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首露王墓)은 현재 김해시 서상동에 있습니다 (현재 사진의 수로왕릉은 정확한 축조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은 가락국(AD 42~532년)의 시초를 연 왕입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승하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의 빈궁(殯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 묘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해시 수로왕릉 (원래는 이런 조선식 무덤형태가 아니라 고려대에만 해도 신궁같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무덤발굴과 함께 가루로 사라진 두 미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의 '수로왕묘'에 기이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유원은 참고로 오성과 한음의 그 오성 이항복의 9세손이기도 합니다.
그가 유배중에 집필한 임하필기중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중세-조선까지의 문물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텍스트인데,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근간으로 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회강(東史會綱), 여사제강(麗史提綱), 해동역사(海東繹史) 및 중국 역대의 사서와 선유(先儒)의 저작을 참조하였다고 필자가 밝히고 있습니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의 역사와 문물, 제도에 대해서는 주로 중국의 정사나 고려도경등도 많이 참조하였고, 일본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같은 저작도 쓰였습니다. 이 문헌지장편에 바로 수로왕릉에 대한 '발굴'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수로왕묘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그 묘를 발굴하였다. 관 속은 금옥(金玉)으로 염(斂)하였으며, 두개골의 크기가 구리 동이[銅盆]만 하였다. 관 밖에는 두 미인(美人)이 있어 얼굴빛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는데, 꺼내어 광(壙) 안에 두자 그 즉시 부스스 사라졌다. 아마도 당시의 순장자(殉葬者)일 것이다.
그런데 이 원문은 그 전대인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 19권]에 등장합니다. 미녀들의 나이가 20세정도라고 적혀있는 것이 더 세부적입니다.
壬辰年後。倭賊發金海首露王墓。壙中甚闊。頭骨大如銅盆。手足脛骨亦甚偉。柩傍有二女。面貌如生。年可二十。出置壙外。則旋卽銷滅。蓋其殉葬者也。
이외에도 더 후대인 18세기 [연려실기술]에도 실려있는데 원전은 [동문광고]라고 되어 있고, 신라시대에 존재하던 수로왕릉 옆의 '사당'에 관한 이야기까지 실려 더 자세합니다. 이 기술에는 더 고대인 '신라대'의 기록까지 전합니다. 이때의 기록은 신화적입니다. 그뒤의 기록은 임란대의 도굴로 같은 내용입니다.
수로왕의 사당은 수릉(首陵) 옆에 있다. 신라 말기에 영규(英規)라는 자가 사당의 음식을 훔쳐 사신(邪神)의 제사에 썼는데, 뒤에 사당으로 들어갈 때 대들보[樑]가 부러져 압사(壓死)했다. 뒤에 도적이 떼를 지어 사당으로 들어가서 제기(祭器)를 훔쳐 내니, 홀연히 갑옷 입은 맹사(猛士)가 활을 가지고 사당으로부터 나와서 도적들을 쏘므로, 도적들이 흩어졌다가 며칠 뒤에 다시 가 보니, 크기가 3장(丈)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아홉 사람을 물어 죽였다. 국조(國朝)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그 무덤을 파 보니 관 속에 금과 옥이 들어 있었으며, 두골(頭骨)의 크기는 구리 동이[銅盆]만 하고, 관 밖에 두 미인이 있어 얼굴 빛이 산 사람 같았는데, 무덤 밖에 내어 놓으니, 햇빛을 보자 곧 녹아 버렸다. 이는 대개 당시에 순장(旬葬)한 사람인 것이다. 《동문광고》
즉 임진년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왜구가 김해에 입성해서 (아마도 1592년 진주성전투) 이 묘지를 발굴했는데, 이 때까지도 수로왕의 묘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던 기록입니다. 무려 1400년간 도굴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수로왕묘는 실록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세종때 (1430년대) 엉망이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 87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10월 4일(기묘)
김해 읍성에 있는 수로왕 능침에 표석을 세우기를 청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순시차로 김해(金海)에 이르러 친히 살펴보온즉, 읍내성[邑城] 서편 길옆에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의 능침(陵寢)이 수전(水田) 가운데에 침몰되어 있었는데, 혹은 길을 내어 짓밟으며 혹은 마소를 방목(放牧)하기도 하오니, 다만 마음가짐이 소홀하고 행위가 무례한 것뿐이 아니옵고, 금제(禁制)하는 법률도 있사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수로왕이 비록 해변 한구석에서 나라를 세웠고, 또 알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사오나, 나라 다스리기를 1백여 년이나 하였으며, 나라를 계승한 것도 거의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신라나 백제의 시조에 비하오면 그 공이 비록 우열은 있사오나, 상고 시대에 있어서 농사를 힘쓰는 것으로 나라를 창립하여 백성들이 그 은덕으로 한편에서 편안히 살았사오니, 비옵건대, 신라 시조를 숭앙(崇仰)하던 예전(禮典)에 의하여 그 제도와 예절을 참작하여 능 옆 사방 50보 안에 있는 밭은 모두 묵히게 하여 갈고 심는 것을 금지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구역의 경계를 정하고 표석을 세우게 하옵시되, 수호하는 1, 2호(戶)를 선정하여 때때로 소제하게 하와 포장하는 예절을 베풀게 하옵소서.”
