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갯벌작가 이의웅 시인 상봉기]
박토薄土에 지핀 시의 등불, 조팝나무 연가
한기홍(갯벌문학 주간)
1. 드라마틱한 시인과의 상면
아마도 2001년도 한여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문단에도 창작물을 온라인상에 직접 올리는 인터넷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때였다. 필자의 등단 모지母紙 ‘문학세계’의 인터넷 작품방에 시 한편을 올리고는 집 앞 은행나무 밑에서 더위를 삭히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시인님 이시죠? 저 서울 이의웅입니다.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약간 가느다란 음색이면서도 영남사람 특유의 뚝심이 얼핏 느껴지는 젊고 밝은 목소리였다. 그간 몇 달 동안 인터넷을 통하여 이의웅 시인의 시작詩作을 감상하면서 그 마술적인 시적언어와 삶의 페이소스를 통찰하는 절묘한 시풍에 흠뻑 매료된 터였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까지도 시인을 오프라인 상에서는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어이구! 이선생님. 그동안 무척 뵙고 싶었습니다. 만사를 접고 뵙겠습니다.”
마침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갯벌문학회의 심종은 회장이 주말에 서울 장충단공원 위 호텔에서 문학공간사에서 수여하는 ‘공간문학상’을 수상하기로 되어 있어 그날 만나기로 시인과 약속했다. 상봉의 날, 수상식이 끝난 후 일행과 헤어져 약속장소인 장충단공원 전철역 벤치로 서둘러 나갔다. 전날 공원과 역전의 특성상 많은 인파를 추측하여 서로 간에 얼굴을 모르는 처지라 접선(?)방식을 논의한 결과, 시인께서 신문지를 말아 쥐고 있겠다는 언질이 있었다.
예상 외로 한적한 벤치에는 두어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신문을 말아 쥐고 서성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신문을 활짝 펼쳐서 보고 있는 초로의 신사 한분이 눈에 띄었다.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다. 넷net상에 오르는 시인의 작품들을 보면서 많아야 사십대 중반 갓 중년의 멋쟁이 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 또한 젊음과 박력이 넘치지 않았던가. 주춤거리고 있는데 벤치의 신사가 신문을 접으며 일어섰다.
“한기홍 시인님 아니십니까? 저 이의웅입니다.”
정장차림의 훤칠한 신사시인. 단아하고 중후한 외모에 밝고 건강한 미소를 선사하며 이의웅시인은 그렇게 필자의 문학역정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공원에서의 감격적인 회동 후, 시내의 민속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두 사람 모두 ‘의외였다’는 첫 대면의 덕담을 나누었다. 시인은 필자가 오십 대 쯤으로서 시적 경륜이 풍부한 사람으로 그간 인식하고 있었다했고, 필자는 시인께서 이제 갓 중년에 접어든 젊은 시인으로 알고 있었다고 놀라움을 토로했다. 기실 시인과 필자의 나이차는 21년이었다. 조혼풍습의 지난 시대로 치면 필자의 아버님 연배인 것이다. 인터넷의 급속한 팽창은 우리 사회에 노소불문老少不問과 신분 계층여부를 떠난 동호인들의 광범위한 회동문화를 창출해내었고, 요즘 회자되는 이른바 ‘소통문화疏通文化’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흔연히 주고받는 술잔과 대화 속에 더욱 필자가 놀란 것은 시인께서 평생을 공직생활에 봉직했다는 사실이다. 서울시 공무원으로서 본청 공보담당公報擔當으로 이미 재임 시에 필명을 떨쳤었고(시장 연설문작성 전담), 중랑구청 국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필자 또한 현재 지방공무원으로서 미관말직에 봉직하고 있으니, 공직 대선배에 대한 존경과 경탄에 주향이 식을 줄 몰랐다. 시인과 장충단공원에서의(신문을 표식으로 한) 드라마틱한 상봉은 그렇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내 심안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늘날 나이와 경륜을 초월해서 문향이 타오르면 흔쾌히 상봉하여 두주불사하는 시인과 필자와의 진한 시대정신을 떠올리면, 뿌듯함에 앞서 시인에 대한 감사와 존숭의 념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필자가 누리는 홍복弘福인 것이다.
