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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8호) |
☞ 채제공선생 묘를 돌아 나와서 민영환선생 묘가 있는 구성면 마북리를 찾아가는 길은 건물이 많은 시내를 지나 가면서 도로 옆에 있는 구성 초등학교를 찾아야 합니다. ☞ 구성 초등학교 좌측 골목을 조금 들어가면 정면에 민영환 선생의 묘소(아래 좌측 사진)가 보입니다. 묘 역 입구의 철문은 잠겨 있었으며,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담장과 철망은 쉽사리 넘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에 청운당이 왔을 때는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는데... 묘역 좌측에 충정공 민영환선생묘 관리사무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어서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대문은 열 려 있었으며, 응답이 없어서 소리를 질렀더니 안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다시 들어가서는 한참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 이었습니다. |
▲ 민영환선생 묘역 입구 전경 | ▲ 민영환선생 묘역 관리사무소 |
☞ 하는 수 없이 입구에서 바라보니 묘역 입구 좌측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썼다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서 있는데, 이 묘역에는 문인석이 묘역 가까이에 있고, 망주석이 문인석 다 음에 멀리 떨어져서 서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처음 봅니다. 장명등도 멀리 떨어져 있더군요. 봉분 우측에 묘비가 있으며, 특히 봉분을 두른 산담 위에 다시 곡담을 설치(1972년 10월)한 점이 특이 합 니다. 올해로 만 100년이 되는 묘라서 그런지 무언가 묘제에 잘 맞지 않는 어정쩡한 모습인 것 같다는 생 각이 듭니다. ☞ 민영환 선생의 묘는 본래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봉분없이 평장되었던 것을 1942년에 후손들이 지 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신도비(神道碑)는 1959년 3월에 세웠다고 합니다. - 2005.01.23 - |
▲ 묘역 내부로 들어 갈 수 없어서 위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모신 묘이다. 민영환은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주미전권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6년에 특명전권공사(외교관의 하나인 공사의 정식 명칭)로 임명되어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면서 서양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시정의 개혁을 시도했으며,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였다.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五賊)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국민과 각국 공사 그리고 황제에게 고하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하였다. 유서 및 그가 사용했던 의복, 인장 등 각종 유품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높은 둔덕 위에 담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의 묘지에는 좌우로 문인석 한쌍이 있고 우측으로는 묘비가 서 있다. 묘지의 입구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신도비가 서 있다. |
민영환 선생의 동상은 어디에... |
▲ 창덕궁 정문 좌측 편에 위치(2003.02.15 촬영) | ▲ 현재, 우정총국 건물 뒤편에 위치(2005.02.05 촬영) |
☞ 민영환 선생의 동상은 종로구에 위치한 우정총국 건물 바로 뒤편에 있습니다. 우정총국 관계자에게 민영 환 선생의 동상이 이 곳에 있는 연유가 있냐고 물어보니, 우정총국과 특별한 관련은 없으나 민영환 선생 의 동상이 이 근처에서 몇 차례 옮겨 다니다가 이 곳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 이 글을 작성하는 순간 2년전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어디선가 여러 번 본 것 같아서 몇 만 장이 넘는 사 진을 일일이 찾아 보았습니다. 드디어 사진을 찾고 보니, 민영환선생 동상이 만 2년 전에는 창덕궁 정문 좌측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동상을 찍고, 얼마 뒤에 창덕궁에 다시 갔다가 동상이 없어져서 이 동상이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바로 우정총국 뒤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정총국으로 옮겨 온지는 만 2 년째 되었군요. 이제는 이리 저리 옮겨 다니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2005.02.15 - |
민영환 선생이 자결하신 옛터는... |
☞ 민영환 선생께서 자결하신 터는 최근에서야 알았으 며, 인사동을 지나는 길에 다시 가 보았습니다. 인사동 입구에서 올라가다가 좌측에 공평빌딩 방향 의 도로로 조금 가면 왼쪽에 시티은행(구 한미은행) 이 있으며, 이 빌딩 앞에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 하신 옛터"라는 쓰여진 조형물이 있습니다. ☞ 아래의 기사 내용과 같이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 이 리 저리 떠돌다가 위에 소개드린
바와 같이 결국은 옮긴 곳이 민영환선생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우정 개인적으로 민영환 선생이 자결 하신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2005.03.27 - |
민영환선생 동상과 관련된 기사는... |
☞ 동아일보 2002년 10월 15일자 ''민영환 동상' 이전 법정다툼 조짐'이란 제하의 기사를 일부 발췌함.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앞에 을사조약(1905)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망국의 한을 달랬던 민영환(閔泳煥·1861∼1905)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의 이전을 놓고 2년 넘게 계속돼온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사무소와 종로구 간의 갈등이 법정으로 비화할 조짐이다. 창덕궁사무소는 올 들어 5차례나 동상 이전 및 국유재산 반환을 독촉하는 내용증명을 종로구에 보냈다. 임금이 살았던 궁궐 앞에 신하의 동상이있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다 종로구가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덕궁사무소는 종로구가 올해 안에 동상을 이전하지 않으면 국유지 반환 청구 소송을 내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종로구는 “민영환 선생이 자결했던 인사동에 광장을 만들어 옮기거나 생가 터가 있는 견지동 조계사로 옮기고 싶지만 장소 확보가 여의치 않아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옮길 수도 없는 것 아니냐”면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각가 윤효중(尹孝重·1917∼67)씨가 만든 이 동상은 1957년 안국동사거리에 세웠다가 1970년대 초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3일자 '나라 잃은 설움 에 자결을 택하다'는 제하의 기사 중에 일부를 발췌하였으며, 우측 사진도 가져 옴. "민영환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황제와 국민들, 한양에 있는 외국 사절들에게 각각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지금 인사동 한미은행 앞에 있던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을 한다. 특히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민영환이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한 이후 피묻은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의 피 묻은 곳을 뚫고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절죽(節竹)'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나무다. 자동차에 밀리고 현대인에게 버림받은 동상, 거리를 떠돌다 이런 아쉬움과 부러움을 가슴 한 켠에 가지고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동상을 찾아가 보았다.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서울 인사동 한미은행 근처인데, 지금은 이를 기리는 조형물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끌지 못한 채 외로이 찬바람을 맞고 서 있다. 원래 이 동상은 낙원상가 쪽에서 운현궁을 지나 헌법재판소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안국동 네거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도시답게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금과 같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으로 이전되었고, 서울시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동상이 서 있어 방해가 된다는 창덕궁 관리사무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이 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미 일제 치하 반세기를 잊고 나라 잃은 설움을 잊은 우리들이 해온 일이 이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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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선생의 혈죽은... |
☞ 아래의 글은 마법연구회란 네이버 카페의 잃어버린 역사의 민영환 혈죽의 또다른 자료(뮈텔주교의일기) 란 제목의 글을 옮겼습니다. "서양의 합리적 사고 방식과 카톨릭 신부로서 기적을 애써 외면하려는 면이 보이지만 현장감 있는 언어로 작성되어
신선한 감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
매국노 후손들의 뻔뻔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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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선생 묘 위치도 |
소재지 : 경기 용인시 구성면 마북리 산36
빨간 압정이 있는 구성 초등학교 뒤편에 민영환선생 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