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미술관에는 많은 걸작들이 있었습니다.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그림 앞에서 느꼈던 전율감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가장 흥분하게 만든 작품은 카라바조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앞에서 저는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아이 같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카라바조는 밀라노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였지만
그의 가문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조라고 불립니다.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너무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의 걸작을 생각하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에 카라바조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잠시 그의 ‘ 성 베드르의 십자가 처형’ 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형을 받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형을 받을 것을 자청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당당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림에 묘사된 베드로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손에 박힌 못 때문인지 베드로는 상체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의 온 몸에 나타난
근육과 얼굴을 보면 그는 공포와 고통 그리고 절망에 젖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볼 때 금방이라도 악을 쓰는 베드로의 목소리가 튀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를 세우는 인부 중 등을 보이고 엎드려 있는 사람의 발은 흙이 묻어서 새까맣습니다.
이 모든 장면이 바로 제 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이 그림이 당시에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 때까지 그림에 묘사된 대부분의 성인들은 모두 좋은 옷과 당당한, 완성된 얼굴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이 것을 깨뜨렸습니다.
당연히 가톨릭 교리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나왔고 많은 물의를 빚게 되었습니다.
잠시 카라바조를 불러내서 그의 입장을 들어 보겠습니다.
‘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몸에 못이 박히는데 누군들 아프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림에서나마 곱고 당당하게 그려진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건 저의 고집이고 철학입니다’
다음 그림은 ‘성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입니다.
원래 이 그림은 교회에 걸리게 될 3개의 작품 중 하나인데 처음에 그렸던 작품은
내용이 교리에 위배된다고 해서 다시 그린 그림으로, 천사가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는
마태오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받아 적는 손등의 심줄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데 마태오의 자세가
영 불안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늘에서 떠 있는 천사가 불러주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으려면 아마도 이 자세가 맞을 것 같습니다.
독서실에서 수학 문제 풀 듯 앉아서 적는다면 더 이상하겠죠?
검은 색 배경으로 떠 있는 천사는 더욱 빛납니다.
그리고 마태오가 받아 적는 모습을 제가 옆에서 지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카라바조가 미술사에서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첫 째 이유가 바로 이 점입니다.
즉 그림을 보는 관람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관람객을 그림 속 장면의
현장 목격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은 내용에 따라
꽤 고통스럽습니다. 바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의 걸작 중 유티트, 다윗, 세례자 요한 을 묘사한 작품들을 제가 여기에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목이 잘린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입니다.
물론 제가 겁이 많은 편이지만 말입니다.
아래 그림은 ‘성 마태오의 소명’ 이라는 작품입니다.
마태오는 원래 세무서 직원이었죠.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찾아
오신 장면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예수님은 맨발이고 소박한 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저요?” 하고 자신을 가리키는 사람이 마태오인데 그와 그의 동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책상 위에는 세다 만 동전들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 있는 방향에서 빛이
사선으로 들어와 방안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죠.
카라바조는 사선으로 비치는 빛을 이용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명암을 극대화 한
그의 기법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로 이어지게 되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것이 카라바조가 일으킨 두 번째 혁명입니다.
‘로제토의 성모’라는 그림을 함께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목을 모르고 보았다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옆집의 아주머니
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남자의 발바닥은 정말
새까맣습니다. 이 두 남자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아니면 길 건너에서 우연히
이 장면을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래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몸은 처져있고 그 무게를 느끼는 표정 역시 그대로 들어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예수님의 발바닥은 까맣습니다. 자꾸 발바닥만 가지고 그런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카라바조는 발바닥마저도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의 일생이 늘 즐거웠던 것 만은 아닙니다.
테니스 경기를 하다가 판정에 시비가 붙었던 모양입니다. 옥신각신 하다가 그만 상대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참았으면 좋았을 걸 ----.
결국 참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카라바조는 이 결정이 맘에 들리 없었겠죠.
그가 선택한 방법은 로마를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난 후 이탈리아 남부
지방 여기 저기를 떠 돌다가 결국 나폴리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테니스가 뭔지 ---.
어쨌거나 참수형에 대한 공포가 있었는지 카라바조는 앞서 말한 유디트, 메두사,
세례자 요한등의 목이 잘리는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평소에도 의심이 많은 도마가 예수님이 창에 찔린 상처를 만져 보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났습니다. 사진이었다면 도마의 마음 속의 얼굴을 이렇게 도저히
찍지 못했을 것입니다. 답답해 하시는 예수님 얼굴과 도마의 얼굴은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을 것 같습니다.
미술사의 물길을 또 한 번 바꾸었던 카라바조였습니다.
카라바조 선생님, 지금도 테니스를 치시는지요?
정물화에도 워낙 뛰어 나셨던 분이라 심심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선생님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저의 목이 서늘했습니다.
(카라바조의 정물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