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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신학대학원장 은준관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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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강연자이며 필자인 은준관목사와 포럼 주최자인 수표교교회 김고광목사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위기와 도약 사이에서 - 갈림길에 서 있는 한국 교회의 미래 -
은준관 목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www.gspt.ac.kr
I. 도입
신학은 지난 세기(1900~2000년)를 불러 화려했던 ‘교회시대’라 한다. 특히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그 상징으로 한다. 그러나 21세기 문턱을 넘어서면서 미국 개신교회와 한국 개신교회는 심각한 중병에 노출되어 버렸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데도 자기 진단을 포기한 채 몸 부풀리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두고 신학에서는 여러 표현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찍이 ‘교회 죽음’을 경험한 독일의 몰트만(J. Moltmann) 교수의 진단이 핵심을 꿰뚫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교회에는 ‘성직자’와 ‘성직자가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만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회중’(congrega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참여도, 공동체도 없다는 고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떠났거나(유럽 교회), 떠나고 있거나(미국 교회),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한국 교회) 것이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여기서 파생되는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남아 끝까지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마저 ‘참여적 주체’가 아닌 ‘nobody’로, 때로는 커다란 조직에 의해 ‘도구화’되거나 ‘객체화’되어 ‘주변’(marginal)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 사람은 있으나 그 안에 살아 움직여야 할 ‘회중성’과 ‘공동체성’이 깨져 나가고 있는 데 한국 교회의 위기는 깃든다.
지난 20년 사이(1987년~2007년) 고도의 성장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한국 교회는 불행히도 지난 날의 화려했던 ‘교회성장 신드롬’(church growth syndrom)의 환상을 되살리면서 ‘대교회주의’, ‘거대한 교회건축’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 결과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을 가져올 수 있었던 ‘회중성’의 회복, ‘공동체’ 회복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가 양극화 되면서 한국 교회는 심각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생명력을 잃고 텅 빈 교회당만 남는 교회 죽음으로 추락할 것인지, 아니면 어느 날 또다시 한국 역사와 이 민족 아니 세계 속에서 거대한 변혁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작은 등불로 소생할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II. 어찌하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흥’과 ‘망’을 그대로 따라가는가? - 종교사회학적 분석 -
120여년 전 미국 교회로부터 복음 전파를 이어받은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운명에 놓여 있었다. 각 교회의 정치제도, 예배 형식과 교육 체제 그리고 선교와 전도의 방식까지도 미국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교회성장기’, ‘교회침체기’, ‘교회쇠퇴기’로 구분되는 교회 변화 기상도마저 시기만 다를 뿐,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틀과 흐름(좋지 못한 것까지)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공통적인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공통분모 한 가지가 그 속에 깔려 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시장지향성’(Market Oriented)이라 부른다. 헌법으로 국교가 허용되지 않는 미국과 한국은 필연적으로 모든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여기서 ‘종교와 종교 사이’, ‘교파와 교파 사이’, 심지어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는 상업주의적, 시장경제적 ‘장마당’이 형성되었고, 소위 ‘무한경쟁’이라는 피나는 종교 전쟁이 불가피하게 등장하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크게’ 만드는 자만이 승자가 되는 시장주의가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 심장부에 파고들면서 교회의 비만주의를 부추겼다고 본다.
