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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인 *****
{ 1 } 매달 향기로 말을 거는 꽃
1월은 수선화,
2월은 매화,
3월은 천리향,
4월은 라일락,
5월은 아카시아꽃,
6월은 태산목,
7월은 차자꽃,
8월은 백합,
9월은 코스모스,
10월은 국화,
11월은 팔손이꽃,
12월은 동백꽃.
{ 2 } 꽃의 길
꽃의 길은
아름답지만
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오던 길로
떠나야 하는 꽃
사랑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줄 아는 꽃
만남과 이별의 때를
참으로 분명히 아는
꽃의 고요
꽃의 지혜
그의 길은
멀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 3 } 봄비에게
봄비, 꽃비, 초록비
노래로 내리는 비
우산도 쓰지 않고
너를 보러 나왔는데
그렇게 살짝 나를 비켜가면
어떻게 하니?
그렇게 가만가만 속삭이면
어떻게 알아듣니?
늘 그리운 어릴 적 친구처럼
얘, 나는 너를 좋아한단다
조금씩 욕심이 쌓여
딱딱하고 삐딱해진
내 마음을
오늘은 더욱 보드랍게 적셔주렴
마음 설레며
감동할 줄 모르고
화난 듯 웃지 않는
심각한 사람들도
살짝 간질여 웃겨주렴
조금씩 내리지만
깊은 말 하는 너를
나는 조금씩 닮고 싶단다
얘, 나도 너처럼
많은 이를 적시는
고요한 노래가 되고 싶단다.
{ 4 } 가슴에 별이 되는 시
밤길을 걸어오는데 주위가 하도 밝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름달이 떠 있습니다
둥근 달을 바라보는 마음엔 둥근 기쁨이 뜹니다
바라보면 와서 안기는 달이여,
고요해서 좋은 달이여,
달님 옆의 별들도 얼마나 정다운지!
은하계 내부의 성운에 있는 분자 구름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합니다
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별 냄새가 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한 편의 깊고 아름다운 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습니다
시인은 사라져도 시는 남아서
우리의 가슴속에 별이 되어 뜨겠지요.
{ 5 } 나무들의 소속
사철나무 : 화살나뭇과
등나무 : 콩과
향나무 : 측백나뭇과
태산목 : 목련과
벚나무 : 장미과
호랑가시나무 : 감탕나뭇과
능소화 : 능소화과
종려나무 : 야자나뭇과
동백나무 : 차나뭇과
꽃과 별과 새들처럼 나무들도 소속을 알고
제 이름을 불러주면 더욱 기뻐하겠지요,
[ 6 ] 평상심
늘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단촐하게, 간소하게!
좋은 일에도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성실하고 겸손하게 웃으며 길을 갈 것
한결같이 언제 어디서나
늘 푸른 평상심을 지니고 살자.
[ 7 ] 아픈 날의 일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과 이마를 다친 어느 날 밤
아프다 아프다 혼자 외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편할 때는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고마움
한꺼번에 밀려와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자기가 직접 아파야만 남의 아픔 이해하고
마음도 넓어진다던 그대의 말을 기억하면서
울면서도 웃었던 순간 아파도 외로워하진 않으리라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지요
상처를 어루만지는 나의 손이 조금은 떨렸을 뿐
내 마음엔 오랜만에 환한 꽃등 하나 밝혀졌습니다.
[ 8 ] 기차를 타면
부산에 살고 있는 나는 경부선 열차를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손님들을 목적지까지 모시고 갈 기관사 ㅇㅇㅇ
입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목소리도, "여러분, 우리 기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잊으
신 물건이 없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는 안내방송도 정겹게 들
립니다.
'우리' 라는 단어의 여운이 문득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
순간을 사랑합니다.
기차를 타면 우리 나라의 사계절을 뚜렷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습
니다.
봄에느 진달래와 철쭉과 복사꽃이 가득한 산과 들을 바라보며 분홍빛
마음이 되고, 여름에는 하얗게 피어나는 아카시아와 태산목, 탱자꽃과
밤꽃 향기를 먼 데서도 가까이 차창 안으로 불러들입이다. 가을에는 불
타는 단풍 숲과 벼이삭이 물결치는 황금빛 들녘에 황홀해하고, 겨울에
는 눈 덮인 산천과 침묵의 강을 바라보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난 누가 뭐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가 제일 좋아."
