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 |
세 대 수 |
인 구 수 | ||||
함평이씨 |
함풍이씨 |
합 계 |
함평이씨 |
함풍이씨 |
합 계 | |
합 계 |
2,313 |
303 |
2,616 |
10,190 |
1,512 |
11,702 |
동 구 |
397 |
51 |
448 |
1,894 |
247 |
2,111 |
서 구 |
855 |
108 |
968 |
3,783 |
523 |
4,306 |
북 구 |
673 |
78 |
751 |
2,901 |
385 |
3,286 |
광 산 |
388 |
66 |
454 |
1,642 |
357 |
1,999 |
○ 2000년에 이르러서는 정확한 조사는 하지 아니하였지만 2,700世代에 13,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咸李의 氣槪(기개)
○ 우리 咸李가 光州땅에서 인연을 맺게된 것은 始祖 彦(언) 11世孫이며 기성군 파조이신 兢(긍) 할아버지께서 1433년 5월 3일 중국 使臣(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압록강 甛水站(첨수참)에서 殉職(순직)함에 世宗大王께서 당시 광주 斗坊鄕(두방향) 현 광주 북구 角化洞(각화동) 甲坐原에 禮葬(예장)케 하면서 였다.
○ 咸李는 광주땅에 연고를 갖거나 入址開村(입지개촌) 선조님들이 국중에서 또는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분들이여서 처음부터 咸李의 存在는 광주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 광주땅과 인연을 맺은 기성군 兢(긍) 할아버지는 大提學(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하신 국중 인물이며 더구나 中國使臣으로 귀국길에 殉職(순직)하여 世宗大王께서 아끼던 臣下이였다.
○ 오치마을에 入址開村(입지개촌)하신 繼仁(계인)祖는 兢(긍) 기성군의 증손으로 司憲府 監察(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신 德望이 높으신 분이였다.
○ 芳蕙마을에 터를 잡으신 從愚(종우)할아버지는 蔚山 兵馬節度使를 역임하신 분으로 全羅道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분이였다.
○ 그 후 적불마을을 入址開村(입지개촌)한 百春(백춘)祖는 從愚(종우)祖의 曾孫으로 1592년 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 司饔院 奉事(사옹원 봉사)로서 직무 수행중 침범하는 왜적과 끝까지 격투하면서 관아를 수호중 순직한 충신으로서 추앙을 받은 분이였다.
○ 백춘(1537~1592)從弟이신 邦柱(1542~1597)祖께서는 1570(선조 3년)에 式年試(식년시) 甲科(갑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여 百春宗家宅 사당에 모셔있는 先祖에게 장원 告拜(고배)차 吹笛(피리를 불고) 行次(행차)로 笛吹(적불)이란 이름을 창명하게 하였고 또한 壯元(장원)及第(급제)한 가문임을 광주지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箕城君 兢(긍)의 7世孫이며 경기도 용인 愁洗洞(수세동)에서 梧峙로 오신 繼仁祖의 4世孫인 邦弼祖(방필조)께서 河西 金麟厚(하서 김인후)와 從遊(종유)로 挹翠亭(읍취정)의 정자를 세워 忠行高潔(충행고결)하였고 壬亂三等功臣(임란삼등공신)에 策錄(책록)된 거룩한 인물이 咸李의 가문 오치에서 배출되였다.
○ 梧峙마을에서 경사가 이어져갔다. 箕城君 兢(긍) 8世孫이며 경기도 용인 愁洗洞(수세동)에서 오치마을로 오신 繼仁祖(계인조)의 5世孫인 涵一(一査)祖께서 1603년에 式年時 丙科에 及第하였다. 官職은 成均館 司成으로 마치였으나 在職時 淸白吏로 유명하신 분으로 특히 강진 현감시는 康津郡民이 덕을 못잊어 梧峙 大行들에 여생의 供養(공양)답으로 마련하여 주어 속칭 강진들이라고 까지한 명문의 가문으로 이어져 왔었다.
그 후 대대로 咸李의 명예를 선양하면서 국가와 지역사회에 이바지하신 선조님들이 많이 배출되자 오치와 방혜 적불 마을은 名賢의 世居地로 또는 念珠마을에 咸李의 선비마을로 氣槪가 이어져 오고 있어서 咸李가 客班이였지만 奇高朴, 南尹, 北宋 五李(咸李포함)와 같이 光州 土班의 성씨로 기반을 다지며 살아왔었다.
