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이 있다. 웅장하고도 해맑은 이 종 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이다. 이처럼 소리와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애절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이다. 다시 말해 호적등본상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면 주민등록상으로는 봉덕사종이 맞지만 별칭에 해당되는 에밀레종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종에 얽힌 전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이나마 성덕대왕 신종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종(725년) 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국 범종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맑고 웅장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녀 일찍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종이 걸려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의 남쪽인 남천리에 있던 절로서 효성왕(孝成王) 대인 738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혜공왕(慧恭王)대인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런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됨에 따라 이후에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世祖) 5년(1460년)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다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되었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5년 8월에 다시 봉황대 아래에서 관아가 있던 동부동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 사진은 마침 조선고적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관아 자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동부동 옛 박물관에 오랜 기간 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5월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종의 형태는 위, 아래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한 항아리형의 몸체에 상,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고 방형의 연곽(蓮廓)과 당좌, 주악상을 배치하였다. 몸체 위쪽으로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목 뒤로 굵은 음통이 솟아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덕대왕 신종은 다른 통일신라 종과 구별되는 몇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자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의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종의 중심은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종구를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과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긴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이다. 종신 앞, 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서(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자(四句)씩 짝을 맞춘 [명(銘)]을 배치하였다. 특히 서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은 성덕대왕 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一乘之圓音)]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필오(金弼奧)이며 종의 제작자로는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박종일(朴從鎰)과 박빈나(朴賓奈), 박한미(朴韓味), 박부악(朴負岳) 등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ton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모연의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에 관계된 전설인 점에서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의 내용은 다른 한편으로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말해 준다. 발원으로부터 제작까지 3대에 걸쳐 30여년이나 소요된 시간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불가에서 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종소리를 통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하는 대승적(大乘的) 자비 사상을 담고 있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 하였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과 상반되는 그야말로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다행히 성덕대왕 신종의 과학적인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다는 것은 주조의 과정상 처음부터 종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조성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이 종의 이름이 일반적인 종과 달리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확인되지도 않은 에밀레종이란 별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사진
[문화재대관 국보 금속공예](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2008.12)
성덕대왕 신종 p.225, 226, 227, 228, 229, 230 사진 참조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구주대학에서 ‘한국 범음구(梵音具)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하여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을 거쳐 2002년 초대 국립춘천박물관장과 전시팀장, 아시아부장, 미술부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2009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불교미술대전』,『갑사와 동학사』,『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미륵사지 출토 금동 수각향로의 조형과 편년」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