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아름다움 속에 스며있는 티베트의 눈물
신현봉
1.
수 없이 많은 퇴근길에 나는 히말라야를 향해 가곤 했다. 어렵고 고단할 때마다 티베트 고승들의 가르침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았다. 라마들과의 만남은 번역서를 통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 인연은 내게 참으로 소중하다. 내 가난한 삶에서 그들과의 만남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인연은 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이다.
2.
2007. 7. 28(토) 11 : 00. 공가공항에 도착했다. 티베트인들이 평생을 소원하며 오체투지로 찾는 라싸에 비행기로 온 것에 대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티베탄 가이드가 걸어준 까닥을 목에 두르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한기가 몸에 스며든다.
3.
티베트의 산하山河는 광활하다. 수많은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고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산도 많아서 삶의 환경이 매우 척박하다. 비가 와서 땅이 패여 나가면 나가는 대로 둘 뿐 인공적인 수해 방지시설 따위는 하지 않는다. 라싸나 시가쩨와 같은 도시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티베트의 자연은 수천 년간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강폭은 대단히 넓고 강심은 깊지 않아 보인다.
황량한 산이 첩첩한 곳에서 만나는 저지대의 녹색 숲과 보리밭과 유채와 짙푸른 하늘과 강물과 설산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광활한 원색의 자연미는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4.
티베트인들의 삶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을 거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965년 티베트가 중국의 서장자치구로 편입된 이래 도로가 개설되고 공장 노동자가 생기고 전기와 텔레비전이 보급되어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야크나 양을 키우는 목축업에 종사한다. 강변과 계곡 사이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저지대에 펼쳐진 경작할 수 있는 땅의 넓이에 따라 적정 인구가 농업을 하거나 반농반목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은 마을은 불과 10여 호 남짓하다. 절대다수가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그들 삶의 형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행을 하다보면 신축 중인 건물이 많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건물들은 주로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이주해온 한족들이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다. 줄지어 늘어선 단층 상가 건물에는 티베트인이 운영하는 가게도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간판도 내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길가의 상가건물에 간판 없는 상점이 바로 티베탄이 경영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순박한 그들이 중국인의 상술을 어찌 견뎌낼 것인지? 지금도 티베트인 보다 이주해온 중국인이 더 많다고 하는데 첩첩 산 속에서 꽃피운 불교왕국은, 그들의 불심은, 그들의 미소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라싸는 이미 영혼의 도시가 아닌 상업도시로 변모한 느낌이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조캉사원 앞의 바코르 광장의 바가지 상혼, 2~3배의 요금을 요구하는 택시기사와 인력거꾼, 우리 일행 중의 한분은 거기서 카메라를 날치기 당하기도 했다. 라싸 시내의 많은 떠돌이 개들이 근래에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5.
티베트인들이 주식으로 하는 짬빠는 볶은 보릿가루를 버터차(야크젖)로 반죽한 것이다. 시가쩨의 타시룬뽀 사원에서 저녁공양 준비를 하고 있는 라마에게 부탁해서 전통 음식점에서 먹어 보았는데 그 맛이 매우 담백하였다. 음식이 그들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야크고기와 양고기는 먹지만 물고기와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티베트에서는 승려와 일반인의 음식이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식인 참파는 수행에 좋은 음식이라 할 것이다.
티베트인들의 음식과 생활상태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정말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가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지 잘 먹고 편하게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삶, 자비의 삶이 잘 먹고 사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문명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신심을 지니고 있다. 사악한 감정을 갖거나 부정적인 업을 지을 상황과 가능성이 매우 적은 환경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때 묻지 않은 원시의 풍광이 빛나는 대자연 속에서 지극한 불심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극락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갈 것인가?
6.
나는 티베트의 라마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분들의 가르침에 의해 마음에 대한 이해를 더했으며 삶과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눈을 떴다. 그 분들을 나는 스승이라고 부른다. 가르침에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이렇게 숨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라 한다. 죽음이 멀리에 있다는 듯이 사는 것은 잘못이다.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대비하라고 한다.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므로 지금 수행하라는 것이다.
