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뒤무리에 사령관이 엄청난 야심가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외세로부터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권력을 잡고 싶어했다. 거기다가 그는 루이 필리프이라는 아주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 뒤무리에의 계획은 이랬다. 적군인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파리로 진격한 뒤 혁명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런 다음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내세우고 실제적인 권력은 자신이 차지한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뒤무리에의 이러한 음모를 눈치 채고 그에게 파리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뒤무리에는 루이 필리프와 함께 냉큼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
이제 불똥은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에게로 튀었다. 혁명 정부는 평등한 필리프가 아들과 함께 반역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결국 평등한 필리프는 1793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아버지가 죽자 루이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작의 작위와 봉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프랑스를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도는 망명객인 그에게 작위와 봉토는 그저 그림의 떡이자, 못 먹는 감일 뿐이었다. 그 시절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명으로 수학 선생 노릇을 했고 그의 누이동생은 삯바느질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망명 생활은 2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와 화해를 시도했다. 사실 루이 18세로서는 시민들의 편에 서서 형을 실각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형을 처형하는데 찬성한 오를레앙가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루이 왕조나 오를레앙가가 다시 싸운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루이 필리프가 루이 18세와 화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1814년 프랑스가 왕정체제로 되돌아가자, 루이 18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덕분에 루이 필리프는 마흔 한 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돌아와 자신의 봉토를 찾을 수 있었다. 루이 18세와 화해를 했지만, 그는 왕당파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오를레앙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