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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종말 원문보기 글쓴이: 천지마음
(원문) 度祖諱椿, 小字善來, 蒙古諱孛顔帖木兒. 受宣命受宣命襲職.(【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1책 1권 3장 B면) 도조(度祖)의 휘(諱)는 이춘(李椿)인데, 어렸을 적의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蒙古)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이다. 선명(宣命)을 받아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
* 孛顔帖木兒 = Буян Төмөр, ᠪᠠᠢᠠᠨᠲᠥᠮᠥᠷ Bayan-Temür 바양티무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吾魯思不花 의 몽골이름 ‘ᠦᠯᠦᠰᠪᠦᠺᠠ 울르스불카’
(원문) 桓祖諱子春, 蒙古諱吾魯思不花。 齠齕異凡兒, 稍長善騎射, 及其襲職, 士卒樂附。 咬住稍長, 桓祖欲以職事歸之, 咬住讓而不受。 咬住後從桓祖, 來見恭愍王, 王屬之亏多赤, 官至中順軍器尹。.(【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1책 1권 4장 B면) 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 군기 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 吾魯思不花: 桓祖의 몽골 이름 * 우다치: 우다치(亐多赤) : 우달치(迂達赤)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의 관직.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것으로, 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던 일종의 숙위병(宿衛兵)이라 추측됨. |
조부(祖父) 이춘(李椿)의 원래 이름은 ‘帖木兒’(첩목아: 여진 발음 ‘티무르’)이고
부친(父親)의 이자춘(李子春)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의 영어발음 ‘Ulus-Buqa’ 로 원래 발음은 ᠦᠯᠦᠰᠪᠦᠺᠠ 울르스불카이다.
이성계(李成桂)의 몽골이름이 아기바토르(阿基拔都) 인데
황산벌 일본의 소년 장수 이름이 阿基抜都(アキバツ)아키바츠 , 아지발도(阿只抜都, あきばつ)라니 혼란스럽네요.
* "아기발도와 킵챠크 칸국의 정체" 참조
《고려사절요》는 아지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賊植立不動,有一賊將,年纔十五六,骨貌端麗,驍勇無比,乘白馬,舞槊馳突,所向,披靡莫敢當,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적은 박혀 있는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 부딪치고 가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피하기 바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1, 경신(庚申)2, 신우(辛禑) 6년(1380년)
아지발도(阿只抜都)라는 이름은 고려군이 붙인 것으로 정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지발도의 명칭을 한국어의 「아기」와 몽골어 「Баатар 바토르(용맹한 자)」의 한자 음차표기인 抜都「발도」가 합쳐진 것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Аги Баатар 아기전사 (?)>
투르크語: ‘티무르-테무르’는 ‘쇠’(鐵: 철)를 의미
티무르(Timur)는 몽골어로 『트무르 Төмөр』이며 차가타이어察合臺語와 우즈벡어 O'zbekcha로 『Temur/Timur/Taimur/Tamerlane』로 불리며 그 의미는 모두 똑같이 ‘철鐵’ 이다.
영어로도 『Timur/Tamerlane』로 같고 터어키어로도 『Timur』이며
몽골어를 음차한 차이나 병음발음으로는 『띠에무어Tiěmùr帖木兒』가 되며 한자의 한글음은 『첩목아帖木兒』가 되는데 원음과 차이가 나거나 전혀 다르게 됩니다. 따라서, 몽골어를 따라 『투무르Төмөр』라 하거나 차가타이어를 이어 계승한 우즈벡어를 따라 『티무르Timur』라 불러야 한다.
한자의 한글음이 철목아인 『鐵木兒』도 역시 몽골어로 『트무르 Төмөр』, 차가타이어察合臺語로 『Timur』로 한자로 음차할 때 다른 한자를 선택한 것으로 같은 말에 대한 다른 표기에 불과합니다.
또한, '철鐵'의 차이나병음발음도 역시 [Tiě]로 똑같다.
티무르帖木兒는 티무르제국을 세운 칸의 이름으로도 유명하지만 기본적으로 몽골제국을 세운 몽골인들사이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되어진 이름으로 원사나 몽골사를 찾아보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몽골원사의 티무르帖木兒 이름의 사례 : 孛羅帖木兒, 察罕帖木兒, 答失帖木兒)
‘티무르’는 매우 흔한 북방민족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몽골 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였던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이름이 바로 ‘티무르’(재위기간: 1370~1405년)였다. 북방 민족들은 고대로부터 철을 잘 다뤘는데, 투르크어(語) ‘티무르’ 또는 ‘테무르’가 바로 '쇠'(鐵: 철)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내몽골대학 교수는,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는 몇 대에 걸쳐 성장한 고려계 몽골 군벌 가문 출신으로 원(元)나라의 직할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서 거의 100년간 몽골 관직을 맡아 세력을 쌓았다고 설명한다.
