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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W"* ┗ うたばん
2009/03/29 08:10 http://blog.naver.com/lmbejo2/10044859390 아지트(agit)란?
좌익운동과정에서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이동하며 소재를 모르게 하고 비밀지령을 발하는 지하운동의 집합소이다. 러시아어로는 원래 아지트풍크트(agitpunkt)라는 선동본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운용과정의 특성을 반영하여 이동본부 ·지하본부 ·비밀본부의 뜻으로 사용된다.
시인들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시인들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시인의 상상력을 길어올리고 창작열을 자극하는 샘물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192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인들이 시적 영감과 삶에 대한 열정을 얻었던, 술이 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고 연애와 낭만이 살아 숨쉬던 공간은 어디인가? 시인들이 드나들던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기도 하고 문화가 되기도 하며 정서가 되기도 한다. 많은 시인들은 그들만의 아지트에서 일상에 짓눌려 무뎌진 감각과 혼탁해진 의식을 열정적인 담론과 담배연기와 커피 한 잔으로 정화했다. 술이 주는 안식과 위안 속에서 닫혀 있던 의식을 해방시켜 왔으며 그들만의 아지트에서 섬광같이 번쩍이는 시적 영감을 구해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리스 다방, 은성, 사슴, 낭만에서 인사동의 평화만들기, 실내악, 탑골, 시인학교, 이화, 귀천, 홍대 앞에 위치한 예술가, 곱창전골, 신촌의 은경이네, 그리고 대구, 부산, 광주 시인들의 아지트까지… 시인들의 낭만적 도취와 시적 열정에 대한 그리움이자, ‘행복한 시쓰기’를 가능케 했던 그들만의 은밀한 소굴의 문을 반쯤 열어본다.
문인들의 ‘장소’, 문인들의 ‘공간’ 이야기 장석주 장소는 신체를 떠받드는 물적 기반이다. 레비나스의 말대로 신체가 의식의 출현 그 자체라면 장소는 의식이 움직이고 현현하는 무대다. 장소는 사람을 사물로서의 존재성을 강화하기보다는 “사건의 질서” 그 연쇄로 이끈다. 사람과 그가 속한 장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신체가 어떤 자리에 놓인다기보다는, 신체가 바로 자리이다. 신체는 미리 주어진 공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신체는 익명적 존재 속에서 위치화의 사실 자체로부터 출현(irruption)1)”하는 까닭이다. 열린 장소들은 대개는 친교와 공생을 위한 공간들이다. 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카페나 살롱, 혹은 그와 유사한 장소들은 더욱 더 필요하다. 근대 이후 일인칭의 신으로 등극한 ‘나’의 생각, 문체, 집필이 무르익는 사적 공간들은 정전들의 공간이다. ‘나’의 여럿 됨으로 만드는 ‘우리’가 한데 어울려 만나는 공간들에서는 문학의 이본들이 만들어진다. 입에서 뱉어져 일회성의 운명을 안고 장엄하게 사멸하는 그 이본들! 담배연기와 같이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 이본들은 다만 구전(口傳)의 대상이 된다. 문인들이 드나들던 공간들은 문학의 저변을 두텁게 한다. 문인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찻집, 술집, 카페 등은 많은 일화들을 머금는다. 그 장소들에서 문인 저마다의 독자적인 버릇, 감정, 취향, 기질들이 돌출하고 뒤섞이며 놀라운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화학작용의 결과로 어느 때는 놀라울 만한 밀착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섬광을 번뜩이고 폭발하며 파편으로 쪼개져 튕겨나간다. 문인들의 아지트로 이름 높았던 술집 중 하나인 '시인학교' 풍경
아리스다방에는 언제나 김종삼이 있다
1970년대 말 광화문에 있는 아리스다방에 가면 거의 틀림없이 김종삼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리스다방 건너편에 있던 동아방송의 촉탁직원으로 일하던 김종삼을 만나서 나는 아리스다방으로 갔다. 원고를 받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나는 소설가 이병주의 실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아리스다방과 지척에 있던 귀거래다방이나 연다방도 1980년대 초까지는 문인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명동의 은성은 문인들의 단골 막걸리집이다. '은성'은 연기자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하던 막걸리집이다. 명동백작이라는 별칭을 가진 소설가 이봉구나 전혜린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전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명동은 문인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공간이다. 명동이 금융중심지와 패션을 선도하는 공간으로 바뀌며 젊은 금융인들이 문인들을 명동에서 밀어내고 새 주인이 되었다. 이상이 차린 청진동 제비다방에서. 사진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천변일기'의 구보 박태원에겐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술 친구이기도 하고, 경성을 쏘다니는 길 동무이기도 했고, 술값도 댈 수 있는 스폰서이기도 했다. 김해경이 본명인 시인 '이상'의 사진에는 유독 박태원이 자주 등장한다. 검은 수염을 한 이상과는 달리 박태원은 더벅 머리에 검은 둥근테 안경을 쓴 순진 소년처럼 등장한다. 또 다른 친구는 곱사등을 한 화가 구본웅이다. 어릴 때 사고로 다친 구본웅은 이상과 박태원에 끌려다니다시피 하거나 뒷돈을 대야 했지만 그리 싦은 내색없이 스폰서 역할을 했던 듯 하다.
왼쪽부터 화가 이승만, 구보 박태원, 소설가 정인택.
박태원은 나팔바지를 입기보다는 서양과 일본 신사들의 고급문화에 더 가까운 차림을 하고 다녔다.
시인 이상이 차린 제비다방은 지금의 청진동 해장국 골목 입구 오른편 코너에 있었던 듯 하다. 이상은 금홍을 얼굴 마담으로 앉혀두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박태원은 종로를 들러 일본계 번화가로 들리면서 자주 구본웅의 화실에 들렀는데 그 화실은 지금의 플라자 호텔 뒷편 북창동 쪽이었던 것 같다. 자주 어울리던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서로 이승에서 저승에서 얽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상 시인에게는 알려진 로맨스가 몇 번이 있다. 금홍이와의 로맨스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권영희와의 로맨스는 대체로 권영희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그러나 로맨스는 로맨스, 빠뜨릴 수는 없다. 또 다른 로맨스는 이상의 주검까지 수습했던 김향안과의 사랑이다. 권영희는 이상 시인과 구보 박태원이 친했던 소설가 정인택과 결혼한다. 정인택이 권영희를 못잊어 죽네 사네하며 음독 자살까지 꾀한 결과다. 둘은 한국 전쟁 통에 월북한다. 일본에서 새로운 꿈을 모색하던 이상 시인이 죽었을 때 이상의 마지막 연인 김향안은 몇날 며칠 동안의 여행을 거쳐 동경으로 가서 이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여성과 관련해서는 이상이 복이 많은 남자였는지 모르겠다. 구본웅(1906~1953) 서양화가
화가 구본웅은 불구의 처지인지라 여성들과의 로맨스는 그리 눈에 띠지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작가들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그의 모델에 되어 주었던 여인들의 이름들이 들리고, 구본웅이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그녀들을 대해주었다는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구본웅의 여인의 그림들에서 구본웅의 격정을 느끼고, 여인들의 얼굴에서 여인들이 느꼈던 그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지 모르겠다.
구보 박태원은 해방 전에 결혼을 해서 성북동 싸리집에 살 때는 이미 2남 3녀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구보도 늘 병약한 탓에 자신감을 많이 갖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친구인 이상과는 달리 여성과의 잦은 접촉은 없었던 듯 하다. 모던 보이들이 보여주는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모더니즘 시인인 구보가 한국 전쟁 당시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랐다. 그는 경향작가도 아니고, 카프의 멤버도 아니었다. 구인회에 속했던 그가 북한으로 가다니. 그것도 아내, 2남 3녀를 두고 말이다. 구보 박태원은 월북한 후 1955년 홀로 사는 아품을 달래려 했는지 결혼을 한다. 상대편은 정인택과 결혼하고, 월북했던, 이상을 짝사랑했던 그녀 권영희(권순옥)다. 그녀는 박태원이 말년에 시력을 상실하고 구술로 작품할 때 같이 공동작업을 하면서 구보씨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정인택과 사별한 권영희는 정인택과 두 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구보 박태원의 영향인지 북한에서 작가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 시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시신을 수습했던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김향안은 이상의 죽음 이후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화가라고 생각했던 홀애비 김환기와 결혼을 한다. 김향안은 김환기를 프랑스 유학으로 이끌고, 김환기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김환기의 사후에는 환기 미술관을 운영해나간다. 김향안 즉 변동림은 이상, 박태원이 그렇게도 같이 뒹굴며 술값으로 괴롭히던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이복 동생이다. 여기에 살짝 요즘 이야기를 보태면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다시 말해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이름난 발레리라 강수진이다.
김향안 여사는 문필가이며 화가이다. 1916년 서울 출생으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44년 김환기와 결혼하였으며, 파리 소르본 대학 및 에콜 드 루브르를 수학하였다. 1974년 김환기와 사별하고, 1976년에 환기재단을 설립하였다.
맨 오른족 키다리 아저씨가 김환기 화백. 김환기 화백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김향안
시인 이상과 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아내였던 수필가 김향안(1916~2004 본명 변동림) 여사가 지난달 29일 88세로 뉴욕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여사의 유해는 뉴욕 근교 김환기 화백의 묘소옆에 묻혔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김여사는 1936년 18세 문학소녀시절에 오빠인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친구였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을 만나 짧은 결혼생활을 거쳐 다음해 사별했다.
박태원은 북쪽에서도 아이를 낳고, 손주들을 많이 본 모양이다. 그 손주들 이름에는 서울에 남겨 두었던 자식들의 이름을 한자 씩 박아두었다고 한다. 북쪽 아이들을 보면서 남쪽 아이들을 떠올리는 작가의 영리함에는 눈물이 묻어난다. 구보 박태원의 둘째딸 박소영씨의 아들은 요즘 잘나가는 봉준호 감독이다. 봉감독이 구보 박태원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구보 박태원이 북한에서 1987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우리는 비교적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살은 셈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조건들 탓에 구보는 여전히 해방전 구보로만 받아들여진다.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그렇다.
구보 박태원, 이상 김해경, 화가 구본웅이 남겼을 발자욱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망라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넘치고 넘친다. 그들이 찾았던 낙랑 파라의 모습을 보고 싶고, 그곳을 운영했고 월북후 북한의 인민배우였던 김연실을 보고 싶고, 그들의 든든한 문학 후원자였던 이태준을 만나고 싶고, 그들의 친구 최서해도 보고 싶다. 구보씨의 글 선생이었던 양건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상, 박태원과 함께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김소운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화가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의 아내 김향안, 변동림이 이런 우리 맘을 헤아리고 헤아려서 환기 화가에게 넌지시 알려준 결과는 아닐까.
청진동 골목. 이곳도 재개발이 되면 그 모습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학림다방
명동에서 밀려난 문인들은 종로와 인사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종로에 있던 반쥴, 사슴, 낭만, 그리고 청진동에 있던 항아리 등은 문인들의 단골 술집이었다. 서양 음악을 경청하는 취미를 가진 문인들은 무교동의 르네상스, 명동의 필하모니, 충무로의 티롤을 즐겨 드나들었다. 한창 서양음악 듣기에 몰입해 있던 나 역시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곳들을 출입하며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내가 티롤에 간 게 1970년대 중반인데, 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 직전까지 황석영, 송영, 조해일 등이 단골로 드나들었다고 했다. 서울대 문리대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부터 학림다방은 청년 문사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소설가 김승옥에서 이인성까지 숱한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무수한 청년 문사들이 학림다방을 거쳐나갔다.
반포 치킨의 성자, 김현
그 뒤로 강남에 있던 고선, 반포아파트 인근의 반포치킨, 인사동에 밀집해 있던 평화만들기, 시인학교, 이화, 귀천, 낙원동의 탑골, 홍대 앞의 예술가 등이 한국문학의 사적 담론들이 만들어진 공간으로 등재되어 있다. 나는 고선과 반포치킨에서 우리 비평문학의 거장인 김현을 만나고 그의 자애로운 눈빛과 격려의 말을 들었다. 김현은 가히 반포치킨의 성자였다. 김현은 차라투스트라처럼 외친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성할 수 있게 하며, 억압 없는 사회를 꿈꾸게 해준다.” 김현은 무지몽매한 문학 중생들에게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쓴다는 것의 기쁨과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선지식이었다. '문지 4김'으로 불리는 비평가들. 왼쪽부터 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
강남고속터미널 인근 구반포 상가에 '반포치킨'이 있다. 1977년에 개업한 집이니 벌써 30년이 흘렀다. 통마늘을 넣어 전기구이로 익힌 다음 마늘소스로 온 몸뚱아리를 바르는 반포치킨의 맛은 더러 신문에 소개될 정도인데, 그곳에서 김현은 술을 마셨다. 김현은 거기서 술을 많이 마셨다. 쉰 살도 되기 전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마도 술이 배후세력은 아닐지라도 작은 원인은 되었을 것이다. 1990년 6월 27일 김현은 사망했다. 신문을 읽고있는 김현
신사동에 있던 고선은 김현의 고선(古船)이고, 또 그곳의 선장이었다. 김주연, 김치수, 오생근 등의 비평가나 이청준, 김원일, 복거일, 이인성 등의 소설가, 그리고 사학자 정문길, 음악이론가 서우석, 시인 황동규, 정현종, 김광규, 김형영 등이 그 오래된 배에 단골로 승선하는 문인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흥겨운 밤의 연회에는 술과 문학 담론이 화사하게 버무려지며 질펀한 향연이 베풀어졌다. 인사동의 평화만들기에서 신경림을 보고, 다른 시인들과 소설가들, 화가와 영화감독 들을 볼 수 있었다. 평화만들기에는 평화와 자유, 그리고 다정한 예술인의 연대가 있었다. 1980년대 말 인사동 초입에 있던 이화에서 소설가 김주영과 문학저널리스트인 정규웅을 만나고, 요절한 시인 기형도 등과 합류해 술잔을 기울였다. 탑골에서는 자유문인실천협의회에 속한 문단의 요시찰인물, 반체제 인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진보진영의 젊은 문인들을 볼 수 있었다. 탑골은 '실천문학'의 실질적인 산실이었다. 홍대 앞 예술가에는 문학과지성사를 구심점으로 그 자장(磁場) 안에 있는 이인성, 정과리, 홍정선, 성민엽, 권오룡, 채호기, 박혜경, 김동식, 최성실 등이 모습을 나타냈다.