혼자서 중얼거리며 창 밖을 보면 선과 들이 "그래 그래."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만 같습니다.
기차를 타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울리는 휴대 전화가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애써 참으며 눈을 감고 혼자만의 '생각 여행' 을 떠나보
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은혜로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짧은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반성하는 시
간도 갖습니다. 한참 잊고 있던 옛일들이 문득 생각나 감회에 젖어보기
도 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는 지혜로운 판
관이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
우며 메모를 하고, 그 동안 마음 깊이 담아두기만 했던 시상을 불러내
어 종이에 옮겨 적는 여유도 가져봅니다.
기차를 타면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
고 배울 수 있어 좋습니다.
처음엔 옆자리의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가 어색하고 힘들었으나,
요즘은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늘 내가 먼저 자연스레 말을 건네곤 합
니다. "사실은 어려워서 어쩌나 했는데, 먼저 말을 건네시니 편해요. 커
피 한 잔 드시겠어요?" 하는 이웃의 모습은 내가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
럼 정답게 여겨집니다.
자기가 지금껏 성장해온 과정, 가족관계, 여러 종류의 고민과 갈등을
비밀스런 부분까지도 스스럼없이 나에게 털어놓으며 기도를 청하는 이
들의 솔직하고 순박한 모습에서 감동과 자극을 받습이다. 때로는 다른
좌석의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기차 안에 있는 환자를 위해 기도를 부탁
할 적에는, 내가 아직 기도의 전문가가 아닌 사실을 못내 부끄러워하며
가만히 손만 잡아주고 옵니다.
서로 이름과 주소를 주고받으며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경우도 없진
않으나, 대부분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니 서로에게 편안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차에서 내릴 적에 나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에 산다니까 "저는 평소에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좋아해서 그분께 편지까지 쓴 일도 있답니다." 하며 설마 당사자인
줄은 모른 채 내 앞에서 내 얘기를 들려주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기차를 타면 욕심을 버린 작은 순례자의 마음이 됩니다.
"안녕히 가세요!" "잘 다녀오세요!" 하는 인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 곳. 우리으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임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곳.
기적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기차와 함께 내 마음도 끝없이 달려가는
사간.
여행이 주는 한 줌의 쓸쓸함을 즐겁게 맛들이는 시간.
작은 순례자인 나는 내 마음을 향해 나직이 속삭여봅니다.
'마음이여, 좀더 단순하고 가벼워져라.'
'마음이여, 좀더 겸손하고 자유로워져라.'
'인생이라는 기차 안에서 완전히 내리기 전에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
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요. 사랑을 하고 싶으
면 기차를 타라고 나는 말해야겠어요. 혼자만의 기차 여행도 아름답지
만, 가까운 벗이 옆에 있는 여정 또한 즐거우리라.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 길을 가요.
- 나의 시 < 기차를 타요 >
{ 9 } 앞치마를 입으세요
삶이 지루하거든
앞치마를 입으세요
꽃밭에 물을 줄 땐
꽃무니의 잎치마를
부엌에서 일을 할 땐
줄무니의 앞치마를
청소하고 빨래할 땐
물방을 무니의 앞치마를
입어보세요
흙 냄새 비누 냄새 반찬 냄새
그대의 땀 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그대의 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금 더 기쁘게 움직여보라고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끊임없이 꿈을 꾸며
희망을 재촉하는
친구가 될 거예요
때로는 하늘과 구름도
담아줄거예요.
{ 10 } 합창을 할 때처럼
합창을 할 때처럼
오늘도 저에게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삶의 무대 위에 다시 한번
저를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합창을 할 때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절제하는 기쁨으로
매일을 살게 해주십시오
합창을 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소리와 행동에 귀기울이는
사랑의 인내를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합창을 할 때처럼
틈새의 침묵을 맛들이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겸손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의 길을 걷게 해주십시오.