第二節 入鄕 來歷(입향 내력)
1. 梧峙(오치)마을
가. 마을 沿革(연혁)
光州 北區 梧峙洞에 소재한 오치마을은 머구재밑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의 북쪽에 신촌마을 동편에 윗마을, 남동쪽에 매머리마을 남서녘 아랫마을 서편에 황개머리 마을이 듬성듬성 모여 있으며 물방골과 참새골 사이에 거문고 타는 玉女모습의 玉女彈琴形(옥녀탄금형)명당이 있는 거문고 등이 있다. 梧峙 坊築(오치 방축)의 저수물로 풍년농사를 지어왔던 오치마을은 조선조 한말에는 蛙只面(와지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촌리 하촌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오치라 하고 瑞坊面(서방면)에 편입하였다. 1955년 7월 1일 광주시로 편입되고 1957년 洞制(동제) 실시에 따라 瑞山洞(서산동)으로 되었다가 현재는 원명을 찾아 오치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始祖 彦의 14世孫인 繼仁祖께서 지금으로부터 480년전(2000년기준)인 1919년(中宗 14년) 乙卯士禍를 피하여 오치에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한 후 18代를 줄기차게 이어오면서 名賢의 世居址로 光州땅에 咸李의 명예를 선양하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도시화에 밀려 구획정리사업으로 오치 방축은 매립되고 여기를 기점으로 하여 바둑판처럼 4통 8달로 도로가 개설되여 현대도시가 되어버렸다. 지난날 마을앞 오치방축매립지에는 오치 한국전력공사가 크게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옆에는 무등파크맨션 서쪽에는 주공아파트 광주은행등이 있고 동쪽으로는 일반주택이 서 있으며 북쪽으로는 금호타운,혁신타운의 아파트촌이 형성되어있다. 현재는 누가 보아도 옛날 오치마을의 형상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고 오직 선조님께서 남겨 놓으신 挹翠亭(읍취정)과 梧山亭(오산정)만이 咸李의 얼을 이어가면서 오치는 咸李가 살아온 유서 깊은 터임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나, 入址開村(입지개촌) 諱繼仁先祖(휘계인선조)
오치마을로 처음 터를 잡으신 선조는 始祖 彦의 14世孫이며 箕城君(기성군) 兢(긍)의 증손으로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을 역임하신 繼仁(계인)祖께서 1519년 경기도 용인 愁洗洞(수세동)에서 증조부 兢(긍)의 先塋(선영)이 있는
斗坊鄕(각화동)과 가까운 곳으로 家率(식구)을 거느리고 光州땅 梧峙마을로 이거하였다.
繼仁(계인)祖께서는 오치마을로 이거하여 몸소 農事를 짓고 餘暇로 學問을 닦으면서 옛날 徐有渠(서유거: 영조때 農政家)와 같이 여생을 보냈다.
配는 宣人 慶州 李氏로 合窆(합폄)하였으며 墓所는 光州 梧峙洞(오치동) 書堂山麓(서당산록) 金洞巽(김동손)좌로 모셔있다.
다, 入址하게 된 緣由(연유)
오치마을에 처음 터를 잡으신 繼仁祖의 曾祖父(증조부) 兢(긍) 箕城君 할아버지는 1389년 咸平郡 羅山面 牛峙里에서 태어나시고 1405년(太宗 5년)조선조에서 처음으로 시행하는 과거에 及第하시고 다시 1427년(太宗 9년) 重試(중시)에 올라 禮曺參議(예조참의) 吏曺參議(이조참의) 參判(참판) 直提學(직제학)겸 弘文館(홍문관) 藝文館(예문관) 大提學(대제학) 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 成均館 大司成經筵(대사성경연) 義禁府 五衛都摠府의 都摠管(의금부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崇祿大夫 吏曹判書(승록대부 이조판서)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을 역임하고 箕城君에 封하여졌다. 1433년(44세)에 中國使臣(중국사신)으로 갔다가 귀로에 鴨綠江(압록강) 甛水站(첨수참)(驛)에서 得病(득병)하여 殉職(순직)하시었다. 