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신비로 둘러싸인 골굴사와 기림사
▲마애여래불좌상에서 내려다 본 골굴사 경내
계절이 바뀌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한편으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 했던 고승의 말을 언뜻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변화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대로의 삶을 어떻게 인정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경주의 사찰을 방문하면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천년의 도시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구석에서도 사연이 배어있다. 사찰은 호국불교로 일컬어질 만큼 신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웬만큼 이름난 사찰은 두루 다녔지만, 골굴사 방문은 이 핑계 저 핑계로 가지 못하다 최근에야 가보게 됐다.
▲석굴 사원
골굴사는 경주 함월산 자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사찰이다.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6세기 인도의 광유성인이 이 곳에 마애여래불과 석실을 지었다고 전하는데, 역사적으로 불국사보다 200년이 앞선다.
골굴사가 최근 경주 참살이 여행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불교문화 알리기 차원에서 실시하던 템플 스테이의 본산으로, 불교의 전통무술인 선무도의 도량으로 명성이 얻으면서부터다.
보문관광단지를 가로질러 4번 국도를 따라 감포 방향으로 가다 안동사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좌회전해서 골굴사 진입로로 들어가면 된다.
▲풍화작용에 의해 바위가 많이 훼손됐다.
▲열심히 메모를 하는 탐방자들
함월산 골굴사 일주문을 지나 1㎞쯤 산 속으로 들어갔더니 선무대학이 먼저 맞이한다. 선무대학을 지나 경사진 길을 오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바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바위 위에 4m 높이의 보물581호인 마애여래불좌상이 신비스럽게 앉아 있다.
풍화작용으로 인해 마애불 아래 부분은 곧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래불을 중심으로 12개의 동굴이 있는데, 곳곳에 부처님을 모셔놓았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니라 모두 사람의 손으로 파낸 것이다. 패어진 곳들이 마치 해골처럼 생겼다. 그래서 절 이름이 뼈 골(骨)자에 동굴 '굴(窟)'자를 써서 지었다.
여래불까지 오르는 계단은 짧은 거리지만 몹시 가파르다. 일부 구간은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 어렵사리 동굴 속의 부처님을 보고 나면 더운 날씨에는 땀으로 범벅이 된다고 한다.
▲보물 581호인 마애여래불좌상
어렵사리 마애여래불상 앞에 다다랐다. 자칫하다가는 실족할 위험마저 있지만, 아직 떨어진 사람은 없다고 전한다. 마애불좌상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고 정확하게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달 첫 해가 뜨는 방향이라고 한다.
▲기림사 입구
마애불의 방향이 나라의 대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비록 풍화작용으로 인해 주변의 모습이 변한다 해도 원래 가지고 있는 뜻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비로 가득한 불좌상을 보면서 유명한 고승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골굴사와 인접한 기림사는 넓은 주차장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길이 기분 좋게 나있다. 산모래가 뿌려진 길은 자연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일주문을 지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을 따라 가는데, 요즘 보기 드문 다람쥐를 보게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길 아래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봄을 예찬하는 듯해 마음이 유쾌해 진다.
▲오종수 중 한 곳인 화정수 앞
기림사 경내 뒷마당에 있는 화정수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 곳이 바로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샘, 즉 오종수(五種水)중 한 곳이다. 이 물을 마시면 마음이 고요해진다고 전하는데, 너도나도 바가지를 들어 물을 마셔대곤 한다.
오종수는 화정수외에 기림사 뒤편의 '감로수'와 나한전 삼층석탑 아래에 묻혀 있는 '장군수', 천왕문 앞 담벼락에 있는 '명안수'와 기림사 개울 건너에 까마귀가 쪼는 자리를 파서 샘을 발견한 '오탁수' 등이다. 현재 다섯 군데 샘 중에 세 군데 정도만 남아 있다.
▲기림사 본전인 대적광전
▲대적광전 문살, 통나무에 무늬를 새겼다.
기림사는 해방전만 해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였다. 이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와 불국사가 크게 개발되어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된 사찰이다. 기림사에 가면 수령 500년이 넘는 보리수나무가 상징처럼 뻗어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웬일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리수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는 재작년 태풍 매미로 인해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이다.
기림사 경내를 돌아보기 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효과적이다. 첫 번 째는 보물 833호이며 기림사 본전인 대적광전과 약사전, 진남루, 응진전과 보리수와 목탑이 있던 자리 등 구역이다. 두 번 째는 삼천불전, 명부전, 삼성각, 관음전과 요사채이다. 세 번째는 박물관이다.
▲진남루
아담하지만 시원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넓은 마당 때문이다. 건물 또는 건축이 앉은 자리 보다 몇 배나 넓은 마당은 마음까지 넓게 만든다. 시야를 넓게 가진 탓인지, 사물이 다 아름답게 여겨진다.
산사에서 하루를 보내다보니 하루 시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샘물의 효능을 봤다고 말하면 픽 웃을지는 모르겠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다르게 느리게 사는 지혜를 호젓한 산사에서 배웠다.
산야는 먼지 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산야와 더불어 우리도 초목처럼 깨끗한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