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김한훤당(서흥)-굉필
|
영남8대가
1.정한강(청주)-구-성주:간말
|
정 한강 신도비명(鄭寒岡神道碑銘)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17년에 재주가 뛰어난 자를 친애하고 어진이 에게 몸을 굽혀 태평성대의 치화를 이루어 보려고 시도하였는데, 이 당시에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나와서 초빙의 명을 받자, 거기에 쏠린 중외의 흠모와 기대는 경성(景星)과 경운(慶雲)이 세상에 상서를 보인 정도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벼슬을 계속하지 않고 초야에 많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재주를 다 펴보지 못했으며, 폐조(廢朝)의 초년에 이르러 동기간을 주륙하며 자전(慈殿)을 폐위할 것을 꾀하고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부추겨 온 세상이 금수의 지역으로 빠져들자, 선생은 봉사(封事)를 수차 올렸다. 그 말씀이야 먹혀들지 않았지만 천도와 인륜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것은 사실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선생은 별세하였다.
그 뒤 4년이 지난 계해년에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하여 난세를 밀어내고 정상으로 회복시키고서는 맨 먼저 세상에 보기 드문 전례(典禮)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예관에게는 치사(致祀)할 것을, 태사(太師)에게는 증직을 의논할 것을, 태상(太常)에게는 시호를 의논할 것을 명하여, 선생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내림으로써 유자(儒者)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이 차례대로 다 거행되었고, 선생의 언행에 나타나고 사업에 드러난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실이 드디어 보다 더 크게 밝혀졌다. 선생의 문인 학사(學士) 이윤우(李潤雨) 씨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호) 장공(張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흠에게 신도비문을 청하기에 흠은 행장을 읽고 말하기를 “이는 돈사(焞史, 덕행이 있는 자의 언행의 기록)로서 충분히 고명한 도덕을 그려냈다고 하겠습니다. 불초한 흠이 비록 문인 제자의 열에는 끼이지 못했으나 그 규범을 흠모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니, 또 어찌 감히 문장이 대단치 못하다 하여 사양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살펴보건대 선생의 이름은 구(逑), 자는 도가(道可)이고 한강(寒岡)은 그 호이다. 정씨는 본관이 청주(淸州)에서 나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휘 의(顗)는 고려를 섬겨 공적이 드러나고 벼슬은 대장군이 되었는데 선생의 12대조이며, 그 후 대대로 유명한 사람이 나왔다. 증조 윤증(胤曾)은 철산 군수(鐵山郡守) 증 이조 판서이고, 조부 응상(應祥)은 사헌부감찰 증 승정원좌승지이다. 승지공은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 선생이 그 지행(志行)을 사랑하여 딸을 시집보냈으며, 승지공은 한훤의 규범을 준수하고 능히 가정의 교훈을 세워 김을 매고 북돋았다. 선고 사중(思中)은 증 이조 판서이고 선비 이씨(李氏)는 증 정부인(贈貞夫人)으로 성주(星州)의 명문인데 선대의 빛을 배태하여 옹골차게 길상(吉祥)을 열어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에 성주 사월리(沙月里)에서 선생을 낳았다.
