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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6장) |
간 |
심 |
심포 |
비 |
폐 |
신 |
陽(6부) |
덤 |
소장 |
삼초 |
위 |
대장 |
방광 |
<표 2> 6장 6부의 陰陽五行 배속도
五行 陰陽 |
木 |
火 |
土 |
金 |
水 | |
陰(6장) |
간 |
심 |
심포 |
비 |
폐 |
신 |
陽(6부) |
담 |
소장 |
삼초 |
위 |
대장 |
방광 |
相生관계를 쉽게 풀어보자.
․ 木生火―나무는 타서 불이 되고, 이때 나무와 자식은 불이고 불의 어머니는 나무이다.
․ 火生土―불이 타고 나면 재가 남는다. 불의 자식은 흙이고 흙의 어머니는 불이다.
․ 土生金―흙을 파면 쇠가 나온다. 흙의 자식은 쇠이고 쇠의 어머니는 흙이다.
․ 金生水―쇠는 물에 녹아 약수가 된다. 쇠의 자식은 물이고 물의 어머니는 쇠이다.
․ 水生木―물을 주면 나무가 자란다. 물의 자식은 나무이고 나무의 어머니는 물이다.
相克관계는 억누르는 관계다. 사암도인은 相克을 官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관’의 횡포가 떠오른다. 相克관계는 相克과 역상관계가 있다. 相克부터 쉽게 풀어보자.
․ 木克土―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린다.
․ 土克水―흙은 물을 가두고 막는다.
․ 水克火―물은 불을 꺼버린다.
․ 火克金―불은 쇠를 녹인다.
․ 金克木―쇠는 나무를 자른다.
역상관계도 쉽게 풀어보자.
․ 木畏金―나무가 너무나 커서 쇠(쇠톱)가 두려워한다.
․ 金畏火―쇠(큰 쇠붙이)는 불을 두렵게 한다.
․ 火畏水―불(큰 불)은 물을 두렵게 한다.
․ 水畏土―물(큰 물)은 흙을 두렵게 한다.
․ 土畏木―흙(단단한 흙)은 나무를 두렵게 한다.
舍岩五行針灸의 원리
동의학에서는 6장 6부가 相生관계와 相克관계에 따라서 질병의 발생, 발전, 경과, 치료에 五行의 이론을 대입시켰다. 6장 6부는 그 전속된 氣의 흐름인 12 經脈이 있다. 이 經脈은 각각의 경혈로 구성되어 있다. 사암도인은 이 각각의 기가 흐르는 혈에도 五行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각 經脈 중에서 다섯 개의 穴에 五行을 배당하였다. 그것이 井, 榮, 兪, 經, 合의 오수혈이다.
사암도인은 이 6장 6부의 오수혈을 이용하여 正格과 勝格을 창안해 냈다. 政格이란 虛한 장부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를 정(正)자를 써 政客이라고 하였다. 勝格이란 實한 장부를 瀉하는 처방으로 이길 승(勝)자를 써서 勝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舍岩五行針의 원리는 무엇일까?
政客의 원리
五行상으로 한 장기가 虛하다고 할 때 그 虛한 원인은 첫 번째가 어머니가 허약해서이다. 따라서 한 장기가 虛한 상태일 때는 虛한 장기를 직접 補해 주는 것보다 원인 치료를 해주자는 것이다. 즉 원인 치료로 어머니를 補해준다.
둘째는 虛한 상태의 장기를 相克관계에 있는 장기가 억제하여 더욱 虛하게 만든다. 따라서 相克관계에 있는 장기를 瀉해주게 되면 기운을 차릴 수가 있다.
․ 원리1 : 虛한 것은 그 母를 補하고 나를 이기는 것을 瀉하라.
勝格의 원리
한 장기가 實할 때는 첫째 그 원인이 자식이 實해서 모성본능이 막히게 되어 자신이 實하게 된다. 따라서 實한 상태의 자식을 瀉하면 그 어머니는 자식을 돌보려는 기운을 그 자식에게 전하려 할 것이다.
둘째로 장기가 實하게 되는 다른 원인은 相克관계에 있는 장기가 허약해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형상으로 기운이 없다. 그래서 相克관계있는 장기를 補해 주면 기운을 얻어 實한 장기를 다시 공격한다. 기운을 자식에게 전해 주자마자 다시 相克관계에 있는 장기로부터 공격을 받으므로, 이 實한 장기는 자신의 세력을 잃게 되어 조화롭게 된다.
․ 원리2 : 實한 것은 그 子를 瀉하고 나를 이기는 것을 補한다.
