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최씨는 분명히 해주 최씨에서 분적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옛 문헌을 샅샅이 훑다보면서 그 증거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밝혀낸 세가지 사실을 열거토록 하겠습니다.
1. 해주 최씨 족보에 시조(始祖)의 함자가 없습니다.
해주최씨 족보를 찾아보았습니다.
시조(始祖)의 함자가 없었습니다. 새로 탐진 최씨라 했으니 빠질 수도 있겠죠..
그럼 시조의 아버지 정(靖)자, 할아버지 철(哲)자는 있어야 할텐데..
그러나 역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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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주 최씨는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사절요 제10권 기미17년에 보면 시조께서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三月,門下侍郞平章事,致仕崔思全,卒,思全,初以醫術進,諭拓俊京,去李資謙,以功,驟登宰司,晩年,自以起寒地,位極寵溢,固請致仕,
3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최사전(崔思全)이 졸하였다. 사전이 처음에는 의술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척준경(拓俊京)을 깨우쳐서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로로 급작스럽게 재상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만년에는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출세하여 벼슬이 극도로 오르고 은총이 넘친다 하여, 굳게 치사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해주 최씨였다면 이런 귀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주최씨 2대는 海東孔子로 불리우는 최 충(崔沖)이었으며, 동 시대 해주 최씨 인물로 해주 최씨 4세손인
최사추(思諏)는 중서령에 이를 정도로 잘나가는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中書令,致仕,崔思諏卒,思諏,文憲公冲之孫,力學擢科,文宗召入內侍,與語稱旨,自是,歷仕中外,所至有聲績,爲相,論議,務存大體,不敢輕改舊章,門人子弟,有來謁者,常訓以事君之道,言不及私,雖謝事家居,憂國之心,終始不替,王,適以燃燈觀樂,聞訃,震悼,罷宴輟朝,賻恤優厚,令百官,會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사추(崔思諏)가 졸하였다. 사추는 문헌공(文憲公) 충(冲)의 손자로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종이 불러들여 궁중에서 왕을 모셨는데 말하여 보니 왕의 마음에 맞았다. 그 후로 내외 관직에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의논하는 것이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옛 법을 고치지 않았다. 문인과 자제 중에 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항상 왕을 섬기는 도리로 교훈하고 개인적인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다름이 없었다.
왕이 마침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서는 놀라고 슬퍼하여 잔치를 파하고 조회를 정지하며, 부의와 위문을 특별히 후하게 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게 하였다.
3. 문공미(文公美)는 최사추(崔思諏)의 사위입니다.
문공미와 한인은 예종의 등창치료를 소홀히 했다고고 임금께 상소하여 시조(始祖)로 하여금 2년의 도형을 받게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공미는 공교롭게도 최사추의 사위라고 합니다.
예를들어, 시조께서 해주최씨 시조 온(溫)의 증손이라면 최사추와는 6촌에 해당하는데 나서서 상소를 올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시조께서 이자겸에 밀고를 해서 처형 내지는 귀양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참조 페이지 :
http://cafe347.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9pEO&fldid=11uE&contentval=0000Fzzzzzzzzzzzzzzzzzzzzzzzzz&nenc=elG-wjTaG8Eg.pPVDecr3g00&dataid=15&fenc=zQRUyLfti_k0&docid=19pEO|11uE|15|20071128145020&q=%B9%AE%B0%F8%B9%CC&srchid=CCB19pEO|11uE|15|20071128145020
"이들 유선·유길 형제의 아들·손자대에는 당시 왕실 외척으로서
사실상의 집권자였던 이자연 일가와 이중삼중으로 혼연을 맺었다.
(이자연의 딸 셋은 인예태후·인경현비·
인절현비 등으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 인천 이씨항 참조)
예컨대 최유길의 아들 최사추(예종조 수태사·중서령)는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을 사위로 삼았는데, 이자겸의 딸(최사추의 외손녀)이 예종비가 되었으며,
이밖에도 당시 쟁쟁한 권신이던 문공미·류인저 등이 모두 최사추의 사위였다.
또 최유선은 이자연의 조카인 이예를 사위로 삼았고,
유선의 손자 최륜(예부상서)은 이자연의
손자 이자덕(이자겸의 사촌)의 사위가 되었다.
첫댓글 그럼 또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사전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오셨을까? 경주?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께서 최씨로 사성을 받은 이후 관향(본관)없이 최씨로 사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겠죠..본관제도는 신라말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고려말 다 돼서 정착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청년화수회 소식란의 "본관제도로 살펴본 탐진최씨의 연원(淵源)"을 참고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