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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우 시집 <얼음꽃> 해설(05. 9)
얼음의 시, 순리의 시
김용락(시인, 경북외국어대 국제학부 교수)
1.
일우가 다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기로 했다. 참 잘된 일이다. 마치 집을 나갔던 탕자가 부모님의 품속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남일우 시인에게 시는 뗄 수 없는 인생의 숙명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런데 일우는 그 시와 20여 년 이상을 냉담하게 서로 떨어져 살아오다가 드디어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앞두고 시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시의 품에 다시 안긴 것과 동시에 우리 친구들에게는 잊고 지냈던 20년 너머의 낡은 필름과 같은 아름다웠던 옛 추억과 우정의 파노라마를 한아름 선사해주고 있다.
사실 시를 웬만큼 쓰는 시인에게는 누구에게나 문청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남일우 시인에게도 문학청년 시절이 있었고, 나를 비롯해 앞으로 언급할 몇몇 친구들은 그 문청의 동반자였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대구 달성고 검바위(문학동아리 명칭) 출신인 오규찬 시인(이이는 현재 연간 수십 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 사장이다)이 고교 후배인데 시도 잘 쓰고 똑똑한 친구라면서 일우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역시 시를 잘 썼고 똑똑했다. 우리들이 지방대학에 진학한데 비해 그는 서울대에 진학해서 우리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대학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아마 시 제목이 '흘러라 형산강이여'일텐데 경주에서 포항시내를 거쳐 동해로 흘러가는 지방천의 이름이 형산강인데 바로 그 강을 시의 소재로 삼은 유장한 가락이 돋보이던 시였다.
그의 한 두 해 앞서 당시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받은 면면을 보면 현재 문단의 중견이 되어 있는 소설가 김영현, 평론가 김이구 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85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남일우의 역량을 감안해본다면 아마 그가 시와 그토록 냉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도 지금쯤 시단의 중요한 중견이 되어있음은 불문가지일터이다.
우리는 80년대 초에 <예각>이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했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지면에 다소 얼룩이 지는 일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구성멤버의 면면을 밝혀보면 김영욱(국악이론가, 대구예술대 교수) 윤상수(시나리오작가, KBS 시나리오 공모에 최우수 당선) 오규찬(사업가, 천마문학상 시 당선) 오승건(시인, 시집 《》) 조영기(사업가) 주재호(극작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 최병규(서울에서 직장생활, 7,80년대 전국 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휩 씀) 와 일우, 그리고 내가 그 동인이었다. 이후 <예각>은 민현기 교수(문학평론가, 계명대 국문과)에 의해 대구 지역에서 최초로 현실비판적 민중문학의 싹을 틔운 집단으로 문학사적 자리 매김을 당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예각>의 동인지《다시금 그리움 하나로 선다면》(1982)은 나에게도 잊지 못할 책인데 나는 이 책을 펴냄으로써 중앙문단의 눈에 띄어 창비 신작시집으로 문단에 정식 등단하게 된다. 이 동인지에 남일우 역시 훌륭한 많은 시를 발표한다. <예각>을 펴내기 전 우리는 대구 유경다방이라는 곳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이 다방은 대구 도심에 있었는데 시인 신동집, 화가 손일봉, 작곡가 김진균 등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우리같은 어린 문청도 이 다방의 단골이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카운터에 앉아 괴테의 파우스트도 읽고 김지하의 오적도 읽을 만큼 교양이 있고 문학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70년대 말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대구백화점 뒷골목 술집에 시계를 맡기고도 모자라 마음씨 좋은 이 다방 여주인에게 술값을 곧잘 빌리곤 했다.
아마 81,2년 5월쯤 되는 데 '부탁한 편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이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그런데 첫날 우리는 몽땅 대구중부경찰서에 연행됐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80년 '피의 광주 오월'로 전국이 얼어붙어 있다가 이 무렵 학생 시위를 기점으로 서울대학생들이 전국 각 지역에 침투에 대규모 민중봉기를 획책한다는 첩보가 당국에 떠 돈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대생이 낀 일군의 대학생들이 제목도 수상한 '부탁한 편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에다가 팜플렛 내용이 "펜은 칼보다 강하다 운운"으로 시작되는 전시회를 열었으니 표적이 되었던 게 분명하다. 그날 우리는 중부경찰서에서 실컷 얻어맞았다.