바타르 교수는 이성계(李成桂) 가문은 직계 4대조까지 모두 북방 민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성계 자신도 북방민족 계통의 원래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뉴데일리 특약> 김필재(金泌材)님 글 인용
* 『테무진Тэмүжин (음차표기 鐵木眞 또는 特穆津) 』은 <철鐡중에 가장 정수>를 의미.
티무르 제국
투르크-몽골계통의 티무르가 건국하여 1370년에서 1526년까지 존재했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조로 정식 명칭은 구르칸 왕조. 수도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
차가타이 칸국 출신이며 동시에 어머니가 칭기즈 칸의 후예인 티무르가 몽골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동시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세운 국가로 잘나가던 시절에는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산맥 지역을 아우르던 대국이었다. 티무르가 정복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티무르 제국도 화약 무기를 쓰기 시작했고 당시 중앙 아시아의 다른 세력들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티무르 본인의 군사적 재능도 한 몫했다.
14세기와 15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제국.. 이 제국의 창건자 티무르는 참으로 묘한 인물입니다. 잔인무도하고, 냉혹하면서도 뛰어난 전략,전술가이며 문화와 예술의 보호자라는 양면성을 지닌 독특한 인물입니다.
티무르 일대기
티무르 Timur. Timour라고도 씀. 별칭은 Timur Lenk, Timurlenk(터키어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Tamerlane/Tamburlaine). 1336 트란스옥사니아 사마르칸트 근처 케시~1405. 2. 19 침켄트 근처 오트라르. 이슬람 신앙을 지닌 투르크인 정복자. 중국 이름은 첩목아(帖木兒)이다. 주로 인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정복하는 과정에서 행한 야만적 행위와 그가 세운 왕조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티무르는 투르크화된 바를라스 부족의 한 구성원이었는데 이 부족은 본래 몽골족의 일원이었고 칭기즈칸의 아들 차가타이의 트란스옥사니아(대략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됨) 정복전쟁에 참여한 후 그곳에 정착하여 차가타이 한국으로 알려진 곳에서 성장했다. 트란스옥사니아의 당시 통치자 아미르 카즈간이 1357년에 암살된 후 무정부 상태에서 1361년에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트란스옥사니아의 중심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침략한 카슈가르의 칸 투글루크 테뮈르에게 티무르는 충성을 맹세했다.
25세의 무명의 티무르는 결사항전보다는 충성을 서약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경쟁자을 제거하고 자신이 바를라스 부족의 수장이자 케시의 통치자의 지위을 확고히 다졌다. 투글루크 테뮈르는 티무르의 노련함을 높이 평가하여 아들인 일리아스 호자를 트란스옥사니아의 총독으로, 티무르를 그의 자문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테뮈르가 벡칙이란 또 다른 대신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으므로 티무르는 2인자에 불과했다. 티무르는 얼마 후에 그들과 손을 끊고 도주하여 자신의 처남이며 아미르 카즈간의 손자인 아미르 후사인과 연합했다.
수많은 방랑과 모험 끝에 경험을 쌓은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즈 지방에서 후사인 휘하의 병사들을 재조직하고 다시 트란스옥사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일리아스 호자를 케쉬와 사마르칸트 근처의 타쉬아리기, 카바마탄 사이의 한 지점에서 물리치고(1364) 호젠트을 지나 타쉬켄트에 이를 때까지 추격했다. 일리아스 호자는 겨우 일리로 도망쳤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투글루크 테뮈르는 일리에서 사망했다. 이제 위협이 없어진 그들은 트란스옥사니아 정복에 착수하여 1366년경 이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강력한 권력자가 된 그들 사이는 곧 경쟁상태가 되었고 처음엔 후사인이 우세하여 티무르는 또 한번의 도주을 했으나 이번에는 숙적인 일리의 몽골인들을 부추겨 트란스 옥사니아 지방의 침략을 획책했다. 몽골인의 침략에 당황한 후사인은 다시 티무르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티무르는 혼괘히 받아들여 다시 권력을 회복했다. 더 이상 티무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엇다는 것을 안 후사인은 자신의 영지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1370년경 티무르는 기습으로 발흐에서 후사인을 포위하고 그를 항복시켰다. 후사인은 메카로의 순례을 가는 도중 암살되었다. 그의 부하에 의한 죽음인 것이다. 발흐의 주민들은 대부분 후사인에게 충성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렀다. 여기서 티무르의 태도는 전형적인 동양적 위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우정어린 항변, 화해의 포옹, 그리고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쿠란]의 구절의 인용, 뒤이은 배반, 급습, 무자비한 처형.’