{ 11 } 편지 쓰기
네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발견하고 사랑하며
편지를 쓰는 일은
목숨의 한 조각을 떼어주는 행위
글씨마다 혼을 담아
멀리 띄워보내면
받는 이의 웃음소리 가까이 들려오네
바쁜 세상에 숨차게 쫓겨 살며
무관심의 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때로는 조용한 편지를 써야 하리
사계의 바람과 햇빛을 가득히 담아
마음에 개켜둔 이야기를 꺼내
아주 짧게라도 편지를 써야 하리
살아 있는 동안은.
{ 12 } 넓게 다 아름답게
-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남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자기 실속만 차리려
는 경향에 빠져드는 자신을 볼 때 얼른 '넓게 더 아름답게' 하고 속
으로 외칩니다.
- 늘 함께 지내는 이의 행동이 못마땅하고 그를 향한 이해의 폭이 자꾸
만 좁아지려 할 때, '넓게 더 아름답게!' 하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 세계에서 일어나는 큰 일들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오로
지 자신의 일에만 골몰해 있을 때, '넓게 더 아름답게!' 하고 잠든 의
식을 깨웁니다.
- 사랑과 기도의 범위가 너무 좁고 선택적이고 이기적이라 여겨질 때,
'넓게 더 아름답게!' 를 조용히 외칩니다.
- 남의 호의를 무시하고 의심하는 옹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넓게 더 아름답게!' 를 외웁니다.
-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편견
과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넓게 더 아름답게!' 를 반복합니다.
- 남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가 안 돼 속을 끓일 때도, '넓
게 더 아름답게!' 를 읊조립니다.
- 모든 일에 '넓게 더 아름답게!' 를 기도처럼 끊임없이 외우고 실천하
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삶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야겠지요?
{ 13 } 해인글방의 글쓰기
*첫째 : 글감 모아두기
글의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두는 자기만의 바구니를 만듭니다.
노트, 일기장, 메모장 등에 자연을 관찰한 것,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
는 느낌, 특별한 일, 책-영화-연극에서 얻은 감동, 기도나 명상에서
건져올린 내용 등등 무엇이라도 좋으니 부지런히 적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쓰면 좋습니다.
*둘째 : 방향 설정
쓰고 싶은 글의 제목을 일단 정한 뒤 내용 전개를 위한 구성을 하고
계속 궁리하며 깊이 익혀가는 작업을 합니다. 너무 잘 쓰려고 욕심을 부
리거나 다른 이의 흉내를 내려 하지 말고 자기만의 진실과 개성이 잘 드
러나도록 방향을 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셋째 : 초고 만들기
생각한 것들을 글로 옮겨 적을 때 유의할 점 몇 가지,
- 본인이 잘 모르거나 뜻이 분명치 않은 단어라고 여겨지면 꼭 확인
해보고 씁니다.
- 중복된 표현, 꼭 안 써도 될 외래어를 무심결에 썼는지 살펴봅니다.
- 문장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제대로 서용하고 있는지 살펴
봅니다.
- 맞춤법, 띄어쓰기, 앞뒤 문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는지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정도 읽어보길 권유합니다.
- 인용을 할 때는 그 자리에 꼭 필요한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제대로
인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할 적엔 반드
출처를 밝히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 시를 빚을 때는 너무 설명적이 되지 않고 간결하게 절제된 상징 언
어를 쓸 수 있도록 한껏 노력해야 합니다.
- 글에서 타인에 대한 언급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넷째 : 중간 점검
초고를 만들어 잠시 다른 곳에 두고 잊고 있다가 다시 꺼내서 되풀
이해 읽다 보면 고쳐야 할 부분이 새롭게 눈에 띄곤 합니다. 어느 글이
든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손질해야 설익은 것을 최대한 줄일 수가 있
습니다.
*다섯째 : 마무리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면 자기가 쓴 글의 독자가 되어 천천히 소리를
내어 읽어봅니다. 객관성을 지니고 냉정하게 관찰하면 내용상, 표현상
의 부족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으므로 마지막 손질을 좀더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는 확신을 들면 비로소 마무
리를 합니다.