경찰서 문을 들어서자마자 어두컴컴한 방에 가두더니 무차별 난타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영문도 모르게 맞았더니 입이 터지고 코피가 나고 말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서야 우리를 밝은 사무실로 불러내 소위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부탁한 편지가 무엇이냐,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배후에 누가 있느냐, 서울대생 남일우는 대구에 내려왔나, 어디 숨었나, 무슨 지령을 받았느냐, 혹시 간첩 아니냐 등등 별 별 것을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1주일간의 행적을 16절지에 수 십 차례 동일한 내용을 쓰게 했다.
나를 취조한 형사는 좀 우스운 작자였는데 난데없이 나보고 우골탑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자 갑자기 내 귀싸대기를 올려 부치더니, 야 임마 시골에서 부모님이 논밭 팔아서 대학을 보냈으면 조용히 공부나 할 것이지 이런 쓸데없는 글이나 쓰고… 뭐라고 뭐라고 겁을 주었지만, 내가 별로 겁을 안 내는 티를 보이니까 약이 올라서 그러는지 우리 시골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가장해 차로 치여 죽일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공갈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절 이상을 빈사무실에서 앉아 있자니 맞은 전신이 욱신욱신했다. 오후에 나이가 좀 더 든 은백 머리칼의 중후한 사내가 우리를 불러내더니 이해해라, 워낙 시국이 어렵고 간첩이 날뛰니까 밑에 사람이 좀 과하게 한 모양이다, 밖에 나가서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타이르면서 갈비탕을 한 그릇씩 시켜주었는데 입술이 터진 곳에 뜨거운 국물이 닿아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다방 주인마담이 관계 요로를 통해 우리가 단지 선량한 문학청년이란 사실을 보증을 하고 풀어 주도록 힘써 준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일우가 그 잘난 서울대를 다녀서 생긴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지금에서야 밝히자면 '부탁한 편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시화전 제목은 당시 한창 남미 소설에 빠져있던 윤상수 작가와 내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는 소설 제목을 변주한 것이고 "펜이 칼보다 강하다 운운" 팜플렛 내용은 정통종합영어 명사편 예문에 있는 것을 그럴싸해서 인용한 것뿐이다. 그때 우리는 물론 시대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투신해 실천했던 열렬한 투사도 아니었고 문학의 사회적인 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랬던 것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심한 '고문'을 당한 셈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점차 투사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문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은 젊은 청년들에게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존재의 빛나는 이데아이자 때론 끝 모를 절망의 구렁텅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존엄한 인간의 도리와 시대와 역사를 대하는 법을 배우고 이웃과 공동체 삶에 어떻게 기여해야하는 지를 익혔다. 그리고 우정도 키워갔다.
각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군대가고, 대학원 진학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예각>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 와중에 남일우는 서울대 학보사 기자를 하고 졸업하면서 대구MBC 기자로 취직했다.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우리세대의 문학》이라는 무크지로 등단했다. 주지하다시피 문학과지성사는 창작과비평사와 함께 7,80년대 한국문학의 중심이었다. 일찍 불의로 작고한 평론가 채광석 선생이 일우의 등단작을 칭찬했던 게 기억난다.
