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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이 아니라 소설입니까? 한권의 소설책으로 한 나라의 건국사를 이해하시려는지요? 이 점 납득이 안갑니다
⇒ 제가 말씀드린 요지는 굳이 이성무 전 국사편찬 위원장 같은 분의 『조선왕조사』와 같은 전문서적을 볼 것도 없이 흔하디 흔한 소설책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그렇게 근거도 없이 말씀하셨는가 하는 반문이지 소설책으로 역사를 이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연산군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의 국운이 심하게 기울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연산군 그이후에 영,정조 같은 훌륭한 왕들이 나왔고, 연산군 이후에도 조선의 역사는 17명의 왕을 배출하며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조선이 비록 쇄국정책으로 인해 근대문물을 늦게 받아들인 후유증을 20세기에 치뤘지만,
근대문물의 늦은 수용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조선 전체를 혼란과 혁명의 아수라장으로 묘사하신 점 유감입니다
⇒ 연산군과 영·정조 사이의 기간은 하면 무엇으로 설명하실 수 있는 것인지요? 글 짧은 탓인지는 몰라도 저는 광해왕 정도를 제외하면 이 두 기간 사이의 조선 왕들이 특별하게 업적을 남겼다라는 큰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현종 같이 소리 없으나 은근한 정치력을 발휘한 사람이 과소평가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사실은 있습니다만 효종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고 효종과는 다른 측면이지만 숙종 또한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정확하게 519년입니다. 하다 못해 어지간한 인터넷 사이트나 만화책 제목에서도 '조선왕조 500년'이라 불리는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CD타이틀]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조500년(상)
[CD타이틀]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조500년(하)
실록 대하 드라마 〈조선 왕조 500년〉
조선이 519년이라는 증거자료 제출합니다.
태조 [太祖, 1335~1408]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 출처: 이성무,『조선왕조사』
순종 [純宗, 1874~1926] 조선의 제27대 왕이자 최후의 왕(재위 1907∼1910). ⇒ 출처: 상동
이러함에도 600년이라 주장하시는 해모스님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요?
조선에 비해 일본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통일된 나라가 없이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극적으로 히데야시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언제죽을지 모르는 봉건시대의 백성들이 과연 맘놓고 편하게 살수 있었을까요?
오다 노부나가 같은 사람도 일본에 있었겠지만 조선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왕과 신하들은 셀수 없이 많았습니다. 김준수님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아주 보잘것 없는 나라로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조선은 일시적인 혼란도 있었지만(그 어떤 나라의 역사중에 일시적인 혼란이 없었던 나라가 있었을까요?) 군주정치에 의한 강력한 통치체제에 의해 조선은 나라를 600년이나 이끌어갔던겁니다.
또한 경제력에서도 조선은 탕평택,영정법,도조법,대동법, 상평통보 등 화폐개혁등 시행착오를 거치며 보다좋은 제도를 위해 노력했으며,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제는 그만큼 활성화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철포수입이외에 일본경제가 어떤점에서 활력을 이뤘다는건지요?
⇒ 제가 일본을 그토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나 제도 볼 것 없이 바로 히데요시와 선조를 무작정 대비하여 평면적인 역사적 사실만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또한 칼을 쓰느냐 안 쓰느냐, 사람을 죽이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느냐 간접적인 책임이 있느냐의 차이지 히데요시가 선조보다 유독 잔혹한 인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밖에 전시와 평시의 차이도 고려할 필요가 있지요. 전시가 일상적인 일본과 평시가 일상적인 조선은 그 환경이 달랐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후 히데요시와 선조의 역량을 1:1로 비교해보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선조가 나은 점이라면 히데요시보다 글자를 많이 읽을 줄 안다는 점입니다. 학문이야 선조가 압도적이지요.
더 이상의 비교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일본측에 서서 이야기를 할 목적이었다면 히데요시의 장점을 선조의 단점하고만 평면비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그렇게 한 사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연산군 이후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은 조선 민중도 별 차이 없습니다. 다만 순식간에 죽느냐 아니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에 처했다가 차차 말라죽느냐의 차이입니다.