{ 14 } 나를 키우는 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15 } 어떤 고백
싫어
하고 네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네가 싫다
미워
하고 네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네가 밉다
절대로 용서 못해
하고 누군가에게
네가 말하는 순간은
나도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를 아프고
병들게 하는 그런 말
습관적으로 자주
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아프고 병들어 보니
제일 후회되는 그런 말
우리 다신 하지 말자
고운 말만 히는데도
시간이 모자라잖니
화가 나도 이왕이면
고운 말로 사랑하는 법을
우리 다시 배우자.
{ 16 } 말을 위한 기도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허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 17 } 고운 말 연습하기
우리의 일상 언어는 습관에 의해서 형성되기에 아예 처음부터
잘 길들이고 가꾸어가지 않으면 바로잡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속으로 미리 연습하고 말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도 실수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상처 대신 사랑을 전하는 언어의 주
인이 되고자 평소에 내가 실습하는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 어떤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
러셨어요?" "오, 그랬군요!" "세상에!" "저런!" 하고 이따금 맞장구치
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 자신의 대한 평판 중 칭찬을 들을 땐, "감사합니다. 다 염려해주신 덕
분이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하면 되고, 충고하는
말을 들을 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유의할게요." "하기 어려운 말
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대해 "신
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다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다.
- 누가 틀린 정보를 계속 고집할 적에는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그게
아니라니까요." 라고 말하기보다는, "혹시 착각하신 것 아닐까요?"
"제 생각엔 그게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도로 겸허하게 표현
하는 게 대화에 도움이 됩니다.
- 어느 특정한 사람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에게는 그 대상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먹이며 "ㅇㅇ 때문에 어렵지요?" 라고 하기보다
는 그냥 "요즘 매무 힘드시지요?" "덕 쌓을 일이 많으시지요?" 하고
말을 건네거나, 위로의 뜻을 전할 때도 "신경 끄세요." 라는 말보다는
"안심하세요." "마음 놓으세요." "잘 되도록 기도할게요." 라고 하면
한결 부드럽지 않을까요?
- 자리에 없는 이를 험담하는 것이 듣기 거북할 때는, "우리가 못마땅해
하는 그 점이 그 사람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 사람에겐 또 다른 좋
은 면이 있잖아요." "우리도 부족한 사람이니 이젠 그만하고 다른 이
야기합시다." 하고 적당히 화제를 돌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예기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 화가 치밀 때는
"환장한다." "죽겠다." "돌아가시겠다." "기절하겠다." "화딱지 난
다." "신경질 난다." "열 받는다." "혈압 오른다." "뿔따구 난다." 등
등의 말들은 삼가고, "더 이상 못 참겠네요." "큰일이에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너무 심하단 말이에요." 라는 표현으로 푸념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 갑작스런 사별의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이들에게는 무조건 '주님의
뜻' 운운하며 신앙적인 설교를 앞세우기보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
네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 이런 일이---." 등의 말로 슬
픈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서 말을 하거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
지 않으면 그냥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손을 잡아주는 위로의 표현을
하는 게 더 낫습니다.
- 다른 이의 인격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점잖지 못한 말은 삼갑니다.
'제까짓게', '그까짓게', '구제불능' 등의 표현이나 "웃기네(웃기고 앉
았네, 웃기고 자빠졌네)." "김새네." "두말하면 잔소리지." "뿅갔다."
"똑소리나네." "방방 뜨네." "뻔할 뻔자야." "쪽 팔리네." "별꼴이 반
쪽이야." "미치고 팔짝 뛰겠다." 라는 말들은무심결에라도 입에 담지
않으며, "나는 해피하다." "베스트를 다했다." "두 가지 입장이 짬뽕
이 되었다." 식으로 국적 없이 혼합된 말들을 삼가려고 애씁니다.
- 친한 사이라도 외모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는 인
사는 실수하기 쉬우니 자제합니다. 상대가 건강하고 좋아보일 적엔
"모습이 참 좋아 보이시네요!", 안 좋아 보일 적에는 "무슨 근심 이라
도 있으신가요?", "매우 피곤해 보이시네요." 등의 표현을 쓰도록 합
니다.