문학적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시인으로 장래가 보장된 통로를 통해 입문한 셈이지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일우는 시와 멀어졌다. 그러면서 우리와 만나는 기회도 점차 멀어졌다. 우리는 각자 생활인이 되어 세파를 헤쳐나가기 힘든 젊음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청모의 청춘들이 백발이 언 듯 비치는 중년이 되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어느 정도 알게된 나이가 되어서 일우가 다시 시를 찾게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시, 문학은 일우뿐 아니라 문청시절을 보냈던 우리 모두에게 차라리 첫사랑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존재를 구축해나가던 청년시절에 영혼이 매혹 당했던 그 첫사랑을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신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는 일은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일우의 말처럼 "이 세상의 그리운 것은 다 때가 있"(〈생강나무 꽃 진 뒤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흝어져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사랑이라는 것을 진정 모랐"(〈넝쿨식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일우의 이번 시집은 불혹을 넘기고 곧 지천명을 바라보는 중년이 갖는 그 자연스런 정서의 집적이자 앞으로 문학적 발전의 가늠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이 시집을 통독하고 난 전체적인 인상은 풍부한 자연과 그 자연에서 발하는 서정의 활달하고 풍요로운 어떤 느낌이다. 그리고 시 편편의 유장한 가락은 시인의 예전 솜씨가 전혀 빛 바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20년의 공간을 금새 뛰어넘는 이런 솜씨는 남일우 시인의 천래의 재능이거나 시를 멀리하면서도 결코 시를 놓지 않은 문학적인 삶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요즘 시인은 비슬산 기슭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직장생활에 지친 몸을 재생하면서 자연을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근황이 시집 전체에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대구 인근의 비슬산, 헐티재, 대견봉, 조화봉 등과 소나무, 참나무, 때죽나무, 넝쿨나무 산벚나무, 참곷 등 숱한 식물들의 이름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이런 자연은 때론 홀로 때론 군락을 이루어서 시집에 자연과 서정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자연과 물여일체의 경지에 닿고자하나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마음의 간극을 드러낸다. 뒤에서 다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자연과 합일하려는 시인의 태도는 다른 시편에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세상의 순리에 부응하려는 시인의 눈밝은 예지이자 시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한 중년사내의 세상살이, 시적 진실, 진리에 가 닿으려는 삶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각설하고 하지만 자연과 일체가 되려는 시인의 노력은 완성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아직까지 도회인의 때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연작시〈숲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인의 이런 태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시이다.
2
헐티재 정상의 어린 나무 한 그루
버팀목에 기대 힘겹게 버틴다
발아래 아득한 벼랑 굽어보고
속절없이 닥쳐오는 비구름 맞으며
저 나무는 속 깊이 새겨 알리라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길을 따라 다만 스쳐 흘러가는지
5
물길 말라 버린 숲이여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이여
불빛 따라 몰려드는 날벌레여
세상을 향해 열었던 마음의 흔적이여
다시 길을 만드는 숲이여
감당할 수 없이 번져가는 쑥부쟁이여
토끼풀이여 질경이여
너무 멀리 있는 그대여
-〈숲에서 부르는 노래〉부분
버팀목에 기대어 힘겹게 버티고 있는 헐티재 정상의 어린나무는 시인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그 마음은 세상을 향해 문을 열었지만 "젖은 가슴 온전히 드러내고도/왜 그대를 넉넉하게 품지 못하는"지 자책하면서 "차마 세상에 드러내 놓지 못한/울음 하나 삼키고"(〈금호강〉)있는 시인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런 시인에게 상처입은 시인을 온전히 안아줄 자연, 혹은 시인이 탐구하고 이는 진리는 "너무 멀리 있는 그대"일 뿐이다.
이 시집에서 눈에 띠는 것은 풍부한 자연 못지 않게 '당신'이라는 호칭이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당신은 분명하게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마치 만해 한용운의 '님'처럼 대상이 불분명하고 애매하기도 하다.