다방은 한국문단사의 이면이다 어떤 장소들은 하나의 숙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소는 운명의 근경(近景)이다. 장소들이 삶을 이끌고 삶을 창조할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장소의 철학은 그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장소는 그 스스로는 어떤 철학도 낳지 못한다. 장소는 다만 사람을 모을 뿐이다. 장소가 이끌어들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장소를 운명의 산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장소는 무(無)로 가득 찬 백지와 장미꽃의 운명을 내재화한다. 17세기 독일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이렇게 쓴다. “장미에겐 이유가 없다.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꽃을 피울 뿐이다. 자기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자기를 봐주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1950년대 한국 문단은 다방 전성시대였다. 다방의 미시사(微視史)에 대한 기술을 빼고 한국문단사는 완성될 수가 없다. 문단의 서식지이자,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다방에서 만남은 물론이거니와 원고의 청탁과 수교, 원고료 지불, 필자 등과 같은 행정적인 일들이 치러졌다. 다방들은 제 방과 사무실을 가질 수 없는 가난한 문인들에게 주어진 낙원인데, 사적 공간들의 결핍으로 인해 번성을 누릴 수 있었다. 모나리자, 금붕어, 돌체, 자연장, 갈채, 대성, 문예살롱, 동방살롱, 문, 서라벌, 서린, 시온, 하루방, 휘가로……들에 문인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다방은 사랑방의 대용공간이며, 사무실의 변이종(變異種)으로 나타났다. 문인들은 아무 약속이 없어도 다방에 가 앉아 있으면 낯익은 얼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다방들은 서로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다방들에는 음악, 통음난무, 재기발랄, 유행에 대한 성토, 웃음, 눈물, 실패, 광기, 작은 성공의 기적들, 신경질환들이 부글부글 끓는다. 다방들은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진화하고 번성한다. 다방의 진화는 물론 다방의 유전자 때문은 아니다. 다방은 아무런 유전자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다방을 다른 곳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거기 모이는 사람들의 기질과 취향과 세계관이다. 장소의 유전자는 사람들의 기질과 취향과 세계관이 만드는 하모니 그 자체일 터다. 진정한 뜻에서 장소들의 진화를 이끄는 것은 시간이다. 그 다른 기질과 취향들이 맞부딪치고 날선 각들이 조금씩 마모되면서 긴 날들로 이어지는 연회의 시간 말이다. 그 연회는 긴 날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낳는다. 다방이 사람에게 해탈을 주거나 명철함을 키우게 하지는 않는다. 다방이 가진 미덕은 긴장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와 느긋한 여유, 나른한 이완과 휴식과 낙관주의다. 전봉래와 정운삼, 다방에서 살다 다방에서 죽다 어떤 사람들은 다방이 숙명화한 반정주성反定住性에 참을 수 없는 멀미를 드러낸다. 아직 혼미함에 빠져버린 세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유목의 기질을 기르지 못한 탓이다. 그들은 가변과 유동으로 출렁이는 유목의 게르2)에서 서둘러 영원한 정주定住의 집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죽음이다. 도쿄의 프랑스아카데미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돌아와 시를 쓰던 전봉래는 피난지 부산의 스타다방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혼미해지자 다방을 나와서 밤 부두를 홀로 걷다가 이튿날 국제시장 근처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전봉래의 자살은 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전봉래가 목숨을 끊은 지 여섯 달 만에 또 다른 시인이 밀다원에서 자살하는데, 바로 정운삼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숙명여고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정운삼은 전쟁이 안겨준 절망의 하중(荷重)에 실연의 슬픔이 얹혀지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난파해버린 것이다. 정운삼은 페노발비탈 예순 알과 새콜사나둠 다섯 알을 삼키고 죽음으로 하강해 간다. 그날 밀다원에는 김말봉과 김환기 등이 있었지만 정운삼의 자살을 막지는 못했다. 자살 원인을 두고 문인들이 설왕설래했다. 어디에서 발원한 슬픔과 절망이 그들의 의식을 치명적으로 침윤했을까. 전쟁이 그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게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든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게 있는데, 바로 싸워서 지켜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이다.”3) 누추함과 절망과 퇴폐를 강요하는 전후의 패덕이 두 시인을 자살로 몰았을 것이다. 전봉래와 정운삼의 죽음은 전쟁의 비참 속에서 존재의 영도(零度)로 떨어진 문인들 사이에 가벼운 뇌진탕과 같은 충격과 함께 한시적으로나마 정신적 공황증으로 번졌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그마저도 사치였다. 두 시인의 자살은 문인들의 기억 안쪽에 깊이 팬 내면의 상처를 남기고 서둘러 봉합되었다. 그 봉합은 병적인 전율에서 빠른 망각으로 도망가기였다. 죽은 자들을 잊는 것은 언제나 산 자들의 몫이다. 박인환, 이봉구, 이형기, 조영암, 이봉래, 이일, 오상원, 홍사중, 황운헌, 정창범 등은 피난지 부산의 밀다원, 금강, 태백다방 등에 거의 날마다 나와 죽치고 앉아 있곤 했다. 이밖에도 대구의 아담다방과 녹향, 막걸리집 말대가리집과 감나무집 등도 한때 유명했다. ‘마리서사’, 그 실패한 한국 모더니즘의 산실
방은 사회적 공간의 계열에서 최소단위의 원형이다. 방은 주체의 무수한 기억들과 자아의 공명(共鳴)들로 채워지고, 마침내 자아와 하나로 겹쳐진다. 방은 자아를 기르고 자아를 방출한다. 방은 기억과 욕망의 누각이다. 방들이 없었다면 방을 잃고 떠도는 자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방들은 정주의 공간이며, 또 한편으로 정주의 일상성에서 낯선 세계에로 탈주하는 범선들이기도 하다. 방은 정주와 탈주의 이항대립적인 욕망을 벽으로 세우고 완성되는 공간이다. 아마 시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넘겨받아 박인환이 연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가 그럴 것이다. 낙원동에 자리잡은 ‘마리서사’는 낙후된 근대 경험으로 굳어버린 제 의식의 구질구질함을 벗고자 했던 저 댄디보이 박인환의 조급한 욕망과 향서(向西) 취향과 기질이 빚어낸 공간일 터다. 그 욕망의 조급함은 외래어의 남용으로 얼룩진 그의 시들이 증거한다. 박인환의 서양 이해는 계통이 불분명하고 아주 얕은 것이다. 서양 문명과 예술을 향해 뻗치는 그의 욕망은 현저한 모더니즘 지향으로 드러났지만, 센티멘탈리즘이라는 낮은 단계의 심미적 이성 때문에 그의 모더니즘은 정신으로 승화하지 못한 채 표피적 외장(外裝)으로 떨어진다. 박인환은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와 같은 시구에서조차 참지 못하고 ‘스콜’이라는 생경한 외래어를 불쑥 내뱉는다. 앙드레 브루통, 폴 엘뤼아르, 장 콕토 등의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유명 시 잡지들을 구비하고 있던 이 서점엔 시인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장만영, 정지용 등과 소설가 이봉구, 김광주, 《신시론》 동인인 김수영,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그리고 《후반기》 동인인 조향, 이봉래 등이 뻔질나게 드나든다. ‘마리서사’에 모인 시인과 화가들은 이성적 선린 관계이기보다는 예술동호인들의 느슨한 우정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은 토속과 전근대에 대한 혐오감에서 촉발한 모더니즘에의 유혹에 공명했지만, 그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조향이나 이봉래 등이 드러내 보인 시적 실험의 조악함은 참혹하다. 박인환은 전방위적 예술인 장 콕토를 선망하고, 위스턴 오든이나 스티브 스펜더의 시적 지향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역시 기질과 취향의 전면적 혁명으로 나가지 못하고 겨우 겉치레의 흉내에 머물고 말았기에 그 모더니즘의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실패는 곧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예술의 실패다. 그 박래적인 것에 대한 유혹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이국 선망과 조급한 모방으로 버무린 시들을 양산하는 형태로 비루함을 드러냈다. 김수영이 훗날 「마리서사」에서 떨어져 나와 박인환을 대놓고 욕하며 독자 노선을 모색한 것도 그 겉멋만을 취하는 비루함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반발이었다. 김수영은 이렇게 쓴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4) 시인은 세계를 개조하고 뒤집는 대신에, 그 위대한 꿈이 무산하는 슬픔과 실망을 제 자아의 거푸집을 바꾸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그것은 진정한 위안이 되지 못한다. 남은 것은 “실망의 가벼움”뿐이다. 왜? 방은 혁명의 동력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의 분출도, 땀의 끈기도 없이 다만 사물화되는 방은 희박해진 정신적 상태, 즉 자아의 데드마스크다. 그래서 실망의 가벼움만으로 채워진 방에는 “녹슨 펜과 뼈와 광기”만이 있다. 어쨌든 ‘마리서사’는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번성하던, 그러나 높은 경지에 오르는 데 실패한 한국 모더니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2) 게르ger는 몽골어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사는 천막 같은 집을 가리킨다. 유르트yurta라고도 하고 파오라고도 한다. 한 가운데 나무막대를 세운 뒤 가죽이나 펠트, 밝은색의 수직물로 덮어 지붕을 삼은 유목민의 집을 말한다. 가축을 방목하는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말이나 마차로 간편하게 운반할 수 있게 가벼운 소재로 만든 이동식 가옥이다. 3) 베르트랑 베르줄리, '슬픈 날들의 철학', 성귀수 옮김, 개마고원, 2007 4) 김수영시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장석주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에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어둠에 바친다' '절벽' 등 다수 있음. 평론집과 산문집, 장편소설 등 출간.
‘멍’과 ‘체’, 다방과 예술가의 조건 소래섭 언제부턴가 도시에서는 좀처럼 다방 찾기가 여의치 않은 세상이 되었다. 다방은 커녕 묽은 원두커피와 각종 차를 흡연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커피숍’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다방과 커피숍이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은, 아마도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다국적 커피 전문점들 때문일 것이다. ‘스타벅스’를 ‘별다방’이라고, ‘커피빈’을 ‘콩다방’이라고 불러 보았댔자, 그것들이 다방과 같을 수는 없다. 자판기마저도 ‘다방커피’보다는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토해 내는 상황에서, 다방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제 다방은 세계화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유물로만 쓸쓸하게 남아 있거나, 다국적 커피 전문점들이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한 지역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 세기 전 이 땅에 다방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다방은 ‘스타벅스’ 못지않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19세기말 커피를 처음 접한 서민들은 검고 쓴맛이 나는 그 액체가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 해서 ‘양탕洋湯국’이라 불렀다지만 1), 1927년부터 명동과 종로 일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다방은 백화점, 카페와 함께 근대 서양 문물의 상징이 되었다. ‘스타벅스’가 한국에서 성공한 것은 커피가 아니라 ‘즐거움과 문화’를 팔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1937년의 명동
마찬가지로 192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다방 또한 근대의 첨단 문화에 대한 동경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유학에서 돌아온 지식인들과 새로운 풍속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른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은 근대의 문화와 감성을 탐닉하기 위해 맹렬하게 ‘다방 취미’에 빠져들었다.「다당茶黨여인」이라는 글에서 자신을 “도회의 딸, 아스팔트의 딸”로 규정했던 소설가 이선희는 현대인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다방에 가면 서울이 파리와 같이 느껴진다고 썼다.2) 채만식 또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몸을 쉴 수 있는 다방의 맛과 멋을 모르는 사람은 촌사람이나 이전 세기 사람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3)당대의 많은 이들이 다방에 매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소위 ‘금붕어족’이라고 불릴 만큼 다방에 자주 출몰했던 이들은 문인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이었다. 시발이 된 것은 1927년 종로에 문을 연 다방 ‘카카듀’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과 동화를 썼던 이경손이 경영한 ‘카카듀’는 곧 해외문학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같은 해 젊은 문화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문을 연 ‘멕시코 다방’ 또한 예술가들과 언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담당했다. 무용가 최승희의 나체 무용 사진을 걸어두기도 했던 ‘멕시코 다방’은 연락 장소를 겸하기 위해 손님들의 메모를 맡아서 챙기는 종업원을 따로 두기도 했다. ‘멕시코 다방’이 누적되는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한 후,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이순석이 개업한 ‘낙랑파라’는 이상과 박태원을 비롯한 구인회의 아지트가 되었다. 구인회 구성원들 외에도 안석영, 최정희, 함대훈, 이헌구, 김광섭, 모윤숙, 노천명 등이 ‘낙랑파라’의 단골들이었다. 4)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상은 1933년 7월 집을 팔아 다방 ‘제비’를 차렸다. 특히 ‘제비’는 전면 벽을 전부 유리로 만들어 지나가는 신여성들의 각선미를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 손님을 끌었다. 5) 2년 후 경영난으로 ‘제비’가 폐업한 후 이상은 다시 ‘쓰루(학)’라는 카페를 냈지만, 이 역시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이상은 다시 ‘69’라는 이름의 다방을 열고자 했지만, 개업 얼마 전에야 ‘69’의 의미를 알게 된 경찰이 영업 허가를 취소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다방의 범람시대’는 1940년까지 이어졌다. 문인들뿐만 아니라 근대의 문화와 감성을 호흡하려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방에 몰려들었다. 1940년, 윤곤강은 「다방」이라는 시에서 “아편처럼 진한 커피 속에/켜지는 등불……/사람들은 모두/불나비의 넋으로/ 불나비의 넋으로 모여든다” 6)고 썼다. 다방은 1920년대부터 새롭게 등장한 사랑의 방식이었던 ‘연애’의 주 무대이기도 했다.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는 풍경은 당대 로맨티스트가 꿈꾸던 전형적 연애의 한 장면으로 자리잡았다. 다방이 성황을 이루었던 데에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마담’들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복혜숙(卜惠淑, 1904~1982)과 김연실(金蓮實, 1911~1997.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배우 겸 가수) 같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까지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다방 마담으로 나섰고, ‘천사’의 강림을 확인하고자 몰려든 사람들로 다방은 끈적끈적하게 달아올랐다. 김연실
복혜숙
이쯤 되면 다방은 에로틱한 복장의 여급들이 술과 웃음을 팔던 ‘카페’와 다를 바 없었다. 이상은 「흥행물천사」란 시에서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로테스크한 형상과 냉소적인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여자는만월滿月을잘게썰어서향연饗宴을베푼다.사람들은그것을먹고돼지같이비만肥滿하는쵸콜레이트냄새를방산放散하는 것이다.”
7) 다방에 온갖 군상들이 몰려들어 소란스러워지고 카페와 다를 바 없는 지경으로 변질되자, 도무지 갈 만한 다방이 없다는 불만이 문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애초에 문인들이 다방을 찾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다방 경영자가 문인을 비롯한 예술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다방은 서구의 살롱이나 커피하우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즉 1930년대 경성의 다방은 이전의 폐쇄적인 ‘사랑방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공 영역으로서 사적 개인들의 공적 만남을 매개하는 사교장의 기능을 담당했다. 8) 다방은 단골로 드나들던 동인들의 회합처로서 동인 내부의 구심력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문인이나 여타 장르의 예술가와도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다방은 정신을 집중하고 예민한 감각을 훈련시킬 수 있는 고요하면서도 감각적인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창작을 위한 사색이나 집필에도 적절한 ‘공동 서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요컨대 다방은 창작과 교류에 필요한 물리적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문인들이 자신들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다방의 범람시대’를 맞아 문인들의 아지트가 될 만한 다방은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향락적인 다방과는 달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도 응당한 일이었다. 채만식이 1939년에 발표한 글에서 서울에도 한 곳쯤 원고 쓰는 사람이 전문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방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현민 유진오(玄民 兪鎭午)• 1939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 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 1942,43 대동아문학자 대회 조선 대표 2회 연임 • 1945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 1947 대한민국 제헌국회헌법 기초위원 • 1952∼65 고려대 총장 • 1960,61 한일회담 수석 대표 • 1967 신민당 총재
9)당대 다방의 세태에 대한 비판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유진오(兪鎭午)가 1938년에 발표한 「현대적 다방이란?」10)이라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문인들이 다방에 자주 출입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데, 글을 읽다 보면 오히려 문인들이 다방을 찾게 되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다방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차를 파는 다방이고, 나머지 하나는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이다. 차를 파는 다방은 대중적·개방적·세속적인 특성이 있고, 찻값이 싸며 상인·관리·회사원 등이 주로 애용한다.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은 귀족적·폐쇄적·고답적이며, 찻값이 비싸고 어여쁘게 차린 모던 걸이 차를 나르며 예술가·실업자·유한마담 등이 주 고객이다.