-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싫다' '좋다' 라는 표현을 성급히 쓰지 않도
록 하고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든가 하는 비교급의 말, 단정적인 말
들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유의합니다. 싫은 음식에 대해서도 "이건
맛이 없고." "딱 질색이고." 등의 표현을 삼가고, "전 웬일인지 이
음식은 썩 즐기지 않는 편이라서요." 정도로 말을 하면 어떨까요?
-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한꺼번에 퍼붓지 않도록
하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곧바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정도로 웃어 넘깁니다.
-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 이라느니 "내가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등 자신이 수고한 일에 대해 은근히 광고하거나 습관적인 푸
념으로 선행의 향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합니다.
- 겸양의 뜻으로라도 자신을 가리킬 땐 꼭 '내가' 대신 '제가'로 말하고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한결같이 존칭어를 쓰는 연습을 합
니다. 그리고 학생이나 어린이의 이름을 부를 적에도 '야' '자'라고 하
지 말고 "ㅇㅇ이?"하며 끝을 올려 명랑하게 이름을 불러줍니다.
- 하루의 일이 잘 안 풀려 속상할 적에도 "재수 없다."는 말보다는 "오
늘은 좀 이상한 날이네요." 정도로 표현하고, 기분이 나쁠 때에도 "기
분이 더럽다." "지겨워." 등의 말보다는 "마음이 안 좋아요." "좀 언
짢은 느낌이에요."로 자제해서 말하려고 애씁니다.
- 주의사항을 적은 표지판이나 메모를 적어두는 알림판에도 주위의 반
응을 미리 물어보고 결정하는 섬세한 정성이 필요합니다.예를 들면
'출입 절대 엄금'이라는 말보다는 '출입을 삼가해주세요' '출입 제
한'은 어떠냐고 제시해봅니다. 행사장에 '꽃다발 사절'보다는 '꽃다
발은 받지 않습니다.' '꽃은 마음으로 대신해주세요.' 좀더 부드
럽게 여겨지고 '이곳의 책은 가져가지 마십시오'보다는 '이곳의 책
은 여기서만 봅니다.'가 거부감을 덜 갖게 합니다.
우리가 잘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살천해
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이 일상의 언어 생활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에 나는 "주님, 오늘 하루 저의 말이 기쁨과 평화의 선물이 되게 해주십
시오."라고 기도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자리에 들 적엔 " 이웃에게
평화를 전한 말들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고 상처를 준 말들에 대해서
는 용서를 청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고운 말 수첩을 만들
어 매일매일 고운 말을 찾아 적고, 고운 말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진
정 고운 사람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오늘은 '고운 말 쓰기' 라는 글자로 내가 만든 5행시를 수첩에 적어봅
니다.
고 - 운말을 골라써야 고상한 사람되지요
운 - 치있는 우리말을 꾸준히 써가노라면
말 - 의향기 널리퍼져 세상은 꽃밭되지요
쓰 - 지말죠 속어비어 극단적 부정적인 말
기 - 품있는 사랑의말 다함께 갈고닦아요!
{ 18 } 나의 말을 잘 들어준 이의 모습에 감동 받다
항상 잘 듣는 이의 모습은 항상 아름답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제가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요?'
저의 사소한 문제들도 유심히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일처럼 염려하는 당신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해결의 길에선 아직 멀리 있어도
제 말을 잘 들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서
저를 들어주는 당신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헸습니다
중간에 끼여들고 싶을 적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저의 말을 하나도 가로막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 당신의 인내에 감동하면서
저도 그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판단은 보류하고 먼저 들어주는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배웠습니다
잘 듣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기다리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편견을 버린 자유임을 배웠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을 믾이 하고
주제 넘게 남을 가르치려고 한
저의 잘못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소리로서의 말뿐 아니라
저의 사소한 행동과 상황에도
민감하게 귀기울이며
제가 해야 할 바를 넌지시 일러주는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잘 들어주는 이가 없어 외로운 이들에게
저도 당신처럼 정성스런
사랑의 벗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듯 선한 갈망을 갖게 해주신 당신에게
늘 새롭게 감사드립니다.
