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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기행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파도처럼 나의 방랑벽은 오늘도 어디론가 떠날 것을 종용한다. 그래 가자. 산과 바다가 부르니 어딘가 무릉도원이 있을지 모른다. 내 그곳에 다다르면 긴 여정의 닻을 내리고 세사를 잠시 잊고 금빛 나래를 싣고 대붕처럼 끝간데 없이 올라 천하를 굽어 보리라. 젊은 날 강렬하게 느꼈던 이상의 절규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의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 ...........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다. 대붕이 태풍을 타고 창공을 거슬러 날개짓 한번에 십만팔천리를 날아가니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장자를 읽으면 참으로 마음이 안온하다. 그러나 현실은 끝없는 구속과 경쟁을 요구한다. 우리는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천연히 본성에 자신을 맡기는 장자는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현실은 억압과 구속을 요구한다. 자유는 인간의 본성인데 끊임없이 주변과 갈등을 초래한다. 나의 오십년 짧지 않은 삶 또한 그러지 아니한가? 마치 빠비용처럼 끝없는 구속과 탈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한번은 장자가 복수의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의 대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수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시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진흙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겠는가?" 두 대신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바닥을 꼬리를 끌며 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바닥 속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 정상적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비정상적이다. 인류 전체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이 정신 질환은 매우 미묘한 메카니즘에 의해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대 자신에게, 그대 행동에, 그대의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대의 삶 전체가 그것에 지배당한다. 먼저 몇 가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 장자의 이 이야기가 보다 명확해지고,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내적인 분열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은 곧 자연, 또는 자연스러움을 비난하는 것이고, 자연과 싸워서 그대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코 그럴 길은 없다. 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가? 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것은 비난을 통해 에고가 강화되기 떄문이다. 에고를 강화시킬 다른 방법이 없이 때문이다. '나'라는 것을 갖기 위해 그대는 자연적인 것을 죽여야만 한다. 자연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다.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에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어떤 투쟁도 갈등도 없이 살아간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는다. 만족스러우면 잠을 잔다. 사랑을 하고, 먹고, 잠자면서 그냥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는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자는 말한다. 누구에게도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든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지 말라. 장자는 말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한 가지 그대가 유일하게 따라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의 '자연성'이다. 그것이 그대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든 신뢰하라.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자연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사들, 삶의 원천을 파괴하는 독을 전파하는 자들 때문이다. 그들이 그대에게 너무도 많은 것들, 너무도 많은 '해야만 한다'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대는 '있는 그대로 순수 존재 상태'를 볼 수 없다. '언제나 해야만 한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충실하라 누구에게도 말고. 불현 지천명이 되어버린 나의 초라한 이력서를 내려다 본다. 한때 평범을 거부하고 비범을 동경했건만 삶은 늘 배신으로 점철되고 병약하고 보잘것 없는 사내가 되어 우두커니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올 여름도 한 일주정도 어디론지 훌쩍 떠나올까한다니까 생석이가 동행할 의향을 비친다. 초교 동창이란 것외에 달리 그 친구에 대해 달리 아는게 별로 없는 친구인데 말이다. 우선 반갑고 든든하다. 더우기 차량이 없는 나로선 짧은 기간에 평소 가보고 싶은 곳을 다닐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이천칠년 팔월 열 하룻날, 우리는 남해안을 돌아 동해를 일주하는 대장정에 닻을 올렸다. 간단히 이마트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고 차는 바람처럼 부안 고창 영광 목포를 거쳐 영암땅에 다다른다. 문득 눈 앞에 월출산의 위용이 자태를 뽐내고 우리를 손짓한다. 이년전 홀로 여행할때 정상까지 다녀온 산이라 더욱 정겹다. 월출산(809m)은 전남 영암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암군에 들어서면 멀리서도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져 호남의 금강산이라 일컬어 진다 월출산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도갑사, 천황사, 경포대, 무위사 등 모두 4곳에서 시작된다. 