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천에서 구두 닦기나 하고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를 바라보면서 계속 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미리 남하 하셨으니 남한 어딘가에 게시겠지.
피란민들이 부산에 많이 몰려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산으로 갈 방법을 찾아보자.
남한 사정에 어두운 당시의 나로서는 어떻게 부산까지 갈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또 누구에게 물어 볼만한 마땅한 사람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인천에는 해군 경비부가 있다. 해군 함정은 자주 부산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해군 인천경비부가 있는 부둣가에서 구두를 닦기로 하였다.
해군들에게 공짜로 구두도 닦아주고 특히 정문에 있는 경비 헌병의 구두는 매일 거저 닦아 주었다. 그리고 경비부 안에 들어가 구두 닦는 허가를 받았다.
“병조장님 언제 부산가요?”
“나는 못가고 신병조가 곧 갈 걸”
“신병조 님이 누구야요? 어디 계셔요?”
신병조는 해군 72함의 위생 하사관이다.
매일 구두를 공짜로 닦아주며 잔심부름도 해주고 부산행을 위해 며칠 동안 공을 들였다. 겨우 해군 72함 의무실에 쑈리(하우스보이)로 딸아 갈수 있게 됐고 승선의 허가를 받았다.
그동안 신세지고 연평도에서부터 같이 배 타고 온 옹진형과 그 형수에게 작별을 고하고 구두 통을 돌려주고 배를 타게 되었다.
이분들은 섬에서 나오는 배에서 갑자기 만나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고 남조선에 대해 생소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분들이다.
인천부두에서 상륙정에 올라 외항에 정박 중인 72 군함에 승선 하였다. 신병조와 같이 의무실에 가서 군의관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군의관님은 너무 높은 분이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허리를 구부려 절만 하였다.
해군식 쑈리복장을 얻어 입고 부지런히 의무실 청소 위생병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잠은 의무실 옆에 간이침대에서 잤다.
이 함정은 서해 작전지에서 동해로 가는 길이었다. 훈련과 작전을 하며 여기저기 섬에 들리고 또 진해에서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를 훈련시키는 임무도 있어 한 무리의 생도들이 승선을 했다.
젊은 사관들의 생기 넘치는 생활을 보니 이 보잘 것 없는 구두 닦기 소년에게는 부럽기 한이 없고 딴 세상 사람들 같이 느껴졌다.
토요일 점검시간에는 함정 내 모든 수병, 하사관 장교들까지 긴장을 했다. 특히 해군사관생도들은 담배를 못 피우게 된 모양이었다. 매주말 실시되는 검열에 대비하여 손에 묻은 노란 담배 진을 지우기 위해 손가락을 마룻바닥에 비벼 씻으며 애를 썼다. 아세톤을 무친 솜을 가져다주니 쉽게 지울 수 있어 이 생도들에게는 의무실 쑈리가 대단한 인기였다.
어떤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하선도 했는데 그 백사장이 아주 기가 막히게 예쁜 황해도 장연 몽금포 해수욕장의 모래알 같아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곳 이름을 잊어 버려 한번 찾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한 달 넘게 항해하다 결국 부산항에 도착하니 이제 함정 의무실과는 작별해야 한다.
이제 이 함정은 아주 전방에 해당하는 동해로 가게 되어 나 같은 군인도 아니고 군속도 아닌 민간인 쑈리를 동행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무실의 신병조님은 나에게 그 귀한 닭털 침랑(sleeping bag)과 먹을 것을 좀 싸주었다.
내려준 곳은 부산 대교동 부둣가였다. 다시 오갈 데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날이 저물어가자 잘 데도 없으니 노숙을 하기 위해 골목어귀에 자리를 잡았다.
피란시절에는 노숙을 많이들 하여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기후가 온화하였다. 그런데 눈 오는 것을 보기 힘든 남쪽 부산에 그해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닭털 침랑위에 눈이 하야케 덮여 있었다.