지도자들이 뜻을 펴기에는 조선이 일본보다 훨씬 여건이 좋습니다. 아니 하다 못해 명 왕조보다도 통치 영역은 작으면서 권력은 집중되었으니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여건이 좋았습니다. 지도층들이 제대로만 했다면 선정은 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데 통치가 지리멸렬 흩어진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더구나 조선 정부의 정치가(물론 통제 시스템 그 자체야 조선이 기막히게 잘 조직되기는 했습니다만) 그 흩어진 일본의 유명한 전국대명 즉 각 지방에서 이름난 태수들보다 나을 것이 없거나 더 열등한 지경에 떨어진 상황이라면 이는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정부가 못했다는 말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세조 이후부터 세도가들이 들고 일어나서 각다귀처럼 야금야금 전국토를 갉아먹는 상황을 과연 '일시적'인 혼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른바 성군이라 하는 성종 시기에 도리어 한명회 같은 권신이 압구정을 짓고 백성들이 혹사 당해야 했던 상황은 그저 '일시적'인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요?
중앙집권은 맞는 말이지만 과연 그것이 왕권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던 것일까요?
심지어 조선은 "무늬만 군주정인 과두정이다."라는 견해가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탕평책'을 영조가 쓰기 훨씬 이전부터 이에야스는 '교통정리'를 끝마쳤고 상평통보 발행 운운할 시절 이전부터 이미 오다 노부나가는 명 왕조의 영락전과 기타 기존의 화폐 등을 이용하여 상업경제를 활성화 시켰던 점은 왜 간과를 하시는 것인지요?
참고로 상평통보는 인조 11년인 1633년 김신국(金藎國)·김육(金堉)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김육과 같은 개명한 사람의 견해조차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웠던 당시 정부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후 숙종 4년인 1678년 정월에 다시 남인인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노부나가의 경제 활성화 시기에 비하면 적어도 한 세기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일본과 경제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화폐경제가 발달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경제의 활력 차이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만약 고려와 일본의 대비라면 저는 이모 저모를 대보아도 고려가 훨씬 나았으면 나았지 일본이 이런 부분에서 나으니 어쩌니 하는 어설픈 비교는 굳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종 대까지의 초기 조선이라면 일본에 비해 압도적이더라도 연산군 퇴위 이후의 조선은 분명 사정이 다릅니다.
연산군 퇴진 이후(즉 중종 집권 후)로 조선 '사회'는(주자학의 발전이야 어떻든) 확실하게 '정체' 되었던 반면 일본 사회는(여전히 짬뽕 학문의 한계성이 있는 대로) 이전 시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약진'했던 것이 현실입니다.
왜 일본인들이 자국의 고대사에는 꼬리를 내리면서도 이에야스의 집권으로 형성된 중세사의 전환점 전후에서는 유독 목소리가 커지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일본 경제에 철포만 있었다고 한다면 경악스러울 일입니다.
철포의 도입은 오늘날 한국이 미국에 M-16 사는 그러한 개념이 아닙니다.
철포의 도입과 더불어서 활에서 창으로 급변하던 센고쿠 지다이(전국시대)의 전술방식이 또다시 전환되고 그러한 가운데서 '전반적'인 변화를 용인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각 영주 간에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공감대를 이룬 사실이 진정한 의미의 변화이겠지요.
예를 들어 노부나가는 농민이 농한기에 전쟁에 종사하고 농번기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는 이중적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즉 조선이나 일본의 기존 농민개병제 즉 농민이 곧 병사인 개념에서 탈피하여 병사는 병사, 농민은 농민이라는 방식으로 각각 자신의 분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근거: 童門冬二, 『織田信長 人間學』, 이정환 역, 작가정신, 2000.)
생산자들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 생산력이란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라쿠이치(樂市)·라쿠자(樂座)와 같이 특권 상인의 독점적 시장을 철폐하고 다이묘 즉 태수(여기서는 군주의 의미가 더 강함)의 관리 하에 둔 것은 변화 중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데 조일전쟁 이후로 더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말이지요.
이를 위해서 도로를 정비하고 다리를 설치하고 관문을 철폐하고 통행세를 폐지하니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과 물건의 유통이 활발해졌고 일본 전체에 활기가 넘치게 된 것은 변화가 아니고 또 무엇일런지요.(근거: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같은 책, p. 87.)
이쯤 되면 가히 일본 전역의 활성화라고 해도 과언만은 아닙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일본이라는 나라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는 나라와 그렇지 못했던 나라의 국력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서기 5-6세기 고구려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고 전성기를 이루어냈습니다.
반면 문명국이니 어쩌니 큰소리쳤어도 남조와 북조는 고구려 중심의 동-북 아시아 질서에 순응해야만 했지요.
