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연 풍수지리 학회 4차 간산 안내입니다. 이번 간산은 유서 깊은 양주의 진산인 불국산에서 시산제를 겸한 간산이 되겠습니다.
시산제의 의미는 2006년(병술) 우리 학회에서 실시하는 한 해의 안전답사와 학회의 발전, 회원 님들의 건승과 가내의 행복을 염원하는 행사입니다. 모든 회원 님들께서는 바쁘시더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시어 행사를 더욱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시산제와 병행하여 실시하는 간산 코스는 양주일대의 풍수유적지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번 간산 시 중점적인 연구과제는 물형론(옥녀산발형 등)과 수세론(반배수 등), 팔십팔향법(96향론)에 대하여 심도 있는 토론을 개진할 예정입니다.
1. 일시 : 2006년 3월 4일 (토요일) 오전 10: 00
2. 집결지 : 태릉역 (오전 10시 소형차량)
-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하차, 7번 출구
3. 진행 : 碩礎 채영석, 冶丁 김명식
4. 답사지 (답사지는 사정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1) 김극핍(金克핍)- 양주시 주내면 마전 2리(내촌마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시호는 평정(平靖), 자는 자성(子誠)이다.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성종 21년(1489)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 5년(1498) 식년시 문과에 3등 23인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검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수찬, 지평,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정란(政亂)으로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자 고산현(高山縣)에 유배되었다.
중종 1년(1506) 중종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 나와 교리가 되었고, 승문원 교감(校勘)으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하였다. 그 후 도승지,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좌참찬, 병조판서, 세자좌빈객, 우찬성, 좌찬성 겸 세자이사 등에 이르렀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에게 직언하고, 출척(黜斥)할 것을 아뢰어 흉당들의 원한을 샀다. 중종 25년(1530) 김안로, 허항, 등으로부터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서거(逝去)하였고, 중종 32년(1537) 김안로 등이 사사(賜死)된 후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식견이 풍부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純忠輔祚功臣崇祿大夫光嶽君)에 추증되었다.
※가계도
김철산-국광-극뉴-종윤-호-계희-장생-반-익겸-만기(대전 연기 번성)
-겸광-극핍-명윤, 홍윤(대사헌)......
2) 열린우리당 전 의장 문희상 선대 묘- 양주시 남방동 산 102번지
양주의 진산인 불국산의 연맥을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으로 바라보는 묘역을 살펴보고, 길흉여부 등을 토론할 예정이다.
낮게 들어오는 비룡입수로, 입수일절(入首一節)은 오룡(午龍), 좌향은 신좌인향(申坐寅向)을 놓아 4층 용법(龍法)인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에는 합당하다. 그러나 ?,,,,,,
3) 시산제- 양주시 유양동 불국산 입구(백화암 부근)
준비물: 돼지머리, 3색 과일 이상, 막걸리 등
4) 휴암 백인걸-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26
효촌리 건너편으로 8부 능선을 점하고 있는 묘소로 북향대지에 속한다. 북향(北向)으로도 혈을 결지할 수 있다는 것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선생(1497~1579)의 본관은 수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조광조의 제자이며, 우계 성혼의 스승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 후 돌아와 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1551년에 풀려 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문묘배향에 거론되었으나 스승(정암 조광조)과 제자(우계 성혼)가 모두 배향 되었으므로 제외되었다는 설이 있다.
5) 남양홍씨 홍지 묘역 (무학대사가 소점한 옥녀산발형)- 양주시 남면 상수리 산15
홍지의 묘소는 친구인 무학대사가 소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지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자는 명철, 본관은 남양홍씨 당홍(唐洪)파이다. 고려 말 임진도승으로 재임하였으나 조선왕조가 쿠데타로 개국되자 끝내 숨어서 나오지를 않았다. 선생이 별세하면서 일체의 관직 이름을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으나, 후손들이 후환을 염려하여 이성계가 내린 사재직장의 벼슬을 명정과 묘비에 기록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이 사실을 확인한 뒤 `홍지가 드디어 조선의 신하가 됐다` 며, 후손들에게 관직등용과 이곳 상수리 일대의 땅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내려주었다고 한다.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으로 나누는데 본관은 같이하면서도 시조는 달리하고 있다. 토홍의 선영은 남양에 많고, 당홍은 이곳 양주에 많이 있다. 이곳 혈장은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으로 머리카락마다 혈이 맺히는 것이 되어 산 능선마다 혈이 맺혀있다. 남양홍씨(당홍)의 발복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