陰陽五行의 원리를 처음으로 침술에 이용한 사암도인은 이렇게 相生과 相克원리를 몸에 적용하여 몸의 부조화 상태를 조화롭게 하고, 효능이 탁월한 많은 임상처방들이 전해져 온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연구된 「舍岩五行針」은 역사적인 민족의술로 학문의 체계가 다른 어떤 針灸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단한 붐을 조성하고 있는 수지침이 있다. 이 수지침은 첫째, 손은 몸의 축소판이고, 둘째, 손가락은 오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셋째, 손에도 6장 6부의 기능을 조절하는 經脈이 있다는 것이다. 1975년 고려수지침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그 효과가 탁월하여 수많은 동호인들이 있다. 또한 손에도 여러 가지 상응체계가 존재한다고 하여 수족침, 다살이 손침 등이 속속 발표되어 한층 연구 활동이 활발하다.
이 수지침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6장 6부의 상응하는 經脈이 있고 오수혈이 있어서 사암도인의 政格, 勝格 원리를 이용하여 6장 6부의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 또한 舍岩五行針을 활용하려면 장부의 虛實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하는데 수지침에서는 진단법이 잘 정립되어 활용하기가 좋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수지침은 전문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배워서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누구나 쉽게 舍岩五行針法의 기본처방들을 보다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제3의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지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획특집|홍익 민주주의 시론(의학편)>4
朝鮮時代 以前의 朝鮮醫學書籍 考察
박선경|통일문제연구소
導言
本稿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朝鮮時代 以前의 醫書에 관한 고찰이다. 물론 [三國遺事]의 檀君記에 보이는 熊女가 人間으로 變身하기 위하여 복용한 쑥과 마늘은 仙藥으로 해석하는 說도 있지만 여기서 고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확실한 典據에 의하여 推測이 가능한 三國時代와 高麗 末까지로 시기를 한정한다.
일찍부터 이 방면의 연구는 日本學者에 의하여 昭和初年 卽 20世紀初葉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연구는 예컨대 三木 榮의 [朝鮮醫書志] 등은 朝鮮固有醫書, 中國醫書의 朝鮮版, 醫藥關係朝鮮本, 朝鮮醫書의 中國版, 朝鮮醫書의 日本版 및 該當關係書, 朝鮮醫書目錄類의 冊目次가 말하듯이 朝鮮醫書는 거의 전부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실제로 朝鮮時代의 醫書는 [李朝實錄]에 보이는 醫書類, [大典會通]에 보이는 醫書, 日本에 殘存하는 朝鮮古版醫書 등의 原資科外에 [中國․朝鮮․日本醫學對照年表圖], [日本․朝鮮․中國醫學交流史鳥瞰], [朝鮮醫學史]의 附錄인 “朝鮮醫學硏究圖書” 등의 관계 자료집이 있다.
그러나 보다 以前의 朝鮮醫學藥學關係書籍은 中國의 古文獻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散見된다. 사실 新羅의 醫書에 관한 자료는 中國隋唐시대의 古醫書에서만이 확인이 가능할 정도다. 當時의 時代狀況을 감안하면 이러한 古代醫書의 處方論이 佛敎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宋의 贊寧의 [宋高僧傳]이 新羅의 佛敎理論을 大陸의 理論과 區別하지 않고 同等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類推한다면, 醫藥分野에도 같은 관찰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선 의심해 보는 것도 타당하다. 現今에 와서 종래 大陸人으로 알려진 高僧이 新羅人인 것이 밝혀지는 것은 이러한 가설을 더욱 傍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문제점으로 남기기로 하고, 앞서 명시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朝鮮 以前의 醫藥書에 관한 몇 가지 典籍에 한정하기로 한다.
三國時代의 [百濟新集方]
우 리나라의 古代에 존재하던 固有의 醫書가 확인된 것은 日本에서이다. 日本에 남아 있는 現存 最古의 醫書인 [醫心方]에는 百濟의 醫書가 二條 引用되어 있고 新羅의 것이 四條 인용되어 있으며 [醫略抄]에는 百濟의 것이 一條 轉載되어 있다. 新羅의 것은 統一新羅 때의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百濟의 자료가 시기적으로 더 앞서는 것은 확실할 수밖에 없다.