이에 世宗大王께서는 나라에 큰 人才를 잃으셨다고 哀悼(애도)하시고 棺槨(관곽)과 糧穀(양곡) 70석을 下賜하시고 承旨 林垠(승지 임은)에게 命하여 祭祀(제사)를 지내고 光州땅 斗坊鄕(현 角化山) 甲坐之原(갑좌지원)에 禮葬(예장)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기성군 할아버지께서 벼슬길에 올라 계속 漢陽(서울)에 계심에 큰아드님이신 伯源祖는 故鄕 咸平에서 叔父 慴(숙부 습) 孝友公을 따라 점필제 김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臺諫(대간)의 천거로 司諫院(사간원), 正言(정원) 除授(제수)되고 그 후 제주 判官(판간)을 역임하고 茂長縣監(무장현감)으로 옮겼고 佐翼原(좌익원) 從勳(종훈)(世祖禪位功臣)이 되어 벼슬을 하시다가 宗孫으로 故鄕(咸平)으로 돌아와 윗대 先塋(선영)을 모시고 살으시다가 羅州로 이사하게 된 것이며 둘째 아드님이신 叔汶祖(숙문조)께서는 兢(긍) 아버님을 따라 서울근교인 경기도 용인 愁洗洞(수세동)으로 가셔서 아버님을 받들어 尙衣院(宮中의복관리 및 금은 수급)의 直長(종 7품)과 全州 判官을 끝으로 관직을 사임하시고 여기에서 居留하였으며 叔汶祖(숙문조)아드님이신 熹祖(희조)께서도 아버님이 터를 잡으신 경기 愁洗洞(수세동)에 거처를 두고 直長(직장)을 역임하시고 여기에서 기거하시엇다. 熹祖(희조)의 큰아드님이신 繼仁(계인)祖께서는 司憲府(사헌부) 監察(감찰)을 역임하시고 祖父와 先考熹의 山所를 경기도 용인 수세동에 두고 兢(긍) 증조부가 모셔있는 斗坊鄕(현 각화동)과 거리가 가까운 오치에다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게 된 것이 광주땅 定着(정착)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라, 遺蹟物(유적물)
1) 角化祠(각화사)
∘ 위치 : 광주시 북구 각화동
∘ 창건 : 1997. 11. 14(음 10.15) 기성군 문중의 誠力으로 玧範 主幹下에 창건
∘ 配享先祖(배향선조) : 4位 - 仁問 : 密直提學(7世), 蕃 : 監司(8世), 三吉 : 贈兵曺判書(9世), 春秀 : 全羅左水使 贈吏曹判書(10世)
2) 齋室(재실)
① 奏格齋(주격재)
∘ 위치 : 광주시 북구 각화동
∘ 主齌祖 : 兢(긍) 기성군파조
∘ 창건 : 1876(丙子)후손의 성력으로 창건
∘ 연혁 : 1988(戊辰) 載勉 主幹下에 門中의 성력으로 重建
② 永慕齋(영모재)
∘ 위치 : 광주시 북구 오치동 ∘ 主齋祖 : 繼仁(14世)
∘ 연혁 : 1954년 恒範 주간하에 후손의 성력으로 창건
∘ 1991년 토지개발공사에 수용되어 철거되고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됨
③ 東村齋(동촌재)
∘ 위치 : 光州市 北區 淸玉洞 新村
∘ 主齌祖 : 敬道(20世)
∘ 연혁 : 1988. 載國 建元 주간하에 후손의 성력으로 창건
3) 亭閣(정각)
① 挹翠亭(읍취정)
∘ 위치 : 光州市 北區 梧峙洞
∘ 主亭祖 : 邦弼(17世)
∘ 연혁 : ∙ 1813(癸酉)창건 ∙ 1996(丙子)建昌 主幹下에 重建
② 梧山亭(오산정)
∘ 위치 : 光州市 梧峙洞
∘ 主亭祖 : 龍憲(26世) 梧山
∘ 연혁 : 1917년 梧山의 子 松泉 啓翼께서 先親이 세우지 못한 亭子를 유지를 받들어 건립하다.
4) 碑(비)
① 箕城君 神道碑
∘ 위치 : 光州市 北區 角化洞
∘ 主碑祖 : 兢(긍) 11世 기성군파조
∘ 연혁 : ∙ 1937년(丙子) 敏龍, 敏璿(민선),敏性,啓翼,啓宗 主幹下에 後孫의 성력으로 竪立
∙ 1997 門회장 玧範 主幹下에 후손들의 성력으로 角化洞 境外로 移竪(이수)
∘梧峙坊築(오치방축)
1879년 고종 16년에 발간된 광주읍지를 보면 그 때 오치방축이 수록되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한말이나 아니면 日帝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진다.오치 종친들의 말씀을 종합하여보면 오치마을은 거문고를 타는 玉女모습과 같다하여 玉女彈金形局(옥녀탄금형국)이라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치마을이 상촌에서 하촌으로 길게 뻗어내려 마치 뱀이 꿈틀거리면서 있는 것과 같다하여 蛇龍之形(사룡지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蛇龍穴에 있어서는 물이 있어야 생기가 솟아나 용은 날을 수 가 있고 뱀은 棲息(서식)한 개구리를 잡아 먹을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風水說의 여건을 부합시켜 마을의 번영을 기하고 한편으로는 農事灌漑(농사관개)용수로 활용키 위한 일거양득의 의미에서 저수지로 만들어진 것인데 만들 당시 咸平李氏가 주간이 되어 저수지를 축조하였고 저수지에 수용되는 토지도 咸李의 耕作農土가 거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방축의 수용 토지는 기부체납으로 국유지(농수산부)로 되어 버렸다. 1984. 12. 28 ~ 1989. 12. 31까지 5개년에 걸쳐 광주시에서 제8지구 오치 구획정리 사업으로 매립하게 되었으며 그 당시 地目은 溜池(유지)로 地積은 19,349㎡(5,853평)이였다. 현재는 이 坊築터에 韓國電力公社가 들어서 있다.
