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현상을 무엇이라고 학술적으로 정의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신비성과 종교성을
배제하면서 그 의의와 관리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생명현상을 평가할 때에는 대체로 자신의 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거나,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나 주위 자연의 모든 생명현상을 기준으로 하거나, 또는 가문의
혈통을 이어 가거나 민족과 역사의 이어짐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도
바라보아 평가하기도 한다.
자신의 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생명현상을 바라 볼 때에는 관점의 출발점이 자신이므로
자신만을 위한 삶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으로 이는 이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라는 한시적 관점에서는 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단, 이것이 결코 옳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의해 스스로 가려졌던 눈을 보다 주변으로 돌려보면 생명의 현상을 이해 하는 폭도 넓히게 된다.
굳이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람이나 물, 새벽에 일기 시작하는 공기의 흐름과 밤에는 가라앉는 공기의 흐름, 빛나는
태양과 잔잔히 밝은 저 달의 존재 의의, 그리고 붕붕대는 꿀벌들의 바지런 함, 풀벌레
소리 등이 무엇을 말하며 녹음과 낙엽을 번갈아 가며 1년 사시사철 형태는 변하지만
줄기차게 생명이 연장되는 나무, 비록 한해살이지만 씨앗을 뿌린 뒤, 자신은 한풍과 눈
속에서 얼고 스러져 없어지지만 뿌렸던 씨앗을 통해 생명력을 이어가는 풀들......... 등을
보면 자신의 존재를 밖에서 바라 볼 수 있어 겸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의 원시림이라는 아마존의 밀림이 무너져 가며 지구의 사막화가 진행되어 가고 있고
과학화와 선진화 및 현대화로 갖은 대기 오염과 오폐수의 배출을 통해 자연환경이 오염 되고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코끼리의 상아와 호랑이의 뼈, 악어의 가죽,
상어의 지느러미와 고래 가죽, 곰의 웅담, 노루의 사향, 뱀, 고양이, 수달....등등 함께 살아
가야만 하는 온갖 동물들을 서서히 없애고 생태계를 스스로 파괴해 가며 몸의 따뜻함과
안락함, 입과 위장의 만족함 그리고 호사의 교만함을 추구하는 오늘날 지구촌의 병폐의
시작은 바로 자신만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생명현상을 해석하는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 발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온갖 범죄와 부정부패 및 살인과 강도, 질시와 방종함, 끊임없는 자기 도취와 물질적 풍요
함과 향락의 추구........등등 역시 자신만을 위한 탐닉에서부터 비롯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주위의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
이들의 존재 역시 소중함을 자각하게 되며 아끼게 된다.
그렇다고 자신을 아끼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이는 자동차 주행시의 안전과 비유해 볼
수 있다. 즉, 내가 안전하게 차를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안전을 지켜
줘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쾌적한 삶을 지내려면 먼저 주변을 쾌적하게 해야 한다. 주변이 쾌적하지 못한 그것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발상이다.
오늘날 국가의 경제 주권이 흔들리는 소위 IMF 경제 위기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왜 일찍이 경제가 호황일 때에 화합을 강조하거나 지역 이기주의를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 화합이 안되고 지역이기주의가 횡행하는데도 그 많은 숱한 종교적 양심은 왜 실종되었으며 종교는 결과적으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의 소망을
간구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종교의 기능이 끝나는가. 실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종교적 양심을 실천하지 못하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 역시 자연과 생명현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나 하나의 삶이 소중하다면 내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의 생명도 소중하며 이웃과 학우와
동네 친구, 직장이라는 한 배를 탄 위아래 동료들, 노인과 장애자들, 고아들, 같은 민족
으로서 지역이 다른 국민들의 삶 그리고 빈곤한 나라들의 삶 역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내 집 안뜰의 화초와 정원수, 내 고향 뒷동산의 꽃과 나무 그리고 자연환경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고향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나의 발전, 내 고향의 발전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겠는가.
과학보다 항상 초과학적인 것은 바로 자연이다.
아무리 과학이 자연을 극복하려해도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아니 원래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니까... 이 오묘함을 말로 어찌 설명할 것인가.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자연이라는 성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손 끝에 닿기만해도 터져버리는 공기방울과 같은 것이니까.
과학이 그 목적을 자연의 극복에 두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인간
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교만과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목적 은 당연히 인간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그 이용을 최적화 하는데 두어야만 한다.