11) 유진오는 두 종류의 다방 가운데 후자, 즉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만을 ‘본격적인’ 다방이라고 규정하면서 당대의 다방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다방을 현대 지식인의 무기력, 무의지, 무이상, 권태, 물질적 궁핍, 진퇴유곡의 처지를 나타내는 곳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다방을 그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당대 지식인들이 다방에 ‘멍’하니 앉아 교양과 고민이 있는 ‘체’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멍’과 ‘체’야말로, 그들의 무기력, 무의지, 무이상 등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멍’과 ‘체’라는 평이한 단어들로 다방을 찾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포착해낸 유진오의 감각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설명보다도 생생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며, 12) 당대 지식인을 비판하려 했던 유진오의 의도와는 달리 ‘멍’과 ‘체’야말로 근대 예술가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멍하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자극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백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수많은 감각적 자극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어떤 혼돈의 상태, 각각의 자극들을 체계화하고 그에 반응하기 이전에 무한한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는 도취의 상태를 뜻할 수도 있다. 시인 이병각은 「차의 육체와 정신」이라는 글에서, 차는 문학과 같이 고매한 정신을 요구하며, 건전하고 무딘 사고를 경멸한다고 썼다. 13) 차는 마치 아편을 마셨을 때와 같은 몽환적인 상태에 이르게 함으로써 문학적 창조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차 마시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만 자기 한 사람만으로 고요한 박스에 앉아서 남극식물을 벗삼으며 향기로운 차 맛을 핥고 공상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 바로 그러한 상태를 ‘멍’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멍’이라는 말은, 어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의도와도 결합되어 있지 않은 감각의 충일 상태를 가리키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근대에 들어 여타의 영역과 예술을 분리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는 어떤가? 유진오는 당대 지식인들이 교양이 없어도 있는 체, 정신적 고민이 없어도 있는 체한다고 비판했다. ‘체’는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거짓으로 그럴 듯하게 꾸미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진오의 말마따나 예술가인 체한다고 해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예술가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예술가적 자의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체’하는 것, 즉 자신과 남을 구별하려는 욕구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하는 ‘문청 기질’이란, 바로 ‘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병각은 그러한 욕구를 차의 정신과 견주어 설명한다. 14) 그는 차가 남을 경멸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경멸하고 싶어 경멸하고, 그럼으로써 자위를 얻는 것이야말로 차의 정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때는 남을 경멸하는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히고 싶어 다방 문을 두드리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병각이 말하는 경멸의 정신이 자신과 남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결국 ‘체’의 정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1930년대 다방이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것은, 다방이 ‘사교장’인 동시에 ‘공동 서재’로 기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멍’과 ‘체’라는 말 또한 결국은 다방의 그러한 두 가지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멍’을 위해서는 ‘공동 서재’가 필요하고, 여타 집단과 구별되는 동류 집단과의 만남을 통해 ‘체’하려는 욕구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로도 다방이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방이 ‘멍’과 ‘체’라는 근대 예술가의 조건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孫素熙(1917~1986)
田淑禧(1919.3.15~)
원로수필가 전숙희씨(88세)가 1968~2004년의 일기를 정리한 형식의 자서전 ‘가족과 문우들 속에서 나의 삶은 따뜻했네’(정우사)를 펴냈다. 그는 국제펜 한국본부 회장(1983~91)을 역임했고 계원예고·계원조형예술대를 설립했다. 또 문예지 ‘동서문학’(1970~2004)을 펴내고 한국현대문학관(구 동서문학관)을 만드는 등 예술교육과 문학인 지원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이 책에서 그는 동료문인 및 예술가, 정치·경제계 인사들과의 교유를 비롯해 펜 활동, 학교설립,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 1970~80년대 문단의 이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정신적 밑받침이 돼준 남동생인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에 대해 애틋한 정을 표시한다. 1970년 1월28일자 일기에서 그는 “펄벅 여사가 왔다. 지난번보다 많이 늙었으나 담담하고 조용한 이야기는 하나도 늙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1975년 10월7일에는 “이방자 여사 연락해 루이제 린저 여사와 만나기로 주선해 나도 나가 같이 이야기했다”고 썼다. 1980년 1월30일에는 “정주영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사람이 멀리 드라이브라도 가고 싶다고”라며 “소박한 기품, 호감을 가게 한다”고 평가한다. 1980년 2월10일에는 선배시인 모윤숙씨의 3·1문화상 수상에 대해 친일경력을 들어 반대여론이 일어난 것과 관련, “나이 일흔에 이런 충격을 받는 모선생이 가엾다”고 털어놓는다. 펜 회장 선거와 관련, 소설가 손소희씨와의 갈등도 소개된다. “손소희가 펜에 출마한다는 선언을 한 이후 그의 만나자는 요청에 따라 반쥴에서 만났다. 내게 일금 3천만원을 줄테니 회장에 나오지 말라는 요청이다”(1984년 11월21일)라고 기록했다. 나흘 뒤에는 “김동리 선생은 40년을 문단 감투 쓸 때마다 내가 쫓아다니며 표찍고 욕먹고, 손소희와 연애할 때 들러리 서주고 했건만 오늘날까지 점심 한번 사준 일이 없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두 사람은 1986년 손소희씨의 발병을 계기로 화해한다. 1987년 6월10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축하연에 참석해서는 “2500명을 초대했다는 파티는 거의 아수라장이다”라고 말했다. 같은해 2월 88국제서울펜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는 “인권 없는 나라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기자 미국의 펜 회장 수잔 손탁은 너무나 분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면서 고생담을 털어놓는다. 1993년 6월은 시련의 나날로 기록됐다. 동생 전낙원씨가 카지노 비리로 검찰 수사대상이 된 것이다. “이미지를 더럽히고 모략받고 있는 동생이 한없이 가엾다”고 썼다. 전씨는 3년여 해외에 체류하다가 96년 귀국, 세금포탈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1998년 2월21일 미당 서정주의 집에 김남조 김후란 등과 찾아갔을 때는 “김남조가 산 이름을 1683개나 외우신다니 어디 100개만 외워보시라 하자 맥주 한 잔 하시면서 순식간에 100개 산 위치와 높이까지 설명해가며 외우셔서 감탄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경향신문 2007.5.10)
1963년 회식에서. 첫줄 왼쪽부터 전숙희, 장덕조, 박종화, 조애실, 둘째줄 왼쪽부터 모윤숙, 손소희, 최정희, 박화성(문학사상 2001.9월호)
1930년대 후반 ‘다방의 범람시대’를 맞아 문인들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다방의 수효는 점점 줄어들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다방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손소희(孫素熙) · 전숙희(田淑禧) · 유부용 등이 개업한 ‘마돈나’, 김동리·조연현 등이 드나들던 ‘플라워’, 모윤숙이 관여하던 ‘문예살롱’ 등의 다방이 문인들의 아지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시절에는 부산 광복동 문총 사무실 2층에 있던 ‘밀다원’이 문인들의 안식처이자 연락처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명동의 다방들이 다시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조병화는 동료 문인들과 어울려 명동의 술집과 다방을 배회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을 “명동의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직후 명동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15) 그들은 다방에 모여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왕자들인 ‘체’했던 것이다. ‘아지트’의 순화된 우리말은 ‘소굴’이라고 한다. ‘본거지’라는 말도 있지만, 어쩐지 문인들의 아지트에는 ‘소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멍’과 ‘체’, ‘소굴’은 모두 어떤 일탈의 냄새를 풍긴다. 다방을 밀어낸 자리에서 휘황찬란한 조명을 번득이고 있는 ‘스타벅스’는 왠지 소굴 같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이 시대의 시인들은 어디에 소굴을 마련했을지 궁금해진다.
1930년대 말 명동입구 '다이나'다방. 일제시대 서울서 처음 선을 보였다.
명동의 다방
일제 때에도 명동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가였으며 문화의 거리였지만 그 후 광복과 6 · 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도 여전히 명동은 서울의, 아니 한국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광복의 환희와 전후의 허무와 「페이소스」가 흐르던 이 거리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등에 모여 실존주의철학을 논하고, 「니힐리즘」을 논하고 예술과 인생을 토론하며 불운했던 시대의 한과 정을 풀었던 거리가 바로 흘러간 시대의 명동거리였다. 비록 주머니는 텅빈 예술가이지만 기개(氣槪)만은 높아 하늘을 찌를 듯 하였던 사람들이 모였던 낭만의 거리가 명동이었다. 지금은 소비문화의 중심지, 환락의 거리, 지분(脂粉) 냄새가 가득한 거리로 변해버린 명동이어서 그 당시 명동거리에 정과 한을 쏟았던 명동파(明洞派) 문화인들의 발자취는 지금 거의 찾을 길 없지만 전설같은 추억담만은 아직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명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속칭 명동의 샹송 「세월이 가면」의 작사자인 박인환(朴寅煥)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면,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무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1956년 이른 봄 「동방싸롱」앞 빈대떡집에서 박인환이 작사하고 이진섭(李眞燮)이 작곡, 임만섭(林萬燮)이 노래불러 즉흥으로 만들어진 「명동샹송」은 이 후에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어 명동의 노래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그 외에도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고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고 30세의 한창 나이에 그가 사랑하던 거리에서 통음(痛飮)끝에 그의 싯귀절처럼 술병처럼 쓰러져버린 시인 박인환! 그의 일화는 아직도 명동거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 명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伯爵)」이란 애칭으로 불리었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이다. 명동으로도 문화예술인들에 의하여 빛나던 황금시대에 이봉구는 명동거리에 젊음을 묻어버린 말하자면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명동을 사랑하여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 인물이 한 두명이 아니겠지만 그처럼 명동에 애착을 갖고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기에 「명동백작」이니 「명동시장」이니 하는 애칭이 생겼을 것이다. 그가 1966년에 발표한 『그리운 이름따라―명동20년』(유신문화사)에서 그는 흘러간 시대의 인물들과 거리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서문(序文)에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는 "문인(文人) 예술가들은 항상 이곳에서 기염(氣焰)을 토로하면서 새로운 문학과 음악, 미술, 연극을 구상했던 것이다. 당시 이봉구형은 언제나 명동카페나 주점에 앉아서, 또는 문인 예술가와 단란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만길 기염을 얌전하게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에게 명동시장의 호칭을 보냈던 것이다. 이제 지난 날 명동시장이 그 치내(治內)에 있었던 명동20년사를 친히 썼으니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명동사(明洞史)가 될 것이다."
또 「명동백작」이란 애칭의 유래도 유명한 일이다. 6 · 25전쟁 당시 그가 부산에 피난살이 할 때 부산일보에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은 프랑스의 배우 「루이 · 쥬베」의 추도사를 쓴 적이 있는데 이 글에서 「룸펜굴(窟)」이란 영화에 몰락한 남작(男爵)으로 출연한 「루이 · 쥬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폐허가 된 파리의 뒷골목 룸펜들의 소굴에서 헤매는 그대는 최후의 남작이여! 나도 명동에서 밀려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신세이니 그대와 나는 같은 신세로다」라고 썼는데, 이글을 연유로 하여 그의 벗들이 “남작이 뭐냐 백작해라”하고 농담삼아 붙여준 것이 일화가 되어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된 것이다. 이렇게 명동거리에 인생을 묻었던 이봉구도 1960년 초에 변해가는 명동이 세태에는 어쩔수 없었던지 아니면 친구들이 모두 떠난 명동이 낯설어서였던지 이런 말을 남기고 명동거리를 떠나 버렸다.
「가는 길 오는 길, 쉬는 곳 머무는 곳이 거의 같아서 자주 만나던 우리의 명동파들은 60년초 우리들의 명동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명동을 떠나게 된다.」
다음으로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註4]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위의 『명동 20년』에 공초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청춘이다 청춘, 멋지고 흥겨워야지. 카운터 위에 올라 기염을 토하는 두사람을 향해 공초는 젊음이 부럽다고, 술잔을 높이들어 찬사를 보내고 다시 담배를 피워물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선생님, 술은 못하시면서도」「포엠」의 마담은 담배 두갑을 사다 공초에게 선사한 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정이 고마워 인사를 올리면 「여기를 한번 다녀가면 그래도 파적(破寂)이 되니까 오지, 가족들과 즐기다 가는 것 같아서」 쓸쓸한 미소가 입가에 잠시 감돌다 또 눈을 감는 것이었다.
술을 못하여 주로 「청동다방」등에 출입하던 그와 『명정(酩酊) 40년』으로 유명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같은 해 나란히 사파(娑婆)를 떠 “수주 가고, 또 공초가 가고”라는 무상(無常)이 가득 찬 말 속에 명동은 흘러갔다. 시인 조병화(趙炳華)도 명동을 사랑하여 “명동 인생천리 허허한 골목에 주점의 불꽃만이 늘어간다 잘잘잘! 인간의 기름이 닳도록!”이라고 읊으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또 「포엠」에 대하여는 이렇게 썼다.
"퇴계로에 「포엠」이라는 술집이 생겼읍니다. 저녁이 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이 오면 병들어 앙상한 가로수 잎사귀를 돌아 우리들은 술을 마시러 「포엠」으로 갑니다. (중략) 그림쟁이들이 먼저 모여 들었읍니다. 그리고 글쟁이들이 모여들었읍니다. 그림쟁이와 글쟁이와 노래쟁이들이 같이 취해서 노랑저고리를 웃기다가 돌아들 가곤 했읍니다."
이상과 같이 명동파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명동의 풍속도를 그려 보았지만 지면상 줄이기로 하고 본론인 다방의 변천에 대하여 계속 기술해 나가기로 한다.
