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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 시모음]
강천사에서
흙길이다 한적한 진입로 따라 속살 훤히 보여주는 피라미떼, 폴짝폴짝 뛰어 햇살 감아 올라간다 물살이 거칠어서 이 길 선택했을 저 무리들은 잘 닦인 길은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 길은 넓을수록 따분하다 어느 절이었을까 아스팔트로 門 열던 그 절은 흉흉한 안팎의 소문들이 귀를 먹게 했다 극락교 지나온 사람들은 대웅전에서 합장을 한다 간절한 소원이 누구에게나 한 가지쯤은 있는 법 허나, 일찌감치 세상에 단풍든 나는 빌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냥 지나친다 내 육신 외의 것들에 대하여 손을 모아 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화가 더 이상 커지지 않기 시작한 뒤에도 긴박한 속보조차 숭늉처럼 쉽게 소화시키지 않았던가 쉰내 나는 몸, 씻어 보자는 속셈인가 약수 한 대접 거뜬히 마신다 길다란 쇠줄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넌다 한발만 움직여도 흔들린다 벼랑도 마음을 닮은 걸까 올려다 볼 때보다 내려다 볼 때 더 위태롭다
개구리밥
헛짚은 날들이 나를 증명해 놓았네 개구리밥이 물 위에 뿌리를 내리듯 헛물켠 시간들이 나를 세월의 방죽 위에 뜨게 했네 발목 닿지 않을 것 같은 내일도 겹겹이 떠 있을 것이네 바둥거려도 집으로 가는 골목과 골목은 좁아만 갔네 짐 꾸려 떠나온 곳마다 헐거워진 세간 대신 방안 가득 채운 달이 목 메였네 순대 한 접시 털레털레 들고 퇴근하는 밤엔 시린 달이 차가운 방에 들어와 소주를 들이켰네 잠들지 못한 새벽엔 비탈진 계단에 주저앉아 별을 털었네 차차 좋아 질 거야, 밑도 끝도 없이 헛짚은 날들이 지금의 나를 증명해 놓았네 거짓말이고 싶었던 세월은 끝내 위증되지 않았네 천장 뚫고 내려와 아랫목 고집하는 물방울마냥 안전핀 없는 일상은 어디든 돌파구를 내고 싶었네 아무 곳이나 뿌리 내려 자지러지고 싶었네 헛물켠 시간들이 나를 세월의 방죽 위에 뜨게 했네 물이 스미면 개구리밥이 햇볕에 말라붙듯 내가 떠다닌 생활사도 뿌리를 감출 것이네 내가 버석버석 말라비틀어지면 햇볕은 그제서야 내가 떠 있던 세월의 방죽 발목 빠지지 않게 천천히 거닐 것이네
거미 -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 2
한달 만의 식사다 나방은 즙이 많아서 좋다 위턱과 아래턱을 놀린 지 오래여서 입이 좀 뻐근하다 집주인이 돌아온다 저 남자는 시를 쓴다 한달 전, 저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게을러서 화장실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내 집을 빗자루로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의 식사 탓일까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꾸 신트림이 난다 밥 먹는 내 모습을 처음 보았겠지, 남자가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남자도 나처럼 오랫동안 굶었는지 깡말라간다 생각하면 저 남자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 곳에 들어 올 때마다 지금처럼 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런지 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남자가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릴 때면 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남자가 알몸을 씻은 날은 주린 아랫입에 손가락을 물려 또 다른 허기를 달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것이다
깨꽃
참깨는 그해 가장 더운 여름날을 골라 연분홍 꽃 피운다 우리가 늦게 도착한 민박집 텃밭에는 참깨가 첫 꽃잎을 막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흰색 같기도 하고 분홍색 같기도 한 그대 봉긋한 꽃봉오리 자꾸만 부풀어올랐다 소리 지르고 싶어! 날 밝도록 입술 깨물며,