강력한 경쟁자을 제거한 티무르는 자신을 몽골 제국의 복구자이자 차가타이 계통의 칸들 가운데서 유일한 사마르칸트 주권자로 선언했다.
[정복기]
그후 10년 동안 티무르는 자타(동부 투르키스탄)와 화레즘의 칸들과 싸워 1380년 마침내 카슈가르를 점령했다. 그후 러시아인들(그들은 마마이의 금장 한국, 즉 킵차크 한국에 대항해서 일어났음)에 대항해서 크림 반도의 몽골 칸인 토흐타미시에게 군대를 지원했다. 그의 군대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폴타바 근처에서 리투아니아군을 물리쳤다. 1383년에는 헤라트 점령과 동시에 페르시아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일 한국 왕조로 알려진 몽골족 말기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 나타나게 된 회복의 기미도 일 한국 마지막 왕인 아부 사이드가 죽은 후에는 좌절되었다(1335). 권력의 공백은 경쟁적인 여러 왕조들의 내부 불화와 분열을 야기했다. 서로 전쟁중이던 이들 공국들은 티무르에 대항해 상호협력하에 효과적인 저항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호라산과 동부 페르시아 전역은 1383~85년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파르스와 이라크·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그루지야등의 서부 이란의 정복원정의 구실은 메카로 가는 대상단을 약탈하는 루리스탄 지방의 산간민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갑작스런 종교적 충동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치안조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많은 산적들을 붙잡아 산꼭대기에서 던져버렸다.” 서부 이란 지역은 모두 1386~94년에 함락되었다. 그 사이 간간이 당시 킵차크 한국의 칸인 토흐타미시와 교전을 벌였는데 토흐타미시의 군대가 1385년 아제르바이잔을, 1388년 트란스옥사니아를 침략하여 티무르의 장군들을 패퇴시켰다. 1391년 티무르는 토흐타미시를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추격하여 그를 패배시키고 왕위를 빼앗았다. 토흐타미시는 군대를 다시 일으켜 1395년 카프카스를 침략했는데 쿠르 강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후에야 전투를 포기했다. 티무르는 러시아로 진군하여 1년 동안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하지만 아무런 지배체제을 구축하지 않고 돌아갔다. 오히려 티무르는 킵착을 황폐화 시켰다. 그는 타나와 사라이를 파괴시킴으로써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엿다. 즉 그는 마르코 폴로가 묘사했던 고대의 대륙간 교통로를 막아버렸고, 칭기스칸의 정복을 거치면서 그나마 잔존하여 유럽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그러한 흔적조차 지워버렸던 것이다.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로 킵착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았다.
티무르가 원정 나가 있는 동안 페르시아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동부 이란의 도시 사브제와르가 1383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티무르는 끔찍한 보복을 가했다. “거의 2,000명의 죄수들이 산채로 차곡차곡 쌓이고 진흙과 벽돌이 함께 섞여 탑을 이룰 지경이었다.” 세이스탄도 같은 운명을 맞앗다. “우리의 병사들은 시체로 산을 만들었고 해골로 탑을 쌓앗다” 세이스탄의 수도인 자린지에서 티무르는 남녀 노소을 불문하고 요람에 있던 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을 모두 처형시켯다.
서부 이란에서는 자신의 가신의 죽음을 호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무자파르 영토로 침공해(1387년 10-11월) 하마단을 거쳐 이스파한으로 진군햇다. 이스파한의 태수는 곧 항복했지만 주민들이 반항을 하자 곧바로 학살을 명령했다. 티무르의 입장을 변호하는 공식적인 기록인 [승전기]는 “7만개의 머리가 이스파한 성벽밖에 무더기로 쌓였고, 시내 곳곳에 해골무지가 생겨났다”라고 적혀잇다. 티무르는 문화적 세례을 받은 투르크인이었고 페르시아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문명의 꽃을 파괴해버렸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여려 도시들은 황폐해졌고 주민들이 대량 학살되어 해골이 산을 이루었다.
[인도원정]
티무르는 이미 60세가 넘는 1398년에 인도 원정을 계획했다. 칭기스칸 가문의 군주들은 서북인도을 일종의 사냥터로 여겨졌다. 1292-1327년까지 그들은 기마군단의 정기적인 기습공격으로 보물을 약탈하고 건물을 보이는 데로 파괴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티무르 역시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지역으로 알려진 그곳으로 들어가 많은 수입을 올리는 약탈을 재개하는 것 이외엔 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종교적 구실을 대었다. 티무르는 델리의 이슬람교도 술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지나친 관용을 베푼다는 것을 빙자하여 인도를 침략하여 9월 24일에는 인더스 강을 건너 대량 학살을 자행하며 델리로 진군해 갔다.