2. 징한 그리움에의 침잠, 조팝나무꽃 애린愛隣에 함몰된 2002년도 시단詩壇
이른바 ‘댓글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한 때여서 네티즌 작가들은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거의 매일 창작시를 간단히 net상에 올려, 독자와 작가간의 촌평과 격려를 주고받던 2001년도. 고색창연한 육필시대의 졸업이라 그런지 장안의 인터넷 문학 사이트는 기성과 신인, 아마추어 문학도가 어우러져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물론 당시 조탁彫琢을 거치지 않은 즉흥시의 범람도 문제점으로 회자되었지만, 어디 문학인의 창작욕이 이처럼 용광로처럼 타오른 적이 있었던가.
과거에는 일부 다작시인 말고는 왠만한 시인은 1년에 십여 편 쓰면 다행이고, 그나마 시집출간은 5~6년 주기였다. 인터넷의 탄생은 문단에서도 커다란 충격이요 혁명이었다. 그러나 역시 문학의 본령은 아날로그 시대의 수없는 시어조탁과 올곧은 시정신의 구현을 정통으로 삼아야할 것임은 자명하다. 이의웅 시인의 첫 시집 ‘오동나무 한그루’ 때문일까? 당시 필자와 동료작가들은 시인을 ‘오동나무 시인’이라 불렀다. 시인의 하루가 멀다 올려지는 작품에 대한 독자들과 문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삶의 역정 굽이굽이마다 시인의 뇌리에 저장되었을 숙성된 희로애락의 가락과 정한이 정갈하게 걸러진 명주名酒의 개봉마냥 아름다운 시어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연작시 ‘술 이야기’와 ‘산사의 여인’ 시리즈는 명실공히 2001~2002년도를 뜨겁게 달군 인터넷 문학의 결정판이자, 현대문학이 새롭게 분류하기 시작한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이며 현란하기조차 한 시어의 탄생을 천명한 일대 사건이었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가히 ‘이의웅 신드롬’이라할 반향이 물결쳤고 시인의 상징어 ‘조팝나무 동동주 연가’는 화제어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당시 시인의 연작시들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소개되어 해외동포들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시인의 서정에 취하여 하루하루를 시인의 시가 상재되기를 고대하는 내용의 댓글들이 빗발쳤다. 연작시 ‘산사의 여인’에서 펼쳐지는 시인과 생면부지의 산사은거 중년 시나리오 여작가 '황수련’과의 인터넷상 현실공간에서 나누는 실시간 대화(댓글)의 애절하고 깊은 사모의 정한은 현장 논픽션시(non-fiction poetry)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할만하다.
국내에서는 강남의 모카페 여사장부터, 스님, 목회자, 방송국 프로듀서, 대학교수, 의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계층에 걸쳐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인의 창조력과 샘솟듯 뿜어 나오는 서정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연작시와 독자반응을 수록한 시집, ‘눈빛 마주치면 붉게 물들까’를 제2시집으로 발행. 2003 도서출판 천우)
시인의 시어는 정갈하면서도 강렬하다. 원래 술도 청주淸酒의 향취가 오래가는 법이요, 오동나무의 품위는 가야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가 넘쳐흐르면서도 마치 모네의 ‘수련’에서 보듯, 근대 유럽 명화의 세련미가 엿보이고 어느 순간 고졸古拙함 마저 갖춘 시인의 선도 높은 작풍에 전율한다. 거기에 덧붙여 독자로 하여금 향정신성 약제를 들이마신 듯 시인과 시어에 탐닉하게 만드는 시인의 마력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문인 개개인의 시에 대한 평가는 평자에 따라 각각 다르다할지라도, 명시에 대해 느끼는 감동은 동일하다 할 것이다.
감동과 전율을 주는 시. 바로 이의웅 시인의 시편들이다. 시인과 ‘풍경소리’ 동인이자, 막역지우인 이창년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의 시인에 대한 시 촌평을 옮겨본다.