광복이 되면서 일제 때에 있던 명동의 다방들은 일단 문을 닫고 약간의 변화를 거쳐 다시 문을 열게된다. 그전에 그 거리에서 다방을 열었던 마담에 의해서 고전음악전문의 「봉선화(鳳仙花)」다방이 첫 테이프를 끊고 이어서 「리버티」「삼일(三一)」「에덴」이 생기기 시작하여 명동거리는 다시 다방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이어 손소희(孫素熙) · 전숙희(田淑禧) · 유부용(劉芙蓉)의 세 여인이 「마돈나」를 개업하여 이채를 띠었는데 이 다방에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 김송(金松)을 비롯한 문협인(文協人)들이 모였고 김광주(金光州) · 이용악(李庸岳)도 즐겨 드나들었다. 「마돈나」에 이어 「남강」「미네르바」「오아시스」「고향」이 문을 열었고, 「에덴」 옆에는 김광조(金光祚)부부가 「라아뿌룸」을 열어 이계원(李啓元) · 윤길구(尹吉九) · 이진섭(李眞燮) · 강문수(姜文秀)를 비롯한 방송인들이 모여들었고, 김연실(金蓮實)이 「낙랑(樂浪)」을 열어 옛 향수따라 손님이 모여 들었다. 또 소공동에서 「하루삥」을 하던 장만영(張萬榮)이 충무로(忠武路)에 「비엔나」라는 다방문을 열었다. 다방안 정면에서는 조병화의 유화(油畵)가 걸려 있었고 김기림(金起林) · 김용호(金容浩) · 김경린(金璟麟) · 선우휘(鮮于輝) · 승정균(承鼎均) · 김광균(金光均) · 김병욱(金秉旭) 등이 모였으며, 「휘가로」에는 전봉래(全鳳來) · 김수영(金洙暎) 등이 눌러 살다시피 하였다. 또한 일제 때부터 서울역 앞에 있던 명곡다방(名曲茶房)인 「돌체」가 명동 한복판으로 진출하여 음악광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이 시기 즉, 1947년이 명동으로는 황금시기였다. 「돌체」「휘가로」를 비롯하여 「무궁원」「명동장」의 주점에는 명동의 순수파들로 연일밤 터져날듯 대성황이었다. 오상순 · 서정주(徐廷柱) · 김광주 · 조지훈(趙芝薰) · 김동리 · 구상(具常) · 임긍재(林肯載) · 김초향(金草鄕) · 임서하(任西河) · 김중희(金重熙) · 최봉식(崔鳳植) · 김진수(金鎭壽) · 김병욱 · 김수영 · 임호권(林虎權) · 조연현 · 김창수(金彰洙) · 고병순(高炳舜) · 고흥상(高興相) · 김종윤(金鍾潤) · 조덕송(趙德松) · 최기덕(崔起德) · 임광빈(林光彬) · 최금동(崔琴桐) · 김정한(金定漢) · 최병욱(崔炳郁) · 김진기(金鎭岐) · 박고석(朴古石) · 손응성(孫應星) · 정전여(鄭銓汝) · 조병화 · 이진섭 등이 드나들었다. 6 · 25전쟁 직전까지는 「문예싸롱」과 「모나리자」「낙랑」「담담」 등이 유명다방이었고 「명동장」「무궁원」「백화정」「딱총집」「동해루」「동순루」등의 음식점도 명동파의 아지트였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고 9 · 28수복, 1 · 4후퇴 등의 와중(渦中)에서 환도 후의 명동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이 폐허 속에 봄이 오자 대구로 피난갔던 「모나리자」가 제일 먼저 문을 열었고 이어 「신한(新韓)」「올림피아」등이 문을 열어 「상해(上海)에서 돌아온 리루」라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 속에서 다시 만나는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어 코주부 김용환(金龍煥)부부가 「금붕어」를, 또 「돌체」가 다시 열려 다시 얼마간 명동은 활기를 띠게 된다. 1955년에는「동방싸롱」이 문을 열어 명동의 1950년대 후반기를 풍미하게 되었다. 한때 문단(文壇)은 「모나리자」파, 「문예싸롱」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모나리자파는 제각기 하나의 비조직성의 문인 예술가들이고 다른 싸롱그룹과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이 「모나리자」파가 이 「동방싸롱」으로 대거 이동을 해 온 것이다. 문인들 외에도 김승호(金勝鎬) · 주선태(朱善泰) · 최남현(崔南鉉) · 장민호(張民虎) · 김동원(金東園) · 이해랑(李海浪) · 박암(朴岩) · 유치진(柳致眞)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상으로 살펴보아 알 수 있듯이 이런 시대에 명동은 서울의 문화예술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리고 다방은 이 명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기(知己)끼리 모여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쉬는 장소로서의 기능에서 머물지 않고 훨씬 적극적으로 명동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즉, 다방에서 음악회, 그림 및 사진전시회가 열렸고 시낭송회 문학토론회 등의 문학행사도 열렸고 때로는 연극무대와 영화관이 되기도 하였고 기타 동창회, 간담회 등이 열리기도 하는 등 음악 · 미술 · 문학 · 사진 · 연극 등의 모든 문화예술의 무대로써 「종합예술(綜合藝術)의 장(場)」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초원(草苑)다방(명) 김동석(金東錫)의 시집 『해변의 시』의 출판기념회
-문학가동맹소설부(文學家同盟小說部)의 소설간담회
-올림픽다방(충) 오장환(吳章煥)의 시집 『병든 서울』출판기념회 -휘가로다방(명) 해군종군화가(海軍從軍畵家) 「양달석 개인전」 -김혁림(金赫林) 회화전 [註11] 한국음악가협회의 종합음악대연주회의 회원권 예매장소
-한국작곡가협회의 동남아세아 음악대회에 참석하는 김세형(金世炯) 환송회
-담수(淡水)다방(명) 나운영(羅運榮)작곡집 『다윗의 노래』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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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吳泳鎭)의 미국 영화연극계 시찰보고강연회
-돌체다방(명) 국제오페라협회 정기(토요) 레코드감상회 「쇼팡의 밤」「하이든의 밤」「춘희」「브람스의 밤」외 28회 서울법대졸업생음악회
김소영(金昭影) 「새로운 언어」의 출판기념회와 양주동(梁柱東)의 「문학강연회」
-춘초(春初)다방(명) 고(故) 홍난파(洪蘭坡)의 추도회 -월궁(月宮)다방(명) 「국제 Pen 클럽 한국센타」에서 주최하는 「문학의 밤」사회 이하윤(異河潤) 현 국내시의 조류(潮流):김광섭(金光燮) 헤밍웨이론:조용만(趙容萬) 자작시 낭독:변영로 역사소설의 방향:김기진(金基鎭) 고전문학의 현대적 의의:양주동 -목동다방(명) 나운영의 『반주법』출판기념회 -대도회(大都會)다방(충) 서라벌예대「문학의 밤」 -산유화(山有花)다방(충) 김명순(金明順) 수예전 -청동(靑銅)다방(명) 국제극예술협회(國際劇藝術協會)(ITI) 년차대회와 오영진의 환영회 -레인보(충) 일본대학 예술과동창회 -담담(淡淡)다방(명) 극작가 유치진의 사극집(史劇集) 『자명고(自鳴鼓)』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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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명동의 근처 즉 소공동(小公洞) · 남대문로(南大門路) · 을지로1가의 다방에 대하여도 살펴보자. 주로 관청 · 은행 · 호텔 등과 경향신문(京鄕新聞) · 서울치대 등이 몰려있는 이 거리도 1950년대 문화의 집결지였고 다방 또한 이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명한 다방들과 거기서 벌어졌던 문화행사등을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본다.(소는 소공동, 을은 을지로1가)
「 · 푸라워다방(소) 3년전 일본복강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옥사한 윤동주(尹東柱)와 송몽규의 추도회(연희전문주최) [註34]서정주(徐廷柱)의 시집 출판기념회 [註35] 모윤숙(毛允淑)여사의 출판기념회 [註36] 방기환(方基煥)의 『손목잡고』출판기념회 [註37] 발기인은 이헌구(李軒求), 박목월(朴木月)외 20명. 월남용사 최상덕 환영회 [註38] 조대(早大)동창 송별회 [註39] 박신영(朴臣影)의 시집 『바다의 합창』출판기념회 [註40]
· 은전다방(소) 이창(李昌)「제3회 작품전」 [註41] · 올림피아(을) 재경산업미술가협회(在京産業美術家協會) 주최 국내산업건설에 대한 주제로 한홍택(韓弘澤) 개인전 [註42] 이수억(李壽億) 유화전 [註43] · 칠보(七寶)다방(소) 이병주(李丙疇)『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 출판기념회 [註44] · 양춘(陽春)다방(소) 이경림의『주석(註釋) 석보상절(釋譜詳節)』 출판기념회 [註45] · 동명그릴(소) 박경리(朴景利)의 장편소설 『표류도』출판기념회 [註46] · 치대그릴(소) 서울상대 동창회 [註47] 박익수의 『과학철학(科學哲學)』출판기념회 [註48] 양명문의 시집『화성인(火星人)』의 출판기념회(오상순 박종화 이헌구 등의 발기) [註49] 조성식의 『고등영문법』출판기념회 [註50]」 이외에도 「봉선화다방」「대지(大地)다방」「가로수」「감로수(甘露水)다방」「하루빈」「낙천(樂天)다방」「화이다방」「모니카다방」등이 있었다. 1212사태 당시 광화문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강점, 해방의 공간 그리고 한국동란, 이승만의 독재와 박정희의 쿠데타와 군사독재, 1212사태, 서울의 봄, 그러나 5.18민주 항쟁과 신군부의 등장...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Prof. Chauhan Jii는 한국사회의 price of freedom을 강조하곤 했었다. 지금이야 명동이 쇼핑천국이 되어 버렸지만, 해를 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달을 달이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에, 문인들의 둥지였다고 한다.
명동백작 이봉구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남. 술과 사람을 좋아하던 명동의 마당발로서 청년시절에는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일본 메이지대학 유학 중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후에 매일신문, 자유신문, 경향신문 등에서 기자로 재직했다.
김수영과 김수명
서울출생. 선린상고 졸업 후 도쿄상대에서 유학했으나, 징집을 피해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모더니즘 성향을 詩作을 했다. 그러나 한국동란 중 인민군에 징용 후,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데올로기와 반공컴플렉스로 고통받아야 했다. 따라서 그는 창작보다는 번역이나 닭을 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4.19이후 현실적인 문제들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동생 김수명은 김수영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사람이며, 그녀는 후에 現代文學의 편집장이 되었다.
박인환
강원도 인제 출생, 해방공간에서 좌익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고 전해지나, 한국동란 중에는 국군의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며, 처참한 전쟁을 치르고도 남과 북 모두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에 좌절하여 허무주의적 글을 쓰기도 했다. 옷을 잘 입어 '댄디'라는 별호도 있었으나, 서른 한살에 세상을 떠났다.
전혜린
평안북도 순천출생. 부유한 집의 장녀로 태어나 서울대 법대 재학중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독일 뮌헨에서 유학, 실존주의에 자신을 바쳤던 것으로 보이며, 서른살에 자살했다.
공초 오상순
서울출생. 유년에는 기독교적 교육을 받았고 일본 도지샤대학 종교학과 졸업후에는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폐허>동인지 활동 후, 불가에 귀의하여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담배를 즐겨피워 꽁초라는 별호가 있었다.
그는 어쩌면 진정한 초월자였을지도 모른다.
1) 강준만·오두진,'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인물과사상사, 2005, 23쪽.
2) 이선희,「다당여인」,'별건곤', 1934년 1월호. “값싼 모더니즘의 여왕”이 되겠다고 작심한 듯 써내려간 이 글에서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은 아이러니로 느껴질 만큼 과장스럽게 표출되어 있다. “케이크를 포크로 쿡 찔러 먹었다. 갑자기 내가 몹시 올라가는 것 같다. 김치를 젓가락으로 먹는 것보다 한층 더 문화적임에 쾌감을 느낀다.” 3) 채만식,「다방찬」,'조광', 1939년 7월호. 4)「끽다점 연애풍경」,'삼천리', 1936년 12월호. 5)「끽다점 평판기」,'삼천리', 1934년 5월호. 6) 윤곤강,「다방」,'조광', 1940년 8월호. 7) 김주현 주해,'정본 이상 문학전집 1', 소명출판, 2005, 54쪽. 8) 손유경,「1930년대 茶房과 ‘文士’의 자의식」,'한국현대문학연구'12집, 한국현대문학회, 2002, 116쪽. 9) 채만식, 위 글. 10) 현민,「현대적 다방이란?」,『조광』, 1938년 6월호. 11) 요즘에도 이런 분류가 가능할지 생각해본다. 어쩐지 유진오의 분류법이 지금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을 듯하다. 실제보다는 이미지가 소비 욕구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굳이 ‘차를 파는 다방’에 속하는 것을 꼽자면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나 자판기밖에 없을 듯하다. 아니면 이런 분류는 가능하지 않을까?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주요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다국적 커피 전문점들과, 후미진 골목에서 소수의 마니아를 대상으로 생존하고 있는 찻집들. 오늘날 문인들은 어느 곳을 더 자주 찾을까? 12) 유진오 자신도 “이 ‘멍’이란 말은 실로 묘한 말이니, 즉 이것 한 자로 이 몇 줄 위에 무기력, 무의지 운운하고 길게 늘어 놓은 것을 전부 표현할 뿐 아니라”라고 썼다. 13) 이병각,「차의 육체와 정신」,『조광』, 1939년 8월호. 14) 이병각, 위 글. 15) 조병화,「명동 시절」,'한국문단 이면사', 깊은샘, 1983, 352쪽. 소래섭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울산대 국문과 교수. 「백석 시에 나타난 음식의 의미 연구」 등의 논문과 '에로 그로 넌센스-근대적 자극의 탄생' 등의 저서가 있음.
