 선생이 통역을 해 줬다.
타지마 케이지의원은 NHK라디오 <안녕하십니까>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니시하라마치 인구 6300여명. 우리 나라 면 정도의 아주 작은 지역이었다. 이 때 호시코 씨는 니시하라마치에 한국관광객이 가장 많이 온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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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운동가 호시코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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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그는 니시하라마치에도 욘사마 열풍이 그칠 줄 모른다고 했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겨울연가'에 나온 3곡 정도의 배경음악을 미디어 플레이어(MD)에 녹음해서 듣고 다닌다. 구마모토 시골에도 이렇게 겨울연가 욘사마 팬들이 많다. 나는 스타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배용준을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연가 내용과 음악이 좋다. 처음 NHK에서 상영돼 유명해지기 전부터 계속 시청했다."
그는 한국 영화에 관심도 보였다. "한국 영화는 영상미가 뛰어나다. 촬영기술이 일본 영화감독보다 뛰어난 것 같다. 한국과 일본 영상을 비교하면 한국은 젊은 감각을 잘 살린다. 젊은 감독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일본은 나이 든 감독이 많아서 그런지 젊은 감각이 없다. 한국감독은 영화를 통해 한국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역사문제도 정치적 해결보다는 영화를 통해 진행하면 훨씬 청소년들에게 감흥을 줄 것이고 해결이 빨리 될 것이다."
호시코 씨가 말하는 도중 니시하라므라(마치)에 도착했다. 2층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대표단 일행은 호리따 교육위원장과 대담이 이뤄졌다. 길준용(서산여중학교, 충남역사교사모임 회장) 선생은 "역사는 과거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의미가 있다"며 "4년 전 처럼 역사교과서를 올바로 채택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요청서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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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하라마치 교육위원회 호리따 교육장에게 길준용선생이 요청서를 낭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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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인사말을 한 호리따 교육위원장은 "대표단이 우려하는 결과는 없을 것"이라며 "학교선생님들이 위원으로 돼 있으니까 안심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과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도 다른 시정촌 교육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왜곡교과서 반대를 표명하는 요청서를 각각 전달했고, 후로사와 지요카츠 씨도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호리따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11시30분이었다.
타지마 케이지 의원, 통역을 도운 황석균 선생과 함께 호시코 씨에 차에 다시 타 미나미아소촌으로 향했다. 니시하라므라(마치)를 지나는 길에 발전을 한 풍차가 선뜻 눈에 띄었다. 타지마 케이지의원은 풍차는 이산화탄소(공해) 배출을 줄이기 위해 구마모토현에서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풍차 높이 60m, 총 10대 정도의 풍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풍력발전소는 9000가구분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니시하라므라는 한국관광객이 많은 탓에 한글 표지판도 설치 됐다. 니시하라므라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한글판이 설치돼 있다고 호시코 씨는 귀띔했다. 풍차는 일본에서 가고시마에 이어 올 3월 두 번째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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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하라마치 타지마 케이지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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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풍차가 돌아가는 지역은 짙은 초록색 풀잎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우리 시골의 초록 풍경이 생각났다. 소 먹이로 쓰려고 재배를 하는 풀이다. 겨울이 되면 다음해 풀잎이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반드시 태운다고.
한참 승용차를 타고가고 있는데 문뜩 창밖을 보니 산과 산이 연결된 지점에 일직선처럼 보인 선이 보였다. 화재가 날 때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무를 잘라 내고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산불 예방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이 지역사람들의 지혜인 셈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젖소처럼 고기소를 방목한다. 빨간 고기소라고 해 아까우시라고 부른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쭉쭉 뻗은 삼나무(스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자연산이 아니라 경제용으로 팔기위해 의도적으로 조림한 나무들이다.
니시하라므라에서 떠나 20분쯤 갔을 때 칼데라(일명 카르데라) 화산이 나타났다. 화산이 일어난 곳 중 세계에서 가장 큰 화산이다. 날씨가 흐려 선명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장엄했다. 화산이 폭발한 칼데라지역은 7만 명의 인구가 현존하고 있다. 화산지역에 사람이 사는 경우는 세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고 케이지 의원이 소개했다. 이곳은 골프장도 4곳이나 있다. 한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입국했던 구마모토현 공항이 니시하라므라에 있었다. 생각해 보니 한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차를 타고 미나미아소촌 교육위원회로 가던 중 점심시간이 됐다. 이 지역 먹을거리로 유명한 구기노므라(마을)에 있는 오후쿠로깡(어머니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거대한 물레방아와 바로 인근에 공동묘지처럼 생긴 골프연습장이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멀리 카데라 화산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 식당은 구기노에 있는 3개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각각의 음식에 가격이 매겨져 있고 취향에 따라 음식을 선택해 골라 먹는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문화 차이가 무엇일까를 잠시 생각했다. 한국은 함께 차려놓고 같이 먹는 음식문화고 일본은 똑같은 음식이라도 각각 나눠 먹는 문화이다. 이곳 오후쿠로깡은 관광객들의 관광코스로도 상당히 알려졌다고.