{ 19 } 지혜를 찾는 기쁨
지혜이신 예수님
매순간 저에겐 지혜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지혜의 빛을 받아야만 이름답고 튼튼합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당신의 지혜를 구하면서도
그 길에서 멀리 있어 목마를 적이 많았습니다
당신처럼 아낌없이 사랑하고 사랑하면
저도 조금씩 지혜로워질까요?
어서 오시어 어리석은 저를
지혜의 물로 세례 받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볼 것만 보고 들을 것만 듣고
말할 것만 말하고 행할 것만 행하여
떳떳하게 맑아진 기쁨을 노래할 수 있도록.
{ 20 } 사랑의 빈방
손님 아닌 주인으로 당신을 맞을 마음의 방에
어서 불을 켜게 하소서
돌처럼 딱딱한 마음 대신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욕심으로 번쩍이는 어른 옷 대신
티없이 천진한 아기 옷을 입고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주의 말은 찬미의 말로 바뀌고
불평의 말은 감사의 말로 바뀌게 하소서
절망은 희망으로 일어서고
분열은 일치와 평화의 옷을 입으며
하찮고 진부하게 느껴지던 일상사가
아름답고 새로운 노래로 피어나게 하소서---.
{ 21 }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걈손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예민하게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 22 } 저를 이기게 하소서
매일 매일의 삶의 길에서
겸손으로 교만을,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게 하소서
너그러움으로 옹졸함을
자신을 내어줌으로 이기심을 이기게 하소서.
{ 23 } 짧은 말
진실이 담긴 짧은 말,
깊은 말로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
그 동안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너무 많은 말로 뜻없이 기도했습니다
이젠 정말 기도도 짧게하고,
시도 짧게 쓰고,
말은 적게 하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 24 } 잠을 자는 동안에도---
잠을 자는 동안에도 당신을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늘 사랑이 낳아주는 맑고 순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내가 어제보다는 좀더 순해진 것 같아.
좀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 라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할 수 있기를!
선한 갈망, 고운 갈망을 심어주신 나의 님이시여!
오늘도 찬미 받으소서!
{ 25 } 순례자의 노래
11월은 진정 순례자의 달입니다. 여행, 나그네, 이별, 죽음, 쓸쓸함, 낙
엽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달.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 16칸의 길고 긴 기차에는 승객들의
서로 다른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모습도 담겨 있었지요. 기차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탔을 땐 조용함을 그리워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없
을 땐 사람들을 다시 그리워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에게도 어떤 장소에
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이 갈 길를 가시는 주님의 모습, 저도 많은 이
들을 골고루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머물 때
는 머무는 분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가을 바람이 부니 마음에도 삶에 대한 고운 갈망의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옵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 쓰는 부지런한 순례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루하루 해야 할 평범한 일과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삶은 견디는 것, 승리는 견디는 이의
것임을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면---.' 오랜만
에 올라가본 묘지엔 물든 나뭇잎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죽음 준비 잘하세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더 열심히 살아요---." 무
덤 속에 누워 계신 우리 수녀님들이 저에게 나직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
습니다.
*
무얼 달라고 조르더라도 사랑스럽고 애교 있게 조르는 이에겐 작은
선물 하나라도 더 주게 됩니다. 무뚝뚝하고 시무룩하게 멀찌감치서 지
켜보기보다는 먼저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네고 밉지 않게 독촉하는 것이
더 정답고 반가운 것임을,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
시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주님께 좀더 애교 있게
조르는 사랑스러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문득 생각해보았지요.
*
제가 늘 마음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집은 당신뿐입니다. 주님
오늘도 문을 열어주십시오. 평화의 길이신 주님, 저도 당신을 닮은 평
화의 길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 길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기를 원합
니다. 다만 하나의 밝은 길이 되기 위한 어둠의 시간들을 잘 견디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늘 맑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이 깨어 있어야 하는지! 늘 자유롭
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욕심을 줄이고 절제해야 하는지! 교만이 숨
어 있는 율법보다는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겸손이 담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
주님, 오늘 하루도 새롭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련생이게 하소
서. 약간은 떨리는 수줍음, 순수한 눈빛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일을, 기
도하는 일을 끝까지 계속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십시오. 자신은 위선
적인 행동을 잘도 하면서 다른 이의 위선을 못 견뎌 하는 위선에 빠지
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저의 위선이 느껴질 때 얼른 마음을 갈고 닦
으며 기도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지니게 해주십시오.