[百濟新集方]이란 書名을 갖고 있는 醫書의 내용은 [醫略抄]에 있는 一則은 [醫心方]3에 있는 二則의 하나와 같은 것이다. “丁創”을 치료하는 方文으로써, “丁腫의 毒氣가 心에 들어 困死코저 함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菊花의 잎을 따서 줄기와 合한 다음에 이것을 찧어서 그 汁을 석되(三升) 짜내어서 이것을 복용한다.”고 되어 있다. 다른 一則은 물론 [醫心方]에만 실려 있는 것으로 “肺癰”을 다스리기 위한 醫方이다. “[百濟新集方]의 肺癰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은 黃耆一兩을 물 석 되(三升)를 붓고 끓여 한 되(一升)가 되게 한다. 이것을 두 번 복용할 수 있게 나누어서 먹는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百濟의 醫書로 남아 있는 유일한 기록일지도 모르는 이 책의 轉載된 문장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주된 내용이 百濟에서 경험적으로 사용해서 효험이 있다고 인정되어 傳承되어 오던 醫學的 處方을 모은 일종의 民間藥方書가 아니었던가 하고 思料된다. 醫書의 성격이나 전체적 개요 같은 것은 알 길이 없지만 이것은 하나의 희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것임에는 異論이 없을 것이다.
統一新羅의 [新羅法師方]
“新羅法師方”이라고 알려진 冊은 [醫心方]에 인용된 네 편의 斷片文章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자면 이것을 모두 하나의 冊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新羅法師方]으로 인용된 것이 二條,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과 [新羅法師秘密方]으로 인용된 것이 各各 一條씩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적어도 세 권의 다른 醫書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모든 인용이 같은 [醫心方]에 있다는 것도 이런 추측에 한 방증이 된다. 이 경우 특히 의의가 있다고 고려되어야 할 것은 두 번째의 것이다. 즉 여기서는 “流觀”이 新羅法師의 法名인 것으로 보이며, 그의 저서명은 [秘密要術方]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新羅僧을 接하는 셈이다.
차례로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먼저 服藥準備에 관해 [新羅法師方]은 읊어야 할 服藥咒祝文은 “南无東方, 藥師瑠流佛光, 藥王藥上․菩薩․耆婆․醫王․雪山童子는, 惠施阿竭하여 病을 治療케 하고 邪氣를 消除하며 善神이 補處케 하여 五藏이 平和롭고 六府가 順調하여 七十万脈이 自然히 通하고 廷長되어 四體가 剛健하여 壽命이 廷長되고 오나가나 앉으나 누우나 뭇 하늘이 護衛케 하소서, 莎詞.(東쪽을 向하여 한 번 暗誦하고는 服藥한다.)” 같은 책에서 인용된 治積聚方第一에 의하면 [新羅法師方]은 이르되 “續隨子(一名 耐冬花)의 上皮를 벗겨, 이를 술에 섞어 먹는다. 二七粒量入하며 老少가 服用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新羅法師方]은 法師들 상호간에 통용되던 一般的인 藥의 處方에 관한 書籍으로 보인다. 뿐더러 前者의 내용으로 보면 佛敎의 信仰에 基한 祈禱에 의존하여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던 당시의 治療風俗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房內用藥石으로 설명된 法藏의 駖에 관한 두 文章이 길게 傳하고 있는데 처음 것은 新羅法師 流觀의 [秘密要術方]에 인용된 大唐國滄州景城縣에 있는 法林寺의 法師인 惠忠이 傳하여 말한 法藏의 駖記가 그 내용이다. 즉, 日如來가 뭇 衆生을 이롭게 하고자 했으니 이 處方을 衆生이 모르고 願하지 않아 널리 알려지지 못하더니 龍樹와 馬鳴이 佛敎를 說하는 어려움을 겪었을 때 깨우친 바 있어 이 藥을 沙門에게 傳했다. 그러나 이 沙門의 소홀로 세상에 전하지 않아 世間에 그 利로움을 얻지 못했다가, 王이 西天竺國의 王으로 있을 때 東婆台人인 阿蘇란 者가 있었으니 높이 한 자(尺) 二寸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 와서 十二大願三秀秘密要術方을 바쳤다. 藥師如來가 仙儲를 敎喩할 때 王은 病을 다스리기를 즐겨하고 있은 지라 駖을 얻었을 뿐 아니라 더하여 幸運을 얻게 되어 16의 大國을 封하고 百萬의 妃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條項에 [新羅法師秘密方]이 인용되어 있다. 내용은 八月中旬에 꿀벌의 집을 걷어 내서 平平한 곳에 놓고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 벌집 안에 생긴 비단 주머니를 빼내 대나무 막대에 걸어 놓고 十旬이 차면 後에는 그것이 妙藥이 된다. 이어 남편이 覆合을 하고자 할 때 어떻게 內温酒라는 藥을 쓰면 終身토록 無損有益하며 福德은 萬倍가 되고 氣力은 七倍로 늘어나며 求하는 것은 모두 얻게 되며 無病長壽한다. 한 여름에는 몸이 시원하며 깊은 겨울에는 몸이 따스하다. 邪惡한 氣運을 막고 災殃을 당하지 않는다. 男根이 强하기 鐵鎚 같고 길기는 三寸이며 오줌이 맑고 香氣롭다. 男女의 精神은 安靜되며 心氣는 敏捷하다. 귀가 맑고 눈이 밝다. 입과 코에서는 香氣가 난다. 服用할 때에 禁忌해야 할 事項도 12가지나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그 알려진 내용에 근거하여 [秘密方]은 房術의 處方만을 골라서 時代로써 佛敎가 가장 융성하던 때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藥方이 있어 왔음을 前堤로 한다. 뿐만 아니라 新羅時代에 이미 상당한 醫書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또 다른 間接的 資料가 있다. 그것은 高麗時에 醫書를 저술한 金永錫의 [墓誌]에 그는 “항상 大宋과 新羅의 醫書를 閱讀하고 손수 奇要를 撰術했다.”는 것이다.