2. 芳蕙(방혜)마을
가. 마을 沿革(연혁)
광산구 임곡면 등임동에 소재한 방혜 마을은 魚登山(어등산) 중턱자락에 물위에 뜬 배(舟)형국처럼 자리 잡고 있다하여 일제말엽까지는 배위재(舟浮堤)라고도 불러왔으나 한편으로는 어등산 峻峰(준봉)이 마을을 수려하게 감싸고 있어 마을 景觀(경관)이 한폭의 그림처럼 빼어나게 아름다워 마치 고상한 蘭草(난초)가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꽃다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하여 꽃다울 芳字(방자)와 란초 蕙字(혜자)를 부쳐 방혜 마을이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방혜 마을은 馬韓(마한) 백제시대에는 水川縣(수천현)으로 고려시대에는 茂形郡(무형군) 下召 古龍面(하소 고룡면)에 속해오다가 조선조 高宗(고종) 21년 1884년 이후는 光州郡(광주군) 林谷面(임곡면) 芳蕙里(방혜리)라 했고 光復(광복)후는 光山郡(광산군) 林谷面(임곡면) 登任里(등임리) 芳蕙(방혜)마을이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등림의 이름은 마을 뒤 어등산이 솟아있고 촌전에 황룡강이 흘러 登臨水라하여 그것을 줄여서 村名을 登臨이라 하였다. 그러나 日帝시대에 臨字를 任字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姓氏별로는 咸平李家 8戶, 平澤林氏가 5戶, 光山李氏가 10戶가 살고 있으며 특히 從愚祖가 터를 잡은 후 480년간을 운봉공 종손이 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아직까지 光州市에서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현재도 옛날 자연모습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나, 入址開村(입지개촌) 諱從愚先祖(휘종우선조)
始祖 彦의 13세손이며 11世 伯棠(백당) 雲峰公派祖(운봉공파조)의 孫子이신 從愚祖께서 1518년 34세때에 羅州郡 多侍面 會津마을에서 처음으로 山紫水明(산자수명)한 어등산 중턱 山麓(산록)芳蕙洞에 草堂을 쌓고 性理書를 講究하면서 터를 잡아 이사를 하고 마을을 形成하기 시작하였다.
다, 從愚(종우)祖 行狀(행장)
∘ 字睿臾로 司馬에 오르시고 湖學敎授(호학교수) 義禁府都事(의금부도사) 蔚山兵馬節度使(의금부병마절도사)를 역임하신 거룩한 할아버지로서 1485년 成宗 16년 羅州市 多侍面 會津에서 태어나시고 1533년 中宗 29년에 享年 49세를 일기로 終命(종명)하시였다.
∘ 幼年(유년)시절 性度(성도)가 純厚(순후)하고 宏深(굉심)하여 魁然(괴연)히 大人(대인)의 氣象(기상)이었다.
∘ 弱冠(약관)에 俛仰(면앙) 宋純(송순)과 더불어 思齋(사재) 金正國先生 門下에서 修學할 때 當時 朱文公 小學書가 東國에 新出하여 世上에 公布되지 아니하였는데 府君께서 思齋선생의 命 으로 本稿를 修正 精寫하고 疑難의 文章을 吐釋하였다. 이에 思齋 金先生이 極讚하고 宋順興君, 瑭이 洽足히 여겨 湖學敎授로 삼으셨다.
∘ 1513년 中宗 8년 29세에 鄕貢으로 司馬試에 登科하고 당시 七賢인 進士 奇遵, 進士 安處順, 進士 安處謙, 進士 宋純, 生員 金安道, 生員 李彦迪, 生員 李若水 등과 同年이 되어 道義로 親交한 바, 府君을 包含하여 世稱 金榜八學士라 칭하였다.
∘ 1518년 34세에 山紫水明한 어등산 중턱 下麓(하록) 芳蕙村에 草堂을 쌓고 性理書를 講究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羅州市 多侍面 會津에서 移居하시게 되었다.