하매, 예조로 내려보내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수로왕 능침에 표석을 세우고 수호하는 사람을 두게 할 필요는 없으나, 단지 사면(四面)으로 각각 30보씩을 한정하여 밭갈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즉, 논 한가운데에 잠겨있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도굴'에 대한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기록이 나오는 '선조'대에도 전쟁이 끝난 후 수로왕묘를 곧바로 제대로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음이 나옵니다. 도굴기록 10년후인 1603년의 일입니다.
전대 임금의 묘를 논하다.
능묘는 다음과 같다.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는 노산군(魯山君)의 묘,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의 경내에 있는 소목릉(昭穆陵) 열 곳, 경상도, 김해(金海)에 있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 경주(慶州)에 있는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능, 김춘추(金春秋)의 능, 김양(金陽)의 묘, 미추왕(味鄒王)의 능, 효소왕(孝昭王)의 능, 선덕왕(善德王)의 능,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묘, 중략.
그런데, 그 후대인 영조대 (18세기)에도 이 임진왜란때의 '왜병 도굴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 122권, 50년(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년) 6월 1일(계미)
청도 유학 김은이 상소하여 수로왕릉의 수호를 소홀히 하지 말 것등을 청하다
청도(淸道)의 유학(幼學) 김은(金垽) 등이 상소를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인데, 하늘이 경사스러운 징조를 내려서 미개(未開)한 세상에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자영(紫纓)의 금합(金榼)18925) 은 진실로 〈은(殷)나라 시조 설(契)이 탄생할 때의〉 제비가 알을 떨어뜨린 것[玄禽之墮卵]과,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이 탄생할 때의〉 거인이 디딘 발자국[巨人之降跡]의 사실과 부합됩니다.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峯)은 곧 수로왕이 탄강(誕降)한 곳인데, 해마다 심한 가뭄이 들 때에 기도를 드리면 신령(神靈)의 감응이 어긋나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70명의 양정(良丁)을 배정(配定)하여 수호하는 방법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무덤[塚]을 파헤치는 변고를 당하자, 조정에서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함양(咸陽) 지경에서 망제(望祭)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높이 받드는 지극한 뜻을 누군들 흠탄(欽歎)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시조의 후손(後孫) 여러 사람들이 수십 칸의 청사(廳事)를 창설(創設)하고 30경(頃)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제전은 김해부(金海府)의 향청(鄕廳)에 속하게 하고, 오직 동지(冬至)에 한번 제사를 행하였습니다. 본 고을의 품관(品官)이 헌작(獻爵)과 유식(侑食)18927) 을 하고 서리(胥吏)가 제사일을 맡아보게 되니, 예의(禮儀)가 어긋나고 희생(犧牲)과 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숭인전(崇仁殿)18928) ·숭덕전(崇德殿)18929) 의 규모와 같게 하도록 하여 주소서.”
이를 이어 정조대에는 거의 국가제례로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제대로 치러 드립니다.
사라진 순장미녀들 기록의 신빙성
그렇다면 저 지봉유설과 임하필기에 나오는 수로왕발굴시 '순장된 두 미녀'이야기는 사실일까요?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순장된 부장품이나 미이라화된 사람이 공기의 접촉과 함께 부식되거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16세기당대에 그러한 경험을 '직접 한' 사람이 이야기한 정보가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전문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누구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도 지식도 아닙니다). 또한 수로왕릉이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국가의 관리를 받아온 능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며 조선초 (즉 세종기록처럼)의 관리부재는 역시 여말선초의 혼란기의 일시적인 공백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으니, 바로 이 도굴후 수로왕의 무덤을 고친 죽암 허공허경윤(許景胤 , 1573~1646)의 존재입니다. 그 죽암의 묘비내용을 들여다보지요. 묘갈명이란 무덤앞에 조그만 둥근 비석에 새기는 글을 뜻합니다.
