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태풍 프라피룬
김인기
태풍 프라피룬이 와서 추수 앞둔 들판을 휘저었다. 특히 바람이 문제였다. 과수원으로 휘몰아친 기세에 애써 가꾼 과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낙담한 농민들이 울상을 지었다. 해마다 몇 차례씩 닥치는 태풍이니, 마땅한 대비책이 있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은 늘 한탄만 한다. 아직은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역량이 미미한가? 아니면 게으른 인간들의 타성 때문일까? 나는 그것조차 사실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인들한테는 이런 일이 대체로 무관심의 영역에 속한다. 이게 실지로 그렇지도 않지만, 자기 눈에 보이는 피해만 없으면 태풍이야 불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 직접적인 연고만 없다면 농민들의 고통도 다 남의 일이 되고 만다. 하기야 어느 개인이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안을 수는 없다.
과연 해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무관심이란 건 다만 이런 일에만 국한되지가 않는다. 경제가 무너져 길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도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고, 누가 억울한 사연으로 자살을 해도 내가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누가 고의로 부도를 내고 이런저런 명분으로 사기를 쳐도 당장 내한테 영향이 없으면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내 식역에 그런 건 아예 없다.
그러나 이게 사실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다.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 공동체의 한 구석이 무너지는 데도 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게 타당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내게도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남들의 불행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내가 늘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이 동일한 사태에 직면한다고 해서 동일한 체험을 하는 건 아니다. 생각하고 배우는 게 다 다르니까, 그 체험의 내용마저 다 다르다. 물론 보통 사람들도 이런 걸 다 잘 안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그 체험의 차원을 높이겠다고 노력하는 일도 거의 없다.
때때로 하루 저녁에 수천만 원을 술값으로 탕진하는 녀석들의 행태를 소문으로 듣는다. 그 돈이면 여러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다. 그런데도 놈들은 그걸로 가시나들 엉덩이나 만지는데 쓰다니, 어째 인간들이 저리도 철딱서니가 없나?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이다. 혹자는 그런 인간을 '통 큰 사내'로 떠받들며, 혹자는 적개심 때문에 그런 놈을 당장 죽이자 한다. 어떤 이는 체념인지 동정인지 모를 이런 말도 한다. "그런 놈은 그렇게라도 돈을 써야 한다."
이러니 사람마다 그 결과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누가 하루 아침에 어떤 생각을 하다가 금방 잊는 게 아니다. 저마다 오랜 세월을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사는데, 이게 어찌 가볍게 여길 일이랴. 그래, 과연 누가 일 년 동안 달리 생각한다고 해서 그 인생이 달라지진 않을지 몰라. 그러나 누구라도 그 생각을 십 년 동안 지속하면 그 삶은 분명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냉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일도 않고 실컷 노는데, 나는 죽어라 일해도 돈이 없다."
"뭐, 그게 잘하는 짓도 아닌데, 그게 부러워요?"
"그럼요. 나도 그런 데 가서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며 놀고 싶죠."
언젠가 내가 누구와 나눈 이야기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할 수 있으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는 자신이 한 이야기조차 기억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시 그 문제의 성격을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화엄경 한 질이 호화 저택 열 채보다 억만배는 더 소중한 줄 알지 못하면 그 인간도 더 볼 것이 없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위대한 책들이 많으냐. 누가 만리장성을 준다 해도 선문염송 한 질과 바꾸지 않겠다는 그 자부심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이런 인간들과 뭘 더 말하랴.
내가 모처럼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났더니, 이들이 날더러 언제까지나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아라고 한다. 기용이도 그러고, 용한이도 그런다. 병욱이도 덩달아 그런다. 이번엔 정선이를 만나진 못했지만, 아마도 그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내 모든 친구들의 마음이 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보기에 내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과연 순수한 사람일까? 나 자신부터 당장 혼미하다. 그리고 순수하다는 그 개념조차 모호하다. 더구나 나는 여태 단순하게 살고자 한 적은 있었어도 순수하게 살고자 한 적은 없었다. 문득 궁금하다. 과연 어떤 게 순수한 것일까? 한편으로는 물정 모른다는 뜻인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물욕에 무관하다는 뜻인 것도 같다.
우리들은 이십대 초반에 처음 만나 벌써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한때는 또래 처녀들에게나 가 있었던 마음이 이제는 자식들에게 가 있다. 생각하면 그간의 세월이 꿈만 같다. 하기야 그래도 내 성품이야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내 기호나 습성도 그다지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내게서 이제는 그들이 잊어버린 꿈을 보는지 모르겠다.
내가 진실로 얼마나 순수한 인간이냐 하는 사실과는 별도로, 나는 자신을 그렇게 순수하다 봐 주는 그 우정이 고맙다. 내 아내는 그들의 호감만큼이나 생활이 고단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그들이 내게 그러더라는 내 전언(傳言)에 도리어 고개를 가로젓지만, 그러나 그거야 다 그가 철 모르는 신랑을 둔 죄가 아니랴. 그러니 아내는 고난을 자신의 팔자려니 여기고 내내 견뎌야 하리라.
나는 벗들이 건전하게 살기를 바란다. 나는 이들이 이 혼탁한 시절에도 아름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만약 내게 작으나마 순수한 구석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소망일 것이다. 나는 이들이 구태여 출세하여 돈 많이 벌기를 바라지도 않고, 이들이 억지로 권력자가 되어 행세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건 내 관심사도 아니다. 나로선 이들이 늘 성실하게 살면 그것으로 내내 족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때로는 나도 친구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언제나 순수한 그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설령 그게 백일몽일지언정 나는 그 순수 속에서 행복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세사를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그러니 내게 어찌 마냥 순수한 마음만 있으랴.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좋은 인간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사실은 자신이 더 나쁜 놈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집에서 처자식과 맥주 마시고 고기 구워 먹는 게 행복의 전부이다. 이게 참 상상하기에도 어렵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저 사람의 얼굴을 보며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바랄 바가 없다. 심지어 이런 사람도 있다. 그런 게 어찌 행복일 수 있느냐는 내 반문은 잘못이다. 행복감이야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누가 그걸 힐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일만으로 행복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누가 내게 자신의 순수성을 묻는다면 이에 대한 내 답변은 궁하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런 답변을 미리 준비할 것도 없어 보인다. 내 언제 순수를 지향하며 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의사는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원칙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내내 지키고 싶다. 산천도 변하고, 시절도 변하니, 사람인들 변하지 않으랴. 그러나 나는 이런 열정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리하여 나는 일생을 일관하여 산 분들을 존중한다. 한 직업인으로서도 그렇고, 한 생활인으로서도 그렇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나이 스물에 이미 길을 정하여 백발이 성성하도록 분투한 그 생애에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 설령 내가 남들한테 존경이야 받지 못하더라도, 내 생애가 그렇게 장엄하고 치열했으면 좋겠다.
태풍 프라피룬이 지난 자리로 새로운 태풍 사오마이가 온다는 예보가 있자,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데는 아예 무심한 사람들도 저마다 분주하다. 그들은 산으로 들로 놀러다닐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그러고는 그들이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소주를 마셨다. 태풍이 지나가면 어디로 가서 실컷 놀아 보나?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그걸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