1398년 12월 10일 로니성을 장악한 티무르는 그곳에 본영을 세우고는 결정적인 전투을 벌이기 전에 거추장스럽던 수십만 정도의 힌두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티무르연대기]에서는 이 명령이 치밀하게 수행되엇다고 기록 하고 있다.
델리 술탄 마흐무드 투글루크 샤와 재상 말루 이크발이 지휘하는 군대가 12월 17일 파니파트와 델리 사이에 위치한 줌나 하반에서 격퇴당했다. 델리에 입성한 티무르는 군대는 주민들이 보급물 요구의 반발하자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을 학살하고 방화를 질렀다. 노략물은 엄청나 지난 200년간 투르크-아프간 술탄들이 라자들이 지배하는 인도에서 빼앗은 보물들을 모두 트란스옥사니아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학살도 그 반비례로 잘린 목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들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티무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유능한 직인들은 살려주어 자신의 수도 사마르칸트을 치장하기 위해 보냈다. 델리는 온통 폐허가 되었으며 다시 회복하기까지 1세기 이상이 걸렸다. 1399년 4월경 티무르가 옥수스 강을 건너 자신의 수도로 되돌아왔을 때 엄청난 양의 약탈품도 실려왔다.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에 의하면 90마리의 생포된 코끼리들이 사마르칸트의 모스크를 건립하기 위해 채석장에서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티무르는 통상 해왔던 대로 델리의 인도-무슬림 제국을 기초부터 흔들어놓고 그 나라를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빠뜨렸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아무런 질서도 세우지 않은 채 떠나버린 것이다. 비록 그가 브라만 교와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가 타격을 가한 것은 인도의 이슬람이었다. 상당한 교양을 갖추었고 페르시아 문학과 이란의 예술을 애호했던 이 사람은 구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문명지역의 하나인 인도를 접하고는 마치 한 떼의 유목집단의 수령처럼 약탈을 위한 약탈을 자행하고 특정한 문화적 가치체계에 대한 냉담과 무지를 통해 살육과 파괴를 저질렀다.
이 기이한 이슬람 전사는 인도의 변경에 잇던 이슬람의 전위대에게 등뒤에서 칼을 꽂은 셈이다. 그는 루마니아 전선에 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오스만, 맘루크 원정]
이 모스크 건설작업이 시작된 후 티무르는 그의 서쪽 영토 일부를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술탄 파라즈가 점령한 데에 응징하려고 1399년말 생애의 마지막 대원정에 나섰고 아제르바이잔의 통치권을 회복한 후 시리아로 행군했다.
알레포를 급습, 점령한 티무르는 다시 한번 세련된 문인이자 대량 학살자라는 전과 마찬가지의 이중적 측면을 드러냈다. 그는 이슬람의 교사들에게 악의에 찬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전쟁에서 죽은 어느쪽(자신의 병사들과 혹은 맘루크들)이 순교자의 칭호를 받아 마땅한가?’ 란 질문과 그들과 함께 신학을 토론하며 정통의 순니파들에게 알리를 정통 칼리프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라고 강요함으로써 그들을 최악의 곤경에 빠뜨렸다. 율법학자들과 고상한 토론을 벌이지 않을때는 성채의 주둔병을 학살하고 ‘잘린 머리로 쌓은 탑들’을 세웠으며 시내를 약탈했다. 레반트 지방에서 가장 거대한 교역 중심지의 하나였던 이 도시의 약탈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티무르는 이어 하마, 홈스, 바알벡을 점령하고 다마스쿠스 앞에 나타났다. 맘루크의 젊은 술탄 파라즈는 자신이 직접 방위군을 격려하기 위해 카이로에서 왔다.
1400년 12월 25일 파라즈는 티무르군대가 군영을 옮기는 것을 이용하여, 이동 중인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구타(Ghuta)로 들어갔다. 그러나 격렬한 전투끝에 패한 그는 휘하부대의 이반을 두려워해 다마스쿠스을 내버려두고 카이로로 도망쳐 버렸다.
사실상 정복자의 손에 맡겨진 다마스쿠스의 책임자들은 사절단을 티무르에게 보냈고 그중에는 튀니스 출신의 위대한 역사가 이븐 할둔이 있었다.
당시의 이븐 할둔의 나이는 68세, 티무르보다 네 살이 많았다. 한쪽이 서방 이슬람의 여러 정권에서 영욕의 반생을 보낸 문인이라면, 다른 한쪽은 동방 이슬람세계를 말굽으로 짓밟은 무인이었다. 역사적인 두 거인의 만남은 참으로 극적이었으나 겉으로는 매우 담담하게 회견이 진행되었다.
먼저 이븐 할둔이 티무르가 휘하 무장들과 함께 둘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자리에 들어가 “알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안이 깃드시옵소서)”하고 인사를 한뒤 허리를 굽혔다.