바로 이 시장지향적 바탕을 터전으로 한 미국 교회는 지난 70여년 크게 세 단계를 거쳐오고 있으며, 그 흐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 첫 단계는 ‘교회성장기’(church growth)라고 부른다.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세계 제2차대전과 한국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 교회는 신앙을 ‘전투적’(militant faith)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속에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미국 개신교회는 일제히 최고속 교회 성장을 성취하였다. 1960년 초 미국의 전 인구 대비 65%가 개신교인이 되었으며, 여기서 미국 개신교회는 미국 사회를 주름잡는 주역(majority)이 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서 시작한 ‘문화혁명’(여기에는 학생 파워, 히피 운동, 여성 파워, 흑인 파워의 등장이 속함)이 ‘백인중산층문화’(white middle class culture)를 무너뜨리면서 미국 개신교회는 예기치 못했던 제 2단계에 직면하였다.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제 2단계 ‘교회침체기’(church stagnancy)라고 부르며, 1970년까지 그 여파는 요동을 멈추지 않았다. 더들리(Carl Dudley) 교수는 교회 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을 ‘문화혁명’과 대결해야 하는 교회의 무관심과 준비 부족(unpreparedness)에서 찾는다. 1970년 이후를 ‘제 3단계’라 부르며 이것을 ‘교회쇠퇴기’(church decline)라 이름 붙인다. 미국 남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근본주의 신앙의 교단 몇 개를 제외한 미국 주류 개신교회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1970년 이후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매 10년마다 100만 명의 교인을 잃어왔으며, 미국 연합장로교회와 회중교회(U.C.C.)는 50만 명을, 성공회와 루터교회는 25만 명씩을 잃었다. 문제는 이 같은 교인 탈출현상은 끝이 없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누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도, 예견된 것도 아닌 ‘닮은꼴’ 하나가 한국 교회 앞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기와 장소만이 다를 뿐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행로를 그 실패의 길까지도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 산업화를 등에 업고 ‘잘살아보세’를 신앙의 모토로 하여 불붙기 시작한 한국 교회의 ‘신앙’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최고속 성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1990년 전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한국 교회 ‘성장기’(Growth)였으며, 성장과 함께 한국 교회 신앙은 미국식으로 ‘전투적’(militant)이며 ‘공격적’(aggressive)이며 ‘정복적’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영향력에 관한한 한국 개신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 ‘주역’(major)의 자리를 점유하는 듯하였다. 시장 경쟁 마당에서 타종교를 능가하는 듯하였다. 이 기간 한국 교회 모든 교단들은 OOO교회 OO만 신도 운동의 표어를 걸고 무한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불기 시작한 ‘민주화’ 바람과 함께 한국 사회는 다원구조(multi-dimensional)로 바뀌면서 ‘바람막이’, ‘도피성’, ‘안식처’였던 교회 울타리를 서서히 박차고 많은 젊은이들, 인권운동가들,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새 신자들이 뒷문으로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현상유지’라는 제 2단계, ‘교회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침체 현상은 1990년에서 2000년 21세기 문턱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월식 현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여전히 70년대, 80년대의 화려했던 교회 성장의 환상은 많은 목회자들의 영혼까지 침식하고 있었기에 교회 침체를 위기의 징후라고 보는 이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20세기 말 침체기에 오면서까지 그것을 위기의 징후로 보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우둔함은 미국 교회가 겪어온 역사적 실패를 그대로 닮아가는 위험한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2000년! 21세기의 출발, 아니 21세기를 넘어 새천년시대(New Millenium)를 여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한국 교회는 적어도 교회 성장의 환상을 잠시 멈추고, ‘교회성장이후’(After Church Growth)에 다가올 미래의 지평을 예측하는 최소한의 신학적 안목을 가졌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대단원의 ‘출애굽’ 사건을 목격하고 경험한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라고 한 경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불행히도 교회 성장의 환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형화’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선택하면서 지난 7년 동안 크게 ‘대형교회’와 ‘영세교회’로 나뉘는 극심한 양극화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어느 순간 ‘종교와 종교 사이’, ‘교파와 교파 사이’의 경쟁은 끝나고 지금은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경쟁으로 싸움터가 바뀌면서 소형 교회 교인들이 끊임없이 대형 교회로 수평이동하는 제 닭 잡아먹기 식 경쟁으로 변질되었다. 