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세이' 문학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수필'이 서양의 '에세이'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현실적으로 그렇다>고 알고 있는 줄로 안다. 문학이론상으로는 이론서들마다 <서양의 '에세이'와 우리의 '수필'이 어원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수필'이 서양의 '에세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고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상 두 문학이 다른 면이 있는 것을 어찌하든지 하나로 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독자적인 수필 이론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즉 그래서 서양의 이론에다가 우리 것을 이론적으로 접붙임 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론이라는 뜻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수필을 베이콘 쪽 보다는 찰스 램 쪽이라고 찰스 램에다가 접목을 시켜 보려는 시도도 엿보이는데 이 역시 우리의 수필문학을 학문적으로 당당하게 세워 줄 이론이 없기 때문에 생긴 구차한 몸짓이 아닐런지? 찰스 램의 수필이 시나 소설 같은 없는 데서 유를 창조하는 순수 창작문학이 아니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필자가 번역 본으로 읽어 본 찰스 램의 작품 중 창작수필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저 유명한 <꿈 속의 아이들> 한 편 정도하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에세이문학 작품들이었다. 그러므로 찰스 램도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순수 창작문에 수필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찰스 램의 문학에다가 자꾸 접목을 시켜 보려고 하는 시도는 그야말로 동양의 미인보고 자꾸 서양 미인을 닮았다고 우기는 격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수필문학 이론은 서양의 문학 이론에다가 일부 동양적 해석을 가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이론서 몇 권만 읽어 보면 금방 그것이 눈에 들어 온다. 그 숨길 수 없는 예가 문학 이론서들 마다 빠트리지 않고 거론하고 있는 이름이 몽테뉴와 홍매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몽테뉴와 홍매라는 이름만 나왔다 하면 거기서 고만 입을 다물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 이상의 이론 전개가 없는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이'와 홍매의 '隨筆'을 합쳐서 "수필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결론을 내어 놓은 것이 우리 수필문학 이론의 처음과 나중 전부 다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우리 수필문학이 <여기의 문학>으로 문학적 서자 대접을 받아 오다가 요즘에 와서는 그나마도 못 되는 <신변잡기>로 전락 해 버린 근본 원인이었던 것이다. 생각 해 보라! 솔직히 말해서 시인 소설가들이 수필가들을 가리켜서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론 정립 조차도 안 된 글을 쓰면서 문학 한다고들 고개 쳐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이 말은 필자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한 두 사람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조사한 <수필가여 다시는 '붓 가는 대로'를 말하지 맙시다>를 읽어 보시라. 두고 두고 여러 뜻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통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차마 솔직한 표현으로는 말을 못하고 너무나 점잖으신 표현으로 말씀들을 해 오셨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점잔 빼고 말고 할 것도 없게 되었다. 자존심 같은 것 돌아 볼 처지가 아닌 것이다. 당장에 우리들의 금쪽같은 자식인 '에세이' 문학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살려내야 된다. 우리의 수필문학이 문학 이론적으로는 서양의 '에세이' 이론을 가지고 실제 창작은 우리 식의 순수 창작문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집필을 하는 모순된 글 쓰기를 몇 십 년 되풀이 해 오는 동안 서서히 에세이도 죽어가고 수필도 살아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수필문학은 서양의 '에세이'도 아니고 우리가 지향 해온 순수 창작수필도 아닌 그야말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문학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저런 논의에 앞서 실제로 문단에 발표되고 있는 수필 작품들을 보시라. 우리가 참으로 문학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에세이'인지 창작수필인지는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왜 '에세이'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정체불명의 글들을 놓고 오히려 창작수필작품인체들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 오기를 몇 십 년 되풀이 하다 보니 이제는 수필(에세이)독자란 수필독자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수필문단에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다는 소리가 무슨 말인가? 바로 수필을 쓰는 사람도 작가이고 읽는 사람도 작가들 뿐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실제로 수필집 한 권을 출판 해 보시라! 몇 사람이나 책을 사 보는 독자가 있는가? 수필집 한 권 내느라 없는 돈 몇 백 만원씩 끌어다 썼는데 정작 책이 나와도 사 보는 독자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아는 작가들에게 보내려고 하니 우편료가 출판비 보다 더 들고 있지 않은가?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그 근본 이유가 수필문학의 이론 정립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에세이'가 무엇이고 창작 수필이 무엇인지 알아야 '에세이'를 쓰든지 창작수필을 쓰든지 할 것이 아닌가? '에세이'가 무엇이고 창작수필이 무엇인지 알아야 이것은 에세이라고 말을 하고 저것은 수필이라고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르니까 아무것이나 다 '에세이'이고 아무것이나 다 수필이 되다 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문단에 '에세이'가 무엇이고 창작수필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말 해 준 사람(문학이론서)이 있었는가? 그런 책이 있었는가? 필자 자신도 창작 수필에 대해서 단 한 줄의 이론도 읽은 일도 배운 일도 없다.