중앙일보 퇴직자들. 왼쪽부터 곽태형, 김성호, 정규웅, 한규남, 이두석, 김재봉씨
1970~80년대 문인들의 단골술집 풍속도
정규웅 나에게 ‘청진동 출입기자’라는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붙여준 사람은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였다.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65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약 5년간 원치 않은 부서를 전전하던 나는 1970년 초에 이르러서야 문화부에 정착할 수 있었다. 같은 과의 동기동창인 소설가 박태순과 문학과 지성 동인인 이른바 4K(김병익,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 문단에는 대학 시절부터 가까웠던 친구들이 많았으나 문학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은 문단통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이문구였다. 그 무렵 이문구는 광화문 예총회관 안의 문인협회에서 기관지 월간문학을 만드는 등 문인협회의 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 문협 이사장 선거에서 김동리가 조연현에게 패배, 이사장 자리를 물려주게 되자 김동리는 이문구와 함께 한국문학》을 창간하게 되었다. 서영은, 김년균이 편집기자로 참여했고, 그 사무실이 청진동 뒷골목의 조그마한 빌딩에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음사, 신구문화사, 창작과비평 등 문학 관련 출판사들이 많아 청진동 뒷골목에는 문인들의 출입이 잦았지만 한국문학과 이문구가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문인들의 보금자리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술집이 많아졌는지, 술집이 많아 문인들의 출입이 잦아졌는지 선후는 분명치 않으나 술집도 갈수록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문학 기사꺼리가 마땅치 않았던 나의 발길이 문인들에게 귀동냥이라도 하기 위해 툭하면 청진동으로 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문구는 내가 나타나면 ‘청진동 출입기자가 오셨군’이라는 말로 나를 맞았다. 어느 날 아침나절 이문구를 찾아갔다가 그가 사무실이 아닌 그 앞의 조그마한 술집에서 새벽차를 타고 상경했다는 박용래 시인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술잔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박용래 시인의 첫 모습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문인들이 딱히 단골이라고 정해놓고 드나들던 술집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민음사와 한국문학이 들어 있던 건물 아래층의 ‘가락지’라는 맥주홀은 예외였다. 대개는 이곳에서 술자리를 시작했지만 다른 곳에서 마시다가도 2차 3차로 반드시 이곳에 들러야 직성이 풀리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1백 석이 좀 넘는 이 홀은 항상 문인들로 붐볐고, 주변에 비슷한 규모의 맥주홀이 몇 곳 들어서기는 했지만 ‘가락지’의 인기는 오래도록 시들지 않았다. 조병화 시인의 단골이었던 '사슴'에서, 오른쪽부터 정진규, 조병화, 이탄, 우우석, 김종해 시인 70년대 초
‘가락지’가 이렇듯 문인들의 단골 주점이 된 데는 아마도 1960년대 중후반부터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 왔던 ‘낭만’이라는 대형 맥주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들어 술꾼들의 주머니 사정이 다소 나아지면서 막걸리나 소주로 시름을 달래던 상당수의 술꾼들을 맥주집들이 흡수한 것이다. 특히 ‘낭만’에서 인기를 끌던 몇몇 여자 종업원들이 독립해 살롱 분위기의 카페들을 잇달아 열면서 술집 풍속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곳이 관철동에서 꽤 오래 술꾼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사슴’이다. 이곳에는 조병화, 송지영, 이병주 등 원로 중진문인들이 즐겨 찾았는데 항상 시끄럽고 번잡한 ‘가락지’와는 달리 아늑하고 호젓한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술꾼들의 취향이 그렇게 변해간 것은 그 무렵의 시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1975년엔가 고은, 이문구, 박태순, 황석영 등이 주축을 이룬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가락지’에서 발의되었고, 조선·동아 사태로 내쫓긴 기자들이 술집에 모여 울분을 토하는 일이 더욱 잦아지게 되자 문화예술인과 언론인에 대한 유신정권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열 명, 스무 명씩 모여 술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던 분위기 대신 서너너덧 명씩 끼리끼리 모여 조용히 술 마시며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청진동과 ‘가락지’에 모여들던 문인들은 멀리 세검정으로, 인사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카페촌으로 급부상하던 세검정에는 ‘시화’ ‘산장’ ‘베이스캠프’ 같은 곳에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인사동에는 후에 ‘이화’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인사동빌리지’와 ‘선천집’ ‘사천집’ 같은 곳을 단골로 삼는 문인들이 많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인사동 뒷골목의 ‘평화만들기’가 가장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단골이니 아지트니 하는 개념이 많이 시들었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김유신의 말[馬]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단골술집으로 향하던 게 70-80년대의 음주 풍속도였다. 하지만 진짜 술꾼들에게는 단골술집이라는 게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하룻저녁에 서너 군데 술집을 닥치는 대로 전전하는 게 보통이었다. 고은 시인 같은 경우다. 문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던 70년대 초 나는 고은 시인에게서 가벼운 주머니로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 날 오후 서너 시쯤 볼일을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가던 중 광화문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이미 꽤 취기가 있어 보이는데도 고 시인은 무작정 나를 뒷골목의 선술집으로 끌고 갔다. 둘 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고 시인은 호기 있게 찌개와 소주를 주문했다.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찌개가 바닥이 나자 고 시인은 냄비에다 물을 붓고 밑반찬을 모두 쏟아부은 다음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마셨는데도 술값은 얼마 되지 않았다. 술꾼들에게 술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라면 장편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문학기자로 일하던 70년대의 10년, 그리고 문화부장만 세 차례를 역임했던 80년대의 10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문인들을 술집에서 만났다. 문인들과의 첫 만남은 거의가 술집에서 이루어졌다. 갓 데뷔하여 안동에서 상경한 소설가 김주영을 ‘가락지’에서 처음 만나 술을 마시며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를 목청껏 불렀던 일이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80년대 중반 문학기자로 있던 기형도 시인이 나에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이화’로 데려가 장석주를 만나게 해준 일도. 앞으로도 술과 관련한 이런 추억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는지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정규웅 문학평론가. 1941년 서울 출생. 저서 '휴게실의 문학' '오늘의 문학현장' '글동네 사람들' 등. 소설 '그림자 놀이' '피의 연대기' 등이 있음.
그곳에 가면 시인의 별똥별을 볼 수 있다 최재봉 2008년 4월 11일 금요일, 자정 가까운 시각. 한겨레신문 문학 담당 기자 최아무개는 동료들과 택시에 올라 인사동으로 향했다. 신문사 근처에서 있었던 부서회식을 마친 뒤 단골 술집인 ‘소설’에서 2차를 할 생각이었다. ‘소설’의 마담 언니가 몇년 간의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귀경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인사동 골목의 안국동 쪽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그는 크라운제과를 지나 학고재 골목이 나오기 전, 왼쪽으로 첫 번째 작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아뿔싸, 골목으로 접어들자마자 아는 얼굴들을 마주쳤으니, 이시영, 김정환, 박형준 시인과 평론가 신형철 등이 출판사 사람들과 함께 골목을 되돌아 나오고 있는 것 아닌가. ‘소설’에 자리가 없구나! 직감이 왔다. 김정환 시인이 누군가. 자타가 공인하는 ‘소설’의 터줏대감 아니겠는가. 그가 발길을 돌렸다면 그렇잖아도 좁아터진 ‘소설’에 남은 자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소설’은 돌아온 안주인을 환영이라도 하려는 듯 성대한 ‘인파’로 북적였다. 김정환 시인에 필적할 단골인 건축가 ㅈ선생, 최아무개의 직장 동료였다가 영화판으로 옮겨 간 ㅇ아무개, 영화제작자인 ㅇ형 등의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소설’의 또 다른 단골인 소설가 성석제 형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김정환 시인이 소리통 격인 배를 한껏 내밀고 벨칸토 창법으로 부르는 「메기의 추억」을 듣기는 틀린 것이었다. ‘소설’에 입문하지 못한 시인들 일행은 종로 쪽으로 내려가다가 인사동 네거리 근처에 있는 ‘시인’으로 갈 모양이었다(시인은 역시 ‘시인’으로?!). ‘시인’은 애초에 김사인 시인의 시집 제목인 ‘가만히 좋아하는’을 옥호로 삼았다가 나중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집이다. 그 시집의 주인을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나 이런저런 모임 장소로 애용하고 있는 곳. ‘소설’보다는 몇 배나 넓은 집이니 분명 자리가 있겠지. 최아무개 일행은 인사동의 또 다른 명소인 ‘평화만들기’로 향했다. 원래 있던 자리가 화랑으로 바뀌면서 수운회관 뒤쪽 작은 골목으로 옮긴 지 몇 해 되었다. 한때는 웬만한 문학상 시상식의 뒤풀이를 도맡아 유치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장소도 좁아진 터라 큰 모임을 수용하지는 못한다. 원래 집 벽에 김지하 시인이 직접 썼던 이용악 시 「그리움」만은 벽지를 통째로 뜯어다 옮겨 놓아서 예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요즘 ‘평화만들기’에서는 출판사 학고재의 손철주 주간이 취흥이 오르면 즉석에서 펼치는 ‘애정 한시 특강’이 인기다. 벽 한쪽에 걸린 칠판에 달필로 원시를 적고는 한 구절씩 새기면서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술맛을 한껏 돋운다. 인사동의 명물 '귀천',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왼쪽)가 운영하고 있다.
최아무개가 찾았던 날은 가게가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낯선 얼굴들이 주모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근처 헌법재판소에 근무하는 소장 판사와 또래의 변호사들이었다. 박재동 화백이 얼마 전에 낸 책 '인생만화'에 백기완 선생이 주례를 선 이 집 주모의 결혼식 장면이 소개되어 있는데, 일행은 그 책을 보고 수소문 끝에 이 집을 찾은 모양이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은 인사동의 또 다른 명물이다. ‘귀천’과 마찬가지로 학고재 골목에 있는 ‘인사동 사람들’은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중진 및 원로 시인들이 단골로 삼고 있는 집이다. 본래 인사동에 있다가 안국동 쪽으로 건너가서 다시 문을 연 카페 ‘시인학교’도 시인들의 단골이다. 김종삼 시인의 시 제목을 가져다 쓴 이 집에서는 종종 시 전시회와 낭독회 같은 행사도 열린다. 지금은 없어진, 낙원상가 옆 ‘탑골’은 ‘소설’과 ‘평화만들기’에 앞서 문인과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출판사와 술집들이 몰려 있는 홍대 앞에도 시인들의 아지트가 몇 있다. ‘럭셔리 수’ 노래방 맞은편쯤에 있던 ‘예술가’는 문학과지성사(문지) 쪽 문인들이 즐겨 찾는 집이었다. 문학과 사회 편집회의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면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문지와 가까운 문인들이 모여들어 한바탕 유쾌한 술자리가 벌어지곤 했다. 주인이 제주 출신 처자여서 소설가 현기영 선생도 이재무, 박철 등 후배 시인들을 대동하고 자주 갔는데, 아쉽게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예술가’ 이후 문지 문인들이 옮겨 간 아지트는 극동방송국 맞은편 골목 안에 있는 ‘버즈’다. 매주 목요일에 있는 ‘문지 세대’ 문인 모임에는 황동규·정현종·김형영 시인과 소설가 김원일 선생, 평론가 김주연·김치수·김인환·오생근 선생 등이 이곳에 오고, 문학과 사회(문사) 편집회의가 있는 금요일 저녁에는 문사 동인들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젊은 문인들이 모여든다. 소설가 지망생으로 알려진 주인장이 모아둔 엄청난 양의 엘피 음반이 이 집의 자랑이다. 귀에 익은 올드팝과 한국 포크음악 등을 들을 수 있고 옛날 방식으로 리퀘스트도 받아 주어서 최아무개 역시 즐겨 찾곤 한다. 주차장 골목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지하철 홍대입구역과 산울림소극장 사이에 있는 ‘곱창전골’ 역시 다량의 엘피 음반을 보유하고 있어 주로 7080세대 문인들과 출판인 및 편집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문인들이 모여 사는 일산에도 문인들의 아지트가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독일 맥주집 ‘크롬바허’가 가장 유명할 듯한데, 2007년 연말에는 소설가 김훈 선생이 주관하는 ‘일산향토문인회’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하다 보니 일산뿐이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문인들도 대거 참여해 성대한 모임이 되었는데, 이날은 특히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강정의 ‘수와 정’ 듀엣이 동료들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연주와 노래 실력을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멀리 용인에서 온 소설가 박민규와 인디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인 시인 성기완도 이에 질세라 무대에 올라 흥을 돋웠다. 지방에 거주하는 시인들에게도 그 나름의 아지트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 최아무개가 가본 곳 몇 군데만 소개하련다. 지난 가을 전주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이 열렸을 때다. 문인들의 잔치인 만큼 부대 행사(?)로 저녁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주에 사는 김용택·안도현 시인과 십수 년 동안 전주에서 살다가 몇 해 전 하동으로 이사 간 박남준 시인이 술집 하나씩을 정해서 행사 기간 중 매일 밤 페스티벌 참가 문인들을 대접하는 일종의 호스트 노릇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전주권 문인 및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은 술집 ‘새벽강’, 그리고 만 원짜리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킬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한 상 그득 나오는 환상의 막걸리집 ‘홍도주막’이다. 전주에 사는 동안 ‘새벽강’에서 살다시피 했던 박남준 시인이 하동으로 간 뒤 인근 구례에 사는 이원규 시인과 함께 단골로 삼은 곳이 구례의 포장마차 ‘어부의집’이다. ‘주먹’ 출신 문학 애호가 아저씨가 경영하는 이 집에 가면 유용주·이정록·안상학 시인과 소설가 한창훈 등 두 사람과 가까운 문인들의 사인이 훈장처럼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재봉 1961년 경기 양평 출생. 현재 한겨레신문사 문학전문기자. 저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등이 있음. 청마와 함께 했던 대구 백록 다방
김종길 지금 돌이켜보니 나 자신의 ‘단골 아지트’라고 할 만한 곳으로는 피난시절부터 7,8년 동안을 보낸 대구 향촌동의 ‘백록’ 다방이 떠오른다. 당시 대구에는 문인 내지 지식인들이 단골로 모이던 다방이나 술집이 몇 군데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석류나무집’이라는 막걸리집은 내가 살던 집 가까이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해송馬海松 선생이나 조지훈趙芝薰, 최인욱崔仁旭 씨 등 피난 문인들의 단골집이어서 나도 한동안 부지런히 들락거리던 곳으로 나의 초기작품인 「주점서장酒店序章」과 「주점일모酒店日暮」의 세팅setting이 된 곳이다. 호도胡桃나무 잎사귀만한 뜰과 호도胡桃나무 잎사귀만한 툇마루에 무수한 호두나무 잎사귀가 퍼어렇게 잠겨오는 주점酒店 30대에 접어든 김종길(오른쪽)시인과 의대 학생이었던 허만하 시인. 대구 향촌동 거리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은 백록다방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주점서장」의 첫머리이지만 과장과 몽타주 수법이 동원되어 그 주점의 실상과 분위기를 나대로 형상화해 보려 한 것이다. 그 집은 ‘석류나무집’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지로 좁은 뜰 한 구석에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기도 하였지만 여름이면 그 뜰을 뒤덮다시피 한 큼직한 호도나무가 뜰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집에 모이던 술꾼들은 좁은 툇마루가 아니면 돗자리를 깐 뜰에 앉아 술을 마셨는데 거기서 벌어졌던 몇몇 일들이 반 세기 넘게 지난 지금에도 어젯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다가 석류나무집은 1953년 여름 피난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로는 왕년의 명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과 함께 피난시절부터 문인 내지 지식인들이 모이던 백록다방은 환도還都 후에도 여전히 그들로 북적거렸다. 나도 재직하던 대학에서 강의가 끝난 저녁나절에는 거기 들르는 것이 거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는데, 자주 어울리던 사람들은 각각 대구매일신문과 영남일보의 문화부장이었던 고故 이근우와 남욱, 그리고 당시 경북대 의대 대학원 학생이었던 허만하였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경남 함양군 안의安義에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가끔 대구에 올 때는 주로 그 다방에서 우리와 어울렸고, 1954년 봄 잠시 나와 함께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출강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주말이면 대구에 와서 우리들과 거기서 만나 환담하다가 (하긴 청마 선생은 주로 우리의 환담을 듣는 편이었지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자리를 인근 약주집으로 옮기곤 했다.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허만하의 '부드러운 시론'(1992)에 부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었다. 그래도 그 자리가 그렇게 즐거웠던 것은 청마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라곤 없었다. 우리의 즐거움은 청마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었지 그의 이야기가 특별히 재미있거나 유식했거나 계발되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청마는 달변도 아니었고 유식한 척하지도 않았으며 특별히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덤덤하고 과묵하면서도 소탈하고 너그러운 것이 그의 인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우리는 이 땅에서는 드물게 보는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나이 30을 전후한 5,6년 동안 대구 향촌동 백록다방과 그 근방에서 보낸 시간이 어떤 면에서는 나의 황금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어울려 젊음을 불사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벗들은 고인故人이 된 지 오래고 지금 이 세상에는 허만하와 나만이 남아 있다. 그것도 불편하거나 병든 몸으로 우리가 맞는 올해가 청마 탄생 100주년이요 서거 41주년이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김종길 1926년 안동 출생.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성탄제' '해가 많이 짧아졌다' 등, 시론집 '시론', 역시집 '20세기 영시선' 외 다수.