새 신자 영입이 아니라 기존 신자 쟁탈전이 치열하리만큼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 특히 아파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 속에 ‘회중성 회복’의 이야기, ‘공동체성’ 회복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침체’는 계속될 것이고, 어느 순간 ‘급격한 쇠퇴’로까지 떨어질 위기 앞에 한국 교회가 직면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논의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닮은꼴’ 뒤에 숨어있는 ‘틀림꼴’ 하나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금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감성’을 넘어 하나님 경험을 찾아 나선 영성 추구의 젊은이들이 태동되고 있다는 리포트 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며, 이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징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성은 가난도, 침략당한 전쟁도, 수탈에 따른 눈물도 경험해 보지 아니한 ‘풍요’(affluence) 다음에 추구하는 영성이기에 그리 절박하거나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지금 위기 앞에 서서히 다가가는 한국 교회지만 아직은 그 저변에 신자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박하고도 사생결단 식의 처절한 영적 갈급함이 깊숙이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 백년, 수 천년의 배고픔과 눈물, 질병과 죽음, 침략과 수탈의 비극을 거치면서 살아온 ‘고난의 영성’(Spirituality in Suffering)이 바로 한국인의 영성이라고 본다. 바로 이 고난의 영성은 성서적 영성과 교감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원초적 자산이고 최후의 에너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있다면 그것은 대형화된 ‘교회당 건축’도, ‘고도로 발달된 행정 시스템’도, ‘훈련된 성직자의 지도력’도 아니라 바로 이 땅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한 교회 한 교회에 참여하고 있는 신자 한사람 한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절규이고 살아있는 내면의 에너지일 것이다.
고난의 영성!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소중한 이 영적 구르터기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성장 신드롬’으로, ‘교회 정치 이념’ 속에, ‘목회자 성공 신화’의 미명으로 더 이상 소멸할 수 없는 절박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III. 그것은 잘못된 ‘교회론’ 때문이었다 - 교회론의 신학적 오류 -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는 지금 날카롭게 대립되는 ‘역설적 상황’(paradoxical situation)에 놓여있다. 아직은 소멸되지 아니한 신자 하나하나의 영적 에너지가 한국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에너지를 담아 하나의 거대한 영적 파워로, 이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키는 촉매의 힘으로 분출시킬 수 있는 새 부대, 공동체적인 구조, 교회의 살아있는 틀이 존재하고 있지 않음에서 오는 공백이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인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못하고 새 술을 낡은 부대에 집어넣으려는 잘못된 교회론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분명 교회론의 신학적 오류에 그 책임이 있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 덜레스(Avery Dulles)는 그의 저서 「교회의 모형」에서 2000년의 교회를 시대의 흐름을 따라 모형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처음 교회의 모형을 ‘제도와 조직’(Church as Institution)으로서의 교회라 불렀으며, 이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를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이 교회는 제도와 조직을 통하여 교회의 통치, 일치, 통제를 추구하는 특성을 가진다. 대형화된 한국 교회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두 번째 모형을 ‘영적 교제’(Communion)라 했으며, 이 교회는 교회의 제도화를 반대하고 영적 교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종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일고 있는 ‘기도원’ 운동과 ‘평신도 교회’ 운동이 여기 속한다고 본다. 세 번째 모형을 ‘성례전으로서의 교회’(Church as Sacrament)라고 불렀으며, 네 번째 모형을 ‘말씀 선포로서의 교회’(Church as Herald)라 했다. 이는 주로 설교를 교회의 중심에 두는 모든 개신 교회를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여기에는 한국 개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 개신교회 모두가 속한다 ‘설교’가 신앙과 교회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교회의 유형이다.