∘ 高祖 參議公 諱 自寶가 羅州市 多侍面 會津에서 居할시 家舍가 失火되어 先世 戶口 文牒이 燒失된바 이를 恒時 慨嘆하시고 京鄕 各地一家宅을 두루
探訪하여 數年만에 先世文牒을 詳備하여 咸李의 族譜牒을 갖게 되었다.
∘ 家親 諱 根宗께서 高山縣監으로 在職時 臥病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職務를 代行하면서 治民 御吏에 協理하니 大縣候(대현후)라는 칭송이 자자 하였다.
∘ 父親께서 終考(종고)하시자 故山에 返葬(반장)하고 墓側에 廬幕(려막)을 짓고 三年동안 죽을 드시고 소금과 채소를 드시지 아니하고 侍墓살이로 至極(지극)한 孝誠(효성)을 다하였다.
∘ 1526년 41세때 義禁府(의금부)都事(도사)로 在任中(재임중) 蔚山(울산)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 特薦(특천) 登用(등용)되었다. 任地(임지)에 赴任(부임)하여 城地(성지)를 쌓고 兵器(병기)를 整備(정비)하고 軍需品(군수품)을 備蓄(비축)하고 軍律(군율)을 確立(확립)하면서 東南海岸(동남해안)에서 橫行(횡행)하던 島夷(도이-倭놈)를 平定(평정)하였다.
∘ 當時(당시) 西疫(호열자)이 猖獗(창궐)하자 官衙(관아)가 閉門(폐문)하고 勿入警戒(몰입경계)하였으나 軍門을 開放하여 民意를 收斂(수렴)하니 百姓들이 그 軍門을 避瘧門(피학문)이라 일컬었다.
∘ 在職中 爭塗者(쟁도자)의 忌嫉(기질)한바 있어 직을 그만두고 芳蕙마을 草堂에 돌아오셔서 不復 仕進하고 學問과 絃歌(현가)로 餘生(여생)을 보내시다가 1533년에 49세를 一期로 終命하시다.
라, 遺蹟物(유적물)
1) 咸平李公 諱 從愚 遺蹟碑
∘ 위치 : 광산구 임곡출장소 등임2리 방혜마을앞 우산각옆
∘ 竪立年月日 : 1997. 11. 3
∘ 竪立者 : 咸平李氏 雲峰公門中
2) 永慕齋(영모재)
∘ 위치 : 광산구 임곡출장소 등임동 내등마을
∘ 創建 : 1935. 章憲, 啓聲, 啓萬 主幹下에 창건
∘ 主齋祖 : 伯棠(백당) 雲峰公派祖
∘ 內登마을 居住 姓氏 分布
18戶中 平澤 林氏 8戶, 河東 鄭氏 3戶, 其他 7戶로 우리 咸李는 한 戶도 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처음 방문하는 外地人은 우리 영모재와 伯棠雲峰公派祖의 墓所를 平澤 林氏 문중 유적물로 생각하기도 한다.
3) 伯棠 雲峰公派祖 墓所
∘ 위치 : 광산구 임곡출장소 등임동 산 336번지
비석등(내등마을) 村前 지방도변
∘ 明堂 : 자손이 번창하고 富貴福祿이 代代로 이어져가는 大吉地이다.
3. 적불(笛吹 赤茀)마을
가. 마을 沿革(연혁)
광주시 북구 용봉동에 소재한 적불마을은 일찍이 풍수지리상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이다. 적불마을은 용봉동에 속하고 있는데 용봉동은 동쪽 각화동 태봉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경방천과 북녘 일곡동에서 흘러오는 용봉천이 합류하는 왕개(지금의 반용)윗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언덕자락은 용주(龍珠) 반룡(盤龍)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형 명당이라고 볼러 오고 있다. 서쪽인 어린이대공원 전망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적불마을도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봉황비상(鳳凰飛翔)형국이다. 용봉이란 이름은 1914년 日帝(일제)가 전 국토의 세부 측량을 실시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용주(龍珠) 반룡(盤龍) 봉곡(鳳谷) 청계(淸溪)마을 이름가운데 용주(龍珠) 반룡(盤龍)의 龍字와 봉곡(鳳谷)의 鳳字를 따서 용봉이라 하였다. 적불마을옆에는 반용과 용주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반용 마을은 지형이 용의 형국이라하여 반룡(盤龍)이라 하였는데 현재 마을의 일부는 전남대학교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전대 경영대학 뒷편에 있다. 그리고 용주마을은 지형이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반룡희주(盤龍戱珠)명당이 있다고 하여 용봉동에서 제일가는 명당처라 하였다. 현재 이 마을은 전남대학교에 편입되어 없어졌는데 법대 사회대 건물이 있는 터이다.