이시인의 섬세한 감성의 눈은 지극히 미세한 사물을 관류하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 속의 의식으로 찰나적 표현으로 시를 형상화 하고 있어 마술적인 신비성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인의 시적 피부는 차라리 여린 꽃잎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시인은 일단 흡입력을 가지고 시를 가까이 할 수 있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시는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감성으로 표출하여 감성에 자극되는 것이 시의 정통적 본질이라고 한다면, 정서적 감동은 자연과 인생의 일체 내용의 아름다움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문방사우, 오우가, 행림칠우의 문향만보文香漫步
시인과는 2001년도부터 현재까지 서로의 문향과 포부를 흠모하며, 연륜을 초월하여 인생과 문학을 동행하는 동인들이 있다. 초기에는 등단지 ‘문학세계’의 서울 행사를 중심으로 부정기적으로 상봉하여 밤이 이슥해지도록 종로골목에서 주담에 문향을 사르곤 했는데, 당시 시인을 위시하여 필자와 윤철환 시인, 이가을 시인, 배현순 시인, 윤미라 시인, 대전의 한량 김보현 시인, 멀리 울산에서 상경한 허영미 시인, 간혹 동석하는 갯벌문학의 심종은 회장과 황문권 시인 등이었다.
종로골목의 주점 ‘삼경원三驚苑’은 그때엔 문인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명소였는데, 어느 날인가 필자의 주흥이 도도하여 동석한 문인들과의 주흥을 ‘삼경원의 풍운’ 이라는 졸시로 인터넷에 올려 모두들 박장대소한 바도 있다. ‘문방사우文房四友’는 2004년도 쯤 필자와 이의웅 시인, 이가을 시인, 김광 시인이 자주 만나며 주석에서 김광 시인이 즉석 명명한 회합의 명칭이고, ‘오우가五友歌’ 역시 김광 시인의 흔쾌한 주향으로 이름 하였는데, 배현순 시인이 포함된 모임의 애칭이다.
‘행림칠우杏林七隅’는 2006년 쯤 필자가 서울 시흥동 은행마을의 주점 예술촌(벽파 김철진 시인 사모님 경영)에서 명명한 별칭인데, ‘은행나무 우거진 마을의 일곱 모퉁이’란 뜻으로 옛 선비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매한 경지를 모퉁이에서라도 경배할 수 있으면 후학으로서 원이 없겠다는 겸손의 뜻으로 지었다. 당시 동석한 일곱 명의 문인들은 필자와 이의웅 시인, 강동문인회장인 윤철환 시인, 남양주문인협회장 서병성 시인, 이가을 시인, 배현순 시인과 김광 시인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칠순의 윤철환 시인께선 사진작가로서 항상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주흥이 무르익으면 주석을 촬영하여 주었고, 육순의 서병성 시인께선 주탁에 앉으면 품속에서 개인소지용 술잔을 꺼내놓고 독작하며 돌림잔을 받지 않았다. 실로 고매한 인품과 호탕한 기개를 가진 분들이다. 일단 주흥이 달아오르면 모두의 머리 위로 학이 날고, 오동가지에 봉황이 내려앉은 듯하여 풍진 따윈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2008년도 지난봄에는 이의웅 시인과 필자를 포함한 행림칠우 몇 분이 오붓하게 1박2일 코스로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날 동반기행 약속만 허공에 새겨놓으며 서로가 아쉬워하던 숙원사업을 결행한 것이다.
오동나무 이의웅 시인.
이 시대 우리 시단의 크고 웅숭깊은 시산주詩山主 중 한분이 틀림없다. 오늘날이 인터넷 문학의 전성기라지만, 시정신은커녕 기본 작법마저 도외시한 작품들이 범람하는 정보화 시대의 박토薄土에 지핀 시인의 등불이 정녕 소중하고 존경스럽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 세련미를 장착한 시인의 시세계는 현금 한국문단에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기법으로서 ‘조팝나무 연가’란 새로운 상징을 부여한 시어의 연금술사로 우리 곁에 빙긋 웃고 있다. 시인의 연년세세 강녕과 파천황의 신작을 고대하면서 추사선생이 선물한 죽로지실竹爐止室의 기쁨으로 맺는다.
(2008 . 8 . 29 한비 한기홍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