다섯 번째 교회 모형을 덜레스는 ‘종으로서의 교회’(Church as Servant)라고 불렀으며, 이는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제2 바티칸공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와 W.C.C.의 ‘하나님 선교’-Missio Dei 신학 이후의 세계 교회의 선교를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세계 선교에 발벗고 나선 한국 개신교회와 민중 신학을 근간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 모두가 ‘종으로서의 교회’ 모형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가 등장한다. 2000년의 교회를 다섯 모형으로 유형화된 덜레스의 교회들이 지금 한국 개신교회 안에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도와 조직을 우선 순위에 두는 대형 교회들, 영성과 교제를 생명으로 하는 종파 교회들, 성례전을 들고 나오는 예전 학자들, 여전히 ‘설교’에 생명을 거는 목회자들, 그리고 경쟁적으로 펼치는 해외 선교와 여전히 ‘민주화’ 운동을 선교의 최우선으로 하는 진보적 교회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 많은 기존 신앙인들 중에 이렇듯 다양한 모형의 교회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신앙의 유형들을 포기하고, 교회를 이미 떠났거나 다른 교회로 이동하거나 교회를 아주 떠나가려는 신자들이 계속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질문과 심각하게 씨름해야 할 지점에 온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물음 앞에서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이 질문은 신학적 질문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교회론의 치명적인 신학적 오류가 질문 소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교회론의 신학적 오류인가? 강연자는 여기서 ‘이중부정’(double negation)의 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 교회의 ‘제도성’, 신앙의 ‘영적 교제’, ‘성례전’, ‘말씀 선포인 설교’, ‘세상을 섬기는 선교’ 그 하나하나는 모든 교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또 세워야 할 사역들이기에 그 어느 하나도 교회 구조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역들이다. 이 다섯 가지 사역들이 존재하지 않는 교회는 조각난 교회가 되든지, 아니면 유령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섯 가지 교회의 사역은 교회의 존재양식-mode of existence 또는 교회 공동체의 표현 양식-mode of expression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데에 있다. 존재 양식이란 그 자체에 생명이 없다는 의미이며, 오히려 생명체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존재 양식은 존재 근거가 아니며 또 존재 근거가 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오늘 대단히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존재 양식을 존재 근거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양식을 존재 근거로 둔갑시켜 마치 존재 양식이 ‘복음’인 양 오도하고 있다.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성이 하나님 나라로 은폐되어 선포되고 있으며, 영적 교제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으로 바뀌고 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선교를 마치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다섯 가지는 교회 사역의 필수적 요인들이지만, 그것들이 복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들은 원초적으로 본질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 방언에서 시작하여 십일조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앙의 양식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복음으로 위장하여 거기에 모든 것을 걸도록 신자들의 물리적-영적 에너지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적 표현으로는 이것을 교회론의 신학적 오류라고 하지만, 저속한 표현으로는 한국 교회가 엄밀한 의미에서 사기 행각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교회가 위기를 겪기 시작한 내면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문턱에서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도전도 아니고, 프로그램 결핍의 문제도 아니며, ‘교인 이탈’이나 ‘성직자 수급’ 문제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위기는 모든 ‘존재 양식들’(그것이 제도와 조직이던, 교제와 성례전이던, 설교와 선교이던, 각종 프로그램과 회개 운동이던)을 교묘히 ‘존재 근거’로 위장하여 그것들이 마치 복음인 양, 하나님의 구원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적 오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전의’라고 부른다.
IV.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새천년 시대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약에 등장하는 두 공동체 이야기를 해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하나의 공동체는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열두 제자 공동체이다. 주님 예수의 사역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Basileia Tou Theou)를 선포하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전 인류와 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Denouncement)과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Announcement)의 약속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었다. 주님 예수는 이를 증언할 공동체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역부터 시작하셨다. 이를 ‘부름받은 공동체’(called-out community)라고 부른다. 예수 공동체는 ‘부름받은 자의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 사역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선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부름받은 제자 공동체는 3년 동안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앞에서 회개(metanoia)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설교(kerygma)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시는 교육(didache)과 하나님 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는 떡을 함께 떼는 일(koinonia)를 통하여 ‘세움 받은 공동체’(called-up community)로 양육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부름받고’ ‘세움받은’ 제자공동체를 들어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제 3의 양식 ‘보냄받는 공동체’(called-into community)로 파송하셨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보냄받는 공동체’가 바로 제자공동체의 존재 양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열두 제자 공동체는 ‘부름받고’ ‘세움받고’ ‘보냄받은’ 온전한 공동체였으며, 그것은 모든 신앙 공동체의 원형(proto-type)이 되었다. 