월출산에서 화강암 지형, 즉 기암괴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구정봉에서 정상인 천황봉을 거쳐 천황사로 이어지는 동북능선이다. 정상을 이루는 바위표면에 가마솥같은 나마가 9개나 패어 있는 봉우리 구정봉(九鼎峰)에 오르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기암괴석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도갑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택할 경우 병풍처럼 펼쳐지는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을 보면서 등산할 수 있으며 가을에는 미왕재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억새밭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짧으면서도 월출산의 절경을 대부분 즐길 수 있는 코스는 경포대에서 바람재로 올라 천황봉을 넘는 것으로, 이 경우 거리는 6,3Km이지만 시간은 4시간 반은 잡아야 한다. 강진쪽 무위사 코스는 자연휴식년제로 현재 등산로가 묶여 있고 영암읍 무등파크 앞쪽에서 산성재를 거쳐 가는 길도 있으나 공식적인 등산로는 아니다. 소백산맥이 목포 앞바다로 흘러가다 평지에 돌출된 잔구 형태의 월출산은 천황봉(809m)을 중심으로 산 전체가 수석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왕재 일대는 넓은 억새밭으로 되어 있고 월출 산악회에서 매년 갈대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의 왕인(王仁)박사와 신라말 도선(道詵)국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며 호남의 소금강산이라 불린다. 또한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단아한 모습의 무위사, 서쪽에는 도갑사가 있는데 도갑사의 해탈문, 무위사의 극락전, 마애여래좌상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월출산의 입구인 도갑사 대웅전 좌측 뒤로 올라서 5km 정도 오르면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용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기이한 9개 단지모양의 구정봉(九井峰)에 이르며 그 아래로 500m쯤 내려가면 국보 14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월출산의 최고봉인 정상에 오르면 동시에 3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월출산의 구름다리도 또 다른 매력을 준다. 이 다리는 지상 120m 높이에 건설된 길이 52m, 폭 0.6m의 한국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이다. 사자봉 왼쪽 산 중턱 계곡에서는 폭포수가 무려 일곱 차례나 연거푸 떨어지는 칠치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고, 도갑사(道甲寺)와 무위사 (無爲寺)로 내려가는 길목에 펼쳐진 미왕재의 갈대밭은 가을이면 황홀한 절경을 이룬다. 특히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풍경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있는 안개, 가을에는 억새, 겨울에는 설경 등 사시사철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우리는 천하절경 월출산에서 점심을 먹고 영암 아리랑을 읊조리며 훗날 다시 한번 찾을 것을 기약해본다. 오후 다섯시경 차는 어느새 진도 대교를 넘어서고 있다. 삼별초의 최후 격전지이자 이순신의 명량대첩의 현장이 바로 진도다 숙연히 머리 숙이고 선열의 넋을 추모해본다. 검은 구름 짙게 드리우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아마도 비가 오려나 보다 우리는 항몽격전지인 용장산터의 남도 석성에 다다랐다. 인적은 드문데 옛 성터는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참으로 견고하고 현대의 건축 기술로도 이 성을 축조하는 것이 용이치 않을터인데 천년을 버티고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당대 세계 최강인 몽고군에 대항에 배중손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린 곳이다. 고려무인의 기백과 의기가 살아 숨쉬는 곳임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기에 자칫 과소평가되어 우리의 뇌리에 잊혀지기 쉬운 인물중 하나가 배중손 장군이다. 이 기회에 한번 그의 행적을 더듬어본다. 배중손 ? ∼ 1271(원종12). 강화군 길상면 출신으로 고려 원종때의 대장군. 원종이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귀국길에 올라 개경으로 환도를 결심하고, 환도 날짜를 발표하자 삼별초는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원종은 그렇게도 간절히 환도를 권유하였건만 삼별초군은 미동도 하지 아니하고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에 반발하여 나라의 창고 기타 시설물들을 점거하고 거친 행동으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끝까지 항쟁하기를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종은 5월 25일 환도길에 도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상장군 정자여를 강도에 파견하여 설득하려 하였으나 삼별초군은 완강하였다. 이에 강도에 머무르고 있던 비빈과 왕족 귀족들이 몰래 숨어 개경으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는 끈질기게 원종의 강도로의 환도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원종은 삼별초를 혁파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5월 29일 장군 김지저를 보내와 조정의 결심을 전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러 하였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삼별초는 더욱더 강렬한 저항심이 솟구쳤다. 몽고에 굴복하려는 원종의 결정에 반발하고 몽고라는 울타리를 타파해 보려는 의연한 결심으로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에서는 이를 삼별초의 난이라고 한다. 삼별초는 최우 집권때의 조직된 것으로 최우는 강도에 도둑이 많을 것을 걱정하여 용사를 모아 밤에 순찰을 하게하여 나쁜짓을 저지르는 자를 잡아 가두게 하였다(지금의 야간순찰대) 그래서 이를 야별초라 불렀는데 도적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특별 선발군대인 야별초를 다시 나누어 도적을 잡게한 결과 그에 따른 경비가 많아져 이를 다시 좌우별초로 나누었다. 