*
먹구름 속에서도 흰구름 속에서도 당신을 보고 듣습니다. 요즘은 유
난히 구름이 많은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구름, 이웃의 마음에 드는 구름이고 싶습니다.
*
제 삶의 길에서 이미 너무 많은 기적을 이루어주셨기에 다른 기적을
달리 청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하루하루가 은총이고 기적임을 살
아갈수록 깊이 깨닫습니다.
*
진정 사랑하면 어머니가 되듯이 어린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구
요? 눈은 맑고, 마음은 밝은 어린이, 의심 없이 다른 이를 신뢰하는 어
린이, 단순하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어린이가 되고 싶습니다. 사랑의 길
에서 복잡한 것은 금물. 단순한 것, 순수한 것, 맑은 것, 천진한 것, 기
쁜 것, 의심이 많지 않고, 궁리가 많지 않고 전적으로 믿고 바라는 신뢰
가 있는 것, 그래야만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즉흥적으로 헛된 약속을 하고 감당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약속은, 특히 말로 하는 약속은 가장 사려 깊고도 신중
하게 할 것, 아주 작은 약속이라도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
임지는 성실함을 지녀야겠습니다.
*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오늘 미사 중 마음의 샘에 고여오던 영
적 기쁨을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대숲에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소나무숲의 초록 바람 같기도 한 그러한 기쁨, 예수와 성령께서 주시는
참 아름다운 기쁨---
*
저녁에 종종 흙 냄새 맡으며 잡초 뽑는 일을 하면 즐겁습니다. 제 마
음의 밭도 그러할 테지요. 그날 그날 잘못된 것을 제때에 뽑아내면 덜
힘들겠지만, 무척 오랜만에 한꺼번에 뽑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
지! 현재에 대한 충실함이 가장 중요함을 풀을 뽑으면서 다시 생각합
니다.
*
요즘은 너무 부족하고 머음에 안 드는 저를 받아들이고 견디며 또 하
루를 시작하는 것, 이것이 저의 봉헌 예물입니다. 먼저 제 자신과 화해
를 해야 선행도 위선이 되지 않을테지요.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것
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늘 연습이 필요합니다.
*
"깊은 우정이란 각자의 선택 받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각자가
소중함을 서로 격려하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나를 사로잡는 사실 하
나는 우리가 감사하기로 결정할 때마다 새롭게 감사해야 할 것을 발견
하는 일이 더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 또한 감
사를 더 불러일으킨다." 라고 말했던 헨리 나웬. 그의 책들은 읽을 때마
다 '더 아름답게 살고 싶은' 열망의 불꽃을 지펴주고 감동을 줍니다.
*
하늘이 흐렸다, 갰다,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람이 불었다, 멈
추었다 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느끼면서 우리 집 오래된 오동나무, 동
백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으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생각이란 것도 오랜 시간 속에 잘 익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오
래된 나무들 아래서 다시 생각했지요.
*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꽃밭의 꽃들도 빗소리를 듣겠지요? 아니, 빗
물을 마시며 흠뻑 취하겠지요? 저도 당신 사랑의 비에 흠뻑 취하고 싶
습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몇 번이고 자문하면서---.
{ 26 } 잘 사랑한다는 것은---
오늘도 잘 들으라고 저를 초대하시는 주님
좀 더 잘 듣는 연습을 하겠다고
매일 새롭게 결심하지만
자주 실수하고 실천이 어려운 저에게
부디 잘 듣는 겸손함과 참을성을 주십시오
주님과 이웃을
자연과 사물을
자신이 따라야 할 마음의 소리를
예민하게 들으며 깨어 있는 사람
그래서 더욱 사랑을 넓혀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 27 } 12월의 촛불 기도
향기 나는 소나무를 엮어
둥근 관을 만들고
4개의 초를 준비하는 12월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함께 촛불을 밝혀야지요?