즉, 자연은 인간에 의한 온갖 인공적 요소를 역시 자연의 위대한 생명의 법칙에 의해 자연
스럽게 수용하여 진행시키고 변화시켜 간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가장 발달되었다는 현대 서양의학의 한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의 생명력을 무시
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서양의학의 학자들은 동양의 전통 적 의학과 철학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쪼개어 분석하고 그 결과를 이용하는데 있다. 화학적 합성에 의한 약의
제조기술의 발전과 인체해부 및 수술에 의한 치료기술의 발전처럼........
그러나 동양 전통의학의 특징은 합치고 조화시키는데 있다.
기맥을 진찰하고 체질분석 등 종합적 진찰결과를 토대로 한 처방으로 천연적 약재의 배합
과 인체경락의 요혈을 조절하여 기혈을 조화시켜 치료하는 것처럼......
쪼개던 합치던 그 대상은 동일하게 인간의 생명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
라는 측면에서 동양 전통의학은 서양의학을 압도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전통의학에서는
음양오행을 중시한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현대 중국의학에서는 유물론적 해석이라는
자기모순 때문에 이를 애써 외면하면서도 선별적으로 이용한다. 음양오행론은 물질적
유물론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유심적 정신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생명력을 물질에만 의존하여 해석하려는 것은 스스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서양의학처럼....
기독교가 흥왕 했던 서양에서 쪼개는 방법에 의존하여 스스로 물질적 치료기술의 발전을
가져 온 것은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마녀사냥 등 비정통적 치료행위에 대해 철퇴를
가한 비극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양오행론처럼 합쳐서 치료하는 방법은 신에 대한
모독처럼 받아들여져야만 했던 암흑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참된 자연의 생명현상을 종교적 형식 측면만을 중시하여 비자연적이고 인공적인 각도
에서 잘못 적용함으로서 결국 합리적인 방법의 발전을 저해한 결과가 되었다.
위의 내용을 간추려 볼 때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이해는 실로 중요한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 문제도 이와 같은 각도에서 풀어 보면 간단하다.
입시위주의 교육제도가 지닌 폐단이 바로 청소년들에게 생명과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와 접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학교의 생물시간이나 종교활동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은 스스로 한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한 표현의 내면
을 보면 역시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접근을 강화시키자는 데 다름 아니다.
인성이나 도덕교육이란 생물학처럼 생명의 기원, 형태, 구조, 발전 등만을 교육하는데
그치자는 게 아니다.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와 생명체의 존재들간에 보다 쾌적한 삶의 환경
을 만들자는 데에 있다.
공자 왈... 맹자 왈... 등 구시대의 유물을 다시 꺼내어 외우고 행하게 함으로서 개성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생명체를 구속하기 위해 그런 교육을 재현하여 강화하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절이란 사람들간에 강요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
규범이자 약속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보호하고 힘이 센 자는 약한 자를 존중하며 나이가
많은 사람은 철없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의 풍부한 경험과 올바른 식견으로 모범을 보이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어야 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하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주며...... 하는 등등은 바로 살 맛 나는 쾌적한 삶의 환경을 만들자는 데
뜻이 있다.
결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무조건적인 장유유서나 노인존중이란 구시대의
유물로서 시대적 사조를 역행하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속칭 노계, 영계 하면서 여고생 심지어는 여중, 초등생의 접대부 등 사회의 음성
적 병폐현상이 출현한 것처럼 생명체를 유지해 가는 주요 수단인 성(性)에 관한 비정상적
양상이 나타났거나,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 여권의 과도한 주장으로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인 가정에도 안정적이었던 종래의 전통적인 양상으로부터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현대의 민주 자본사회이자 핵가족 사회에서는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예절
이란 현실성이 없이 오히려 사회적 부담만 될 것이며, 더욱이 사람과 사람간에 일정한
규범이나 약속 하에서 대등하게 상호 존중되고 아낌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서로 안락하고
쾌적해지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자연스럽지 못한 사회적 규범이나
약속은 결국 무의미해지거나 오히려 사회의 바람직한 발전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긍정적인 체 하나 실제로는 부정적인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못 본체 하되 자연스럽고 건전한 인간관계가 유지되기 어렵게 되거나 또는 서로 얼굴을
맞대어 입에 침을 튀기고 자기 억지주장을 하며 싸우거나 또는 앙심을 품고 후일 앙갚음
을 하는 등 불편하고 해이된 사회적 기강을 바로 잡지 않으면 내실을 기할 수 없이
반병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뢰를 상실하여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孤掌難鳴'이라 했던가.