피란민이 많이 모인다는 국제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려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시기의 국제시장 장사치기는 거의 모두가 함경도, 평안도, 서울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어디서 오셨어요.”
“혹시 황해도에서 나온 사람 아는 사람 없어요.”
배회하며 수소문 끝에 겨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황해도 곡산에서 온 사람이라면 삼춘을 알 것이다.
겨우 찾은 것은 삼춘을 아는 사람이 사리원 농업학교 동창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름이 김창후 씨였다. 다행이었다.
이분을 나를 데리고 구덕산 골짜기 당면공장으로 데려가서 숙소와 일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분에게는 내 나이 또래의 제양이와 그 형 선양이가 있었다. 이들과 같이 당면 국수 만드는 일을 하였다.
가다꾸리(녹말) 전분을 반죽하며 적당량의 명반을 넣고 가루 반죽이 질겨질 때까지 손으로 주물러 반죽을 만들었다. 물이 끓는 가마솥에 큰 구멍이 뚫린 냄비를 매달아 놓고 반죽을 담아 손바닥으로 두들기면 이 전분 반죽은 큰 구멍으로 내려오며 차차 가늘어졌다.
끓는 물에 들어가면서 익혀졌다. 익은 국수를 건져 찬물에 씻고 대나무에 걸어 밖에 내다 걸면 구덕산 찬바람에 얼어서 자연 냉동 건조가 된다. 찬물을 길어오고 당면을 나르는 일이 내 일들이었다.
가마니로 둘러 임시로 지은 공장 숙소에서 꼬부리고 자는데 그래도 배에서 얻어온 닭털 침랑은 나의 재산 목록 제1호로 추위를 견디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국에서 배워 왔다는 소위 당면 기술자에게 야단도 많이 맞으며 고된 일을 하면서 겨우 잠자리 제공 받고 밥 얻어먹으며 월급도 없이 일했다. 같이 일하는 제양이와 선양이는 사장 아들 이라고 쉬운 일을 시키나 어렵고 힘든 일은 나에게 할당 되었다.
이런 고된 일을 대신동 공설운동장 뒤 구덕산 골짜기에서 부산 시내구경 한번 못하고 거의 반년이나 계속 하였다. 그러자 육군 839부대의 부식 용달하는 사장을 만나 그 회사로 옮길 수 있었다.
시장에서 부식물을 사서 주면 자전거에 실어 나르고 여러 잔심부름도 하였다. 그래도 저녁에는 사장집 골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으니 피난 나온 후 최고의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 생활이 길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몇 달을 하였는데 부식 납품 용달 계약을 딴 사람에게 빼앗겨 일거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사장은 밀린 월급과 퇴직금으로 내가 심부름 하던 자전거를 나에게 주었다.
남한에 와서 아는 것이라고는 구두 닦기와 당면 만드는 것 밖에 몰랐는데 그래도 몇 달 동안은 시장 바닥에서 굴러먹으며 본 것도 많아졌다.
유일한 재산인 자전거로 그동안 단골로 다니던 가마보꼬(오댕), 뎀뿌라(튀김), 아부라아게(유부) 공장에서 이것을 가져다 피란민들이 많이 하고 있는 하꼬방(판잣집) 식당에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잠은 공장 창고 한 구석에 마련된 쪽방에서 상어 기름 짜는 아저씨와 같이 자고 아침밥은 기약 없이 아무것이나 요기하고 점심은 공장에서 얻어먹고 저녁은 팔다 남은 어묵 뎀뿌라로 대강 허기만을 면하고 살았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공장 청소를 해주고 뎀뿌라 만드는 준비를 도와주었다. 어묵 뎀뿌라는 상어 기름으로 튀겨진다. 지금은 아주 귀한 오메가3 상어 기름에 튀기는 어묵 뎀뿌라이다.
식용유가 귀한 시기였으니 상어 배속에서 나오는 내장을 끓이면 그곳에서 기름이 나오고 이를 튀김하는 공장에 배달해주는 기름 묻은 아저씨와 같이 생활 하였다. 생선 뎀뿌라가 기름 솥에서 나오면 자전거에 싣고 다음 우동 공장에 간다. 우동 몇 박스를 받아 싣고 아침 배달을 떠난다.