그리운 벗님
해마다 12월 한 달은 4주 동안
4개의 촛불을 차례로 켜고,
날마다 새롭게 기다림을 배우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 기도합니다.
첫번째는 감사의 촛불을 켭니다
올 한 해 동안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아직 이렇게 살아 있음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억울했던 일, 노여웠던 일들을
힘들었지만 모두 받아들이고 모두 견뎌왔음을
그리고 이젠 모든 것을 오히려 '유익한 체험' 으로
다시 알아듣게 됨을 감사드리면서
촛불 속에 환히 웃는 저를 봅니다
비행기 테러로 폭파된 한 건물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오며
행인들에게 소리치던 어느 생존자의 간절한 외침
"여러분 이렇게 살아있음을 감사하세요!" 하는
그 젖은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두번째는 참회의 촛불을 켭니다
말로만 용서하고 마음으로 용서 못한 적이 많은
저의 옹졸함을 부끄러워합니다
말로만 기도하고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거나
일상의 삶 자체를 기도로 승화시키지 못한
저의 게으름과 불충실을 부끄러워합니다
늘상 섬김과 나눔의 삶을 부르짖으면서도
하찮은 일에서조차 고집을 꺾지 않으며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날들을
뉘우치고 뉘우치면서
촛불 속에 녹아 흐르는
저의 눈물을 봅니다
세번째는 평화의 촛불을 켭니다
세계의 평화,
나라의 평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촛불을 켜면
이 세상 사람들이 가까운 촛불로 펄럭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도 양보하는 법을 배우고
선과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평화의 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촛불 속에 빛을 내는
저의 단단한 꿈을 봅니다
네번째는 희망의 촛불을 켭니다
한 해가 왜 이리 빠를까?
한숨을 쉬다가
또 새로운 한 해가 오네
반가워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설렘으로 희망의 노래를
힘찬 목소리로 부르렵니다
겸손히 불러야만 오는 희망
꾸준히 갈고 닦아야만 선물이 되는 희망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촛불 속에 춤추는 저를 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서를 읽으며 기도하고 싶을 때
좋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마음을 가다듬고 촛불을 켜세요
하느님과 이웃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고 힘들 때
촛불을 켜고 기도하세요
촛불 속으로 열리는 빛을 따라
변함없이 따스한 우정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보낸 길에서
또 한 해의 길을 달려갈 준비를
우리 함께 해야겠지요?
{ 28 } 새해 첫날의 엽서
나의 주변 정리는 아직도 미흡하고
어제 하던 일의 마무리도 남았는데
불쑥 들어서는 손님처럼
다시 찾아오는 새해를 친구여
우리는 그래도
망설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자
우리의 좁디좁은 마음엔
넓은 바다를 들여놓아
넓은 사랑이 출렁이게 하고
얕고 낮은 생각 속엔
깊은 샘을 들여놓아 깊은 지혜가 샘솟게 하자
살아 있음의 축복을 함께 끌어안으며 친구여
새해엔 우리 더욱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름다운 말을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하자.
{ 29 }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또 한 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새해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안팎으로 힘든 일이 많아
웃기 힘든 날들이지만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도록
웃는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우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도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밝은 마음 지니도록 애쓰겠습니다
때때로 성격과 견해 차이로
쉽게 친해지지 않는 이들에게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서먹해진 벗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노력의 열매가 사랑이니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해주는
겸손한 용기가 사랑임을 믿으니까요
차 한 잔으로, 좋은 책으로, 대화로
내가 먼저 마음 문을 연다면
나를 피했던 이들조차 벗이 될 것입니다
습관적인 불평의 말이 나오려 할 땐
의식적으로 고마운 일부터 챙겨보는
성실함을 잃지 않갰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아말로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니까요
감사는 나를 살게 하는 힘
감사를 많이 할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 동안 감사를 소홀히 했습니다
해 아래 사는 이의 기쁨으로
다시 새해를 맞으며 새롭게 다짐합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그리하면 나의 삶은
평범하지만 진주처럼 영롱한
한 편의 시(詩)가 될 것입니다.
{ 30 } 꽃이름 외우듯이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들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체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 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나르는
향기가 되자.
[ 출처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이해인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