한편 몽고 병에게 끌려갔던 나라 사람으로 몽고로부터 탈출한 자가 점점 늘어나 이를 모아 신의군이란 군대를 조직하였는데 좌우별초와 합쳐서 삼별초로 부르게 되었다. 삼별초의 몽고에 대한 적개심은 매우 강했으며 국왕(원종)과 세자를 앞세워 구경(개성)환도를 강행하려는 몽고의 압력에 대하여 더욱 강한 반발심을 품게 된 삼별초는 결국 출육환도를 반대하게 된 것이다.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은 원래 임연부자와 같은 노선을 걸었던 장군이었는데 이때 비로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고려 조정이 환도가 확정되고 삼별초를 혁파하고 삼별초 명단을 압수하려하자 삼별초의 적개심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에 배중손은 당시 고려의 무기고 였던 금강고문을 활짝 열러젖치고 병기를 꺼내 군졸에게 나누어주고 성을 굳게 지켰다. 배중손과 노영의는 삼별초를 거느리고 왕손인 승화후 온을 끌어내어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또 따르지 않고있던 장군 이백기와 몽고에서 보내온 사자 회회를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고 많은 군중 앞에서 목베어 죽였다. 배중손 등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관원을 임명한 것은 개경으로 환도한 개경정부에 대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것이니 이는 몽고에 굴복한 원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의 결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 항몽정책을 계속함에 통제된 국가적 체제가 필요하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한편 강화에 있던 조정관료 가운데 육지로 빠져 나가는 자가 적지 않았으며 강도의 병졸들도 도망하여 육지로 빠져나가는 자가 많았다. 이에 삼별초는 강화를 지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배를 보아 공사의 재물과 백성 노비를 모두 싣고 남으로 내려 가기에 이르렀다. 6월 1일 기병하여 고려 조정과 몽고에 대해 항거를 계속하던 삼별초는 결국 고려 정부의 토벌작전에 밀려 같은달 3일에 강화의서해안(외포리를 중심한 인근항구)을 빠져 남으로 내려갔는데 천여척의 배가 줄을 이었다 라고 한다. 앞서 백관들은 몽고에서 건너오는 왕을 맞이하러 나갔던 바 그들의 처자가 모두 삼별초에 붙들려 바다로 떠나가니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으며, 쌓였던 나라의 재정과 기물이 모조리 반출되어 강화도는 순식간에 텅비어 버렸다. 강화를 떠난 삼별초는 서해안 일대의 섬들을 지나 서서히 남하하여 8월 19일 마침내 전남 진도에 이르렀다. 진도는 마치 최우가 몽고에 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것과 같이 육지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육지와 내왕하기 쉽고 해상 활동이 자유로운 남해안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삼별초는 진도의 자연조건을 십분 활용하여 그곳에 자리잡고 실지를 회복하고 몽고를 몰아 내려는 소망으로 늘 와신상담 했다. 몽고가 이를 그냥 놓아 둘 리 없었다. 원종 12년(1271) 5월15일 몽고와 고려 조정은 상장군 김방경에게 역적추도사라는 직함을 주어 좌우종군으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으로 하여금 진도를 총공격하게 하였다. 이 전쟁으로 삼별초는 크게 붕괴되어 도저히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고 이전투에서 배중손도 전사하게 되자 장군 김통정은 남은 사람들을 추스려 탐라(제주)로 후퇴하고 진도는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도 잠시뿐 원종14년 (1273) 2월 28일 고려의 김방경은 행영중군병마원수가 되어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다시 제주의 삼별초를 공격했다. 중과부적인 삼별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삼별초의 최후이었다. 남도석성에서 조금가니 이름 모를 해수욕장이 눈에 띈다 지금은 폐장되고 항구로 개발한듯 어선 수십척이 정박해 있다. 방파제를 따라 남해를 바라보는 등대가 우뚝 서있다. 계속되는 비바람에 바닷물이 뒤집힌듯 온통 흙탕물인 바다가 파도소리와 함께 넘실댄다 유구한 역사의 영고성쇠를 알 길 없는 나그네에게 진도의 아픔을 전해주려는 몸부림같았다. 답답한 가슴을 펴고 크게 한번 포효해본다. 강강수월래로 왜군을 기만하고 율돌목에서 격파해 누란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충무공의 사자후가 귓전에 들릴듯 선연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진도에서 발길을 돌려 완도에세 일박을 하기로 햇다. 검은 구름 사이로 빗발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청해진에 다다르자 파도게 거세게 몰아치며 비바람이 우리의 완도입성을 쉬이 허락지 않는다.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해상왕국 답게 검푸른 파도위에 수백척의 어선이 정박해 있다. 문뜩 문뜩 보이는 야자수 나무가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야시장에 이르니 싱싱한 활어회에 흥에겨운 관광객이 북적댄다. 지난 날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세우고 천하를 호령할 때도 지금처럼 흥청댔을 것이다. 이백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졋다는 완도, 사실 이곳에서 온통 여름을 보낸다해도 후회 없을 만큼 주변 풍광이 수려하고 먹거리등이 넘쳐난다. 이렇게 우리 여행의 첫날 밤은 깊어가고, 마침 생석이 동생이 이곳에서 전복양식을 하고 있다하니 훗날 방문하기로 하고 아쉬움을 남겨둔채 이른 새벽 갈매기의 전송을 받으며 차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
첫댓글 여행의 설렘을 느끼기 보다 자유롭게 날고 싶어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조금 더 밝고 기쁜 마음으로 여행하시길 기대해봅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에요. 밝고 어두움이 둘이 아니지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게 아니지요. 부단히 사슬을 끊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을 도량을 갖출때 홀연히 존재하는 거지요.밤을 건너지 않으면 새벽은 도래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