둘째, 걱정하지 말라. 걱정해서 될 일이라면 왜 걱정 하느냐?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걱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슨 일이 발생하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셋째, 공덕을 쌓으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범하지 않은 행위에서 생긴 결과를 경험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인과응보, 자업자득을 이르는 말이다. 현생에 잘 사는 것은 전생에서 남에게 베픈 공덕이 많은 때문이라고. 구걸하는 사람을 도울 때에도 공덕을 쌓을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보시 하라고 가르친다.
넷째, 모든 일에 긍정하라. 긍정적인 마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하거나 감소시키는데 있어서 막대한 힘을 갖고 있다. 사물의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라. 긍정적 사고를 높이고 부정적 사고를 줄이는 것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유일한 행위이다. 불행도 고맙게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로 상황을 맞이하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마음의 수행이란 긍정적인 생각을 키우고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은 행복을 가져오고 반면에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은 고통을 불러온다. 그러니 다음 생에 문제를 불러올 잘못된 생각을 버려라. 그 생각을 버리면 행복이 남는다. 무슨 일이 발생 하든지 그 일이 나를 돕고 유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라.
다섯째, 공성空性이다. 모든 현상 속에는 고유한 존재가 없다. 모든 지각된 대상들은 우리의 감각기능과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존재는 없다. 마음은 물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시간이나 공간 속에서 주변 요소들에 의존해서 존재하며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현상들은 자체로써 존재하는 개성이나 고유의 성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우리가 감각적으로나 지성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단지, 마음에 나타난 현상일 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여섯째, 임종과 관련된 것이다. 티베트 불교는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마음이 평정을 이룬 상태에서의 임종을 평화롭고 경건하게 맞이할 것을 강조한다. 라마는 임종자가 임종의 순간에 해탈 하거나 극락정토에서의 환생을 돕기 위해 포와의식을 수행한다. 포와는 극락정토에서의 환생을 돕기 위한 기도와 명상인데 이를 통해 고인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카르마의 찌꺼기를 정화 시킨다. 구루 린포체(고귀한 스승)로 불리는 빠드마삼바바가 저술한 ‘티베트 사자의 서’(원제:바르도 퇴돌)는 중음상태에서 한번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임종의 순간에 그리고 임종 이후에 사자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도록 이끌거나 진리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는 나라에서 태어나도록 돕는다.
7.
티베트에 다녀온 지도 한달 보름이 지났다. 광활한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스며있는 티베트의 눈물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책에서나 만났던 뽀따라궁과 쌈애, 데뿡, 조캉, 쎄라, 타시룬뽀, 쿰붐 등의 사원을 방문한 것은 앞으로 티베트의 역사 문화 그리고 불교와 고승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기록에 의하면 1950년 10월 7일은 중국의 침공으로 티베트인 1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많은 승려들이 살해되고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승복을 벗고 결혼할 것을 강요받았다. 1966년 7월, 라싸에 도착한 홍위병들은 티베트인들의 삶의 중심인 6,000여 개에 달하는 사원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불교경전은 불태워지거나 화장실의 휴지로 사용되었다. 1980년에 종교의 자유가 복원되고 사원들이 다시 문을 열고 금지되었던 순례여행이 다시 허용되었다.
티베트의 불교사원은 한국의 사찰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규모가 방대하다. 데뿡 사원의 경우 중국의 침공 이전에는 7,000~10,000여 명의 승려가 상주했는데 현재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있다고 한다. 훼손이 심한 사원을 부분적으로 복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티베트의 사원들은 방치되어 폐허화 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승려가 기거하던 사원에 수백 명이 상주한다면 사용하지 않는 불당과 승가대학 등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의 티베트에는 남아있는 고승이 없다고 한다.
불교왕국 티베트의 고승들이 다람살라와 해외로 나감에 따라 서구에서 티베트 불교가 주목을 받는 가운데 신도가 늘어나고 있는 사실은 어떤 섭리에 의한 것인지? 뽀따라궁의 주인과 고국을 떠난 승려와 티베탄들은 언제 귀국할 수 있을 것인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업은 어쩔 수 없다 하셨다던가? 그렇다면 그 업은 언제나 다 해소가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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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봉 / 1952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했으며 198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와 함께 가는 길』, 『히말라야 가는 길에』 외 4권이 있으며, 골라 뽑은 신현봉 시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