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 없었으니까! <수필문학의 정신>에 관한 글들은 많이 발표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정신과 이론은 다른 것이다. 이론이 없이 정신만 말을 하다 보면 오히려 오해가 생기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광섭 선생의 "수필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라는 수필문학의 정신에 관한 한마디 말이 아닌가? 그 말은 이론이 아닌 수필문학의 정신에 관한 말이었다. 정신에 관한 말은, 특별히 문학적 정신에 관한 말은 많은 경우 비유적인 표현을 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청자연적"이 아닌가! "청자연적"은 수필의 정신에 관한 비유적 표현이지 이론이 아니다. 김광섭 선생의 "붓 가는 대로"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론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 이론을 읽어보려고 아무리 책을 찾아 보아도 그런 책이 없는 것이다. "붓 가는 대로" 한마디 밖에! 필자는 바로 필자 자신의 이 같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 수필문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수필문학 이론> 부재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필자가 조사 해 본 바로는 서양의 '에세이' 이론은 <있는 것의 토의의 문학>으로 소재에서 작의를 얻는 것부터가 창작수필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세이'는 창작수필처럼 소재로부터 창작영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나 의미나 해석의 작의를 얻어서 그것을 작품의 제재로 삼아 만들어 지는 문학이다. 그러나 창작 수필은 다른 장르의 순수 창작문학처럼 소재로부터 창작영감을 얻어서 그것을 작품의 제재로 삼아 창작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에세이와 창작수필은 그 발상부터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수필문학 이론이 없으므로 '에세이'와 창작수필간의 분별이 없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문학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같은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누가 필자에게 창작수필 이론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는가? 그렇다! 필자에게 창작수필 이론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가 졸고 <대한민국의 문예수필은 창작문학이다>에서 거듭 밝히고 있는 대로 필자에게 창작수필 이론을 가르쳐 준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아닌 우리들의 선배 작가들이다. 예를 들면 윤오영이나 피천득 그리고 유병근, 정목일, 윤희경 같은 선배 수필작가들이며 그 외 수 많은 창작수필 작품을 내어 놓고 있는 작가들이었다. 필자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창작 수필 이론을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필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저들의 작품을 읽어 보면 거기에 '에세이' 이론도 나오고 창작수필 이론도 나온다. 작가란 일면 이론가이기도 한 이유는 그가 만드는 작품 속에는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되어져 가는 이론이 자동적으로 포함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윤오영도 피천득도 유병근도 정목일도 윤희경도 그 외 다른 작가들도 모두 에세이도 쓰고 있고 창작수필 작품도 쓰고 있다. 저들에게서 '에세이'란 무엇이고 창작수필이란 무엇인지 배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배운 그 이론들을 내어 놓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의 수필문학 이론을 정립하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을 마다 할 이유가 무엇인가? 수필문학 이론이 정립되면 손해 볼 사람이라도 있는가? 백 년 동안 문학의 서자 노릇을 하였으면 됐지 그것도 부족해서 더 하자는 말인가?
2. 창작수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인류 문명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전에 없던 놀라운 과학적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특별히 2차 대전 이후로 가일층 예측 불허의 변신을 거듭하여 오다가 세기말에 들어서자 마치 숨어 있던 공용이라도 튀어 나오 듯한 컴퓨터로 말미암아 세상은 하루 아침에 디지털이라는 미지의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같은 과학적 변신을 한 마디로 <이성적 활동의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세상의 머리는 지금 너무 지나치도록 똑똑해 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머리는 복제 양을 만들어낸 데 이어 복제 개를 만들어내고, 마침내는 이제 막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단계에 까지 오게 되었다. 이 보다 더 어떻게 인간의 머리가 똑똑해 질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 눈앞의 디지털 혁명은 이 정도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다. 장차는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현대인의 머리 속에서 튀어 나오려는지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지금은 천재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현대인 모두가 다 머리로는 천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인의 마음은 어떠한가? 필자는 지금 이렇게 묻고 나서 잠시 무엇이라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앉아 있다. 현대인의 마음의 황폐화는 그 동안 한 세기를 넘길 때 마다 말세라고 개탄 해 오던 말들이 다 헛말이었다는 느낌을 안 가질 수가 없다. 현대야 말로 말세라고 절망적 한숨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마음을 잃어버렸다. 마음이 실종된 인간군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다. 정치판을 보라! 그 어디에 마음이 있는가! 학교를 보라! 시장을 보라! 공장엘 가 보라! 그 어디에 마음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가! 경제, 문화, 예술, 그 어디에도 마음 하나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로보트는 왜 만들어 내자고 하는가? 그까짓 것 만들어서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현대인이 바로 로보트가 아닌가? 머리만 똑똑하고 가슴은 없는 로보트들! 현대인의 이 잃어버린 마음을 누가 어떻게 어디에 가서 찾아 올 것인가? 