高麗前․中期의 [濟衆立效方]
高麗毅宗時(西紀 1147~1170)에 저술된 醫書로 알려진 것으로는 金永錫撰의 [濟衆立效方]이 있었다. 이 서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金永錫墓誌]에 의해서이다. 毅宗 21年(西紀 1167)에 세운 그의 碑文이 傳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溟州人이다. 그는 大師로 追封된 金陽의 曾孫이요 門下侍郞平章事인 金上琦의 孫이며 門下侍中인 金仁存의 子로서 風貌는 雄偉不常하고 性品은 剛直하고 勤儉했으며 利害를 따라 妄動함이 없었으며, 詭辯을 追從하지 않고 朋友와 故舊에게는 信心이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學業을 닦아 글을 잘 썼으니 그의 著書는 사람들의 意表에서 나왔다. 처음에 그의 祖父의 薦擧로 宦路를 시작하니 良醞丞同正에 補任됐고, 後에 登科하여 官職이 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65歲 나이에 風痺의 病으로 官職을 辭退하고, 드디어 毅宗20년(西紀 1166)에 78歲로 薨去했다. 그는 要職을 두루 거쳤으니 네 번의 外任을 맡았으며, 세 번은 東路兵馬事의 職을 지냈고 한 번은 北路元師를 지냈다. 이르는 곳마다 有能하다는 名聲을 얻었다. 그는 항상 宋과 新羅의 醫書를 閱讀하여 스스로 奇要를 撰述하니 그 著書를 [濟衆立效方]이라고 이름 했다. 이 醫書는 世上에 著述의 當時부터 運用되었으니, 이것이 朝鮮初期까지도 傳해져 내려왔다. 이러한 사실은 朝鮮時의 [鄕藥集成方] 卷三의 中風半身不隨條에 한 편의 글이 이 醫書에서 인용된 것으로 남아 있음으로 알 수 있다. 그 遺文에 의하면 “[濟衆立效]는, 偏風의 手足不隨의 疼痛을 治療하는 데는 松葉 다섯 말(五斗) 가량과 소금(鹽) 두 되(二升)를 熱에 쪄서 *中에 차서 이를 지진다. 차가워(冷)지면 다시 쪄서 反復하면 差度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時期와 前後하여 존재한 것으로 추측되는 醫書에는 다음에 記術할 [衘醫撮要方]의 原本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李奎報는 [藥方]이라고 부르고 [大東韻府群玉]은 [醫方]으로 부르는 醫書가 바로 그것이다. 이 書籍은 高麗王廷에서 藥業을 관장하던 茶房에서 輯撰한 [藥方]을 사용했다고 李奎報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國朝有茶房所集藥方一部, 云云.”) 정작 그가 序文을 쓴 醫書는 高麗 末期에 屬하는 著書이다. 序文에 의하면 이 醫書의 原本인 [藥方]은 “簡略하면서도 神異한 效力이 있으니 可히 萬人의 生命을 救濟할 수 있다. 그러나 歲月이 오래 된지라 脫漏된 부분이 많아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
高麗 末期
高麗 高宗 13年(西紀 1236)에 西京即平壤에서 刊行된 [新集衘醫撮要方]은 崔宗峻이 王命을 받들어 撰한 醫書다. 崔宗峻은 昌原人으로서 高麗 神宗 4年에 魁科에 拔擢되었으며 여러 번 官職이 바뀌어 드디어는 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高宗 33年에 逝去했다. 李奎報가 文集에 남긴 序文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崔宗峻이 [新集衘醫撮要方]을 간행하기에 이른 경위다. 即 神通한 效力이 있던 [藥方]이 오랜 세월로 인하여 거의 쓸 수 없게 되었음을 樞密相公 崔宗峻이 이를 보고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이를 다시 刊行하기를 바랬을 때에 마침 高宗의 許可를 얻어 이 醫書를 二卷으로 나누었으며, 또한 諸醫書의 處方 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添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繕寫케 하여 이름 하기를 [衘醫撮要方]이라 하고는 王命을 받들어 이것을 西京으로 보내니, 留守官이 이를 印刊하여 널리 人間에게 보급케 했다.