티무르는 얼핏 쳐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븐 할둔이 그 손에 입맞추었다.
이윽고 티무르는 그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 마카로니가 든 수프를 권했다. 이븐 할둔이 사양하지 않고 먹는 것을 본 티무르는 흡족한 모양이었으나, 양쪽이 모두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런 때는 뭔가 선물을 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이븐 할둔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아름답게 장식된 <쿠란;제가 보기엔 코란같음> 한권과 예배용 카펫, 무함마드를 예찬한 시집 한권, 카이로제 과자 따위를 사 들고 티무르의 막사로 돌아왔다.
선물을 바치고 <쿠란>을 펴보이자 티무르는 근엄하게 그것을 머리 위에 받쳐 들었다.
이리하여 허물없이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역사가의 탁월한 기품에 충격을 받고 그의 담론에 감탄을 금치 못한 티무르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렇게 박식한 사람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라고 사서는 이야기했다.
티무르는 이븐 할둔이 말로 한 설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글로 자세히 써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이븐 할둔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 12권의 책을 써서 올렸다.
회담이 끝난 후 티무르는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손수 여행의 안전을 위한 증명서를 써 주었고, 카이로까지 가는데 필요한 물건과 노자를 내주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돌아가는 도중 도적을 만나 티무르에게 받은 물건과 증명서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티무르의 위명도 노상강도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윽고 협상자들을 안심시켜 도시을 점령한 티무르는 곧 태도을 바꿔 협상한 배상금의 10배을 요구했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압수했다. 결국 도시에 대한 철저한 약탈과 주민 일부의 학살로 연결된 일련의 과정을 [승전기]에선 다마스쿠스 사람들이 659년 예언자의 사위인 알리에 대해 불경하게 대한 것에 대한 응징이라고 서술했다.
이런 만행중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대부분이 불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명이 대피해 있던 우마이야조 최대의 모스크를 불길이 삼켜버렸다.
1401년 3월 19일 티무르는 그곳의 직인들(비단직조공, 무기제작공, 유리세공인, 도공등)를 사마르칸트로 강제 이주시켜 다마스쿠스의 번영에 타격을 입혔다. 또한 많은 수의 작가들 및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무리들도 데려갔다. 이중에는 훗날 역사가가된 당시 12세의 이븐 아랍샤도 끼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 정복자에 대해 가차없는 책을 집필함으로써 원한을 같았다. 시리아를 폐허로 만든 티무르는 아무런 통치 체제없이 돌아갔고, 그 즉시 맘루크가 다시 점령했다.
같은 해 티무르는 예전에 항복했던 바그다드가 다시 반기를 들자 1401년 7월 10일 바그다드를 습격, 점령했다. 지난 7년동안 바그다드을 비교적 부드럽게 취급했던 티무르는 이번엔 대량학살을 명령했다. 샤라프 웃딘은 병사들이 주민의 머리를 하나씩 가져와야 했다고 적었고, 이븐 아랍샤는 두개씩이라고 했다.
삽시간에 성벽 위에는 2만개의 머리로 된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이 와중에 문학적 심성을 지닌 티무르는 일부 지식인들은 살려주고 오히려 영예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이것을 제외한 주민 전부가 학살되었고 모스크를 제외한 모든 건물(심지어 기념물마저)이 파괴되었다. 이븐 아랍샤는 희생자의 숫자를 9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라크의 하늘 아래서 7월의 열기는 곧 쌓인 시체에서 전염병을 발생시켜 승리자들도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루지야에서 겨울을 지낸 후 티무르의 눈에 그의 주변에 잔존해 있는 단 하나의 강대국은 오스만 제국뿐이었다.
오스만 술탄 바야지드 1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정점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무라드 1세의 위업을 이어받아 세르비아를 정복했고,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면서 헝가리, 보스니아, 그리스등지를 경략했다.
1396년 니코폴리스에서 바야지드1세는 헝가리의 시기스문드왕과 부르군드 지방의 왕위계승권자인 쟝 상 푀르가 이끄는 유명한 십자군을 격파했다.
유럽에서는 일명 일디림(雷火혹은 벽력왕)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바야지드의 동방의 아나톨리아에서의 영역은 타우루스산맥(바야지드의 영토와 맘루크 치하의 킬리키아 사이의 경계), 아르메니아 고지대(티무르의 영토와의 경계), 폰투스산맥(트레비존드의 그리스 왕국과의 경계)까지 미쳤다.