자연성의 파괴와 인간 존엄성의 붕괴에 또 하나의 심각한 요소는 인구밀도의 증가에 따른
가정살림의 경영난이 점증되었으며 균등한 교육의 기회로 고급인력이 증가된 가운데 특히
여성의 사회 참여욕구가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性)의 해방과 여성 권리의 신장이
상호의존적으로 불량한 증폭효과를 가져오며 기존의 성(性)에 관한 규범이 과도하게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심각한 요소는 물질만능과 배금사상에 오염된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정신활동이
단세포화 되어가며, 외부의 순수한 자극에 대해서 쉽게 감동되기보다는 불신과 냉소적인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가 만연되고, 자신의 신념보다는 객관화와 동질화라는 미명하에
집단적 신념 속에 안주함으로서 집단적 이기주의가 쉽게 전횡할 수 있게 된 점이다.
또한 그 결과 삶에 대한 경건함보다는 보다 관능적이거나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자폭적 삶을 선택하는 경향이 그 농도를 더해가며 또는 자신에 대해 신중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비난의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는 점이다.
의학과 유전과학이 발전하여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거나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을 가능케
하거나 농약의 과도한 사용 또는 유전공학의 응용으로 변형된 동, 식물의 성장을 촉진
하거나 또는 초대형의 곡식 수확을 가능케 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역시 자연을 거스르는 것으로 언제인가 그 결과 나타나는 자연의 복수에
가까운 재해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인류의 번영에
바람직한 것이란 말인가?
바람직한 발전이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류의 영속적 유지에 도움이 되며 기여를 할
때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거슬러 가며 인간의 행복과 번영만을
추구할 때에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기상이변 현상이나 지구의 온실화 및 사막화, 극지방의 빙산이 녹아 흘러내리는
등 자연과학적인 현상은 차지하고 그 외에 나타나는 현상 역시 불길하고 심각한 예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화산활동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쉬고 있으며 지진을 통한 지각변동
역시 계속 되어 가고 있다.
단지 인간의 일상적 생활에서 그 사실이 잊혀져 가고 있다. 그것도 인간만의 행복을 위해
사는데 바쁘다는 사실 때문에...... 마치 대낮에 해가 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처럼.......
인체의 병리적 현상도 과거의 단순한 양상에서 복잡 다양한 난치성으로 변화되어 현대
의학은 이와 맞서 싸우느라 여념이 없다. 암이라든가 또는 새롭게 난치성으로 등장하는
병균도 그 종류와 형태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위 인간의 과학이 발전할수록 자연은 새롭게 변화, 대응함으로서 인간
이 제시한 새로운 도전에 맞서고 있는 셈이다.
* 사실 자연은 변함 없이 자연 그대로이나 인간에 의한 과학의 발전이라는 변화가 자연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도록 재촉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생명의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디엔에이로 대표되는 유전 공학에 의한 생명의 사고 발생 시에 대비한 대처나 통제 수단이 없다는 점이 고민이다. 즉 위장, 간장, 심장 등의 장부나 외부 창상 등에 대한 치료의 특징은 덩치가 크고 이에 대응한 치료 기술이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유전공학 발전 등의 인위적 변화를 통해 치료한다
지만 사실은 디엔에이처럼 매우 작은 기본적 미세구조부터 변화를 가져온다는 이것은 곧 온몸에 예측
곤란 한 변화를 일으킨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가려져 있다.
왜 이렇게 자연과의 대치상태가 계속되고 또한 그 긴장에서 해방될 수 없는가.
그것은 바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지 않고 자연을 비자연스럽게 능가, 초월하여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산과 바다, 그리고 강과 산천초목만이 자연이 아니다. 우리가 숨을 쉬며 주변의 생명체와
어울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연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을 먹는 것도 역시
자연현상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워야 한다.
생명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 인간에게도 준 하나의 선물이라고 경건
하게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자연과 조화된 삶을 유지해 갈 수 있다.
자신이 지닌 생명,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소홀하기 쉬운 모순이 발생한다.
태어난 이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의에 대해 의문을 갖기 마련이며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확고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체 살아간다. 그러므로써 삶에 대한 경건함
을 소중히 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력을 절제함이 없이 무분별하고 방종하게 소모해 간다.