판서공이 오행(五行)을 잘하여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틀림없이 명현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남다른 자질을 지녀 영명하고 준수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7, 8세 때 《대학》ㆍ《논어》를 배워 대체적인 뜻을 알았으며 9세 때에는 판서공의 상을 만나 깊이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고자(孤子)가 된 뒤에는 판서공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더욱 독실히 학문에 몸을 맡겼으며 벽에다가 공자의 화상을 손수 그려놓고 매일 빠짐없이 절을 하여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뜻을 표했다. 조금 장성해서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집지(執贄)하여 《주역》의 건곤(乾坤) 두 괘를 배우고 곧 그 나머지를 유추해서 통하여 예전에 익힌 것이나 다름없이 하였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혔으나 회시(會試)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옛 성현을 목표로 삼아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강독하길 그치지 않았다. 세상의 예교(禮敎)가 무너져 관혼상제(冠婚喪祭)가 대부분 예법에 맞지 않은 것을 보고 개연히 고례를 복구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널리 경전을 상고하여 사의(四儀, 관혼상제의 의절)를 뽑아 정했으며, 또 심의(深衣)ㆍ난삼(襴衫)ㆍ야복(野服)ㆍ변두(籩豆)ㆍ비작(篚爵) 등의 옛 제도를 상고하여 가정에서 사용하자, 이웃 마을이 따라 변하고 원근 지방이 취하여 법으로 삼았다. 퇴도(退陶, 이황(李滉))ㆍ남명(南冥, 조식(曺植))ㆍ대곡(大谷, 성운(成運)) 세 선생을 찾아뵙고 학업을 물으니 세 선생은 다 진정으로 허여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모친상을 만났는데 예문보다 지나치게 거상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판서공의 무덤을 옮겨 이 부인과 한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소방상(小方床) 제도를 연구하여 상여가 험한 산길을 무리 없이 운행하였고 광중에 관을 내리는 일에도 정성과 조심을 다하였으므로 장례에 모인 자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복하였다. 복을 벗은 뒤에는 항상 시냇가의 정사(精舍)에 처해 있으면서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으니,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과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무인년에는 전조(銓曹)가 6품으로 서용할 것을 계청하여 사포서 사포, 종부시 주부, 삼가 현감(三嘉縣監)ㆍ의흥 현감(義興縣監)ㆍ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잇달아 제수하였으나 다 사양하였다. 경진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자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는데 선묘께서 친히 만나보고 묻기를 “그대의 스승은 이황과 조식인가?” 하고, 아울러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은 어떠하냐고 물으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량이 심후하고 조행이 독실하며 조식은 기국이 엄정하고 재기가 늠름합니다.” 하였다. 이어 《대학》의 공정(工程)을 논하고 진언하기를 “삼강령 팔조목은 모두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이지만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근독(謹獨)에 있습니다.” 하니, 선묘가 가납하였다.
임지에 부임해서는 선왕의 경전으로 학풍을 일으키되, 가숙(家塾)의 제도를 모방하여 마을마다 서재를 설치해 훈장을 두고서 글을 가르치고 읽는 것을 일과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망궐례를 행하고 향교에 나아가 알성한 뒤에 명륜당에 앉아 제생(諸生)을 불러 글을 토론하였다. 봄가을 석전(釋奠)에서부터 사직단(社稷壇)ㆍ서낭당(城隍堂)ㆍ여단(厲壇)의 제사에까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학사(學舍)와 제단들을 시원하게 일신시켰다. 그리고 향음주례(鄕飮酒禮)ㆍ향사례(鄕射禮)ㆍ양로례(養老禮)를 행하여 온 고을이 감화되어 노력함으로써 서리들은 경외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고, 치적이 멀리 소문나자 관찰사는 그 정사가 으뜸이라고 보고하였다. 신사년에 조정에서 지평(持平)으로 불러가자 창녕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를 세우고 참배하여 떠난 뒤의 사모하는 정을 표했다.