프랑크-부르군드의 화려한 십자군 기사단을 괴멸시킨 그의 군대는 당연히 근동에서 최강의 부대로 여겨졌고 그는 이제 그리스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아 자신의 승리를 마지막으로 멋지게 장식할 순간에 있는 것처럼 보엿고, 이미 그 도시의 봉쇄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티무르는 자신에 걸맞은 맞수를 만난 것이다. 이를 인식했던 두 영웅은 서로를 살피며 정탐했고 그들이 획득한것(한사람은 아시아에서, 한사람은 발칸에서)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전투에 휘말려 들기를 주저했다.
적대적인 행동을 취한건 바야지드였다. 이에 대해 티무르는 오스만조의 불분명한 기원에 대해 약간 신랄한 모욕을 가한 뒤, 자신의 적수를 용인해줄 의향을 표시하였다.
티무르는 두 제국의 영역을 비교한 뒤 다음과 같은 협박하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너처럼 왜소한 군주가 나와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바야지드는 “너를 타브리즈와 술타니야까지 추격하리라!”는 말로써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 회답을 접한 티무르는 1400년 8월 소아시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는 오스만 영내로 들어가 요새화된 도시 시바스를 포위공격해 약 3주일만에 함락시켰다. 티무르는 무슬림들의 목숨은 살려두었으나 약 4,000명정도의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산채로 묻거나 우물에 던져버렸다. 그는 후방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맘루크조을 공격하고 바그다드를 정복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것은 1402년 6월이 되어서야 시바스 평원에서 자신의 군대를 사열했다.
“어떤 부대는 붉은 깃발을 지녔고, 그들의 가슴막이, 안장, 안장덮개, 활통, 혁대, 창, 방패, 철퇴까지 모두 붉은색이었다. 또 다른 부대는 노란색이었고, 또 어떤 것은 흰색이었다.
한 여단은 쇠미늘로 된 갑옷을 걸쳤고 어떤 여단은 쇠판으로 된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카이세리 루트를 거쳐 바야지드가 있는 앙카라로 진군하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앙카라의 북동쪽에 있는 주북(Cubuk ;혹은 치부카바드)에서 1402년 7월 20일에 벌어졌다. 전투는 아침 6시부터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으며 양군을 모두 합치면 거의 100만 명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무렵으로써는 최대규모의 결전이었다.
바야지드의 오스만군의 전력은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로부터 징발한 군대들도 조직되었는데, 우익은 소아시아 제후들의 원군이었고, 좌익은 발칸반도에서 온 세르비아군이었다.
티무르군의 전력은 다수의 소아시아 군대들이 섞여 있었고, 최전방에는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 32마리를 배치했다.
오스만군 좌익은 용맹과감하게 싸워 티무르까지 감탄했을 정도로 세르비아인들과 그 국왕인 스테펜은 바야지드에게 끝까지 충성했지만, 우익의 아이든, 멘테세, 사루한, 케르미안 등지에서 온 투르크인들은 티무르 군대에 자기들의 왕족이 있는 것을 보고 전투 도중에 티무르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마침내 바야지드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바야지드는 그리스도교 가정의 아이들을 소년시절부터 뽑아다가 특수훈련을 시킨 예니체리 1만명과 세르비아인들 앞에서 하루종일 싸웠으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소년병인 자신의 근위대가 괴멸한 것을 보고 비로소 석양 무렵에 퇴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도망치던 말이 쓰러져 아들 1명과 함께 티무르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티무르는 강적이었던 바야지드 1세를 예우를 다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바야지드가 도주를 기도했기 때문에 그를 울이 쳐진 가마에 싣고 가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해 ‘철장’이라는 과장된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바야지드는 패전에 대한 자책감과 절망, 모멸을 견디지 못해 몇 달 후인 1403년 3월 9일 아크 셰히르에서 화병으로 인해 뇌일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단 오스만 군대가 패배하고 술탄이 포로가 되자 티무르에게 서부 아나톨리아의 정복은 한낱 장거리 행군에 불과했다. 그가 쿠타흐야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전위부대는 오스만의 수도인 부르사를 약탈하였다.
이븐 아랍샤와 샤라프 웃 딘은 한 무리의 야민인들처럼 행동한 정복자들의 모습을 묘사하였고, 그 아름다운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티무르의 손자인 아부 바크르는 니케아(후일 이즈닉)까지 말을 달려 “가는 곳마다 살육하고 약탈하엿다”라고 샤라프 웃 딘은 흥미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티무르 자신은 로도스 기사단에게 속해 있던 스미르나(후일 이즈미르)를 포위하였다. 공격하기 전에 그는 총독이었던 수사(修士) 기욤 드 문트에게 무슬림이 될 것을 권유하였다. 물론 총독은 분개하며 거절하였다.
[승전기]에 의하면, 포위는 1402년 12월 2일에 시작되었고 2주일 후 급습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학살이 뒤따랐고 기독교 함대에 의해 구출된 몇몇 기사들만이 목숨을 구했다. [승전기]는 기독교의 영토인 이곳에서 거둔 승리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에 결정타를 가하였다는 독실한 무슬림들의 근거있는 비판에 대해 티무르를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다.