그리고 후회를 계속한다. 그리고 자답한다.
이것이 삶이라고........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천만에! 이것은 자폭적인 삶이며 자연과 조화롭지 못한 긴장된 삶의 연속이다.
결코 편협한 주장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
도 아니다. 모두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가장 바람직한 생명력의 효과적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소위 과학적이라는 방법으로 생명력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날 적에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 살다가 죽게 된다.
일정 기간 살아 있는 시간 길이 즉, 태어나는 때로부터 죽는 그 날까지를 생명시간 또는
생명력이라고 해보자.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간단하게 이해하기 위해
정상적인 경우를 기준으로 예를 들어볼 때 사람마다 태어날 때 받아 지니는 이 생명력은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동일한 유형의 양초의
길이가 모두 같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흑인종은 단명하고 백인종은 장수하며 황인종은 그 중간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일본인은 단명 민족이고 한국인은 장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람도
누구는 단명하고 다른 누구는 장수한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살아 있는 시간적 길이 즉, 생명력은 다르다. 왜 그런가? 이는 마치 비록 같은 양초라 해 도 그 양초가 처한 연소 상황이 다 다른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양초 자체
가 제조과정에서 양초로 형성되는 밀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온실 속의 양초, 비바람도 없이 안정적으로 타 들어가 양초 길이에 따른 시간대로 탄 후
꺼진다. 비바람 막을 데도 없는 들판에서 폭풍우를 만난 양초, 만나기가 무섭게 꺼져
버린다.
바람은 걷잡을 수 없는 것!
없던 바람이 점점 세어지다가 갑자기 세차게 되었다가도 약해지거나 잔잔해지면 타는
속도 역시 이에 따라 빠르거나 느려지게 되며 언제라도 거센 바람을 만나면 그야 말로
풍전등화가 되어 버린다.
호롱 속의 양초도 다소 좋은 조건하에 있지만 온실 속의 양초보다는 못하다. 왜냐하면
호롱 속에 있는 만큼 이동상황 등 많은 변화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시간 즉 생명력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세파에 찌들리고 흔들릴수록 더욱이 자연을 거슬릴수록 그의 생명력은 다 비워져 가는
모래시계처럼 종말을 향해 질주해 간다. 통제나 절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잔디 등의 잡초는 비록 어깨를 맞대어 자라지만 서로 어울려 잔디 군을 이루되 결코 자연
을 거슬러 땅 밑으로 자라지는 않는다. 물총새는 물 속의 고기를 잡아먹지만 결코 물고기
의 씨가 마를 정도로 잡아먹지 않는다. 그저 그 날의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한 양만
노린다.
건강에 해롭다는 술을 과음하고 금연선고를 받았는데도 끊지 못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
하거나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 졌는데도 계속 과로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맹수들이 육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그렇지 않은 초식동물이
육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없는 물질적 탐욕으로 자신의 소유물이 늘어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
들, 이것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다.
과거에 얽매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신경 과민
이거나 숨조차 쉬기가 불편한 사람들..... 이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다.
또한 게으름과 탐욕이 범벅되어 자신의 과실을 적당히 용서하고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면
서 타인에 대한 과실이나 약점은 확대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
이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거스르는 자이다.
자신의 생명은 소중히 하면서도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거나 앗는 사람 역시 자연을
거스르는 사람이다.
실로 우주를 포함한 자연이야말로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이며 시말(始末)이요 스승이다.
일정한 길이의 양초를 보다 오래 타게 하려면 양초가 타는 환경을 바꿔 줘야 한다.
즉, 비나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도 생명시간을 오래 가게 하려면 양초와는 다르게 자연에 충실히 조화된 방법으로 내, 외적 환경을 바꿔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방법이 있겠으나 참고로 고대로부터 오랜 시간을 두고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사용되어 온 방법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명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올바르고 경건하게 이해하여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천수
를 다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실천불변의 강한 의지를 세운다. 결단을 내린다함은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결심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명확한 확신이
없이 안개를 헤쳐 나아가듯 하루하루의 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의문만 안은 채 지내나
건강할 때는 잊고 지낼 수 있겠지만 건강에 이상이 발생하는 때부터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건강을 정상으로 회복하여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삶을 포기하듯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의지가 분명하지 않고
서는 어떤 결실을 얻기 어렵다.
