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가 부끄러운 5월18일!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처녀의 가슴을 도려내며 광주민중의 시체더미 위에서 축배를 든 그들에게 분노의 칼을 꽂는다.
광주 5.18민중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산화해간 2000여 광주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80년 5월을 되새기며 80년 민주화의 봄일지를 인천대학에 국한 지어 간략히 기술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교감 속에 새로운 내일을 기약해 봅니다.
인천대학교의 80년 5월
◈80년 3월 18일
기계공학과에서 최초로 비민주적인 대학운영에 반발 민주적 대학운영 요구
▷80년도에는 백인엽(선인학원-선인학원은 형 백선엽과 백인엽의 가운데 글자를 모 아 이름 붙인 것-이사장, 인천대학 설립자)의 강압에 의해 학생 전원이 정장차림(남 자는 양복과 넥타이, 여자는 투피스)을 강요하였었다.
◈80년 3월 26일
대학 민주적 운영을 위한 1차 대표모임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의 척결을 위해 서울역 역전다방에서 각과 과대표 10여명이 모여 향후의 학내 민주화에 대해 논의
◈80년 3월 28일
영등포역 2차 모임 무산
▷영등포 역에서 2차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어느 과대표가 학교측의 회유에 넘어 가 사전에 모임이 누설되어 학교측의 방해로 2차 모임은 무산되었고 모임을 저지하 기 위해 현장에 나타난 김형걸 초대 학장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근처 중국집에서 예 기치 않은 면담이 성사되었고 면담결과 다음날(29일) 1교시에 학과별 자유토론을 갖 고 토론결과를 가지고 2교시에 학장과 면담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일부 친 백인엽 (재단이사장) 추종교수들은 과대표들을 교수 집으로 끌고 가 연금상태에 두었다.
◈80년 3월 29일
인천대 최초의 집회가 열렸다.
▷전날 영등포에서 있었던 과대표회의와 학장과의 면담에서 있었던 결정 사항에 따라 1교시 시작과 함께 각과에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자유토론회가 열렸다. 일부 친 백인 엽 추종교수 들은 자유토론회를 방해하여 일부 학교에서는 토론회가 열리지 못하였 다. 사전 합의에 따라 2교시 시작과 함께 방송국을 점거하고 【인천대 학우에게 드 리는 글】을 낭독 하였으나 학교측에서 전기를 끊어 방송이 중단됨 이를 기폭제로 하여 본관앞 세종대왕상 앞으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기계과와 건축과, 독문과, 영문과등은 조직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700여명이 자발 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제1차 '학원민주화와 백인엽 퇴진'을 위한 윤석진 (건축 79)의 사회로 학생총회가 열렸다. 미리 준비했던 유인물은 학교측에 사전 적발되어 학교측에 빼앗기고 한 학생이 개인적으로 준비한 대자보 형식의 구호가 교내에 개시되면서 집회는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교 내 그룹사운드 '파이오니아' 에서 음향시설을 지원하였고 끊어진 전기는 본관 앞 가정집에서 끌어와 집회를 가졌 다.
한편 이 시간 각 과대표들은 학장과 면담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김형걸 학장은 "너희 들이 학생이냐 차라리 명동 깡패와 이야기하겠다"등 학생대표들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학생들이 시도한 수차례의 면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때 학생들은 장소를 본관로비로 옮겨 집회를 계속 하고 있었다. 오후 4시 학생대 표로 참석하였던 홍성복(기계 79) 신기출(기계 79) 윤석진(건축 79) 김강욱(기계 79)등이 집회장에 나와 학장과의 면담이 학교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렬되었음을 알 렸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재단과 대학경영의 분리』『어용교수 퇴진』『백인엽 퇴 진』『총 학생회장 직선제』등을 요구하며 장기농성에 돌입하였다. 학생들은 본관 1 층 휴게실과 학생식당 등(현재와는 본관의 실내 배치가 달랐음)에 분산하여 철야 농 성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은 밤늦게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상가(지금과 같 이 많지 않았음)로 음료와 빵등을 사러 갔으나 학교와 재단 측에서 미리 모두 사가 는 바람에 학생들은 식당에 있던 무우로 저녁을 대신 하였다.
3월 29일 점거 철야농성은 당시 전남 조선대의 3월 23일 이후 처음 있은 신생대학 의 획 기적인 사건이었다.