스미르나의 함락과 뒤이은 대량학살은 앙카라 원정(물론 그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을 성전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오스만 술탄이 7년동안이나 포위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시미르나를 티무르는 2주도 채 못되어 정복해버렸다. 무슬림들은 신을 찬양하며 시내로 들어가 적의 머리를 감사의 제물로 드렸다.” 투르크, 이탈리아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엿던 포케아도 티무르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지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맞은편 섬 키오스를 소유하던 제노아인들의 교역회사인 ‘마호네’도 역시 충성의 서약을 하였고, 비잔티움의 섭정 요한네스 7세(그당시 마뉴엘 2세 팔레올로구스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공동황제)는 티무르의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받고 추종의사를 밝히는 의미에서 즉시 사신을 보냈다.
스미르나의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바야지드에 대한 티무르의 승리는 기독교권을 구한 셈이었다. 바야지드가 니코폴리스의 십자군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비잔티움은 오스만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사멸될 운명에 놓여 있었고 단지 몇 달 만에 함락되느냐가 문제였다.
오스만이 앙카라에서 겪은 갑작스러운 재난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세기 동안의 숨돌릴 틈을 주었다(1402-1453). 마치 티무르의 금장 칸국(킵차크 한국)에 대한 승리로 모스크바 국가가 혜택을 입었듯이, 이 돌연한 사건의 결과 트란스옥시아나 사람들의 서아시아 정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비잔티움이었다.
발칸의 기독교권의 이 같은 행운은 오스만을 눌러버린 티무르가 그의 재기를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함으로써 더욱 커졌다. 투르크령 소아시아에서 그는 바야지드가 10년전에 파괴했던 여러 아미르국들을 복원시켰다. 이로인해 아시아에서 오스만의 영토는 다시 북부 프리기아, 비씨니아, 미시아로 국한되어 버렸다. 오스만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티무르는 유산을 둘러싸고 싸우고 있던 바야지드의 아들들의 불화를 더욱 조장하였다.
[중국원정]
티무르는 1404년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왔다. 사마르칸드에서 그는 카스티유의 헨리3세가 보낸 사신으로 후일 귀중한 여행기를 남긴 클라비호를 접견하였다.
콘스탄티노플, 트레비존드, 타브리즈, 라이를 거쳐 클라비호는 1404년 8월 31일 사마르칸드에 도착하였고 9월 8일 티무르를 알현하였다. 클라비호가 쓴 기록에 의하면, 이때 티무르는 너무 늙어 시력이 아주 약해졌다고 한다.
그래도 이 늙은 영웅 티무르는 가슴속에 웅대한 야심의 불을 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칭기스칸 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왕조를 세워 국력의 절정에 오른 명이 있는 중국을 정복할 생각이었다. 명의 초대황제였던 홍무제(주원장)는 칭기스칸 일족 대칸의 계승자로서 과거 차가다이 칸국의 신속(臣屬)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홍무제는 1385년에 중앙아시아로 사절단을 보내, 부안(傅安)과 유유(劉惟)는 하미, 카라호자(투르판), 일리발릭으로 가서 그곳에서 어려움 없이 차가다이가의 칸들과 두글라트의 아미르들로부터 신속(臣屬;신하로써 복종)을 받아냈다.
그러나 티무르는 조공품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선물을 한 차례 이상 중국의 궁정에 보냈다(1387, 1392, 1394). 1395년 홍무제는 티무르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와 함께 부안을 다시 한번 사마르칸드로 파견하였다.
티무르가 중국을 정복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의도를 공포하고 오트라르에 보병 20만, 기병 20만, 도합 40만 대군을 집결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홍무제의 아들이자 두 번째 후계자인 영락제(1403-1424)가 즉위한 직후였다.
이것은 분명히 중국문명이 이제껏 직면했던 가장 중대한 위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불교와 유교를 존숭하고 진정한 천자가 되기를 바랐던 쿠빌라이와 같은 사람의 침략이 아니라, 나라를 전부 이슬람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중국의 문명과 사회를 철저히 파괴할지도 모를 한 광신적인 무슬림의 폭거였기 때문이다.
명조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호전적이었던 영락이 아마 좋은 맞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04년 12월 14일에 진군하기 시작한 티무르 군대는 중앙아시아를 넘는 강행군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의 추위는 유난히 매서웠다. 그 추위속을 뚫고 겨우 침켄트 서쪽 시르다리아 강변의 오트라르에 도착했을때, 티무르는 병이 나서 열이 높았다.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대신들과 손자를 머리맡에 불러서 뒷일을 부탁하고 1405년 1월 19일 71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둘때까지 여전히 중국에 대한 엄청난 위험은 계속되었다. 그의 시체는 썩지 않는 향유를 바르고 흑단관에 넣어 사마르칸트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구르에아미르로 불리는 호화로운 무덤에 매장되었다.