왜냐하면 결실 그 자체가 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또뽑기나 복권당첨 식으로 어쩌다 우연히 얻으려 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또한 한갓 호기심으로 결심한 것은 곧 그 결심이 모래처럼 흐트러져 버리거
나 또는 중도에 쉽게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스스로의 분명한 노력이 없는 그만큼 냉엄하나 노력하면 그 이상의 대가
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가 약한 자일지라도 자신의 생명의 관리에 대해서는 스스로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불변의 실천에 옮길 수 있다.
둘째, 자신에 해당되는 수명 감축의 요인이 무엇인지 규명해야 하며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스스로 찾아서 정한다. 수명의 감축 요인이라 함은 자신의 의, 식, 주
등 일상적인 생활습관으로부터 특정한 기호, 운동방법, 자신의 건강관리, 가정을 포함한
대인접촉 시 태도와 자세, 사랑이나 증오, 또는 공포, 혐오, 욕망 등에 대한 감정처리,
업무취급시의 습관 및 고벽, 삶에 대한 태도 및 이해의 정도 등 모든 면에서 자연적이지
않은 요소 등을 규명하여 자연과 조화 되도록 한다. 이때의 첫 단계는 통상 자신과 가장
가깝게 관련된 요소 즉 의, 식, 주 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셋째, 자신의 생명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무절제하게 소모되는 생명력의 유출을 자연과의
조화에 의지하여 막고 잘못된 습관을 자연과 조화되도록 과감히 개선한다.
이는 주로 최적화라는 단어와 관련된다. 과도한 탐욕은 심지어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
시킨다. 따라서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조화되는 최적화가 무엇인지 스스로 선택
하고 개선한다. *최적화란 자연과 같은 상태로써 예를 들면 입에 들어오는 음식물이 몸에 쌓이게 되면 병이 되며 똥오줌이 되어 자연스레 몸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앞서 소개한 정좌를 수행하여 자신의 양초심지가 타들어 가는 속도 즉, 생명력의
소모를 느리게 한다. 옛 선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방법으로 심지어 원래의 타고난 생명력
을 강화시킨다고 한다.
다섯째, 쉽게 포기함이 없이 칠전팔기의 불굴의 투혼과 수행으로 일관한다.
수행에는 반드시 사마(邪魔)의 시험이 뒤따름을 알되 이를 무시할 수 있다면 무시하여
정진 수행하거나 또는 의연히 대처한다. 단, 사마의 시험은 새로운 경지에 오르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여섯째,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깊은 지혜를 쌓는다. 일반적으로 지혜는 각자의 오성(悟性)에 따라 심천(深淺)이 다르나 초기에는 해박한 선지식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
선지자들과 선인들 그리고 성현들의 말씀을 공부하며 그 참 뜻을 스스로 깨우친다. 이해와
외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곱째, 가급적 모두 버린다.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것도 버리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단,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사마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우친 참된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집착이나 탐애 등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은 굳은 定力 즉 부동심을 반석처럼 굳힌다.
여덟째,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한다. 차 오른 달을 보고 곧 이지러짐을 알며
어두운 밤이라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름을 잊어서는 안되며 빈 그릇에 물을
더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기타 자신이 수행 상 필요로 하는 것을 그때그때 원칙으로 삼되 한 번 정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 나아가되 모든 필요한 것은 자연에 있으며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장수(長壽)가 아니라 천수(天壽)이다.
진시황이 구하고자 했던 불로장생의 영약은 장수를 위한 것이며 자연스럽게 본디 타고
났던 천수를 다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분에 넘는 장수를 구하려 했으므로 과욕이 되었으며 그 과욕으로 인해
진시황이 얼마나 헛된 망념에 사로 잡혔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왜 헛된 것으로 증명되었는가? 그것은 곧 자연을 거스르려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가되 욕된 삶을 살아서도 안되며 헛된 욕심을 부려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소위 영물이라는 백사, 홍사, 천년 묵은 산삼 등을 불로장생의 영약
으로 복용한 사람이 과연 건강하게 장수했는가? 그의 임종은 과연 편안하였는가?
쉽사리 숨이 끊기지 않아 본인마저 병원의 산소호흡기를 낀 채 고통을 호소하거나 또는
그의 가족과 친지 등을 안타깝게 하고 괴롭히지는 않았는가?