겨울에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사직서 여(社稷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고, 임오년 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다가 병을 이유로 조정을 떠났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회연(檜淵)에 초당(草堂)을 짓고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하고서 향우(鄕友)와 문도들을 모아 매월 초하룻날 강회를 갖는 계를 만들었는데, 약조와 규칙을 세우고 가 조목별로 첩자(帖子)를 만들었다. 아울러 글을 지어 그들을 일깨웠는데 모두가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요결이었으므로 격려와 권장을 받아 성취된자가 많았다. 충청ㆍ강원 두 도의 도사(都事)와 형조ㆍ공조ㆍ호조의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갑신년에 선묘께서 특지로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제수하고 고을을 다스릴 방도에 대해 물은 뒤에 돈유(敦諭)하여 보냈는데, 그곳에서 시행한 것도 창산(昌山)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였다. 을유년에 선묘께서 유신(儒臣)을 모아 경전을 교감하면서 그 명칭을 교정청이라 하였는데 선생이 거기에 참여되었다. 공조 정랑,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공조에 제수되자, 선생은 재차 상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 교정하여 올리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정원이 유임시킬 것을 청하였고 가을에 마침내 해직되어 돌아갔다. 군자감 첨정, 고부 군수(古阜郡守),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함안 군수(咸安郡守)가 되어 교화를 세워 기강을 확립하고 선현ㆍ정녀(貞女)ㆍ효자의 무덤과 정려문(旌閭門)을 수리하여 그것을 보고 본받아 법을 삼게 하였다. 그리고 홍수와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기도하여 그때마다 효험이 있었다. 창령(昌寧)에서 부자(父子)간에 송사가 벌어졌는데추관(推官)이 그 옥사로 인해 뇌물을 받아 판결이 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관찰사가 그 송사를 선생에게 넘겨 다스리게 하니, 송사를 건 자가 선생의 위엄에 눌려 승복하여 부자의 관계가 마침내 올바로 정해졌다. 무자년 가을에 백매원(百梅園)으로 돌아가 몇 년 동안 학문을 강론하며 한가롭게 지내다가 신묘년 겨울에 통천 군수(通川郡守)가 되었다.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범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자 선생은 의분에 겨워 일어나 적을 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정예병을 소집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관북(關北)의 토병(土兵)이 왜적에게 붙어 혼란을 선동하고 선묘의 친형 하릉군(河陵君)이 깊은 산속에서 궁지에 몰려 목을 매어 죽자,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통분한 나머지 기지를 써서 적을 사로잡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손수 직접 빈염(殯殮)한 뒤에 행재소에 보고하니, 선묘는 깊이 애절하게 느끼고 통정대부로 올려줄 것을 명하였다.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승진되어서는 무기를 제조하고 둔전(屯田)을 넓히고 군사 훈련을 엄하게 하고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여 혼란한 속에서도 여러 가지 정사를 완전하게 거행하였다.
갑오년에 조정으로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어 경연을 모셨는데, 선묘께서 때마침 《역전(易傳)》을 강하시다가 주회암(朱晦菴)이 돈괘(遯卦)를 만나 상소 초고를 불태워버린 일에 대해 묻기를 “탁주(侂胄)가 권력을 농단하고 조여우(趙汝愚)가 유배되자 주자가 스스로 침묵을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봉사(封事)를 준비하였으니, 그 소장이 만약 들어갔더라면 송 나라의 판도가 혹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나 도리어 돈괘를 만난 것으로 보면 복서(卜筮)의 도리는 천하에서 극히 신묘하다 말할 수 없는데 주자는 반드시 복서에다 그 판단을 맡긴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만약 송 영종(宋寧宗)이 봉사를 한번 보고 기꺼이 탁주를 내쫓을 판국이었다면 그 복서는 필시 돈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복서가 극히 신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였다. 선묘가 다시 묻기를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역(易)의 도는 소식(消息) 영허(盈虛)의 이치와 진퇴(進退) 어묵(語胄)의 낌새에 밝아 시중(時中)을 잃지 않는 것이고, 복서는 역의 말단이니, 정전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하였다.
판결사와 승지를 역임하고 병신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영원산성(鴒原山城)을 쌓아 관동의 방어벽으로 삼았다. 겨울에 호군(護軍)으로 체직되고 승지, 형조 참의, 오위장(五衛將), 판결사로 전임되었다. 정유년 여름에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었는데 가을에 왜구가 재차 창궐하여 궁빈(宮嬪)과 왕자들이 다 성천으로 모이자, 선생은 존경과 예를 다하여 각기 법도가 있게 그 뒷바라지를 하였다. 무인년 겨울에 특지에 의해 가선(嘉善)으로 오르고 경자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가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선생은 분상(奔喪)하고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어서는 상소하여 산릉(山陵)의 일을 논하였다. 형조 참판, 관상감 제조에 제수된 뒤에 사직(司直)으로 체직되었으며,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교정청(校正廳) 관원이 된 뒤에 곧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가 또다시 교정청으로 불려갔고 다시 호군이 되었다.