처음 찾은 <문예>파 아지트 ‘풀러워 다방’
김규동 1948년 1월에 나는 38선을 넘어 단신 남으로 나왔다. 평양에서는 문학동맹의 문학을 너무 많이 체험했고, 이제는 그때까지 월북하지 않고 남쪽에 남아 있는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의 문학이 매우 궁금하기도 하던 차라 훌쩍 길을 떠났던 것이 그만 영원한 실향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해 여름에 소공동에 있는 ‘풀러워다방’을 찾아갔다. 남쪽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란 소문을 듣고 촌놈이 다방엘 한 번 찾아간 것이다. 평양에는 다방이란 게 없었으므로 처음 겪는 일이다. 말로 듣던 대로 그곳엔 문예 잡지 중심의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 이한직, 곽종원, 서정태(서정주의 아우), 이정호, 손소희, 이설주 등 제씨가 진을 치고 있었다. 김동리는 수장답게 처음 보는 문학청년에게 비교적 친절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한테 평양에서 온 젊은이라며 미소 띤 얼굴로 나를 소개시켜줬다. 나는 황송한 마음으로 멋모르고 여러 사람들께 차를 시켜 대접했고, 그분들께 평양 문화계 소식을 아는 대로 들려줬다. 내과의사 같은 인상의 깡마른 조연현은 최승희와 안막, 임화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한설야는 지금도 교육상 자리에 있느냐며 평양에서는 한설야하고 홍명희가 김일성의 신임이 두텁다던데 그러냐고 콧등의 땀방울을 씻을 생각도 않고 물었다. 김동리는 이태준의 소설 「농토」는 인기가 있느냐, 또 조기천의 장시 「백두산」이 많이 읽힌다는데 조기천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김사량이 평론가로 크게 활동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량은 소설은 안 쓰더냐는 말도 했다. 나는 넓은 다방 안 저쪽 구석자리에서 베토벤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이가 원고를 휘갈겨 쓰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아하 저 사람이 남조선 대작가 아닌가 하여 옆의 조지훈한테 누구냐고 은근히 물으니 그는 중국에서 돌아온 김광주라는 소설가라고 일러줬다. 차 시중을 드는 30대 마담이 어찌나 이뻐 보이는지(그렇게 짙은 화장의 여인은 처음 보았다) 아이고 여기가 정말 서울은 서울이구나 하고 나는 새삼 감탄했다. 네모 반듯한 얼굴의 곽종원이 마담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왜 자꾸 이뻐지지? 시집 가려고……” 하는 농을 던지고 하하 웃어댔다. 기생 오빠같이 머리를 올백으로 곱게 빗어올린 이정호가 해죽해죽 웃자 이설주가 “원 점잖지 못하게 뭐 여자를 갖고 그러나” 하며 점잖은 체했다.
두어 시간 동안 촌놈은 서울 문인을 상대하여 이렇군 저렇군 지껄이고 나서 카운터에서 찻값을 계산하니 일금 9백 원이라 호주머니에 단돈 백 원밖에 없는 이북내기는 당황했다. 마담이 향수 냄새를 확 풍기며 “다방이 처음이신가 보죠.” 하며 살짝 웃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 호화판 시집을 맡기고 내일 돈 갖고 와 찻값 갚으면 안 되겠느냐 하니 그러시라며 놓아줬다. 다방 문을 나서니 밖은 이미 어두워지는데 미도파백화점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며 식은땀이 쭉 흘렀다. ‘약해, 그렇다. 문예파, 이건 약하다. 남조선 순수문학 약하다. 이걸 갖고는 안 되겠다. 남조선 문인들이라는 게 뭐 저 정돈가? 굵직굵직한 시인 작가 다 이북으로 가고 여기는 겨우 이거구나. 하지만 어쩌나, 나도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야 한다. 저들과 어울리며…… 살아갈밖에 없지 않은가.’ 쓸데없는 말 외며 걸음을 옮기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남조선 첫체험담을 학교 때 스승인 김기림 선생한테 이야기하니 선생이 “김군, 너무 서둘지 마시오. 내가 이제 천천히 좋은 친구를 소개할 테요. 그러니 친구를 함부로 아무나 사귀지 마시오.”라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문예파가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등을 빨갱이로 모는 데 대한 반감에서 김군은 그들과 놀지 말라는 당부를 했던 것이 분명했다. ‘풀러워 다방’은 6·25 전쟁으로 소진될 때까지 남한 순수파(예술지상주의) 문인들의 화려한 아지트였다. 1951년 1월에 중공군이 내려온다 해서 서울 시민이 모두 피난길에 올랐는데 문인들도 대거 부산, 대구로 피난갔다. 이해 1월 4일인가.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장만영, 조병화, 조지훈, 이봉구, 이봉래 등 대여섯은 석별의 소주잔을 나눴다. 모두들 피난갈 준비로 정신들이 없었다. 이날은 조병화의 시(제목은 잊었다)가 경향신문에 났는데 병화가 그 시를 소리내어 읽자 장만영이 화난 소리로 “아니 지금 중공군이 미아리로 쳐들어온다는데 시는 다 무슨 시야!” 하고 핀잔을 줬다. 병화는 피식 웃고 신문을 접었다. 이때 박인환이 벌겋게 취한 얼굴로 다방에 들어서며 “여러분들, 난 대구로 가기로 했소이다. 짐 다 꾸렸소.”라고 외치듯 하고 나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조지훈 역시 만취한 상태에서 큰소리쳤다. 굵고 나직한 음성으로 “차편은 걱정들 마슈. 국방부 정훈국에 부탁했어요. 군용 차량 한 대 약속해 놨으니 내일(5일) 아침 9시에 명동에 짐들 갖고 모이시오. 다 함께 대구나 부산으로 갑시다.”라고 호언장담하는 거였다. 나는 정직하게도 지훈의 장담을 믿고 이튿날 아내를 데리고 명동에 나왔으나 거리는 이미 텅 빈 상태였다. 다들 밤을 타 피난을 떠나버린 것이다. 어제 만났던 문우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훈이 술김에 한 장담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잘못이었다. 보따리를 안고 내 뒤를 따르는 아내에게 나는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흑석동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남대문을 지나 한강 얼음판을 건너 맥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김규동 1925년 함북 출생. 평양종합대 중퇴. 1948년 예술조선 지로 등단. 후반기 동인(1950~1953). 시집 '나비와 광장' '느릅나무에게'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수상. 언제나 그리웁다
황금찬 그 젊은 날 자주 들러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하던 곳이 어찌 한두 곳뿐이겠는가. 하지만 이 지면에는 그 중 두 곳의 이야기를 하리라. 자연장 다방 1954년 4월이다. 그때 나는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대문 로터리 근방에 작고 새로 문을 연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방이 있었는데 그 집이 ‘자연장’이다. 지금은 다 헐리고 크고 높은 빌딩이 섰지만 그때는 목조건물이 날을 세우고 있을 때다.
‘자연장’에는 많은 고전음악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만 있으면 들르곤 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늘 그 집에 들러 음악을 투정하면서 듣곤 했다. 그 자연장 이야기를 박목월 시인에게 했더니 어떤 음악들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더니 베토벤의 5번 <운명>이 있는지 그리고 6번 <전원>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 있게 다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 가지만 더 알아보라고 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가 있느냐고 한다. 내가 알아본 결과 다 구비됐다고 한다. 그 후부터 박 시인이 일주일에 세 번씩 그 자연장에 와 음악을 듣곤 했다. 그것을 약 1년을 계속했다.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조지훈 시인이 간혹 찾아오고 《청포도》 동인인 이인수가 강릉에서 찾아왔고 역시 같은 동인인 함혜련이 자주 들렀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가 김광식이 일주일에 몇 번씩 찾아와 그가 좋아하는 음반들을 많이 들었다. 자연장은 시인들의 음악감상실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 자연장에서 음악만 들은 것이 아니고 시작에도 힘을 많이 들였다. 그때까지 나는 등단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1953년에 《문예》에 첫 을 받았으나 1년에 한 번 출간하는 잡지라 두 번째 이 1954년인데 문예지가 그 해에 폐간되고 말았다. 자연장 시절에 작품도 많이 얻었다. 「매화」라고 제목한 원산의 이미지 작품과 여학생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소녀상 1」과 「소녀상 2」도 자연장 시절에 얻은 작품들이다. 1955년 봄부터 나는 서대문 근방을 떠나 혜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 자연장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문예살롱 시절
문학지 《문예》가 간행되면서 문예빌딩이란 말이 생겼고, 그 빌딩 1층에 ‘문예살롱’이란 찻집이 문을 열었다. 문학지 《문예》와 정을 같이하는 문인들과 문예지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려는 문학인들이 그 ‘문예살롱’에 정을 두고 쉬지 않았다. 1954년에 《문예》는 폐간의 눈물을 맞았으나 문예살롱만은 그대로 손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직장이 끝나면 문예살롱 가족들은 반드시 그곳에 들렀다 가게 된다. 저녁 6시가 되면 회비를 걷는다. 그 모든 일을 김동리 선생이 맡아 했다. 회비 5백 원이 다 모아지면 살롱 옆에 있는 ‘명천옥’으로 간다.
추어탕과 막걸리를 마시면 회비가 끝이 난다. 그때 김동리를 집사라고 불렀다. 그 생활을 몇 년을 계속했다. 그때가 문학인들의 생활이 가장 비참했던 때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거리에 나오면 우리 네 사람은 자연히 또 모이게 된다. 이범선, 김상억, 김구용, 필자 네 사람이다. 우리는 명동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종로 4가까지. 이범선과 김상억은 답십리, 김구용은 돈암동, 나는 미아리에 살았다. 전차가 종로 4가에서 청량리선과 돈암선으로 갈라진다. 종로 4가에 와선 있는 것을 다 털어 내라는 것이다. 다 털어 낸 돈이 얼마가 되든지 다 이범선이 주머니에 넣고 기와집이지만 지금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집에 들어가 탁주와 돼지뼈를 넣고 끓인 안주로 하루의 지친 생활을 촛불로 밝혀본다. 약 한 시간 무슨 말들을 하지 않았겠는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 우리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이 운 사람이 김구용이다. 그는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울었다. “이 나라의 시인들은 언제 가야 눈물 없이 살 수 있을까.” 그가 울면 네 사람이 다 울었다. 생각하면 어제 같지만 다 옛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그래서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황금찬 1918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53년 《문예》 《현대문학》으로 등단.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문화보관훈장 등 수상. 시집 '구름은 비에 젖지 않는다' '행복을 파는 가게' '옛날과 물푸레나무' 등이 있음.
광주 '원탁'시인들의 아지트
범대순 광주가 예향이라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예향이라는 말을 애용하던 시대에 광주는 묵시적으로 전라도를 대표하였다. 광주가 전라도를 대표하였던 것은 광주가 그 가운데 사람이 제일 많이 사는 비교적 큰 도시이기 때문도 있지만 광주에 산 의제 허백년 선생과 오지호 화백에 대한 존경의 뜻도 있었다. 거기에 1950년대 한국 전쟁 당시 서정주, 김현승, 이동주, 이수복 등이 광주에 살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그때만 해도 광주의 대표성에 대하여 별로 이의를 달지 않았다. 목포나 전주에 특수한 예향의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예향으로 일반화시킨 정서는 그런 탓 등으로 그 인식을 집중시키기 위한 일반적 공감이었다. 1960년대 시동인지 《원탁》이 발족할 무렵만 해도 아직 광주는 예향이었다. 그러나 오늘 예향 광주는 없다. 죽어버린 것이다. 예향 광주를 죽인 원인이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허백년과 오지호 같은 큰 예술인이 사라진 탓일 수도 있고 대표성을 가진 그 선배 시인들이 다 가버린 탓도 있다. 그래서 오늘 광주를 예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주 사람들 간에도 드물다. 그들은 예향보다는 의향義鄕이라는 말의 영향권에서 살고 있고 5·18의 정서에 의해서 더욱 강력하게 지배되고 있다. 거기에 전국적으로 요즘은 예향이 아닌 곳이 없다. 예술이 일반화되고 어디나 다 특징이 재발견되고 강조되기 때문에 예향이라는 말 자체가 사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꼭 광주랄 것도 없지만 그 예향을 죽인 원인인 학살 무기는 아마도 대학일 것이다. 대학이 많아지면서 예술이 일반화되고 예술인이 양산되면서 가치가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광주를 방문한 사람들은 도시의 중요한 목 곳곳에 때로 스무 그루나 서른 그루 나머지의 소나무 숲이 자연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작은 정원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그 소나무 숲은 광주역 광장에도 있고 금남로 한복판에 또 상무동 시청 근처에 또 말바우 네거리에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수많은 대학의 캠퍼스에 그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있어 그 현장들을 찾아다닌다면 그는 동마다 또 거리마다 그 소나무 숲이 설치미술을 이룬 풍경을 만날 것이다. 시민들은 그 옆을 지나가면서 무관심한 것 같지만 사실은 도시의 미소 같기도 하고 애교 같기도 한 그 작은 뷰티 스팟(Beauty Spot)에서 자기도 모르게 위안을 받는다. 2000년 '원탁 시낭송회'를 마치고, 뒷줄 좌로부터 강인한, 김종, 진현성, 박홍원, 전원범, 앞줄 좌로부터 김영박, 김준태(초청시인), 국효문, 문도채, 최봉희, 문병란, 오명규 시인 등 (범대순 촬영)
광주 거리의 이 작은 소나무 숲은 광주 시인들의 현상과 유사하다. 광주의 거리 어디고 소나무 숲이 서 있듯 지금 광주의 문화 공간 어디고 삼삼오오三三五五 시인들이 모여 있다. 그만그만한 문학 단체, 고물고물한 시동인지, 그들의 시 낭송회 등, 그리하여 그 시인들의 모임은 그들만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리가 담장을 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빛깔이 눈부시지 않다. 50년대 선배시인들이 모인 다방 ‘신성’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의 언덕 ‘신성’에 젊은 시인들 가령 박성룡이나 박봉우, 강태열, 윤삼하 같은 빛나는 젊은이들이 출입하면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글을 청탁한 《시인세계》는 실망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고전적 시인의 아지트는 광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요즘 거의 주말마다 광주 시인들의 행사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혹은 문학잡지의 모임에서 혹은 문학단체 시분과 모임 초청을 혹은 10개도 넘은 동인회 모임의 초청을 혹은 시 낭송회 또는 시집 출판 기념회 또는 시인 야유회 등의 초청들이다. 그런데 그 많은 초청에 공평하게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그 초청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한 생각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나에게 그들은 누구나 다 소중한 사람들이고 다만 그 소중한 자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만한 뚜렷한 의미도 없고 또 내가 참가하면 나이 탓에 반드시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나 똑같은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번 덕담으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없다. 나는 어제 두 가지의 시 관련 원고 청탁을 받았다. 하나는 시 동인지 《원탁》 53집 수록 원고 청탁이고 또 하나는 5월에 예정된 《원탁》 시낭송회 낭송 작품이다. 《원탁》은 한국 최장수 시 동인지이지만 그러나 그 공감은 일반적이지 않고 다만 《원탁》 동인들만의 믿음이다. 1967년 5월 l일은 동인지 《원탁》의 발간일이면서 우연히 《60년대 사화집》의 종간의 날이었다. 양다리를 걸친 나는 아직도 《60년대 사화집》이 절망의 목소리를 내면서 무너진 바로 그날 <원탁》이 희망을 가지고 탄생한 것을 기억한다. 지금 그 장수의 《원탁>의 언덕에 바람은 불지 않고 어딘지 김이 빠진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러나 그 《원탁》을 나는 41년 동안 미련하게 지키고 있다. 그래서 《원탁》은 미운 정 고운 정을 가지고 사는 말하자면 나의 조강지처다. 따라서 그 《원탁》은 이미 미울 것도 없고 예쁠 것도 없는 나의 숙명적인 혈연이 되어 버렸다. 그런 마음으로 그 모임만은 나가고 있다. 《원탁》은 40년간 충장로 중국집 ‘왕자관’이 아지트였다. 그리고 요즘은 최근 동인으로 참여한 강경호 시인이 발간하는 잡지 《시와 사람》 사랑방이 아지트라면 아지트다. 그 아지트에 모이는 사람 가운데 처음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나 말고는 없다. 중간에 참여했다가 버리고 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고 기대를 가지고 새로 참여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금은 거의 새 사람들이 주역이다. 새 사람들 틈에 헌 사람으로 있는 게 편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고 거기 있을 것이다. 범대순 1930년 광주 출생. 1965년 시집 '흑인고수 루이의 북'으로 문단 데뷔. 한국시협상, 광주시민대상, 금호 학술상 등 수상. 현재 전남대 명예교수.