그러나 그 존재 양식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통치를 증언하기 위해 설정된 사역 양식이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제자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존재 근거였으며, ‘부름’ ‘세움’ ‘보냄’의 존재 양식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증언하기 위한 제자 공동체의 존재 양식들이었다. 이 관계를 신학에서는 ‘역사-종말론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듯 온전했던 열두 제자 공동체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깨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완벽했던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앙리노엔(Henri Nouwen)은 이를 ‘현존 속의 부재’(absence in presence)라고 표현한다. 함께 있었으나(현존) 사실은 함께 있지 아니한(부재)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존재 양식은 완벽했으나 존재 근거는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는 두 번째 공동체가 등장한다. 사도행전과 모든 서신들 속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열한 제자와 120문도 그리고 이방인이 포함된 혼합 공동체였다. 존재 양식에 관한한 초대교회도 제자 공동체처럼 ‘부름받고’(예배, 기도-leitourgia). '세움받고'(사도들의 가르침-kerygma, didache-과 떡을 떼는 일-koinonia) 그리고 ‘보냄받는’(섬김-diakonia)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 공동체였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무엇이 깨지고 흩어졌던 제자 공동체를 끌어안고 그들을 초대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와 그로부터 계승되어 오는 교황’(일명 사도계승)이라 해석한다. 얼마 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교황의 교리적 독선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신앙 경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는 이를 ‘마가의 다락방 성령 체험’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반쪽 진리일 뿐이다. 성령 체험 이전의 우주론적 사건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신학을 대표하는 칼 바르트 교수나 율겐 몰트만 교수 그리고 허다한 신학자들은 깨진 제자 공동체를 초대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한 존재론적 사건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삼키신 하나님의 생명,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Easter appearance)이었으며, 이 만남에서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음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임하고 있음을 보고 경험하고 또 대망하면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그 곳에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태동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 예수의 부활 사건은 초대교회를 교회되게 한 존재론적 사건(Ontic event) 이었으며, 초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경험하고 증언하는 존재양식, 후속사건( Noetic event)이었던 것이다. 세 가지 교회의 존재 양식은 철저히 부활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섬김의 양식이었다.
새천년을 향해 한국 교회는 도약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교회는 스스로 도약할 수 있는 주체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금 한국 교회가 개혁의 이름으로 시도하는 제도와 조직의 개선, 새 프로그램의 도입, 대중을 흥분시키는 감성적 대회 같은 현상학적 접근 방식으로는 문제의 핵심조차 포착할 수 없는 한계에 놓인다.
조직과 제도를 개편하면 할수록, 새 프로그램들을 마구 도입하여 이것저것 시도하면 할수록, 회개를 빙자한 초대형 집회를 열면 열수록 이 땅 구석구석 신자들 영혼 깊은 곳에 그나마 남아있는 영적 그루터기는 살아 움직이는 영적 파워로 분출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허탈과 영적 빈곤으로 계속 추락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들은 기독교의‘종교성’(religiosity) 유지의 몸부림일 뿐,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일 수는 없다. 여기에 도약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도약의 가능성은 소박하지만 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존재론적 전환’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존재론적 전환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오늘 한국 교회가 성취했다고 하는 모든 교회의 존재 양식들, 그것이 거대한 교회당이든, 초대형 교회든, 화려하고 요란한 예배든, 자랑스런 해외 선교사 봉사 활동이든, 이 모든 것들을 존재 근거인 것처럼, 복음 그 자체인 것처럼 위장하고 도색해 온 신앙적-신학적 위선들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상대화 하는 일일 것이다. 교회는 존재 양식일 뿐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취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 근거,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대치할 수 없음에 대한 솔직한 자기 포기, 자기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 곧 복음이라는 거짓 사슬을 끊는 순간부터 복음을 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후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태6:33) 일에 모든 교회의 존재 양식들을(목사직, 장로직, 예배, 교회당, 헌금, 선교, 봉사 등) 철저히 복종시키는 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존재론적 전환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교회가 그 주역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그 모든 존재 양식들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그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부르실 것이며, 교육과 교제를 통하여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며, 선교와 봉사를 통하여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다시 보내실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이 같은 존재론 전환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다시 드셔서 미래의 증인으로 도약시킬 것이다.
