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tea 차나무(Camellia sinensis)의 어린 잎을 따서 가공한 것 또는 그것을 우려낸 음료.
'차'라는 말은 정확하게 차나무의 잎을 뜻하고,
넓게는 보리차·생강차·인삼차·두충차·감잎차·커피 등 기호음료 모두를 이르기도 한다.
역사 차는 커피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음료로서 그 음용 풍습이 중국에서 비롯되어 동서로 전파되었다.
현재 차의 기원지로 가장 유력시되는 곳은 중국의 쓰촨[四川] 내륙지방이며, 차 재배는 양쯔 강[揚子江]
남쪽 유역과 해안지방으로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타이와 미얀마 북부지역에서는 차잎을 절임으로 만들어 씹거나 먹는 풍속이 있다.
녹차와 홍차는 차잎에 더운 물을 부어 우러난 물만을 마시며, 말차는 가루로 만든 차잎 자체를 마신다.
중국 야생의 차나무가 윈난[雲南]·광시[廣西]에서 하이난 섬[海南島]까지 분포되었지만
이것이 음료로 널리 애음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苦'(씀바귀 고)라고 불렸으나
한(漢)나라 이후 쓰촨으로부터 양쯔 강 유역과 강남으로 차 마시는 습관이 전파되자
당대(唐代)에 이르러 '茶'라는 문자가 쓰였다.
그러나 차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BC 1세기 중엽에 왕포(王褒)가 쓴 〈동약 約〉에 나온다.
삼국시대의 오(吳)나라와 진(晉)나라 때는 쓰촨과 양쯔 강의 중·하류에 차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특히 남조시대(南朝時代)에는 바둥[巴東]·우창[武昌]·루장[盧江:안후이 성(安徹省)]·진능(晉陵) 등
고급차의 산지가 알려졌고, 당대에 이르러 남북중국 전체에 걸쳐 도시에서 일반 서민이 보통 음료로 마시게 되었다.
당의 중기에는 수도인 장안(長安)에 다관(茶館)이 생기고, 육우(陸羽)와 상백웅(常伯熊)이 〈
다경 茶經〉 등의 책을 지어 차 마시기의 보급에 앞장섰다.
9세기에 이르러 차는 중국인의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그 생산과 판매에 조정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차 상인들은 부를 쌓았다. 당대 이전의 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육우는 차를 번차(番茶)·산차(散茶:煎茶)·말차(末茶:粉末茶)·단차(團茶:固型茶)의 4종류로 구분했다.
이것은 당·송 시대 차의 기본적인 분류이며, 특히 단차는 그 시대의 독자적 제품이다.
단차는 질 좋은 차잎을 쪄서 수분과 기름기가 없어질 때까지 짠 다음 물을 부어 갈아 으깨고,
틀에 넣어 굳힘으로써 만들어진다. 이것은 표면이 조밀하기 때문에 납면차(蠟面茶)라고도 하고,
보통은 병차(餠茶)·편차(片茶) 등으로 불렸다.
궁중에 제공되는 것에는 용이나 봉황을 새겼기 때문에 용봉차(龍鳳茶)라고도 했다.
오나라와 송나라 때 푸젠[福建]의 건주(建州)가 특산지였고, 전(壙:약연의 일종)으로 분말로 된 말차를 만들어 마셨다.
그러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단차의 공납을 금하면서 단차는 점점 쇠퇴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녹차(산차)가 애용되었다.
그밖에도 재스민 꽃잎으로 만든 말리화차(茉梨花茶), 반발효의 우룽차[烏龍茶], 포종차(包種茶)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차의 유명한 산지로는 룽징[龍井]으로 유명한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를 비롯하여 푸젠·윈난·쓰촨 등이 있다.
수질이 좋지 않고, 내륙성 건조지역이 많은 중국에서는 차를 큰 뚜껑이 달린 물잔에다 대량으로 마시며,
우리나라에서 녹차를 마시는 법과 상당히 다르다. 당대에서 송대에 걸쳐 주변의 이민족,
특히 육식을 하고 말젖을 마시던 유목민 사이에 차 마시는 습관이 퍼졌고,
차를 말과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이 명대에도 계승되었다.
청대에는 차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이후 아편전쟁에 이르기까지 대외경제문제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국 한국에 차가 처음 전래된 것은 828년(흥덕왕 3) 신라의 사신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씨앗을 들여오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헌에는 그 이전부터 차를 마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부 승려와 화랑도들이 수행과 관련하여 차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귀족·사원 등으로 차가 보다 넓게 퍼졌고,
연등회·팔관회 등의 국가행사나 왕자·왕비의 책봉의식 때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다.
또한 차는 중요한 외교예물이었다.
이 시대의 인물들인 승려 의천(義天)을 비롯하여 임춘(林春)·이규보(李圭報)·한수(韓脩)·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이 차를 즐겼고, 다시(茶詩)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차 마시는 습관이 많이 쇠퇴했으나 16세기 이전까지는 왕실에서 다례(茶禮)가 행해졌고,
사원을 중심으로 다도의 전통이 이어졌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차 마시는 풍속이 쇠퇴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유행했으며,
대흥사의 초의(草衣)는 〈동다송 東茶頌〉을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는 등 다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한국차의 생산과 보급,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차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말 이후 다시 높아져 차에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설립되었고,
다도를 정규과목으로 설정한 대학들도 생겼다.
일본과 기타 아시아 국가 일본에 차 마시는 풍습이 전해진 것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초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서였다. 당시의 차는 중국에서 들여온 단다법(團茶法)으로 만든 것이며,
단차를 불에 쬐어 가루를 만들어 더운 물에 넣어 끓인 것이었다.
1191년 중국으로부터 차의 묘목이 들어오고 각지에서 차가 재배되었다.
그때까지 차는 사원을 중심으로 대개 약용으로 마셨으며,
말차는 약용 이상의 기호음료로 애호되었고, 투차(鬪茶) 같은 경기적·유희적 다회(茶會)가 성행했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초기에 전파된 녹차는 일반화되어 일본 국민음료가 되었다.
티베트·아라비아·몽골 등에는 그밖에 당대의 음다풍습이 전파되었고,
서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이란·터키에는 러시아의 사모바르에 의한 음다풍습이 전해졌다.
티베트에서는 빻은 단차를 소금·버터 등과 함께 수프같이 만들어 먹는다.
유럽 유럽인이 차라는 음료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중엽이었다.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고, 곧 스칸디나비아 제국, 프랑스, 영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후반 한때 지식인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나 값이 너무 비싸 커피가 국민음료로써 일반화되었다.
영국은 현재 세계 최대의 홍차 소비국이지만,
18세기 초기에는 녹차에 대한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반면 홍차 수요량은 매우 적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보통 녹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셨다.
러시아에서는 16세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차를 수입했다고 전해진다.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 1727년의 캬흐타 조약에 의한 육로 무역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