◈80년 3월 30
전문대(당시에는 공업전문대와 체육전문대로 나누어져 있었음)휴교와 2차 투쟁
▷오전 7시부터 철야 정리 집회와 2차 투쟁 전진대회를 열고 학생들의 요구 조건에 학교 당국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백인엽 재단이사장의 허수아비 노 릇만 하고있던 학교당국은 무책임한 행동과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하자 학생들은 【백인엽 물러 가라!】【어용교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교내를 행진하며 시위 를 계속 하였다. 한 편 재단 측은 대학의 시위에 자극 받아 재단 네 다른 학교로 시 위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인천공업전문대학과 인천체육전문대학에 대하여 당일 휴교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분노한 공전·체전 학생들이 【백인엽 물러가라!】는 현 수막을 앞세우고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시위가 확산되자 재단 측은 당황하 여 대학측에 학생들과 협상할 것을 지시하였다. 3월 30일 오후 5시 학교와 학생들이 협상에 들어갔고 학교측은 학생의 요구조건 전부와 시위 주동 학생의 신분 보장을 약속하였고 학생들은 제3차 학생총회를 열고 학교측과의 협상내용을 수용하는 차원 에서 정리집회를 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인천대에서 시작한 『학원민주화와 백 인엽 퇴진』의 열기는 '선화여상''운봉공고''운산공고' '항도고등학교''선인고등학교' 로 확산되어 학원민주화를 위해 7000여명이 함께 하였었다.
◈80년 4월 7일
총학생회 추진위원회 발족
▷지금 까지 학생대표 기구는 학도호국단이었다. 학도호국단은 각과의 과대표들이 선 출하였다. 또한 학도호국단령에 따라 시위등 전력이 있는 학생은 학도호국단의 단위 재대장(과대표)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를 학생 직선에 의한 총학생회 건설을 위하여 '총학생회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학교측의 집요한 방해와 협박으 로 와해되었다 가 다시 재건설하는 어려움을 넘어 '선거관리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80년 4월 29일
인천대학교 초대 총학생회장 선출
▷인천대 민주화의 상징이요 전 학우의 열망 속에 초대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4명 의 후 보가 출마하여 민주적 분위기 속에서 직접선거를 통해 초대 총학생회 장에 홍 성복(기계 79) 부총학생회장에 윤석진(건축 79)이 선출되었다. 총학생회는 출범과 함께「3.29 학원민주화 투쟁」시 약속하였던 사항을 신속히 이행 할 것을 요구하였 으며 평교수, 학생대표로 구성된 학칙개정위원회와 평교수협의회를 구성을 추진하였 다. 총학생회의 건설은 이후 인천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항상 자리하게 되었다.
◈80년 5월 12일
경인지구 총학생회장 회의 개최
▷당시 12.12 군부쿠데타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전두환 군부집단은 정권의 강탈을 위 해 학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집단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었다. 이에 민주와 자유 와 진리의 큰북을 울리는 영원한 打手,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개별 대학 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고 행동대오를 일치 하기 위하여 경인지구 총학생회장 회의를 열었다. 아울러 인천지역 총학생회장 회의를 열어 학내민주화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상황을 학내민주화와 사회민주화는 동전의 앞과 뒤라는 결론 하에 「사회 민주화 투 쟁」을 선언하였다. 더불어 인천대학에서도 학원의 민주화와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을 위해 젊은 대학생으로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는 당당한 지성인으로 앞장서 나갈 것을 선언하였다.
◈80년 5월 13일
학교측의 일방적인 휴교조치
▷전날의 인천지역 총학생회장 회의 이후 학생들의 움직임에 불안한 학교 당국은 일 방적으로 휴교 조치를 취함 총학생회의 강력한 항의와 학생들의 반발로 본래 3일간 의 휴교조치가 5월 13일 당일만 휴교하기로 하였다.
◈80년 5월 14일
총학생회 비상회의 소집, 민주화 투쟁 모의
▷총학생회는 총학생회장 홍성복(기계 79)의 긴급소집으로 비상회의를 열어 전날의 휴강조치에 대한 진상해명과 공식사과 교수회의 일지공개를 요구하였다. 또한 개별 적으로 휴강을 실시한 교수들의 처벌을 주장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보내는 민주주의 를 위한 '행동강령'을 발표하고【전두환 퇴진】【계엄령 해제】등 민주화를 위한 '인 천지구 연합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날 오후 서울역 역전 다방에서 총학생회측의 윤석 진 부회장(건축79) 김강욱(기계 79)당시 학내의 소그룸 모임에서 박종관(전자 79) 심상준(독문 80) 김성일(영문 80)이 모여 5월 15일 교문밖 진출을 위한 역할과 전술 을 논의하고 인천대 인하대 총학생회장단 모임에서 결정된 교문을 진출하여 주안역 광장에 집결하는 연합투쟁을 결의하였다.
◈80년 5월 15일
인천대 민주화운동의 대장정 첫 발걸음, 평교수 협의회 구성
▷5월 15일 오전 9시 학생들 삼삼오오 본관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총학생회는 인 하대에 주안역 광장 집결을 확약하기 위하여 총학생회 비표(노란색종이에 학생회장 도장)를 소지한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인하대 총학생회(일부 복학생그룹)의 반대로 교외진출 좌절 (차후 써클연합회 주도로 교문진출)되어 10시 인천대 독자적으로 교 문진출을 결정하였다.