예빈시 직장 죽암 허공 묘갈명 병서 (禮賓寺直長竹庵許公墓碣銘 幷序)
중략.
약관(弱冠)의 나이에 임진왜란을 당해 어머니를 모시고 함양(咸陽)과 운봉(雲峯) 사이로 피란하였다. 왜구가 수로왕릉(首露王陵)을 도굴했다는 말을 듣고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장사(壯士) 100여 인을 모집하여 밤을 틈타 달려가서 부중 사람들과 힘을 합쳐 보수하고,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공(李公)에게 청하여 조정에 보고하여 망제(望祭)의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또 본도의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여 봉분을 만들도록 하였다. 중략.
허경윤은 김해에 살았던 인물로, 따라서 임진왜란 임진년 (1592) 당시의 나이가 정확히 21세, 혈기왕성한 청년기입니다. 왜병이 수로왕릉을 파헤치자 장사 100명을 밤을 새서 이끌고 가서 보수하고 지켰다는 기록이 묘비명에 전합니다. 따라서 당시 발굴되던 순간의 저 모습을 인근의 사람들에게 거의 하루이틀사이의 동시간으로 생생히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의 원작자인 지봉유설의 '이수광'과 허경윤의 접점입니다. 이수광은 1563년, 허경윤은 1573년 생으로 이수광이 10살 연상입니다. 이수광은 서울출생, 허경윤은 김해출신이지만 이 '도굴사건'이 벌어진 임진왜란 첫해인 임진년 1592년에 묘한 접점이 발견됩니다. 즉, 31세의 당시 이수광은 1592년 바로 같은해,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합니다. 그런데 조경의 우로(右路)의 첫지역이 김해였습니다 (김해 - 함안 - 창녕 - 금산 - 추풍령 등).
허경윤이 아마도 저 미이라의 기록을 전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그가 임란후 올린 상소문때문입니다. 그가 올린 '청봉수납릉문'입니다.
"지난 번 병화를 입었을 때 왕과 왕후의 능이 모두 왜병에 의해 파헤쳐지는 화를 입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구슬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금으로 만든 주발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으며, 갖가지 은제품도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고 옥으로 만든 기러기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이마에 흥건한 땀이 날 정도로 비참했던 그 광경은 차마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이 분은 이미 봉분안의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따라서, 왜병이 무엇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수광이 허경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가능성은 두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는 1592년 당해, 이수광이 직접 경남지방 (김해포함)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거나 (죽암에게서나 혹은 간접적으로), 혹은 임란후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등 여러 지방의 '사건사고'정보를 상소등으로 전해 들을 수 있는 직접적인 위치에서 들었을 가능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저 기록의 신빙성은 요즘 들어 밝혀지고 있는 가야지역의 '순장풍습'때문입니다.
6세기 순장된 창녕시(비화가야) 17세소녀 인골을 근거로 복원한 상

이 기사내용중 "특이한 것은 순장묘가 옛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한반도 전역이 아니라 영남에만 한정된 풍습이었으며, 일정기간 나타났다 사라진 한시적인 풍습이었다." 라는 내용은 아마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같습니다. '일정기간 한시적인 풍습'이라기에는 전설이긴 하겠지만 158세로 2세기말 (199년)죽은 수로왕의 순장과, 3세기 가락국 (후대 금관가야)지역에서 나온 순장 유구, 김해 대성동고분군, 그리고 부산 복천동고분군, 그리고 저 6세기 소녀까지, 약 400년간 이어진 긴 시간입니다.
아직까지 수로왕릉의 순장에 대한 이 기록은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각종 학술자료에서도 고고학적인 성과만 등장하지 수로왕의 기록은 없더군요). 하지만, 이 기록의 '신빙성'자체에 대한 연구는 해 볼 가치가 충분해 보이며, 그 결과에 따라 추후 순장풍습 연구에 쓰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수로왕 도굴의 저 기록 (1592년)은 역설적으로 또한 김수로왕의 원형무덤이 당대까지 무려 1400년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크게 높여줍니다. 즉, 이미 신라 지증왕대부터 사라진 '순장'의 풍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왕릉이었다는 사실로 말이지요. 그리고 특히 '두개골의 크기가 구리 동이[銅盆]만 하였다.'라는 구절은 무려 그 전설의 김수로왕의 인골'이 보존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흥미거리로 치부하기엔, 고고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꽤나 중요한 기록인 듯 합니다.
첫댓글 나 어렸을땐 무덤 가 에서 놀았던기억 근데 몇년전 에 가 봤을땐 문화다 로 변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