V. 갈림길에 서 있는 한국 교회를 향한 제언
첫째,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은 종용히 그리고 냉철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신자 하나하나의 영적 추구 사이를 가로막거나 갈라놓고 있는 ‘사이비 복음’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과감히 부정(negation)하는 용기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사이비 복음’에는 ‘목회자의 성공신화’, ‘대형교회의 꿈’, ‘세습’, 온갖 ‘교단정치’ 등이 포함된다.
둘째, 목회자의 목회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에서 새로운 가능성은 열릴 것이다. 목회는 ‘목회자의 점유물’이라는 목회자 중심 구조로부터 모든 신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 사역(total ministry of God's People)으로 과감히 전환됨을 의미한다.
사역은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증언하는 하나님 백성 모두가 부름 받고, 세움 받고, 보냄 받는 공동체의 사역으로(total ministry) 전환할 때, 거기에는 더 심화되고 전문화되고 영적으로 준비된 목회자의 새로운 목회 구조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교육을 실시하며, 중간 지도자를 양육하고 선교와 봉사를 지휘할 때 목회자는 신자 하나하나를 교회의 교인 만들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우는 목회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자들을 세우는 목회는 보다 예리한 비전과 폭넓은 시야와 목회의 전문성을 절실히 동반하게 될 것이다. 미래 목회는 이곳 저곳 세미나에서 얻는 프로그램의 도입이거나 인기 있는 설교자의 모방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정론이다. 오히려 위임된 교회가 크던 작던 그곳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신학적 예지와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를 어떻게 세우느냐를 설계하고 교육하고 체계화해 가는 온전한 목회자(total minister)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미래 한국 교회는 오늘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10여 번의 예배와 설교 중심의 교회 구조로부터 신약 성서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종말론적 구조로 과감히 전환할 때가 임박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강연자는 한국 교회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 ‘세움 받는 하나님 백성’, ‘보냄 받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의 과감한 체제 전환을 촉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구조이며, 온전한 신앙을 되살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주일’ 신학에 근거한 ‘주일 공동 예배’를 통하여 체제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일’은 주님의 날(The Lord's Day)이며, 그 날은 죽음을 삼키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날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부활하신 날,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주일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종말론적 경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의미는 횟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날(종말론적 시간)에 부활하신 주님(종말론적 사건)과 만나는 예배는 종말론적 경험이어야 한다. 주일 신학에 근거한 ‘주일 공동 예배’ 회복이 속히 살아나기를 기도한다.
세움 받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주일 공동 예배에서 시작하여 한 주간을 그 시간대로 설정한다. 성서연구, 중간 지도자 교육, 교회 안의 작은 교회 모임 등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교육이 체계화 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사역을 위한 교육 체계를 설정하고, 그 틀 안에서 전문적인 사역자 훈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보냄 받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의 전환은 한국 교회가 이 민족과 세계의 역사 앞에 진정 섬김의 모습으로 현존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 양식이 되는 것이다. 신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직업’에서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기업윤리’에서 ‘정치영역’에서 ‘해외 선교지’에서 주어진 은사와 소명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교회당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만족하던 옛날 낡은 부대는 과감히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회론’과 ‘목회론’에 뿌리를 둔 교회 구조와 신앙의 체제 변화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VI. 결론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 소리에 경청하는 예지도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땅 구석구석 크고 작은 교회 공동체의 주역들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과의 만남을 절규하는 신자 하나하나의 영혼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가장 소박하고도 순수한 ‘고난의 영성’에로 한국 교회는 눈을 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고난의 영성’이 하나님 나라를 만나고 경험하고 또 소망하는 ‘역사종말론’적 영성으로 승화해 가도록 인도하는 목회와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과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의 교회 변화가 얼마나 절박한가의 이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