10시 본교생 600여명 본관 앞에 집결 총학생회장 홍성복(기계 79)의 인사말을 시작 으로 『군부독재 타도 민주화를 위한 학생총회』를 개최하였다. 학생들은 【계엄철 폐】【전두환 물러가라】【신현확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총회 열기를 돋구 었고 총회를 마치고 윤석진 부회장(건축 79)의 지휘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가두로 진출하였다. 본교 총 학생의 2/3이상이 참석한 대열이 도화5거리를 향할 때 최루탄과 사과탄 페퍼포그를 앞세운 경찰과 격돌 투석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일진일퇴를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극기를 들었던 심상준(독문 80)이 경찰에 연 행되었다. 주안역광장 집결이 사전에 경찰에 알려짐에 따라 주안역 진출을 강력히 저지하자 전술을 변경하여 학생대열은 인천교대의 합류를 위하여 제물포역 건너에 있었던 인천교대 교내로 진입하여 교대생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당시 교육대학은 남 학생들이 군사교육 과정(R. N. T. C)에 있어 학교측으로부터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 였다. 인천교대생(대부분이 여학생)과 합류한 본교생들은 교대 앞에서 경찰과 투석전 을 몇차레 벌인 후 주안역 집결을 위해 산개 하여 주안 역으로 향했으나 미리대기 중이던 경찰병력과 다시 투석전을 벌이다 철길을 통해 일부는 버스로 동인천역 광장 에 집결【전두환 퇴진】【노동삼권 보장하라】【계엄을 해제하라】등의 구호를 외치 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원석(영문 80)등 3명이 동부서로 연행되었다. 시위도중 경인지역 학생들의 서울역 집결 지침이 떨어지자 전철을 이용하여 속속 종 로 2가에모여 500여명의 인천대생은 종로2가 구 화신 앞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 이고 다시 안국동 한국일보 앞에서 또다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종로와 안국 동에서 벌인 인천대생의 치열한 투쟁은 타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안국동쪽에서 치열 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서울역으로 진출 역사적인 5.15서울역 싸움에 합류 10만의 학생과 시민이 하나되어 20만 서울역 민주화 투쟁에 동참 전두환 타도와 계엄해제, 민주화를 위한 역사적 투쟁의 대열에 당당히 함께 하였다. 이날의 싸움은 밤이 완전 히 깊어져서야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서울역 회군을 시작, 지역별로 각 대학으로 해 산하였다. 인천지역 대학은 동국대에서 철야를 결정하고 동국대 도서관에서 철야농 성에 들어갔다 이날 인천에서 연행된 본교생 4명은 7시경 모두 풀려났고, 그 시간 고려대에서는 경인지역 총학생회장 회의를 열어 시위 해산에 관해서 논의를 하였고 밤 1시경 경찰의 고대 진입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겨 회의를 계 속 하였다.
◈80년 5월 16일
5월 투쟁 학생총회 개최
▷전날 동국대에서 철야를 한 300여명은 학교로 돌아와 5월 15일 인천과 서울싸움에 대한 평가와 경인지구 총학생회장 회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책 동에 빌미를 줄 염려가 있다는 판다하에 일시적으로 시위 중단을 결정한 경인지역 총학생회장 회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후 계엄이 확산(당시 제주지역을 제외한 전 국에 계엄이 발효 중)될 경우 인천지역은 1차 영등포역 2차 용산역 3차 서울역 집 결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밤 이화여대에서 계속되었던 전국 총학생회장회의( 58개대 총학생회장 참석)장에 계엄군 난입 회의가 무산되고 다수의 학생회장 연행 본교 총학생회장 홍성복(기계 79)은 도주 후에 수배되게 되었다.
◈80년 5월 17일
0시부로 계엄 전국확산
▷5월 17일 0시부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다는 발표후 본교 정문에 탱크와 무장군인 배치, 선화여상 정문 무장군인 배치, 재단 정문 탱크와 무장군인 배치, 공대 뒤 운동 장에 계엄군 탱크와 무장군인 막사를 설치하여 진지 구축, 학생들은 일절 학내 진입 을 금지하였다. 100일 넘는 긴 시간 동안 휴교령이 내려졌다. 5월 17일 전에 약소하 였던 지시대로 영등포역 집결, 용산역 집결, 서울역 집결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무산 되고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또다시 17년이란 긴 시간 후퇴하게 되었고 광주의 비 극이 열리고 있었다.
총학생회장 홍성복(기계 79)제적 김대중 내란음모관련 수배, 부학생회장 윤석진(건 축 79)구속, 박종관(전자 79)구속, 심상준(독문 80)구속으로 80년 5월을 마감하였 다.
※이 글은 5.18광주 민중항쟁 20년을 맞아 인천대학의 80년 5월 상황을 인천대학에 한정지어 기록하려고 하였다.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재학생 후배들의 의견을 존중하려 합니다.
우리 학교의 민주화 운동 역사에 대한 작은 기록으로 의의를 가지려 한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 관련자들의 구술을 통하여 기술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흡한 부분은 앞으로 보다 많이 찾아내어 정확한 발자취를 찾아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