임란의 원인을 일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는것 같군요
히데야시는 혼란한 일본을 통일시킨 장본인으로 비록 통일은 되었지만, 안에 내재된 무인들의 반란의 성향을 감지한 히데야시는 그런 힘을 외부로 분출시키려고 임란을 일으킨겁니다다
일본의 국력이 너무강해, 조선을 포함 중국대륙까지 석권해보겠다는 야심에의해 일본이 임.란을 일으킨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랫동안 폭력과 살상의 치열한 환경속에서 살아온 무인들의 잔인한 힘만이 넘치는 왜와, 군사력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나 정치체제에 있어서도 안정되온 조선의 국력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일본이 대륙석권을 위해 조선을 먼저 쳤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군요
⇒ 임진-정유전쟁전쟁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침략 의도'를 지녔던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조선이 허점을 드러낸 것이 중대한 요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분명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발상 중에 무인들의 반란 성향을 억제하고자 했던 측면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히데요시의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세력들보다는 자기 편의 센고쿠 다이묘 즉 전국 대명(태수)들이 왜 그리 많이도 동원된 것일까요?
예를 들어 자신의 최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하여 쿠로다 나가마사, 카토 키요마사, 코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은 반란 성향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면 하등 동원할 필요가 없는 다이묘들입니다.
한데 조선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다이묘들이 하필 다 히데요시의 측근들이라는 것은 유난히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잠재적인 내부의 적을 소모하기 위해 동원된 세력이라 봐야 모리씨나 그 모리씨의 혈육이었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정도가 전부일 뿐 자신을 잠재적으로 노릴만한 사람들이 주전력으로 동원되지 않았던 것은 해모스님이 제기해주신 관점으로 보자면 결손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야스야 논외로 하더라도 대표적으로 다테 마사무네 같은 유력한 다이묘는 조일전쟁에서 동원되었다는 말은 있을지언정 조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전투는 벌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동원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이러한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더구나 조일전쟁에 동원된 일본군의 지역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전통적으로 전국시대의 일본 동부 군대는 서부 군대보다 강하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지요.
"미카와(이에야스의 근거지) 병사 하나가 오와리(노부나가의 근거지) 셋을 당할 수 있고 시나노·카히(신겐의 근거지)의 병사 하나가 미카와 병사 셋을 당할 수 있다."
즉 동부로 갈 수록 병사의 전투력이 강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한데 대체적으로 칸토 즉 이에야스의 지배지인 관동 일대 지역이나 다테 마사무네의 북 일본 지역 그리고 시나노·카히의 군대 그리고 그 카히의 군대와 맞겨룰만한 에치고의 군대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치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물론 보냈어도 타국에서의 전투인만큼 상황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만 그만큼 히데요시의 적들이 자기 세력을 온존시켰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불어서 일본인인 쓴 책보다 우리나라의 고서들을 더 많이 읽어보시기 충고드립니다
⇒ 저는 일본인이 쓴 책만 읽지도 않았고 외람되지만 제가 『지도로 보는 한국사』 조선사 파트의 저자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서'라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저로서는 잘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책을 말씀하신다면 참으로 또 한 번 외람되지만 모자란대로 읽어보았고 우리네가 고대에는 이렇게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 위인이 저입니다.
그밖에 조선사의 대가인 이성무 전 위원장 같은 분이나 조선사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이태진과 같은 분의 글도 보았습니다.(물론 저는 이성무 전 위원장의 설을 더 많이 채택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리고 해모스님 말씀따나 제가 근거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조선보다 일본을 더 긍정적인 면만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조선 정부가 '뭬~야'(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같은 시대 분위기 대신 화담 서경덕, 남명 조 식, 인백 정여립 같은 선각자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시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면 일본보다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타케다 신겐이니 호죠 우지야스니 우에스기 켄신이니 오다 노부나가니 어쩌니 해도 조선 쪽에 훨씬 더 좋은 평가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해모스님께 정중하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의 고서를 보십시오'하실 때는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서적의 명칭을 제시하시고 그 근거를 확실히 말씀해주시면서 이런 것을 읽어보십시오 권하시는 것이지 모자란 상대를 가르치시는데 선문답 같은 말씀 하나만 던져 놓으시면 어찌 상대가 이해하겠습니까?
특히 글을 써주실 때는, 무엇보다 반박의 글을 써주시고자 하시면 그 근거를 좀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저의 교만한 말일지나 글에 가능한 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 자체는 어느 글을 쓰시더라도 사실일텐데 이마저 나무라신다면 저로서는 더 할 말이 없겠습니다.
역사문의 김 모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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