선생의 중형(仲兄) 서천공(西川公)이 병세가 위독하자 선생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몸소 약물을 조제해 드렸으며 별세한 뒤에는 초종(初終)에서부터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반드시 스스로 관리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였다. 계묘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해주 목사(海州牧使)ㆍ광주 목사(光州牧使)ㆍ홍주 목사(洪州牧使),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향중(鄕中)의 자제와 어울려 학문을 가르치고 절차탁마하자 찾아와 배우는 자들이 차츰 많아졌다. 병오년 겨울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자, 65세가 된 자는 수령이 될 수 없다는 국법을 인용하여 사양하였으나 선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임해 보니 어떤 사노(寺奴)가 권세 있는 재상집에 의탁하여 함부로 불법을 자행하므로 선생이 그 죄를 국문하여 다스리고 굽히지 않으니, 온 경내가 경하하였다. 겨울에 체직되었다.
무신년 봄에 선묘께서 승하하고 광해가 즉위하였는데 선생의 명망을 듣고 특지로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을 제수하였다. 앞서 선묘께서 1년이 넘게 질병을 앓아 국정을 살피지 못하므로 간신배가 혼란을 조장하며 앞잡이를 내세워 상대방을 모함하고 위협을 가하였으며 정인홍(鄭仁弘)의 밀봉 상소가 계속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그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대행왕(大行王)이 빈소에 계시는데 체포하는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삼사(三司)가 임해를 국법에 처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계속 소장을 올려 구원하였는데 자세하고 치밀한 말이 수백 자에 달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께서 그를 잊지 못해 하신 임종시의 유명(遺命)이 전하의 궛전에 아직도 생생할 것입니다. 전하의 동기 가운데 탯줄이 같은 자는 임해 한 사람뿐으로 선빈(先嬪, 공빈(恭嬪) 김씨를 말함)은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형제 두 사람이 외롭게 함께 자랐으므로 전하의 애절한 마음은 차마 못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옥사를 굳이 다 살필 것이 없고 사람을 굳이 다 따져 물을 것이 없고 죄를 굳이 다 조사할 것이 없고 법을 굳이 다 시행할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정당하게 하지 못한 잘못을 범할지라도 임해가 죽지 아니하는 용서를 입는다면 문제(文帝)를 비난하는 척포 두속(尺布斗粟)과 같은 노래가 오늘날에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네 차례나 면직해 줄 것을 청하자 마침내 체직하였다. 예부가 국상(國喪)의 의절(儀節)에 대해 와서 묻자, 선생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으로 대답하였다. 여름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어 국장(國葬)에 회곡(會哭)하였으며 시세를 붙따르는 사람이 선생을 지목하여 역적을 비호한다고 하자, 그 전말을 갖추어 말하고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계축년 여름에 간인(奸人) 박응서(朴應犀)가 간신의 지시를 받고 상변하여 대옥(大獄)을 일으킴으로써 초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에 연루되고 위로 자전에게까지 파급되자, 선생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극구 진달하면서 주 경왕(周景王) 때 영부(佞夫)의 사건을 들고 《춘추》 삼전(三傳)을 근거로 삼아 변증하여 대군을 감쌌으며, 또 말하기를 “부자간의 큰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모자간의 지극한 정은 마땅히 그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옛 성인의 순후한 의리를 깊이 생각하고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생각하여 전일에 섬기던 자세를 변치 마소서. 어찌 반드시 이궁(異宮)에 따로 거처하시게 하여 서로 간격이 없지 않은 것처럼 하십니까.” 하는 등 말이 매우 절실하고 강직하였다. 그 소장이 대궐에 올라가려 할 때 선생의 아들 장(樟)이 도성에 있으면서 선생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중간에서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봉사(封事)를 만들어 앞서의 소장과 함께 올렸다. 무오년에 조정이 자전을 폐위하는 의논을 결정하자 선생은 다시 소장을 초했다가 때마침 광해가 “정구(鄭逑)가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라는 설을 선창하여 명예스런 이름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올리지 않았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정월에 병으로 자리에 누워 사수(泗水) 가의 지경재(持敬齋)에서 별세하니, 향년 78세였다. 그 지난해에는 가야산(伽倻山)이 무너지고 별세한 날 아침에는 사수 가의 나뭇가지에 고드름이 맺혔으므로 사람들은 선생이 별세할 징조였다고 말하였다. 4월 무신일에 성주(星州) 남쪽 창평산(蒼平山) 간좌(艮坐)에 장사지냈는데 선영(先塋)의 동쪽이었다. 장례에 모인 자는 460여 인이었다. 가을에 성주의 선비들이 관찰사에게 청해 조정에 계문하게 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사하였는데, 천곡은 곧 퇴계가 논정하여 정주(程朱)를 향사하는 곳이자 선생이 일찍이 원장(院長)으로 있으면서 백록동규(白鹿洞規)처럼 규약을 만들어 문생들과 강독한 곳이다.