대구 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맥향’
이태수
1973년 여름 육군 중위(ROTC)로 제대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한여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등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싶어 한 후배(소설가 김원일 선생의 동생 김원도, 요절 시인)와 함께 경주를 거쳐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 보름쯤 헤맨 뒤 부산 남포동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여행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그 다음날 대구로 돌아왔다. 매일신문 기자 시험이 있으니 같이 응시하자는 친구들이 있어 한동안 그 준비를 했다. 요행히 경쟁을 뚫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서울행이냐, 교직 생활이냐’를 고민해 왔는데, 뜻밖의 신문기자가 돼 조금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대학시절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무렵엔 같은 연배를 중심으로 선배나 후배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시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군생활의 공백기를 딛고 1974년엔 《현대문학》 완료로 등단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는 당시 대구 중앙통에 자리잡은 매일신문사와 가까운 거리의 ‘은하 다방’과 그 인근의 술집 두어 곳이 자연스럽게 아지트가 되고, 얼마 뒤엔 차를 마실 수 있는 화랑 ‘맥향’이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공간이 돼주었다. 우리는 몇 곳을 번갈아가며 모여들어 차를 마시고 술판을 벌이면서 경쟁하듯 ‘문학적 치기’를 주고받았다. 이미 등단한 몇몇 신인들의 뒤를 이어 하나 둘씩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거쳐 등단하는 열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자유시》 동인은 그런 분위기 속에 잉태되고, 출범할 수 있었다. 1975년 가을 이하석과 필자가 만나 동인 결성을 모색하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몇 차례의 조율을 거친 뒤 대구·경북 출신 동세대 시인들로 출범을 서둘렀다. 창립 동인은 문예지로 등단한 박정남(현대시학), 박해수(한국문학), 이경록(월간문학), 이기철(현대문학), 이하석(현대시학), 필자(현대문학)와 신춘문예 출신인 이동순(동아일보), 정호승(대한일보) 등 8명이었다. 1976년 1월 동인 모두가 모인 첫 자리를 갖고, 곧이어 동인 명칭을 〈자유시〉로 결정했으며, 창간호는 그해 4월에 빛을 보게 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문단의 반응은 좋아 용기를 얻었다. ‘시는 자유로워야 함을 우리는 믿고 있다. 모든 것에로의 자유,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시가 자유로우면 그만큼 언어도 자유로우리라는 기정사실을 믿는다. 자유롭자. 그리고 모든 시들로부터도 우리는 자유롭자.’《자유시》 동인지 창간호 책머리의 ‘자유시의 명제’일부분이다. 《자유시》는 이같이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우며 출범했다. 다소 관념적이고 포괄적이지만, 어떤 이념이나 방법론으로 억지스럽게 괄호를 치거나 공통분모를 만들려 하기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자유시》의 이 같은 입장은 성격이 불투명하고 애매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대를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동세대 시인이라는 점만으로도, 개성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어떤 공통분모가 도출되고 '에꼴'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자유시》 동인에 이어 《반시》 동인이 출범하면서 다소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1973년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들은 73년부터 얼마간 ‘73그룹’을 결성, 사화집을 내다가 중단된 상태였다)이 재결집해 《반시》 동인을 결성하면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동순과 정호승을 《자유시》가 양보하라는 강력한 제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놓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정호승을 《반시》에, 대구의 이동순을 《자유시》에 참여하도록 타협을 보았다. 이런 사정으로 정호승이 나간 대신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강현국을 받아들였고, 이경록이 지병으로 작고해 동인지 2집엔 유작을 싣는 아픔도 맛보았다. 1978년에는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서원동이 영입돼 3집을 냈고, ‘독자와의 대화’를 갖는 등 대외적인 활동의 폭도 넓혔다. 또 그 이듬해 4월에는 박정남이 개인 사정으로 빠진 채 ‘맥향’에서 필자 주선으로 동인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열었다. 그 수익금의 일부로 동인지 4집과 이경록 유고시집 『이 식물원을 위하여』를 냈으며, 1983년 청하출판사를 통해 동인지 6집을, 실천문학사의 도움으로 『자유시 선집』을 냈다. 이같이 우리는 6권의 동인지와 1권의 선집을 낸 뒤 아쉽게도 개별 활동으로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낭만적인 감성의 바탕에다 사회나 역사를 향한 눈뜸과 준열한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고, 대부분이 순수시를 지향하면서도 참여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으며,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경향을 변증법적으로 합일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당시 문단에는 순수와 참여, 개인과 민중 문제가 가장 두드러진 화두였다. 우리도 이 화두를 중심으로 활로 모색을 위한 열띤 대화를 끌어나가곤 했다. 당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던 계간지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세계의 문학》 등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 둘 이들 계간지를 통해 발판을 굳히는 성과(필자와 이하석은 《문학과 지성》, 이동순과 정호승은 《창작과 비평》, 이기철은 《세계의 문학》)를 얻었다. 되돌아보면, 1980년대 초반까지 《자유시》는 《반시》와 함께 우리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동인으로 떠올랐으며, 김병익, 김현, 김주연, 김치수, 염무웅 등 적잖은 문학평론가들의 관심에 힘을 입었다. 그러나 시를 향한 의욕과 열정에 불을 지피던 그 시절을 지금 생각하면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동인 대부분이 자기 세계를 부단히 가꾸는 중견의 위치를 굳히고 있지만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며, ‘맥향’의 각별한 후의도 잊을 수가 없다. 몇몇 동인들은 다시 모여 그 시절과 같은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다고 한다. 나도 은근히, 조금은 씁쓸하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이태수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 '꿈속의 사닥다리' '그의 집은 둥글다' '내 마음의 풍란' 등이 있음. 대구시문화상(문학), 동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나의 기억문화유산, 다다
이문재 <그 집 앞>이라는 가곡이 생각나는 ‘집’이었다. 물론 집은 아니었다. 음식점도 아니었다. 카페라고 하기에도 부적절하고, 허름한 맥주집도 아니었다. 관찰력이 여간하지 않고서는 잘 보이지 않는 손바닥만한 간판에는 ‘길모퉁이 카페 다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다다’는 오직 병맥주만 파는 작고, 낡은 술집이었다. 아주 불편한 테이블 4개, CD를 아랑곳하지 않는 폐기 직전의 턴 테이블, 비어 있는 구석이 더 많은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한대수 음반 자켓, 벽에 가득한 낙서…… 다다는 1990년대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는 1970년대였다. 다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성큼, 20대로 돌아갔다. 광화문 서쪽 언저리. 정동 MBC(문화방송이 여의도로 옮긴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곳을 정동 MBC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장소, 장소성은 질기다)에서 광화문 네거리(정확하게는 세종로 네거리다) 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약간 오른쪽으로 휘는 곳, 흥국생명 빌딩 바로 못 미처, 낡은 2층 건물이 몇 채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그 낡은 건물 중에서도 가장 낡은 건물의 2층에 ‘다다’가 있었다. 그러니까 다다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역사박물관과 마주하고 있었다. 참, 다다는 ‘茶茶’다. 다다는 나의 안식처였다. 다다는 벗들과 부담없이 어울릴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낮에도 가끔 들러 차를 마시거나 ‘낮술’을 홀짝거리기도 했고, 책을 보거나, 간밤에 쓴 시를 다시 읽기도 했다. 술값이 없을 때는 술값이 없다는 이유로, 지갑이 두둑할 때는 외상값을 갚기 위해 다다에 갔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다에 갔다. 출장 가기 전날에도 들렀고, 귀사하던 날 밤에도 들렀다. 집과 회사(《시사저널》) 사이에 다다가 있었다. 1986년 봄부터 2005년까지(중간에 2년만 빼고) 나는 줄기차게 다다를 출입했다. 한때, 다다가 ‘그 집 앞’인 적이 있었다. 피해 가야 하는 길모퉁이인 적이 있었다. 술에 곯아, 술을 잠시 끊어야 했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직행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나에게 졌다. 내 두 발이, 나도 모르는 새에 다다의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김유신이었다면 말의 목을 베었을 터인데, 나는 김유신이 아니었다. 그런 날은 내가 나인 것이 참담해서 더 많이 마셔야 했다. 맥주밖에 팔지 않는 집, 안주래야 계란말이와 오징어가 전부인 집, 프라이버시라고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 그런 집을 내 30대, 나의 90년대의 반려로 삼았던 까닭은 다다의 주인 때문이었다. 김수영 씨.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독신 여성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통통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밉상도 아니었다. 눈매가 깊었다. 뜨개질을 하거나 꽃잎을 말리지 않으면 뭔가 늘 읽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무엇보다도 글에 대한 감식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인 김수영 못지않은 ‘칼’이었다. 내가 단골이라는 사실이 수영 씨는 물론 다른 단골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게 되었을 때, 수영 씨는 나의 최초의 독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쓴 기사는 물론 다른 매체에 실린 글들도 어김없이 그의 도마 위에 올랐다. 나중에는 문예지에 보낼 시도 보여주게 되었다. 그의 평가는 예리했다. 말이 많다, 주절댄다, 잘난 체가 심하다…… 그러다가 ‘이건 괜찮네’라거나, ‘이 시 나 말고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별 다섯 개’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날은 대취, 대취, 대취했다. 다다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사실은 장소)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인사동을 들락거렸지만, 어느 날부턴가 인사동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다다에 집착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벗들, 선후배들을 다다로 초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 다다에서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내 친구가 아니다.’ 내 동료와 선후배 기자들은 물론 인근의 타사 기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시인, 소설가들이 모여들었고, 다다 후반기에는 건축가를 비롯해 화가, 사진가, 출판 편집자 등 이른바 문화예술계가 다 꼬여들었다. 그 가운데 내가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싶은 어른이 건축가 조건영 선생이다. 조선생은 다다 분위기가 괜찮았는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정모’를 운영했다. 조선생이 주관하던 그 술자리를 어떻게든 복원해야 할 텐데.
2005년 5월 명예퇴직을 하면서, 나는 광화문을 떠났다. 광화문을 떠나면서 다다를 떠났다. 후배 기자들과 통화할 때, 종종 ‘수영 씨가 선배 안부 여쭙던데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2006년, 다다는 문을 닫았다.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 아니었다. 다다가 세들어 있던 건물이 헐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영 씨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모질지는 못하지만, 질기기는 한 것 같다. 이십대 후반부터 사십대 후반까지 줄기차게 한 술집을 고집했으니. 다다는, 다다의 수영 씨는, 다다에서 나와 맥주잔을 부딪쳤던 벗들은, 내 30대의 ‘기억문화유산’이다. 다다와 더불어, 한 시대가 갔다. 어디 다다만한 아지트가 없을까. 아직도 그런 아지트를 꿈꾸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철이 덜 든 것이 분명하다. 아니, 철부지가 아니라 선천성 철부족인지도 모른다. 천만 다행이다. 한 시대가 갔으니, 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이문재 1982년 《시운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 수상. 경희사이버대 문창과 초빙교수. ‘은경이네’에는 은경이가 없다
정병근 세월에 따라 시인들이 노는 무대도 바뀌는 것 같다. 가령, 60년대에는 명동이었다가, 70년대는 관철동이었다가, 80년대에는 대학로였다가, 90년대에는 인사동이었다가, 2000년대는 신촌 식으로. 여기서 잠깐, 4천만의 객관식 문제 하나 풀고 가자. 문제 다음 중 시인들이 신촌에 가는 이유는?
① 물이 좋아서 ② 술집이 많아서 ③ 회춘하려고 ④ 친구의 권유로 ⑤ 시적 영감을 얻으려고 정답과 해설 젊은 시인(젊다고 생각하고 싶은 시인 포함)들은 1번을 택할 것이 뻔하다. 늙은 시인들은 겉으로는 5번을 택하겠지만 속으로는 3번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몇 번인가. 4번이다. 에이~ 3번이면서…… 뭐,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이 문제는 정답이 없으므로. 신촌, 하면 나는 여관부터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관은 종종 내 피로한 몸의 종착지이면서 시발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은경이네'에서 성귀수 시인이 김요일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좌로부터 성귀수, 황병승, 김요일
새벽까지 한 잔 해 본 사람이라면 아침에 낯선 여관에서 홀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세수도 못하고 회사로 직행해야 했던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나는 신촌에서 주종환 시인과 한 번 동침한 기억이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김요일 시인과도 동침을 하고 말았으니, 아뿔싸! 그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나만 덜렁 남아서 비통해한들 무엇하랴. “택시! 신용산 전철역으로 날아갑시다.”