本醫書의 제목인 撮要가 말하듯이 이것은 原典이나 新集이 모두 救急을 위한 준비의 처방들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生命이 危篤한 경우를 위한 必備書인 셈이다. 이 序文이 특이한 점은 本醫書의 내용을 傳하는 것이 아니라 그 成立經過를 傳하는 外에 첫 부분에 나열한 東洋醫書의 古典들이다. [本草], [千金], [斗門], [聖惠] 等의 소위 古代聖賢들이 저술한 醫書들이 모두 이미 高麗에서는 常識化되다시피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이런 古典의 脆弱性까지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卽 이들 醫書로써 “萬生의 生命을 救濟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들 醫書의 部와 秩이 繁雜하고 尨大하여 省閱하기는 困難하다.” 따라서 寢疾이 彌留한 경우가 아니고, 갑자기 重病을 얻어 蒼皇危急인 것이다. 이 論旨를 勘案하면 高麗時代만 해도 救急秘方이 일찍부터 널리 활용되어 왔음을 察知할 수 있다.
이 醫書 外에도 高麗時代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醫書에는 [鄕藥古方]이 朝鮮朝에서 간행한 [鄕藥集成方]에 遺文이 넷이 실려 있다. 鄕藥이란 말 자체가 “唐藥”에 대응하는 朝鮮 固有의 藥材를 쓰거나 古來로 傳承된 朝鮮 固有의 處方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앞의 [御醫撮要方]이 傳來의 [藥方]을 原典으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 古方도 高麗 前期 내지는 늦어도 新羅時代부터 전해오던 民間治療法을 모은 것이 아니었던가 유추된다. 이렇게 보면 [朝鮮實錄]에 인용되어 있는 [鄕藥惠民經驗方]도 같은 범주의 책일 것으로 판단된다. 朝鮮 太祖 二年(西紀 1393) 初에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醫書는 高麗惠民局의 官用醫書였을 것으로 간주된다.
高麗 末期의 醫書부터는 現存하는 것이 가끔 확인될 수가 있다. 初版은 高麗 高宗時에 간행됐지만 朝鮮 太宗 17年(西紀 1417)에 간행된 그 重版과 다시 世宗 9年(西紀 1427)에 復刊된 것만이 現存하는 醫書가 있으니 [鄕藥救急方] 三券이다. 그러나 高麗 末期에 간행된 醫書도 오히려 亡失된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니, 鄭道傳의 [診脈圖訣](高麗 恭讓王 元年, 西紀 1389刊), [三和子鄕藥方], 徐贊․權仲和撰의 [鄕藥簡易方] 等이 그러한 醫書들이다.
結語
疎略하나마 朝鮮 以前의 醫書를 考察해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은 거의 잃어버린 冊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失望할 필요는 없다. 新羅時代의 古醫書에 관한 기록이 中國의 隋唐時代에 저술되었으면서 佚書가 된 醫書가 발견되면서 隋唐의 醫書著書와 함께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고 보면 앞으로 더 많은 古代朝鮮의 資料가 출현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더라도 古代 특히 新羅時代와 거슬러 올라가서는 高句麗時代의 醫學내지는 藥學에 관한 연구 자료가 學者의 主意를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西紀 844年 頃에 쓰여진 아랍人의 기록에 新羅에서 수출되는 품목 가운데 아로에(aloe), 痳醉劑, 香辛料가 포함되어 있음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高句麗의 경우는 그 領域의 문제와 함께 규명되어야 할 것이 人蔘의 問題이다. 이러한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이야 말로 그래도 지금까지 지울 수 없었던 歷史의 片鱗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우리 역사에 관한 視野의 擴大없이는 불가능한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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