누에
누에가 안방을 가져갔다
뒹굴며 속제하기에 좋았던 마루는 뽕잎을 썰거나 다듬는 장소로 적당했고 우리는 광을 고친 방에서 둥근 잠을 자며 둥근 꿈을 꾸었다 누에가 가져다줄 모나미 연필 한 다스와 새 가방이 누나 입가에서도 웃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기에도 턱없이 비좁은 방이었지만 갓 따온 뽕잎에 엎드린 누에처럼 여덟 식구 모두 싱싱한 잠을 잤다
막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통통한 누에는 겨우 연필로 뭉개진 뽕잎을 먹어야 했다 청소 시간에 주운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밀던 날 막내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림일기를 썼다 큰누나는 훔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내 뒤통수를 측은해했다
누에는 실을 토하기도 전에 안방을 비워주었다 누엣구더기 때문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누에섶에 불을 질러 우리들의 꿈도 함께 태워주셨다
그날 밤, 만취한 아버지는 누운 채로 명주실을 밤새 토해냈다 둥글고 거대한 고치 하나가 다음날 오후까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막내는 더 이상 그림일기장에 누에를 그려넣지 않았다
단풍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1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분비물을 흘리는 것은, 배춧잎에 붙어 있는 솜털이 내겐 덤불이기 때문이다
2 사내가 집을 나선다 저 사내는 볕을 두려워하는 달팽이다 다행히 오늘은 햇살이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이젠 비춰진다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사내에겐 꽃상추밭 같은 공원이 생겼으니까, 실직한 저 사내의 딱딱한 집 속에는 물렁물렁한 아내가 산다 건들기만 하면 젖무덤이 금세 봉긋해지는 그녀는 하루종일 통조림용 마늘을 깐다 그런 이유로 사내의 눈이 매웠을까 사내가 눈을 훔치며 지나간 골목이 축축하다
등꽃 벤치
등꽃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네 슬로우고고 천천히 좀 걷자고 불쑥 손목을 잡아당기던 계집아이 자주 보오라 자아주, 바람이 불 때마다 유년의 보랏빛 등꽃이 바이브레이션으로 길게 떨다 떨어지네 사춘기 끝난 뒤로도 목젖 떨리게 보고 싶던 계집아이 씀벅씀벅 내 노래의 징검다리 건너오다 손을 내미네 창 틈으로 풍금 치는 거 엿보다 매칼없이 줄행랑치던 날이었을 것이네 무릎에 박힌 조무래기 돌들 아카시아 가시로 빼내는 내내 고 계집아이 쓰라리고 따끔거려서 이 악물어야 했네 왜 하필이면 면장집 딸로 태어났느냐고 따지고 싶었네 넘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던 고 계집아이 개똥쑥 찧어 문지른 건 생채기 무릎만이 아니었네 서른에 닿아서야 혼자 찾은 초여름의 모교 등꽃 벤치에 앉아 기타 줄 대신 유년의 한때를 뜯네 능다리 개울가에서 머리를 감겨 주던 계집아이 어, 성우야 머리에 땜빵 있다, 비누 거품처럼 잘도 웃던 계집아이 옹이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네 종이배 띄우기 놀이하다 내 깜장 고무신 잃어버리고는 훌쩍훌쩍 안겨 울 때조차도 애꿎은 검지 손가락만 깨물어야 했던 우유 같은 계집아이 스치듯이라도 보고 싶어 애써 찾지 않으려네 핫따 코때기 한 번 징허게 시큰거리는구마이, 등꽃 벤치에 앉아 텅 빈 기타 속 들여다 보네 옹이 빼낸 자리 멍하니 들여다 보네
망둥어
망둥어 잡을 땐 망둥어가 그만이다 망둥어 살 댕강댕강 잘라 미끼로 끼워 던지면 덥석덥석 물어 댄다 이놈들은 시시한 입질따윈 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시도로 목표물에 덤벼든다 줄을 조금만 늦게 당겨도 바늘은 이미 뱃속에 들어가 있다 망둥어 잡을 땐 망둥어가 그만이다 박 과장 잡을 땐 구조조정이 그만이다 목에 걸렸는지 금세 뱉어 놓는다 노련한 구름이 빠져나간 저, 미끼 없는 바늘달