적불 마을은 중봉이라고 불렀는데 여기 上鳳에는 경주 崔氏, 中鳳에는 咸平李氏 邊鳳에는 竹山 安氏가 土班의 姓氏로 友誼를 다지며 살아왔었다. 1983년까지는 적불마을로 불리어오다가 鳳谷(봉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봉곡이라는 이름은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형국이라 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본래는 광주군 蛙只(와지)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봉리라 개칭하고 광산군 서방면에 편입시켰으며 1955년 7. 1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신룡(태봉)동으로 개편하였으나 1983. 10. 1 용봉동이라는 본래의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적불마을은 1997년 光州市廳에서 용봉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완전 도시화가 되어 옛날 자연마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현재 접불 마을은 좌편에는 신동아 아파트가 건립되어 아파트촌이 형성되었고 우편에는 현대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마을 뒤쪽에는 비엔날레장, 民俗박물관, 도교육위원회가 존치하고 있으며 마을 옆에는 대순진리교 북부지구 큰 건물이 높이 서 있다. 전면으로는 신안동 기상대, 경신여고, 광주변전소 태봉초등학교가 설립되어있다.
나. 마을 創名 經緯(창명 경위)
적불의 이름은 漢字로는 笛吹(적취) 또는 赤茀(적불)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적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 笛吹(적취)
어떻게 하여 적불마을이라고 불렸을까? 연유을 고찰하여 보면 분명히 적불마을에서 연유되어 불러진 이름이라고 보아진다. 적불마을은 雲峰公派祖의 6世孫이며 宗孫(종손)인 百春祖께서 1537년 芳蕙(방혜)마을에서 出生하시고 1558년 22세때에 적불터로 移居하여 오시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에 百春(倫의 子)祖의 從弟이신 邦柱(俊의 子)祖께서는 1570년 선조 3년에 式年試에서 甲科로 壯元하는 榮光을 안게 되었다. 1등은 壯元으로 종 6품을 주고 2등은 榜眼(방안)으로 정 7품을 주고 3등은 探花(탐화)로 정 7품을 주었다. 그리고 乙科 7명은 정 8품, 丙科 23명은 정 9품을 주었다.
甲科 壯元은 대단한 것이었다. 壯元을 하면 조정에서는 이미 地方官衙(지방관아)에 연락하여 고을 守令(수령)으로 하여금 크게 영접하고 환영케 하였다.이때에 壯元及第하신 邦柱祖께서는 먼저 조상에게 壯元 告拜(고배)를 들이기 위하여 말을 타고 壯元帽(장원모)를 쓰고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莊嚴(장엄)한 모습으로 錦衣還鄕(금의환향)하여 적불마을 百春宗家 祠堂으로 오는 것 이었다. 이것이 마을의 영광으로 승화되어서 이때부터 壯元及第者가 금의환향한 마을이라 하여 우리말로는 나팔과 피리를 접어 불다가 적불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피리를 불었다하여 笛吹(적취)하고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2) 赤茀(적불)
赤茀(적불)의 명칭은 1879년 고종 16년에 간행한 光州邑誌 坊築(방축)편에 赤茀坊築(적불방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農耕(농경)시대 中鳳(중봉)마을 북편 광주비엔날레 측면에 저수지 하나가 있었는데 이 저수지 이름은 붉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곳이라 하여 한자로 저수지(坊築(방축))이름을 赤茀(적불)이라고 하였는데 이 저수지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赤茀(적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다, 入址開村(입지개촌) 諱百春先祖(휘백춘선조)
始祖(시조) 彦(언)의 16世孫(세손)이며 伯棠(백당) 雲峰公의 6世孫인 奉事公 百春祖께서 처음으로 터를 잡아 마을을 形成하였다.
이로 인한 咸李의 터로 450년간을 살아오고 있다.
다, 百春(백춘)祖 行狀(행장)
∘ 字는 榮卿(영경)이요 1537년 中宗 32년에 光山郡 林谷面 芳蕙里에서 出生하시고 1592년 선조 25년 享年 56세를 一期로 殉節(순절)하시었다.
∘ 天性이 剛直(강직)하고 文學節行(문학절행)이 당대에 뛰어났으며 1558년 현, 적불마을로 이사하여 挹翠亭(읍취정)을 짓고 洗心泉(세심천)을 만들어 後學을 양성하고 春秋로 鄕約(향약)을 講會(강회)하였다. 이에따라 河西 金先生도 이곳에 枉臨(왕림)하여 藍田古規(람전고규)를 講論(강론)하므로서 親交(친교)가 두터웠다.
