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과학기술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와 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문화) 영화의 효시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라면,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의 첫장은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의 ‘아키라’(1988)가 썼다. 그로부터 16년, 감독의 집념으로 실제작기간 9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빚어진 2004년작 ‘스팀보이’가 4일 한국 관객과 만났다.
#과거를 상상하다
전설적인 사이버펑크의 대부 오토모 감독이 찾아간 곳은 이상하게도 미래가 아닌 과거다.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증기기관이 폭넓게 활용되면서 바야흐로 과학이 산업이 되는 그곳이 영화의 배경이다. 감독은 과학이 자본과 만나 산업으로 옮겨가는 출발지점으로 돌아가서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천재 발명가 집안의 손자인 레이는 연구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있는 할아버지로부터 소포를 받는다. ‘스팀볼’이라 불리는 그 물건은 할아버지가 개발한 초고압, 고밀도의 특수 증기 에너지장치. 이를 놓고 음모를 꾸미는 미국의 오하라 재단은 스팀볼을 빼앗기 위해 레이를 납치하고, 레이는 납치된 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과학의 은혜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재단 편에 서서 거대한 개발프로젝트를 진행중이고, 할아버지는 이를 ‘과학의 영혼을 자본가에게 팔아넘기는 짓’이라며 막으려 한다. 이제 스팀볼 쟁탈전과 함께 박진감 넘치는 당대 각종 증기기관들의 폭주가 이어진다. 레이는 아버지를 도울까, 할아버지 편에 설까.
#현재를 선언하다
감독의 전작 ‘아키라’가 미래를 향한 무거운 묵시록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한결 가볍고 흥미진진하게 과거를 돌아본다. 과학을 지배하는 국가와 거대 자본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해 ‘스팀보이’는 인류가 걸어온 과거를 새롭게 상상해냄으로써 팬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결 더 직설적이고 선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전쟁에서 무기를 팔아 몸집을 불린 미국 재단과 국가의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영국 사이에 벌어지는 영화 속 전투는 어느 역사교과서보다 현실감 있는 정세 묘사다. 영국에서 실제 개최됐던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과학기술의 총아들이 권력에 의해 결집돼 연출되는 전투 장면은 박람회를 찾은 세계 각국의 군사 지휘관들에게 보여지면서 무기판매 홍보시연회가 돼버린다.
이쯤 되면 몹시 노골적인 현실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기술이 우리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있는 점 또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화는 이같은 아이러니를 어느 한쪽의 손도 들어줄 수 없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절묘한 배치를 통해 드러낸다. 오하라 재단 오너의 손녀와 주인공이 맺는 우정을 담아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팀보이’는 쉽사리 결론나지 않는 인류사의 오래된 질문을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교한 액션 스펙터클을 통해 숙제를 내주는 현명한 선생님 같은 영화다. 아이들을 위한 사려깊은 방학선물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 ‘스팀보이’가 상상한 19세기형 병기들
증기병=오하라 재단이 개발한
보병으로 등에 증기엔진을 장착한 갑옷 병사. 영국 경찰들의 혼줄을 빼놓는다.
증기전차=오하라에 맞서기 위해 1차 출동하는 영국군 전차. 증기기관부가 갑판에 탑재돼있다.
비행병=영국 전차가 등장하자 오하라 재단은 강한 증기압력을 이용한 비행병을 출격시킨다. 압력조절이 제대로 안돼 사고를 일으킨다.
외바퀴 증기차=레이가 직접 개발한 1인용 증기동력기관차. 스팀볼을 지키려는 레이가 이를 타고 오하라 재단의 열차와 벌이는 추격장면이 도입부의 압권.
톱니바퀴 열차=외바퀴차를 탄 레이를 쫓아 오하라 재단이 출동시키는 증기열차. 전방에서 조타를, 후방에서 기관 조정을 담당한다.
〈송형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