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구멍이 불심 솟는 옹달샘이어라/김윤수기자
▲ 가지런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구름처럼 걸려 있는 소운당(小雲堂)을 만나게 된다.
산사를 찾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자리한 산사에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에 있는, 일명 돌구멍 절로 알려진 중암암(中巖庵)이 그런 산사 중의 하나다.
돌구멍을 통하여 절을 드나들게 되어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와 보일러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돌구멍 구멍들이 이런 저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 제격에 딱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이런 절, 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는 절들은 그 규모가 어찌 되었건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산사 찾는 맛을 더해 준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말사다. 은해사 일주문을 통하여 4Km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중암암은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중암암'이라는 이름보다는 한문을 풀어 말하는, 일명 돌구멍절로 더 알려진 조그만 암자다.
▲ 돌구멍절에서 제일 큰 구멍인 이 구멍을 지나야 법당엘 갈 수 있다. 곳곳에 있는 돌구멍엔 보일러실도 있고 해우소도 있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창고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팔공산은 그 전체가 '불국토(佛國土)'라 할 만큼 많은 절들이 들어서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하나의 산에 두 개의 대찰(본사)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팔공산과 그 주변은 온통 불색(佛色)이다. 대구 쪽으로 동화사와 파계사가 있고 은해사가 영천에 있다. 동화사와 은해사는 힘들지 않게 하루에 산행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교구본사인 대찰이다.
그리고 대구 하면 언뜻 떠오르는 갓바위도 팔공산에 있으니 팔공산을 불국토라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닐 듯하다. 하기야 대구 사람들의 불심을 알면 당연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듯싶다.
팔공산은 영천, 신령, 하양, 인동, 칠곡 등의 여덟 고을에 걸친 공공의 산이라는 뜻으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과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의 공산 싸움에서 고려 장수 신승검,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여덟 장군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동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심지대사가 영심으로부터 전수하여 봉안하여 왔던 8간자를 고려 예종이 궁중에서 친견하실 때 서기가 뿜어 나와 팔간자의 팔자를 공산 위에 씌워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는 물론 현재에도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 돌구멍을 들어서면 숨어있다 나타난 듯 법당이 보인다. 허리높이의 담 너머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울창하고 휘휘 휘어진 가지가 한껏 운치를 자아내는 멋진 소나무로 유명한 은해사 진입로를 지나 중암암으로 오르는 길은 한적하다.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저수지가 나오고 그 저수지를 지나게 되면 암자를 안내하는 팻말이 있다. 은해사는 8개의 산내 암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중 백흥암 같은 경우는 비구니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는 선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일반의 절들과는 달리 경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곳이다.
갈림길의 유혹을 떨구고 곧장 산을 향해 걷다보면 높이가 20m쯤은 되어 보이는 폭포가 나온다. 한여름엔 시원한 물줄기로 산사 찾는 이의 더위와 갈증을 달래 주었을 듯싶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한 듯 폭포는 하얀 얼음과 울퉁불퉁한 고드름으로 볼륨감 있는 순백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폭포를 지나 한 두 번쯤 급하게 휘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보인다. 일정한 크기로 놓여진 돌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 걸친 흰 구름처럼 산 중턱에 걸친 소운당(小雲堂)이 보인다.
소운당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바위 길을 따르다 보면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돌구멍이 보인다. 어둡고 캄캄한 석굴이 아니고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대문 같은 돌구멍이다.
▲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도 까치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감추었다 내놓은 듯 작은 암자가 벼랑에 서 있다. 이 법당엔 돌구멍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돌구멍 절이란 이름에 걸맞게 암자의 규모도 앙증맞도록 작다. 둥글둥글해 순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절벽 위에 겨우 자리를 틀었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넓이로 법당 앞에 길이 있고 길에는 허리 높이로 담이 쌓여 있다. 장난이라도 만에 하나 담 너머로 몸이 밀리게 되면 그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듯하다. 그렇게 가파르고 높은 벼랑 위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이다.
대웅전 전방 우측에 있는 사무실을 겸한 작은 건물 또한 아슬아슬하게 벼랑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암암은 법당만 돌구멍을 통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화장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얼마나 깊기에 국내에서 제일 깊다는 말을 쓰는지 궁금했지만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 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 절 위쪽으로 올라가면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어야만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의 규모 등으로 자랑 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 스님들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 위 바위 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다.
중암암의 또 다른 특색은 여느 절들과는 달리 영가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만한 절에서는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나 49재 등을 지낸다. 그런데 중암암에서는 영가(죽은이)를 위한 재는 일체 없다고 하니 별다른 뭔가가 있는 듯하다.
▲ 이 틈새로 들어서면 극락굴로 들어서게 된다. 들어가 꺾어지고 두 번을 더 꺾으면 이 빛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빛은 환희의 빛이며 극락의 빛이었다.
중암암은 그 들어서는 입구가 돌구멍이라서 돌구멍절이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이 돌구멍이다. 그리고 그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알 듯 모를 듯한 환희와 성취감이 솟는다.