건강한 삶은 건강한 죽음도 가능케 해준다.
건강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의 최종 결산은 건강한
죽음에 귀결된다. 죽음도 그 삶이 그러하듯 천차만별로 그 원인이나 과정과 최종 임종상황
등이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연로하여 집에서 가족 친지들의 보살핌을 받는 가운
데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편안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였으며 불교에서는 수행 도중에 앉은 자세 그대로 아무런 고통 없이 타계하는 것을
좌화 했다거나 또는 열반에 들어갔다고 하여 이상으로 삼지 않는가.
죽음을 미화하거나 예찬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통찰하자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건강한 삶인가. 그것은 곧 자연에 거스름 없이 자연과 조화되는 삶이다.
그렇다면 천수와 장수 중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자, 죽음인가.
만일 장수일지라도 그것이 곧 자연과 조화된 것이라면 역시 천수처럼 자연스런 죽음이요,
또한 자연스런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욕심을 내어 태어날 때부터 받아 지녀 온 천부의 분수를 초과해 그 시간을
연장하려고 영약을 구해 복용한다든지 비자연스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는 곧 어떤 형태
로든 자연의 복수를 받게 될 것이다. 영약이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아 부작용을 일으킨다던
가 또는 임종시 숨이 자연스럽게 멈추지 않고 고통을 받는다던가 또는 비정상적인 후대가
나온다든지 또는 오히려 건강상 장애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대체로 건강하지 못한 삶의 소유자는 또한 건강하지 못한 종말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이는
바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연스런 생명력의 관리방법인가.
다행히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가지 비밀스런 방법이 있다. 감추려고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어도 행하기 어려워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갔던 방법이나 그 옛날
의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도 그 가치가 최고로 여겨졌던 귀중한 보배와 같은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 명칭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결국은 같은 성질의 것으로 이 책에서는
정좌라고 한 바로 이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서만이 양초 심지의 타 들어가는 속도를 줄이듯 사람의 생명력이 다해
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장시킬 수 있다.
"A sound mind in a sound body"라는 말은 서양속담으로 다 아는 바와 같이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마음이 깃들인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건전하다, 건강하다는 것은 동서 고금을 통해 누구나 다 이상으로 삼았으며 이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몸 그리고 마음의
수련 두 가지 모두가 필수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동양에도 일찍이 이와 같은 말이 있으니 즉, 道家에서 심신 수행의 기준으로 삼는
성명쌍수(性命雙修)도 바로 그것의 한 예에 해당된다.
우리의 고대에도 젊은이들이 心과 身의 두 가지를 다 수련하기 위해 집을 떠나 심산에서
일정기간 지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뿐만이 아니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중앙아시아의 몽고족도 아프리카 토인들의
젊은이 등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이 수련을 할 때 모두 그러했지 않은가.
그러나 수련방법에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마음과 몸의 수련 중 어떤
것을 주로 하고 어떤 것을 부로 하는가의 방법상의 차이이다.
정좌에서는 心과 身의 두 가지 가운데에서 역시 모두를 중시하나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특징이 있다. 즉,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 신체의 수련을 달성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 중 몸은 육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 비교적 쉽게 인식한다.
그러나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어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무어라고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마음을 수련한다는 말인가.
바로 "정좌"라는 이 조그마한 묶음에서 비록 부족하지만 애써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부족함을 느끼지만 애써 번역을 통해 설명하려 한 것은 원래 마음의 수련이란
말로써 설명되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수행을 통해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다스려지면 몸도 마음대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은 가장 자연스런 삶으로 건강하게 천수를 다 누렸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결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강한 삶은 곧 자연
과 조화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역시 죽음에 대한 올바른 받아들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공포와 혐오 등을 이유로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을 가급적 기피하려 한다.
원래 자연은 음양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닌 것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음과 양이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었을 때이다.
태극을 보면 음, 양의 두 가지가 한 원 속에 있지 않은가.
부단히 인간 생명의 연속이 가능한 것도 性的으로 음, 양이 구별되기 때문이나 실제로는
자연과 우주라는 큰 테두리 속에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삶이란 역시 꽃과 나무 등 다른 생명체들처럼 자연스런 죽음을 통해
음양의 양면성이 구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건하게 죽음을 받아들임을 전제로 하여 성숙되고 건강한 삶과 생명력이 보장되나
선택은 그대 스스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