∘ 府君(부군)께서는 1558년 明宗(명종) 13년 司馬試(사마시)에 등재하고 1590년 宣祖(선조)23년에 司饔院(사옹원) 奉事(봉사)(종8품東班(동반))로 奉職中 1592년 壬辰亂이 발발함에 왜군이 한양 職所까지 侵入하였다. 이때 大駕(왕행차 가마)는 西幸(평양)으로 가고 提調(직무대리책임자)등이 逃走하자 府君만이 홀로 朝服을 正色하고 기왕에 御駕(임금가마)를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守職하다 죽는 것이 臣下의 도리라 決心하고 倭賊과 抗拒하다가 賊에게 捕虜(포로)가 되어 罵不絶口(매불절구)하다가 千秋의 한을 품고 56세로 殉節(순절)하였다. 壬辰年 9. 23자로 史乘과 李白沙 日記와 湖南節義錄에 收錄되어 있다. 그 후 1997년 保寧 護國祠에 壬亂功臣으로 位牌를 奉安하였다.
墓는 當初 雲岩洞 大造山에 모시였으나 1980년 光州市에서 이 일대를 어린이 大公園으로 조성하면서 1980. 9. 20일 현 北區 日谷洞 虎項洞 北麓子坐로 移葬하였다.
마, 遺蹟物
1) 赤茀坊築(적불방축) : 一名 鳳凰堤(봉황제), 貯水池라고도함
이 방축은 農業用水용으로 使用키 위하여 만든 것이나 현재는 도시화가 되면서 농경지는 구획정리가 되고 저수지는 비엔날레 전시관 측면에 존치되고 있다.
2) 挹翠亭(읍취정)
百春祖께서 挹翠亭을 세웠으나 年代 未詳(미상)에 없어져 버렸다.
3) 洗心泉(세심천)
百春祖께서 용봉천 제방에 읍취정을 세우고 당산나무 아래 세심천을 파고 용봉천에 洗心洑(세심보)를 막아 관개용수로 農作을 하여 왔었다. 그러나 1980년대 용봉천 복개공사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흔적은 없어져 버렸다.
4. 동산(東山)마을
가. 마을 沿革(연혁)
光州 光山區 平洞面 東山里에 위치한 동산마을은 조선조 중기 1530년경 壬亂 발발전에 天安全氏(천안전씨) 낙남선조 全彭世公(팽세공)이 이주 정착하여 開村한 마을이다. 風水說에 의하면 마을 중심으로 다섯 마리의 龍이 감싸고 있고 서쪽으로 세 마리 용이 둘러있는 중앙부에 자리한다고 하여 多字龍(다자용)형국이라고 한다. 또다른 風水說에 의하면 마을앞 500M 지점에 있는 稜線(능선)이 활과 같고 나주로 뻗는길이 화살과 같다하여 활 형국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동산마을은 95호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에서 天安 全氏가 81戶로 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 咸李는 8戶, 平澤 林氏가 2戶, 其他 姓氏가 4戶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咸李는 光運(광운)祖를 위시하여 承下(승하)祖上을 안장한 평동면 劒像洞(검상동)선산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화된 바가 없이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비옥한 농토에 공기도 좋아 살기좋은 곳이기도 하다.
나, 入村(입촌) 諱光運先祖(휘광운선조)
시조언의 22세손이며 慴(습) 효우공파조의 12세손인 光運(광운)조께서 광산군 삼도면 도덕리에서 妻族 金海金氏와 東山마을 全氏와의 연관으로 1750년 동산마을로 이사와 살게 된 것이다.
다, 入村하게된 緣由(연유)
22세 광운조의 先代인 시조 彦, 18世孫인 時榮(시영)조께서 현 함평군 나산면 우치리 孝子里라 칭한 孝子이신 諱 壤(양)의 先考(선고)곁을 떠나 광산군 삼도면 도덕리로 이사와 19세 汝春(여춘) 20세 大淳(대순) 21세 廷壽(정수)의 4대가 살아오다가 다시 광운조께서 이곳을 떠나 광산군 평동면 天安 全氏가 自作一村(자작일촌)하는 동산마을로 오게 된 것이다.
우리 咸平李氏가 동산마을에서 7代를 살아오고 있으나 족보상 수효는 많은데 모두 他地로 나가서 살고 있다.