점심식사를 끝내고 오후1시 식당을 떠나 미나미아므라(미나미아소촌)으로 향했다. 대리석으로 제작된 공동묘지가 눈에 띄었다. 가족납골당이었다. 일본은 매장을 하면 법에 처벌을 받는다. 반드시 화장을 해 마을 공동묘지에 납골로 보관한다. 납골에 사용하는 대리석 등 돌은 상상을 초월한 고가였다. 우리 돈으로 500만원부터 1000만원까지다. 일본 묘석은 우리 장례비용과 전체와 같은 수준이었다.
미나미아소촌 교육위원회 2층 회의실에서 도착했다. 곧바로 길준용 선생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역사는 과거를 배우는 것이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올바른 과거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양극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서 4년 전처럼 왜곡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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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오후 길준용 선생이 미나미아므라 시모다 겐로데스 교육과장에게 요청서를 전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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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후지오까 고으스께 교육장은 출타 중 이었다. 대신 시모다 겐로데스 교육과장이 인사말을 했다. "의회가 열려 그쪽으로 교육장이 가 있다. 교육장이 돌아오면 충분히 그 뜻을 전달하겠다."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과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는 왜곡교과서 반대를 표명하는 요청서를 각각 전달했고, 후로사와 지요카츠 씨도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참고하라며 시모다 겐로데스 교육과장에게 전달했다.
오후 1시 45분 마나미아소촌을 출발해 오오츠마치 교육위원회로 떠났다. 강행군이었다. 차안에서 창밖을 보면서 궁금한 점을 호시코 씨에게 계속 물었다. 참고로 첫날부터 대표단은 단장을 중심으로 한 현남팀과 부단장을 중심으로 한 현북팀으로 나눠 활동을 했다. 이날 현북팀은 다시 두 개조로 나눴다. 교육위원회를 한군데라도 더들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2시 45분 오오츠마치 교육위원회에 도착했다. 오전에 두개조로 나눠졌던 현북팀이 모두 함께 합류했다. 교육위원회 정문 앞에서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오오츠마치 주민 10여명이 대표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과 함께 3층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다케다 세이코 교육장과 환담을 했다. 홍순승 부단장이 말을 했다. 그의 요점은 역사를 왜곡한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요청서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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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승 부단장과 환담을 하고 있는 오오츠마치 교육위원회 다케다 세이코 교육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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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다케다 세이코 교육장은 "어제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대표단의 활동을 보았다. 3일전에 한국 학생들에게 편지도 받았다. 올바른 역사교과서 채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과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는 왜곡교과서 반대를 표명하는 요청서를, 후로사와 지요카츠 씨는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다케다 세이코 교육과장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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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우시마치 교육위원회 후지 히토시 교육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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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오오츠마치 교육위원회에서 나와 호시코(여성운동가)씨와 니시하라마치의 타지마 케이지 의원과의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다. 일행은 고우시마치 교육위원회로 향했다. 승용차 창밖으로 저층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에 빨래가 펄럭인 곳이 많았다.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는 샤시를 하는데 비해 이곳 아파트는 샤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
3시 5분 고우시마치 교육위원회 2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민단 최 사무국장의 통역으로 진행된 이날 환담에서 홍순승 부단장은 "우리국민들이 36년간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며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등 문제가 되고 있는 후소샤 역사 왜곡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후지이 히토시 교육장은 "충청남도와 교류한지 벌써 22년이 됐다"며 "8월말 채택을 위해 교육위원들이 연구 작업에 들어갔고 선택은 신중히 검토 하겠다"고 밝혔다.
최상철 민단 사무국장과 미아가와 즈네노리 목사는 왜곡교과서 반대를 표명하는 요청서를, 후로사와 지요카츠 씨는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참고하라며 후지이 히토시 교육장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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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소샤 왜곡 역사교과서 등을 전시한 구마모토시 교육센터에 들린 대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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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 고우시마치를 떠나 교과서 전시회장인 구마모토시 교육센터(지난 6월 17일부터 30일까지 전시)에 도착하니 오후4시 30분이었다. 대표단 일행은 한일합방을 정당화하는 등의 내용을 적시한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직접 확인한 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곳 전시장에서는 왜곡교과서와 관련해 구마모토현 지역방송과 홍순승 부단장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1시간가량 역사 왜곡 교과서 내용을 살펴본 일행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스이젠시 호텔로 향했다. KKT 지역방송 6시뉴스에 홍순승 부단장의 인터뷰가 방송됐다.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내일 일정을 위해 바로 잠자리에 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