내가 본격적으로 신촌 출입을 하기 시작한 건 순전히 「은경이네」라는 시를 쓰기까지 한 김요일 시인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에 가 보면 대개 이윤학 시인이나 전윤호 시인, 고영, 황병승, 박후기, 고영민, 신동옥, 안현미 시인 같은, 민머리 곱슬머리 떠꺼머리 상고머리 단발머리 들이 서너 명 앉아 있었다. 우리는 대개 홍대 부근에서 한잔하고 2차로 ‘은경이네’엘 갔다. 왜냐? 싸고 편하니까. ‘은경이네’는 신촌 로타리의 홍익문고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은경이네’는 일찍이 성귀수, 김요일, 주종환 시인의 비밀결사 장소였다, 고 나중에 들었다. 또 얼핏 듣기로는 혁명을 위한 임시정부 청사로 썼다는 설도 있으나, 수사 결과에 의하면 단순 ‘반지 계’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무튼, ‘은경이네’는 그런 저런 사연을 간직한 채 우리(시인)들과 함께 20여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역사와 전통을 가진 술집이다. 그렇다고 고색창연한 담장과 맷돌과 물레방아 같은 장식이라도 꾸며 놓은 집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은경이네’에는 사람의 손때가 반질반질 묻은 탁자도, ‘나, 왔다 간다’ 같은 낙서조차 없다. 그냥 길거리를 가다가 잊은 듯이 유리문을 드르륵 열고 엎어지면 바로 거기가 안[內]이다. 아무 탁자에나 대뜸 앉는 사람이 임잔데, 아주머니도 대뜸 오뎅 국물부터 떠 온다. 비열하게 안주는 안 시키고 소주만 마시면서 떠든다 싶으면 어느 새 우리는 아무 안주나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 먼저 말하는 자가 돈을 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초짜 시인이 “여기요, 라면 하나 하고, 김밥 좀 주세요.”라고 하는 날이면 그날 안주값과 술값은 그자가 내야 함은 불문가지다. ‘은경이네’집의 별미 안주는 뭐니 뭐니 해도 족발이다. 내가 배가 고팠는지는 몰라도 술 안 마시고 맨 속에 먹어본 족발은 가히 ‘장충동 할머니’가 위태로울 지경으로 부드럽고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화장실이 주방 안쪽에 있어서 들락거리다 보면 가끔씩 아주머니가 버너 불을 시퍼렇게 켠 채 쭈그리고 족발의 털을 그슬리고 있었다. “오늘은 몇 마리 태웠남?” “나도 모리겠어. 무조건 태우고 보는 거지.” “좀 안 보이는 데 가서 하지. 족발 맛 다 떨어지겠네.” “아이고, 그럼 먹지를 말던가. 참내……”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중에 누구도 ‘은경이네’ 아주머니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알든 말든. 모르든 말든. 어느 날 새벽. 깨어 보니 ‘은경이네’였다. 덮었던 방석을 퍼뜩 걷어냈다. 아주머니가 탁자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얼른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신용산으로……” 그날 낮에 한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밤새 아주머니에게 헛소리를 해서 뿔이 이만큼 나 있다는 것이었다. 아차! 내가 또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말았군. 이번에는 한참 갈 것 같았다. 두어 달은 발을 끊는 수밖에.. 후환이 두려우므로, 앞서의 ‘여관’ 사건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 번은 주종환 시인이 창원의 고향집에서 불각시에 상경하여 ‘은경이네’에서 술이 깊어지매 숙(宿)할 데가 마땅치 않아 내가 근처의 여관으로 모신 경우이고, 또 한 번은 누군가의 출판 기념회 2차 자리였지 싶은데 지방에서 올라온 몇몇 시인들이 또 숙宿할 데가 마땅치 않자 온돌방 특실을 잡아서 새벽까지 수건돌리기를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요즘도 여전히 ‘은경이네’에 간다. 자주는 아니지만. 거기에 가면 시인 친구들이 있고, 경계 없는 안주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누님이라고 불리는 주인이 있고, 아름다운 기억 상실이 있다. 상계동과 신촌 사이에 ‘은경이네’가 있다. 그곳에 가고 싶다. 정병근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등이 있음.
그녀와 브람스
김상미 안국동 사거리 한 코너에 가면, ‘브람스’라는 작고 예쁜 카페가 있다. 2층 클래식 음악 카페인 ‘브람스’는 내가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지금까지 애용하는 카페이다. 실내에 들어서면 바닥과 벽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어 삐걱거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음악 속 후렴처럼 들을 수 있는 갈색 톤의 아늑한 카페. 나는 그곳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내 마음에 뿜어대는 매연과 고독을 삭히며 브람스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을 마치 셰익스피어와 블레이크, 김소월, 김수영, 엘리어트의 시를 읽듯이 들었다. 그리고 내 곁엔 언제나 한 여성이 있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 나는 출판사에 취직하기 위해 한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잡지 편집반’에 다녔었다. 그곳에서 나는 7명의 동지들을 만났다. 우리는 3개월 동안(한 학기 수업이 3개월이었다) 늘 같이 붙어 다니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중에는 신문기자도 있었고, 잡지사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나처럼 문학에 뜻을 둔 친구도 3명이나 있었다. 우리는 마음이 잘 맞아 서로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3개월 동안의 수업이 끝났을 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가상잡지를 만들어(물론 인쇄되지 않은 가재기 잡지에 불과했지만)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L. 그녀는 나보다 나이는 많았으나 아주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제일이었다. ‘브람스’는 그녀가 무려 30년 가까이 단골로 지낸 곳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자주 그곳에 가 음악을 들었다. 그녀는 음악만 들어도 지휘자가 누구인지를 알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통달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브람스와 바흐, 바그너가 그토록 좋은 줄을 몰랐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음악 속에서 나무들이 어떻게 숨을 쉬며 빛과 바람이 어떻게 세상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니체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그토록 바그너에 대해 심취하면서도 공공연히 애증을 표방해 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노혜봉, 이인원 시인과 함께 안국동 사거리에 있는 카페 브람스에서
그녀는 내게 참 많은 음악가들을 알게 해주고 그들이 음악을 통해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어떻게 표현하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귀기울여 알아듣게 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 그 답례로 나는 그녀에게 내가 좋아하는 시들을 읽어주고 적어주었다. 시와 음악이 함께 있는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한참 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수소문 끝에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땐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말못할 지병이 있었다는 걸 나는 까맣게 몰랐었다.
그녀를 잃고 난 후, 남은 6명의 동지들도 서서히 자신들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몇몇은 결혼을 하고, 몇몇은 이 나라를 떠나거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오랫동안 그리운 그녀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하여 나는 자주 시인들과 함께 ‘브람스’에 와 술을 마셨다. 그러다 ‘브람스’가 마주 보이는 일본문화원 내 《일본포럼사》에 취직이 되어 잡지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브람스’는 나를 만나러 오는 시인들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나는 근무시간에도 종종 그곳으로 가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셨다. 그녀가 좋아했던 창가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려다보면 그녀를 닮은 수백만의 얼굴을 가진 도심의 한 부분이 텅 빈 광채처럼 펼쳐졌다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공책 위엔 시가 한 편씩 씌어져 갔다. 그렇게 20세기가 가고…21세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차츰 ‘브람스’엘 가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어쩌다 가끔 그곳에 들를 때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여전히 실내엔 브람스가 흐르고, 카페 주인 역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음이 왠지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산다는 게 이런 재미구나. 오래된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경의. 그래서 오래된 것은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장소든 상관없이 고맙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구나…. 하여 나는 요즘도 울적한 산책 끝이나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엔 ‘브람스’에 들러 러시안 블랙 한 잔을 마시며 시를 읽듯 클래식에 귀를 활짝 열어놓는다. 그러면 내 속에 ‘꾸역꾸역’ 쌓여 있던 일상의 먼지들이 거짓말처럼 날아가고, 나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사는 나만의 삶 속으로 돌아와, 어느새 ‘개구리 뒷다리~’처럼 웃는 얼굴이 된다. 오래된 단골집이란 그런 곳이다. 아무 말 없이도 단골손님을 달래주고 어떤 경우에도 ‘꾸역꾸역’ 머물게 하지 않는다. 진짜 제 자신만큼 편하게 있다 돌아가게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는 내 유일한, 오늘도 변함없이 내가 애용하는 단골 카페이다.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데뷔.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가 있음. 박인환 문학상 수상.
썸머 와인 그리고 부산 풍락재
서규정 시대는 급박하게 흐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누구누구와 둘러앉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먼저 사람이 있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 같다. 겨울이면 모락모락 순대국 끓이는 김이 거의 보이지 않고 무슨 큰 죄나 지은 것마냥 선술집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 구십년대 초 처음 중앙동에 나갔을 땐 고시회(고스톱을 치는 시인들의 모임)라는 게 있어 뒤풀이 자리는 늘 허름한 대폿집들을 어깨를 나란히 순시하는 게 낙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 오십대 중반쯤 되는 선배님들께선 서슴없이 김 원로 또는 박 원로 등 호칭들에 놀라, 부산은 이렇게 젊은 도시인가 의심하기도 했으나 그게 다 고스톱의 생리를 터득하듯 삶의 진경과 통하자는 추임새였다는 걸 늦게 알았다. 중앙동 플라타너스 거리에 황혼이 내리듯 발걸음들도 뜸해지면서 서면 롯데호텔 맞은편에 ‘풍락재’가 등장한다. 결식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던 ‘아름다운사람들’ 대표 산악시인인 권경업이 사재를 털어 마련해준 사랑방이다. 옛 선비들처럼 고담준론을 나누는 장소라기보다 아무나 와서 편하게 바람처럼 놀다 가라고 ‘풍락재’이다. 앞면은 십육층 건물이 턱하니 자리잡고 삼면은 모텔들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옴팡집이다. 서재도 갖추어져 있고 주방기구와 침대는 물론이다. 부산 서면 사랑방 풍락재 시인 초청 모임. 2005년 9월 7일 유병근, 조말선 시인을 초청해 풍락재에서 열린 첫 번째 ‘바람의 초대’ 행사
그러나 무엇보다 홈 카페가 있다. 어차피 집은 차려준 사람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부산 문인들의 주종을 바꾸어버릴 심산인지 와인이 주류를 이룬다. 소주잔을 들다 와인잔을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대환영이다.
일찍이 신경림 선생께서 다녀가셨고, 김상미 시인이 한 잔 푸고 갔고, 김선태, 황학주, 유홍준 시인 등은 자고 갔다. 권경업이라는 사람 특유의 마당발 탓인지 개그맨 전유성 씨, 산악인 엄홍길 씨 등이 거쳐 간 지 오래다. 그런데 문제 하나는 그들의 질펀한 술자리가 끝난 이튿날 청소는 내가 도맡아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풍락재의 방장으로 취임한 이후 먹고 자기도 하는 내 관리하에 있는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술자리는 거의 다 개판이다. 술이란 개성을 충분히 지키면 되는 것이지, 개성을 깨면서까지 도달할 그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간밤엔 어느 이무기가 승천을 서두르다 다쳤는지 바닥엔 흥건한 피가 고여 있다. 와인은 핏빛이다. 그래도 와인 두 잔이 반절쯤 남은 잔으로 마주보고 남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개판이 청소하기엔 오히려 편하다. 싹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아직도 소주파에서 와인파로 전향을 하지 않다가 어쩌다 가끔 같이 마시게 되는 날이면 틀림없이 안주로는 쌩소리가 올라온다. 시인 몇몇만 모이면 소설가들보다 논리정연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야기가 통일도 되지 않고 전망도 없는 각개의 의견을 그렇게 진지하게 타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시인의 권위는 술로 통한다. 무조건 쎄야 한다. 점잖게 한두 잔, 잔만 부딪치다 갈 바엔 비싼 교통비 들여 누가 나올까, 적어도 통음이다. 완전히 맛이 가야 비로소 자기라는 존재가 전우주적으로 떠받들어지고 확대되면서 황금빛 물결 출렁이는 어느 목가의 전원을 찾아가려는지 들뜨고 들떠 제 목을 제가 잡듯 잡혀가 화장실에서 캭 죽어버린다. 죽어라! 그래야 내일 다시 산다.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태평천국이란 원래부터 없는 법이니까, 역사 안에서 성취할 그 무엇이 있든 없든 남의 술자리에 끼어 땅콩이나 씹다 갈 인물들은 아니지 않겠는가. 모두가 바람이다. 마음은 가되 몸은 술병 속에 담아두고 간다. 늘 각성하면서 또 갇힌 존재가 시인들이라면 과장된 말일까, 근본적으로 대문이 활짝 열린 대도무문의 대두목이 아니라 어딘가 남몰래 닫혀 안절부절하는 소두목들. 하여간에 풍락재는 부산의 사랑방으로 부상한 지 벌써 몇 년째이다. 이곳을 다녀가지 않고선 부산에서 문화 활동을 한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다 왔다 갔다. 동화작가, 화가, 기자 등 면면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출판기념회도 할 수 있고 동인들 간에 토론 장소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기분이 나쁘면 둘이서 맞장을 뜨는 링으로도 무난하다. 경찰은 오지 않는다. 다만 삼면이 모텔로 둘러싸인 요새라서 여성 시인들은 선뜻 혼자서는 나서질 못하는 것 같다. 아니다, 혼자서가 아니다. 서넛 떼거리를 지어서 오니 더욱더 충만하다. 비닐봉지에 이것저것 잔뜩 싸가지고 와 남기지도 않는다. 누가누가 더 잘 마시나 은근히 주량을 자랑하기도 한다. 아주 시끄럽다. 이제 그만 청소할 테니 가라고 넌지시 재촉을 하면 속눈썹들이 가늘게 떨린다. 작열하는 태양에 대한 대지의 대답이 와인이고, 택시도 있고 모처럼 나와 한 잔 하는데 나이 좀 먹었다고 괜히 지랄이야! (속으로)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큰소리로 노래까지 까고 간다.
모두가 주인이다. 사상과 문화가 접점을 찾는 장소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맥질의 장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해도 별반 어긋나지 않을 터이다. 사람과 사람, 앞으로 세계사의 국면이 어디로 전개될 것인가, 통일은 언제 될 것인가, 노무현은 과연 실패했는가,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하다못해 담배 하나를 끊어도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사람과 사람. 풍락재는 바람들이 놀다 가면 그뿐이다. 언젠가 한번은 중앙동의 선배들께서 놀러 와선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더니 히야! 많이 변했네 참 많이도 변해! 아직도 선지국 맛을 혀끝에서 놓기 싫은 것 같다. 옛 정서와 정취 그만만 하랴만 우주복 입기를 기다리는 시대이고 보면 우리 또래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와인을 막걸리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곤 훌훌 자리를 턴다. 오늘은 어느 바람 한 줄기가 대문을 두들길까! 그러나 아무리 풍락재라 해도 풍을 치고 가는 가벼운 바람들은 사양한다. 방장인 내 막강한 권한이고 바람은 골이 깊어야 바람이기 때문이다. (2008.12.30 문화저널21)
글 서규정
전북 완주 출생.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겨울 수선화' 등이 있음
[출처] *"W"*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W"*|작성자 시금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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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도 여전히 ‘은경이네’에 간다. 자주는 아니지만. 거기에 가면 시인 친구들이 있고, 경계 없는 안주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누님이라고 불리는 주인이 있고, 아름다운 기억 상실이 있다. 상계동과 신촌 사이에 ‘은경이네’가 있다. 그곳에 가고 싶다..
즐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