함경도 또순이 아주머니들이 피난살이에 아귀다툼을 하며 영도다리 옆 부둣가에 하꼬방을 짓고 식당을 하였다. 하꼬방 식당을 돌며 우동과 어묵 뎀뿌라 가마보꼬를 배달하며 멀리 초량 범일동까지 갔다.
정식 공장 직공은 아니었지만 공장 일꾼이 먹는 점심을 얻어먹을 때도 있고 하꼬방 식당에서 맘씨 좋은 아주머니가 우동 한 그릇 말아 줄때도 있었다. 이때는 모두 어려운 살림 이었으니 인심도 그리 후하지는 않고 남을 돕거나 선심을 쓴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오후는 아침에 외상으로 놓고 간 식당들로 수금을 갔다. 지독한 또순이 아줌마들은 외상 값 갑을 데에는 몹시 인색했다. 이리 핑계 저런 트집을 잡으며 돈 안주는 끈질기기는 함경도 또순이 아줌마들을 따라 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장사를 해보았으나 외상값은 안 걷혀지고 공장에서 받아온 물건 값을 갚으려니 내 빚만 늘어서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어졌다.
유일한 재산인 자전거를 팔아 빚을 청산하고 취직을 하기로 하였다.
이제는 공장에서 잘 수도 없어졌다.
서울서 온 피난민은 그래도 부산에 연고가 있거나 돈이 있어 집을 세들어 갈 수가 있었으나 이북 피난민은 아무런 연고가 없었음으로 영주동이나 보수동 산비탈에 땅을 고르고 하꼬방을 지어 살았다.
보수동 산비탈에 넓이가 약 3m, 길이가 4m 되게 터를 잡고 3부 널판지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보루박스를 가져다가 2평짜리 집을 지었다.
곧 겨울이 올 터이니 난방은 온돌 구들장을 놓기로 하고 구들장 놓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도와주고 기술을 배웠다.
연탄 불길이 구들장에 직접 닿으면 화력이 좋을 것 같아 깡통으로 만든 파이프로 연탄난로에서 구들장 바닥까지 직접 닿게 나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시공하니 나의 연탄 온돌방은 동네에서 제일 따뜻한 구들장 방이 되었다.
드디어 내 생애 최초의 집이 완성 되었다.
물은 아주 귀해서 새벽 4시에 산 밑 동네에서 5가론 통으로 한번 담아 가져오면 일주일동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새로 취직한 곳은 프린트사의 심부름꾼으로 등사하고 제본을 하는 일이었다. 등사 원지를 가리방에 긁어 등사판에 넣고 잉크 묻은 롤러로 밀고 왼손으로 종이를 빼내는 일이었다.
몇 달 동안 훈련 받으니 나의 종이 빼내는 속도는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고 8절 갱지 4천장을 쌓아 놓고 한번에 100장씩 등사판에 올려놓고 한번 집으면 헤아리지 않아도 꼭 100장씩 집혔다.
빠른 손놀림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참씩 구경을 하고 갔다.
해병대 사령부 작전과에서 그 유명한 해병 전사(戰史)인 “토솔산 작전상보”를 인쇄하기 위하여 용두산에 있었던 해병 사령부에 갔다. 일급 비밀서류이기 때문에 사령부에서 먹고 자면서 인쇄를 하고 제본을 하였다. 이 기간 중에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일요일은 사령부 영내 교회에 갈수 있었다. 교회에 나가 본지도 10년이 지났다.
나는 해주에서 해방 직후까지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으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를 모두 없어버려서 교회에 가지를 못했었다. 게다가 전쟁 통에는 교회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
사령부 교회에 비치된 찬송가책이 하도 가지고 싶어 하나를 슬쩍 가져다가 혼자 찬송가를 부르고 연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