소운당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 중암암 부근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가 있다고 되어 있다. 안내판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계단을 딛고 올라 산 쪽으로 올라서면 안내판에 있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를 볼 수 있다.
중암암은 두 번째 찾아가는 길이다. 2년여 전쯤 한여름에 그곳을 찾았던 적이 있다.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가니 때가 아닌데도 밥상을 차려준다. 칠십은 훨씬 넘은 듯한 노보살님께서 "이 꼭대기까지 오르느라 얼마나 시장했느냐"며 장국에 산나물 무침으로 때아닌 밥상을 차려주어 정말 맛나게 먹은 적이 있었다.
그 할머니가 계시면 그때 못 드린 감사의 표현으로 큰절이라도 드린다는 생각으로 찾았건만 그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중암암 경내를 둘러보고 안내 표지판에 있는 장군수와 건들바위 그리고 만년송을 찾으려니 영 찾을 수가 없다.
▲ 작은 힘에도 흔들리는 건들바위. 이 바위 옆 돌구멍을 지나면 만년송을 볼 수 있다.
할 수 없이 요사채가 있는 곳으로 가 스님에게 여쭈니,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스님께서도 아직 모르고 계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 계신 신도들께 여쭈니 한 보살님이 모든 곳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한다.
의성에서 오셨다는 그 보살님, 3남매 모두를 출가시키고 고향인 의성으로 가셔서 노후를 대비하고 계신 듯한 그 보살님의 안내로 3층 석탑은 물론 세 곳 모두를 보게 되고 카메라에 담게 되었다. 그 보살님은 안내 표지판에 소개되지 않은 아주 특별한 곳을 선물하듯 안내 해 주셨다.
다름 아닌 돌구멍절에서는 꼭 봐야 할 곳이라며 극락굴을 안내해 주신 것이다. 법당 위쪽에 있는 3층 석탑 옆으로 들어서는 극락굴은 누군가의 안내가 없으면 찾기도 힘들고, 설사 찾는다 하여도 선뜻 들어서기가 힘든 곳일 듯하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로 들어가 2∼3m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굴이라기보다는 틈새라고 해야 할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 틈새로 들어서 몇 걸음 가다보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틈새가 나오고 그 틈새를 따라 다시 꺾어지면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자 형태의 굴(틈새)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목에 건 휴대폰이 걸려 그 휴대폰을 빼야 할 정도로 틈새에는 에누리가 없다. 등과 뱃가죽이 붙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몸을 축소시켜야 하고 중간쯤에는 몸을 낮추어야 빠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서 생명의 모짐을 볼 수 있다.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동글동글한 바위의 곡선에서 아름다운 여체의 미가 보인다.
욕심으로 채웠건 허영심으로 채웠건 몸집이 부풀려진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 굴을 빠져 나오며 느끼는 쾌감은, 말 그대로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해방감, 어둠에서 찾게 되는 광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극락굴을 한 번 지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굴을 안내해 주시던 보살께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앉는 컴컴한 굴 전체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로 들어서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연송 하더니 어디쯤에선 몸을 낮추라고 알려주신다.
중암암을 가면 이 극락굴을 꼭 지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굴을 안내 해준 보살님의 말에 따르면, 조강지처가 아닌 소위 세컨드는 이 극락굴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극락굴을 나와 조금 더 올라 능선의 정상에 있는 건들바위는 둥그런 사발을 엎어 높은 듯한 형상이다. 어느날 밤 바위에서 우뢰 소리가 나 주지 스님이 놀라서 달려 가보니 바위가 암자를 덮칠 듯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 스님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니 바위는 움직임을 멈추고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옮겨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바위다.
이 건들바위 옆에도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구멍이 있으니 이 구멍을 지나게 되면 만년송을 만나게 된다.
▲ 김유신장군이 수련을 하며 마셨다는 장군수는 암벽사이에서 흘러 고이는 석간수였다.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바위들. 잘록한 몸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 몸처럼 둥글둥글하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 소나무가 있으니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흙 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모짐을 헤치며 생존하였기에 더없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만년송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야호∼!"하고 함성 한번 지르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경내라는 생각과 혹시 잠들어 있을 산짐승이 놀랄까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능선을 넘어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장군수를 찾을 수 있다. 깎아 세운 듯한, 높이가 두 길이 넘는 암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이는 석간수가 장군수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17세 화랑이었던 시절 이곳에서 수련하며 마셨다는 전설이 있는 약수이다.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암암 뒤쪽, 만년송 조금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련을 하며 기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
▲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돌구멍절 해우소다.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에야 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깊이가 깊다고 한다.
기에 대하여 문외한이지만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마음을 모으게 되며 저절로 산기도 천기도 내려질 듯한 공간이다. 둥그런 배열로 늘어선 길쭉한 형태의 입석들은 마치 장군을 외호하는 호위병 같다. 툭 터진 전망은 호연지기를 키우고, 일상에서 생기는 답답함을 툭 털기에 딱 좋을 듯하다.
돌구멍 절!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구멍 구멍에선 옹달샘처럼 불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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