가령〈꽃이 피기까지〉와〈생강나무 꽃 진 뒤에〉〈은방울꽃처럼〉에 나타나는 '당신'은 바로 '꽃'과 '생강나무'와 '은방울꽃'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중간 부분부터 집중적으로 나오는〈겨울 비슬산〉〈당신없는 밤〉〈안개〉시리즈의 당신은 사실 실체가 불분명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만큼 시적 부력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두드려도 기척없는 당신
아직도 깊은 숲 속에 마음을 두고 계신가요
당신 가슴속에서도 눈이 한자나 쌓이고
눈꽃들이 먼저 감당할 수 없도록 피어났나요
세찬 눈구름 갈대밭을 파도처럼 넘어왔나요
얼어붙은 손마디 감각도 무뎌져
지워진 길조차 낯설지 않습니다
쌓인 낙엽들이 그리움처럼 흔들립니다
땅 속의 달팽이들도 당신 발목을 잡는가요
쌓인 눈 오래도록 녹지 않는 계곡을 넘나들어도
참한 당신 언제 오시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오래된 돌무덤에 작은 돌 두 개 포개놨습니다
나중에 당신 보시도록
-〈꽃이 피기까지〉전문
이 시에서 '당신'은 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꽃이 언제 필지 몰라 나중에 꽃이 피면 볼 수 있도록 돌무덤에 작은 돌 두 개 포개 놓는 시적 자아의 태도는 피는 꽃에 대한 다시말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의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염결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의 태도야말로 일찍이 공자가 말했던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계곡 깊이 내리는 눈은
먼 데 있는 당신 발등에도
금방 닿기에
새들도 찾지 못해
겨울이면 더 화려해지는
그늘 쪽으로 울타리를 넘습니다
당신 흔적 사라진 자리에
발자국 힘껏 찍으며
언 손으로
당신 기억 몇 덩이
뭉쳐봅니다
-〈겨울 비슬산〉부분
안개 속에
당신을 묻어 두네
젖은 불빛 너머
갈 수 없는 나라로
기차는 달려가고
당신 사는 세상
온전히 묻어 두네
안개 속에
-〈안개 둘〉전문
이 두 편에서 드러나는 '당신'은 흔적이 사라진 기억으로 남는 당신이며, 안개 속에 묻혀진 당신이다. 이 당신은 한용운의 '님'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없는 존재이기도하다. 부르지 않으면 있다가도 부르면 실체가 없어지는 '공즉시색이요 색즉시공'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이데아인지 모른다. 하지만 굳이 '당신'의 실체를 밝히자면 어쩌면 다음 시에서 당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끊어버려야지, 저 소나무
뿌리에서 가까운 가지부터
미련없이 잘라 버리듯이
끊어버려야지, 저 소나무
가지 잘라 뿌리를 키우고서야
마침내 숲의 정상에 서듯
(중략)
끊어버려야지, 저 마음도
한 자락이 비어져 나오기 전에
아조 끊어 버려야지
-〈저 마음도〉부분
그곳엔 얼음꽃이 핀다
아주 가끔씩
훤히 드러난 자리
하늘 한 자락이 맞닿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세상에 남겨둔 것들이 달라 보이는
그곳에 얼음꽃이 핀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영혼들이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을 한 줌씩 쌓아
입춘 우수 거쳐 온 바람을 거슬러
잠시 환한 얼음꽃이 핀다
거역할 수 없는 무게로
오만한 소나무 가지를 끌어내리고
세상을 향해
숨은 죄를 고해성사 하라고
처렁처렁 소리를 내는 얼음꽃이 핀다
세상의 흔적마저 금새 사라지는
그곳에 아주 가끔씩
-〈얼음꽃〉전문
〈저 마음도〉에서 끊어버리고 잘라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한 자락이 비어져 나오기 전에/아조 끊어 버려야"할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영혼들이/세상의 서러운 사랑들을 한 줌씩 쌓아/입춘 우수 거쳐 온 바람을 거슬러/잠시 환한 얼음꽃이 피"는,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무게로/오만한 소나무 가지를 끌어내리고/세상을 향해/숨은 죄를 고해성사 하라고/처렁처렁 소리를 내는 얼음꽃이" 피는 그 마음이 아닐까?
왜 얼음꽃일까? 차갑고 투명한 이성적인 공간, 그곳은 젊음의 지적 열정이나 청춘의 몸부림치는 이데아, 좀더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이겨 정상에 남보다 먼저 다다르고 출세하고자하는 그런 욕망을 극복한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세상에 버림받고 상처 입은 영혼과 세상의 서러운 사랑을 따뜻하게 품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숨은 죄를 고해성사 할 수 있는 그런 겸손하고 순정한 마음이 바로 이 시집 곳곳에서 나오는 당신의 진정한 실체가 아닐까?
세상사 미혹됨이 없다는 불혹을 지나 하늘의 뜻을 따르는 지천명의 순리를 좇는 그런 마음의 공간이야말로 남일우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당신'의 실체이자 이 시집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의 시적 휴지기를 일거에 상쇄할 수 있는 시인의 정신적인 높이와 효율적인 창작방법론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그것은 곧바로 독자들에게 기쁨으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