선생의 배필은 광주이씨(光州李氏)로 선고의 휘는 수(樹)인데 훈련 봉사(訓鍊奉事)를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 이우(李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그 몸을 삼가 내조를 잘 하였는데, 선생보다 11년 먼저 별세하였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장(樟)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선생보다 먼저 죽었으며, 장녀는 교리(校理) 강린(姜麟), 다음은 봉사(奉事) 노승(盧勝), 다음은 부사(府使) 홍찬(洪澯)에게 시집갔다. 도사는 도사 조광익(曺光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유희(惟熙)로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친 대신 선생의 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요절하였고, 다음은 유숙(惟熟)과 유도(惟濤)이며, 딸은 노준(盧埈)에게 시집갔다. 강씨는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유징(有徵)으로 생원이고, 노씨는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형우(亨遇 )이고, 홍씨는 1녀를 두었다.
선생의 문벌 세계(世系)는 한훤(寒暄)으로부터 나왔는데 일찍이 퇴도(退陶)의 문정에 올라 연원이 있는 학문을 들어 알았고 또 남명(南冥)과 대곡(大谷) 사이에 유학하여 그 지기(志氣)를 갈고 닦았다. 속학(俗學)이 사람의 재주와 성품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고 기필코 고명 광대한 영역의 고지를 획득하려고 마음먹었으며, 마음을 제어하고 몸을 다스리며 가정살이 벼슬살이 및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등의 일을 회암(晦庵)과 퇴계로 모범을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의 질서와 법도는 예의(禮儀)와 위의(威儀) 가운데에 있고 옛사람의 바른 행실은 모두 서책에 들어 있으니, 상고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기가 확고히 서며 지키고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예를 위주로 하였다. 《심경(心經)》을 매우 좋아하여 선유(先儒)의 말을 주워 모아 거기다가 더 추가하고 숨은 뜻을 밝히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며 후진을 일깨우고 인도하는 것도 반드시 이 책으로 하였다.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을 섬기면서 뜻을 잘 받들어 효도를 하였으며, 백씨는 일찍 작고하고 중씨는 다른 곳으로 출계(出繼)하자, 임시 변통으로 종가(宗家)의 일을 맡아 관장하면서 성심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홀로 된 형수를 집에서 받들어 어버이를 섬기는 예로 섬기고 내외의 조카와 생질들을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이 대하는 등 친족이나 외족간에 화목하고 친구 사이에 신의가 있으며, 형편이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있는 정의(情意)를 다하였으므로 먼 지방의 벗들과 향리의 대중으로부터 다 환심을 얻었는데, 이는 모두 자연적인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억지로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포부가 매우 커서 우주간의 모든 일을 모두 자신의 책무로 삼고 각 방면에 손을 대어 두루 관통하여 산수(算數)ㆍ병법ㆍ의약ㆍ풍수 등에 대해 그 실체를 다 알았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강론하고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문장을 구사할 때도 회암(晦庵)을 따라 겉으로 꾸미고 아름답게 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평소에 산수를 좋아하여 혹시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기우단(祈雨壇)에서 바람을 쏘이고 읊조리며 돌아오는 흥취가 있어 서성거리며 떠나지 않는가 하면 혹은 불시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땅 주인과 문생 가운데 선생을 사모하는 자가 정자를 지어 영접하였으므로 소강절(邵康節)의 행와(行窩)와 같은 풍치가 있었다.