죽기 전에 그는 영토를 생존한 두 아들을 비롯하여 손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내분이 계속되다가 막내아들 샤 로흐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티무르는 생의 대부분을 정복과 파괴하는 데에 보냈지만 후계자들의 치세에 이르러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웅장한 건물로 사마르칸트를 아름답게 꾸몄고 그가 정복한 지역에서 많은 공예기술자와 장인들을 이 도시로 데리고 왔다.
그는 또한 체스의 명수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로 티무르 왕조의 3대왕이 된 샤 로흐(Shah Rokh)는 부왕 티무르가 체스를 두다가 샤(왕)와 로흐(성)의 두 말을 이중으로 땄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샤 로흐는 아버지와는 달리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의 오랜 치세를 통해 아버지가 파괴한 흔적을 복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생애를 바친 현명한 군주였다.
[평가]
티무르는 유목민 소집단의 지도자로 시작하여 간계와 군사력으로 1360년대까지 옥수스 강과 작사르테스 강 사이의 영토(트란스옥사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 후 그는 30년간 기마군병을 이끌고 몽골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의 국가를 정복했다.
그는 유목민 전사들의 지도자로써 제국을 이루어 농민과 목축민을 모두 지배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둔 중앙 아시아의 마지막 막강한 정복자였다.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빈곤과 살해, 황폐에서 많은 전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다시 크리스토퍼 말로의 <탬벌레인 대왕 Tamburlaine the Great>과 같은 저서에 영감을 주었다.
티무르 랭크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의 적들이 경멸조로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붙여준 것인데 이것이 유럽에서는 탬벌레인(Tamburlaine)또는 태멀레인(Tamer-lane)으로 되었다.
티무르는 중앙 아시아의 초원거주민과 유목민의 전통에 뿌리를 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유산의 계승자였다. 그와 그 동족들은 칭기즈 칸의 군사기술과 규율에 단련된 기동력 있는 말탄 궁술가와 검술가로서, 정착하여 생활하는 농부들을 경멸했다.
티무르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사막의 고열과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견디면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 때도 그는 계절을 따라 말을 먹이기 편리한 곳을 찾아 그의 군대와 함께 이동했다. 9명의 아내와 첩들 중에서 1명 또는 그 이상의 가솔과 더불어 그의 조정도 함께 움직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가 그곳을 방문할 때는 단 며칠만 머물고 이 도시 건너편 평원에 설치한 야영천막으로 되돌아갔다.
무엇보다도 티무르는 칭기즈 칸이 개발한 군사기술의 대가였고 당시의 군사 및 외교적 자원을 잘 활용했다. 그는 적대자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약점을 이용하거나 그의 목적에 부합하는 음모와 배신, 동맹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첩자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승리의 씨앗을 적의 대열 속에 뿌렸다.
그는 이웃하거나 멀리 떨어진 세력들과도 고도의 복잡한 협약을 체결했으며 영국과 중국 등의 외교문서에도 이러한 협상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투에서는 이동과 기습의 유연성 있는 유목민적 전략이 주요공격무기였다.
티무르의 가장 지속적인 기념물들은 하늘색 터키옥과 금, 석회석, 모자이크로 장식된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제국 건축물이다. 이중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대형 모스크인데 이것은 지진으로 황폐화되었으나 여전히 돔의 거대한 부분은 솟아 있다.
그의 장려한 무덤 구르에아미르는 이슬람 예술의 정수 중 하나이다. 거대하지만 부서진 비취 평석 아래 그의 시신이 있다. 무덤은 500년 동안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다가 1941년에 공개되었다. 소비에트 고고학위원회가 한남자의 골격을 찾아냈다. 그것은 오른쪽 손과 다리가 둘 다 불구였지만 타타르인 치고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늠름한 체구였다.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중국원정이 무산되었을 때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였으나 그의 왕조는 동족상잔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동안 중앙 아시아에 남아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손자 울루그 베그는 천문관측소를 설립하고 천체표를 바로 이곳에서 그렸는데 그 후 17세기 영국왕실의 천문학자들도 그것을 사용했다. 15세기 티무르 왕조의 부흥기 동안에 사마르 칸트의 남동부 헤라트는 뛰어난 페르시아 세밀화 화가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16세기초 왕조가 중앙 아시아에서 멸망되었을때 그의 후손 바부르가 카불에 자리를 잡은 다음 델리를 점령하여 후에 무굴제국으로 알려진 이슬람계 인도제국을 세웠다.(출처:프리미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