4. 念珠(염주)마을
가. 마을 沿革(연혁)
광주시 서구 화정2동에 소재한 염주마을은 마을 남쪽에 있는 짚봉산과 서, 북, 동쪽이 야산으로 둘려 싸여 그 형국이 마치 염불할 때 손으로 돌려 수효를 세는 염주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시화가 되기전까지는 순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였으나 1990년에 접어들면서 도시계획사업으로 완전히 도시가 되면서 주변에 염주체육관이 들어서고 마을 앞으로 염주체육관을 연결하는 도로가 짚봉산 자락을 절개하여 개설되고 있다. 한말이후에 축조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던 念珠 坊築(염주 방축)도 매립되어 지금은 痕迹(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원래 이 마을은 68世代로 漢陽 趙氏가 자작일촌하는 마을이었으나 우리 先祖 洛緖祖(낙서조)께서 이사 오신후로부터는 咸李가 번창하여 조씨와 쌍벽을 이루며 살아왔었다.
나, 入村(입촌) 諱洛緖先祖(휘낙서선조)
시조 언의 24세손이며 枝春, 縣監公派祖의 14손이신 洛緖(낙서)할아버지께서 화순군 도곡면 온천리에서 1858(哲宗 9)년에 한양 조씨와 烏合之卒(오합지졸)로 여러 성씨가 살고 있는 당시 珠洞(주동) 현 念珠(염주)마을로 이사와 살게 된 것이다.
다, 入村하게된 緣由(연유)
원래는 洛緖祖의 8대조인 世禮(세례)할아버지께서는 무안군 일로면 귀동에서 나주군 봉황면 용두리와 와우리에 터를 잡아 이사를 하였고 그 후 7대조 殷福(은복) 6대조 受省(수성) 5대조 厚(후) 고조 進齡(진령)까지 계속 살으시다가 증조부이신 松祚(송조)께서 화순군 도곡면 온천리로 이사와 조부 昌運(창운) 선친 儒興(유흥)까지 3대에 걸쳐 살으시다가 洛緖祖께서 子 敦植(돈식)가솔을 거느리고 외척과 연고가 있는 광주땅 珠洞(주동)마을로 이사를 오게된 것이다.
라, 先祖遺蹟物(선조유적물)
1) 念珠(염주)마을이라 부르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5년 性理學者(성리학자)이신 雲石 李啓煥께서 마을터가 염주를 돌리면서 염불하는 형국과 같다하여 구술주(珠) 珠洞(주동)을 念珠(염주)마을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2) 桂菴李公白憲實績碑(계암이공백헌실적비)
∘ 위치 : 염주마을 쌍샘(雙泉) 上端(상단)
∘ 비수립 : 마을사람들과 인근주민이 桂菴公(계암공)이 귀감된 행적을 찬양하여 세웠다.
∘ 碑현황 : 忠範祖父로서 도시개발에 따라 도로개설시 비를 이설할 때 중동이 부러져(折倒)비돌은 현재 忠範의 參子 載日宅에 보존되고 있다.
3) 孺人咸平李氏 孝行碑(유인함평이씨 효행비)
∘ 위치 : 염주마을앞 우산각옆
∘ 수립년도 : 1982. 9. 5. 마을사람들이 가륵한 孝行을 찬양하여 세움.
∘ 媤家 : 나주 吳成烈에게 시집감
∘ 행적 : 啓煥 女息을 父母와 舅姑(구고)를 극진한 효성을 다하고 동리에 施德(시덕)하다.
4) 당산나무와 우산각
당산나무의 수령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생기면서 당산나무를 심었다고 볼 때 300년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당산나무 옆에는 마을 우산각이 서있고 서구청에서는 老巨樹 保護 측면에서 우산각의 표석을 세워 놓았다. 우리 咸李 선조님들이 150년간 살아오면서 매일 당산나무를 그리며 살았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하에서 땀을 식히고 여가를 즐기기도한 역사깊은 노거수이다.
5) 念珠坊築(염주방축)
∘ 위치 : 염주마을 하부
∘ 방축축재년도 : 1879년 간행된 光州邑誌(광주읍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염주마을이 생기면서 농경 저수지로 300년전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아진다. 이 저수지는 마을앞 짚봉산 계곡에서 맑게 흐르는 자연수를 뚝만 쌓아 저수지로 만들었다. 1937년 李駿範氏께서 전라남도 수리조합 재직시 조합비로 크게 개축된 바 있었다.
∘ 방축현황 : 1980년대 도시개발 사업으로 염주방축을 매립하여 거기에다 아파트를 건축하여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6) 道甲寺址(도갑사지)
∘ 위치 : 염주마을옆 언덕하
∘ 創寺(창사) : 雲石公 李啓煥의 장녀이며 孝婦 李甲寅(이갑인)과 夫君 吳成烈(오성열) 夫婦가 1943년 일제말엽에 창건하여 불공하여 왔으나 1970년대 廢寺(폐사)되어 현재는 절의 흔적은 찾아볼수가 없고 사찰의 유물만 마을옆 언덕에 부처상과 석등 동자석등을 정비하여 세워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