정인홍은 처음에 선생과 함께 남명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늘그막에 선현을 비난하고 도덕을 배반하므로 선생이 그와 관계를 끊자, 그의 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불칙한 말을 날조하여 선생을 모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홍이 이첨과 함께 악을 저지르다가 벌을 받아 주륙되니,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선생은 축적한 식견이 넓고 배양한 지기 또한 깊었으므로 거의 자신을 완성하고 나아가 남을 완성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었으나 말단 관직과 고을 수령으로서야 어찌 크게 베풀 수 있었겠는가. 무신년 이후로는 세상이 극도로 혼암하였으니 죄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황도(黃道)가 다시 밝아져 태양이 제 빛을 되찾은 뒤로 오늘에 와서는 선생의 한 장 상소가 강상을 천백 년 후세에 세우고 국맥을 끝없는 장래에 이어가게 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은 또한 세운(世運)의 성쇠에 관계된 이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이른바 유자(儒者)란, 높은 자는 한 가지에 치우치고 낮은 자는 비근한 데에 빠지고 마니, 능히 전체 대용(全體大用)과 진지 실천(眞知實踐)에 힘을 써서 도를 보위한 공이 있는 자는 오직 선생뿐이다. 후세 사람으로서 퇴도의 학문을 알고 싶을 때는 선생의 성취한 것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글로는 심경발휘(心經發揮)ㆍ관의(冠儀)ㆍ혼의(婚儀)ㆍ장의(葬儀)ㆍ계의(禊儀)ㆍ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ㆍ갱장록(羹墻錄)ㆍ성현풍범(聖賢風範)ㆍ고금충모(古今忠謨)ㆍ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ㆍ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ㆍ심의제도(深衣制度)ㆍ무이지(武夷志)ㆍ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ㆍ와룡지(臥龍志)ㆍ역대기년(歷代紀年)ㆍ고문회수(古文會粹)ㆍ경현속록(景賢續錄)이 있는데,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상제께서 내린 선을 / 惟帝降衷
사람들이 중도 받아 / 民受其中
본성이야 모두 선해 / 性無不善
성인 범인 한가진데 / 聖凡攸同
오직 저들 소인들은 / 繄彼夸毗
사리 사욕 묶였다네 / 欲昏利梏
거룩할사 우리 선생 / 曰惟先生
남쪽 땅에 태어나서 / 挺生南服
한훤당의 세계 잇고 / 寒暄家世
퇴계선생 영원 받아 / 退陶淵源
지닌 명덕 밝히면서 / 明我明德
산림 속에 숨었는데 / 肥遯山樊
정백으로 후히 불러 / 旌帛厚招
좋은 대우 빈번했네 / 異數便蕃
임금 앞에 나아가서 / 延登前席
천인 도리 토론했고 / 討論天人
밖에 나가 수령되니 / 出宰百里
온 고을이 봄날일레 / 化洽陽春
도를 거둬 지니고서 / 卷而懷之
의리 깊이 탐구하고 / 深潛理窟
예의로써 후생 교육 / 以禮爲敎
하늘 질서 법도였네 / 天敍天秩
큰띠에다 심의 차림 / 大帶深衣
안회 증점 금슬로써 / 回琴點瑟
뜬구름의 만변 속에 / 浮雲萬變
그 즐거움 무한했네 / 其樂囂囂
늘그막에 시사 험해 / 晩際時屯
조정에다 말 다하니 / 盡言危朝
천길 높은 태산처럼 / 岳立千仞
우뚝할사 높고 높아 / 卓哉嶢嶢
사람 도리 부지하여 / 扶持人紀
어두운 길 비추더니 / 日星冥途
목가에다 산붕 재앙 / 木稼山崩
외로워진 오도 신세 / 吾道其孤
성군 새로 나오시어 / 聖作物覩
시호 주고 치제하여 / 節惠崇終
사문 아직 남았지만 / 文不墜地
어느 누가 이을건가 / 孰躡高蹤
후세 사람 공경하리 / 有來式之
높다라한 이 무덤을 / 若堂之封
2.김동강(의성)-우옹-성주:사도실
|
3.장여헌(인동)-광현-인동:남산
|
4.김학봉(의성)-성일-안동;금제
요약 | |||||||||||||||||||||||
|
본문 |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金汝岉)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었다.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는데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치열하였다. |
5.정우복(진주)-경세-상주:우산
6.정동계(초계)-온-거창:강산
7.김점필재-종직-(일선)-고령;개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