만약에 그런 문학이 있다면 우리 문학인들이 앞 장 서서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문학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창작수필 문학인 것이다. 창작수필은 마음의 문학인 까닭이다. '에세이' 문학만 해도 마음 쪽 보다는 이성 쪽의 문학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필자가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 바로 이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직접적 의미 전달 보다 감성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래서 필자는 가능한 문학적 형상화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에세이'의 한계를 넘어 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창작수필은 순전한 마음의 문학인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찾을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문학이 아닌 마음의 문학일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현대인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달프기 때문이다. 마음이 외롭기 때문이다. 마음의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 수필이 일어서야 된다고 필자는 믿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창작수필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에세이도 아니고 창작수필도 아닌 우리 수필계의 글쓰기인 것이다. 먼저 필자 자신의 작품부터 보자. 필자의 작품집에 실려 있는 작품 36편 중 창작조건을 갖춘 창작수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두 편 뿐이다. 나머지는 다 에세이작품들이다. 그러나 필자의 작품집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창작수필집>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행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도 필자의 작품집을 평하여 36편의 작품 중 창작수필 작품은 두 편 뿐이고 나머지 34편은 모두 에세이 작품인데 그 문학적 이유는 이러 저러 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비평 작업을 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 아무도 그 같은 비평 작업을 해 주지 않는가? 그 이유는 다른 것 아니다. 아무도 그런 식의 비평 작업을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 아무도 그런 식의 비평작업을 해 본 일이 없는가? 수필도 창작문학이라고 외쳐댄 지가 벌써 얼만데 아직도 작품집 한 권을 놓고 <창작>과 <비창작>을 가릴 줄 조차 모른단 말인가! 그럴 수 밖에! 아무도(아무 문학 이론서도) 창작수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무도 어떤 것을 창작수필이라 해야 하고 어떤 것을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문예수필> 혹은 <창작수필>이라는 말만 할 줄 알았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조차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이 나라의 수필작가 중 한 분이시라면 필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말에 대해서 기분이 상하든지 동의를 하든지 어쨌든 마음이 움직이실 것이다. 마음이 상하신다면 필자의 말에 동의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의 할 수 없는 이유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요. 그 동의 할 수 없는 이유란 선생님의 창작이론일 테니까 말입니다. 왜 선생님 혼자서만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창작수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이 좋은 창작수필, 세기말의 마음을 잃어 버린 시대에 나부터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길을 나서는 문학을 할 수 있도록 창작수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지금 우리 수필문단에서 쓰고 있는 글들의 주류는 창작수필 작품이 아니다. <창작적인> 작품들일 뿐이다. 필자의 작품부터가 그렇다. 창작적인 모양만 있지 창작품은 아니다. <창작적>이라는 것이 곧 <창작>은 아니다. 그런데 <창작적인 것>을 가지고 <창작품>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수필문단의 현실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수필문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문학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에세이문학의 가치는 그것대로 땅에 떨어지고 있고 저 아름다운 창작 수필은 꽃봉오리 속에서 꽃 한번 활짝 피워 보지 못한 채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문학은 에세이문학대로 살려야 되고 창작수필은 창작수필대로 활짝 꽃을 피우게 해야 된다. '에세이'가 부끄러워서 <창작적인 것>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라도 가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장르의 문학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소설도 있고 시도 있지 않느냐!
우리는 에세이는 에세이 대로 당당하게 쓰고 창작수필은 창작수필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쓰는 <정직한 문학의 시대>를 열어가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세이를 쓸 때는 정확하게 에세이가 무엇인지 알고 써야 되고 창작수필을 쓸 때는 정확하게 창작수필이 무엇인지 알고 써야 된다. 더 이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글쓰기를 계속하다가는 수필이 <신변잡기> 정도가 아니라 <문학의 짝퉁> 소리까지 듣게 될지, 실로 예측하기 조차 두렵지 않느냐. 창작문학이 살기 위해서는 <창작>이 무엇이고 <비창작>이 무엇인지 말 해 주는 사람(문학이론서)이 반드시 있어야지만 된다. 그리하여 마음을 송두리 채 잃어버리고 있는 이 시대에 <마음의 문학>의 꽃을 어서 활짝 피워내야지만 된다. 이걸 싫다고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걸 마다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 이상 이 일을 지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李寬熙
서라벌 예대 수학 美 패시픽 크리스찬 칼리지 졸업 美洲 '한국일보'문예로 시 등단 美洲 '한국일보'문예로 소설 등단 '현대문학'으로 수필 등단 시집: '사랑하고 죽으리라' 소설집 : '아내의 천국' 수필집 : '꽃과 여인을 노래 할 수 없는 시대' 현재 : 'e-수필' 컴퓨터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