망해사
심포에는 바다에 몸을 던지려다가 문득, 머리를 깎은 뒤 제 스스로 절이 된 망해사가 있다 시퍼렇게 깎은 머리를 한 채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는 망해사 낙서전이 있다
망해의 생살을 밀고 나온 검붉은 사리 하나 서해로 떨 어 진 다 닮아진 염주처럼 떠 있던 고군산열도, 바닷물 붉게 그 사리를 닦는다
잘 씻겨진 보름달이 젖은 채로 곧 올려질 것이다
매운탕
여름시인학교 마당을 쭈뼛거리던 나는 구수골 개울에서 물고기나 잡는다
그물 가득 걸려 올라온 햇발들이 엉킨 발을 풀며 비릿하게 쏟아져 내린다 핫따 큰놈 잡혔다, 해찰 나온 선생님들도 바지 걷어붙이고 첨벙첨벙 뛰어든다 피라미 미꾸라지 붕어가 신나게 몰고 쫓던 시인과 작가 선생님들, 물밖으로 하나 둘 내몰린다
찢겨진 족대와 물고기통 들고 의기양양하게 시인학교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와 대단해요 신기한 구경이라도 난 듯 사람들이 몰려든다 한 냄비 거리는 충분하다고 야단들이다
수돗가에 혼자 남아 잡은 물고기 손질한다 어머 징그러워 무슨 시인이 저래, 엄지손톱으로 피라미 배 지그스 눌러 똥을 빼고 있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안만 벙벙하다
이래저래 서운한 생각들 내심 달래는 차, 매콤한 매운탕 냄새 탓에 코끝이 맵다
민달팽이
그가 귀가를 한다 저 민달팽이의 등은 지나치게 가벼워서 무거워 보인다
걷는다는 표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바닥까지 처진 어깨가 천천히 길을 밀고 나간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늘어진 양 어깨가 다리였으므로 빨래처럼 처진 몸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어깨에 신는 신발은 없으니, 당장 닳아질 희망의 뒤축이 없어서 좋겠다 그에게도 한때는 감미로운 집이 있었다 아이스크림 같은 집,
너무나 달콤하게 흘러내린 똥 같은 집 똥집도 안 파는 포장마차 같은 집 잠시 멈춘 그가 집을 지나친다 어쩌다가 아이들만 누수 시켜 놓은 집
한사코 그의 목에 감겨 있는 저 실없는 실업, 그의 목을 한껏 조이고 있다
반나잘 혹은 한나잘
내 어머니 집에 가면 새실 한약방에서 얻은 달력이 있지 그림은 없고 음력까지 크게 적힌 달력이 있지 그 달력에는 '반자잘' 혹은 '한나잘'이라고 삐뚤삐뚤 힘주어 기록되어 있지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 아직까정은 날품 팔만 헝게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 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 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
봄소풍
봄비가 그쳤구요 햇발이 발목 젖지 않게 살금살금 벚꽃길을 거니는 아침입니다 더러는 꽃잎 베어문 햇살이 나무늘보마냥 가지에 발가락을 감고 있구요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드러낸 버드나무가 푸릇푸릇한 생머리를 바람에 말리고 있습니다 손거울로 힐끗힐끗 버드나무 엉덩이 훔쳐보는 저수지, 나도 합세해 집적거리는데 얄미웠을까요, 얄미웠겠지요 힘껏 돌팔매질하는 그녀,
손끝을 따라 봄이 튑니다
힘껏 돌팔매질하는 그녀 신나서 폴짝거릴 때마다 입가에서 배추흰나비떼 날아오릅니다 나는 나를 잠시 버리기로 합니다
불면증 유단자
당신도 그런 적이 있었겠지 어정쩡하게 술 한잔 마셨다가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는 거 말이야 그런 날은 양떼를 목장 안으로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수십 번씩 수백 마리를 몰아 넣었다, 다시 방목을 시켜도 허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더구나 비가 내리는 새벽은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그럴 땐 끙끙대지 말고 벌떡 일어나 된장찌개를 만들어봐 애호박이며 풋고추 숭숭숭 썰어 넣고 뚝배기에 새벽을 지글지글 끓이는 거야 그러니 사뿐사뿐 움직여야 해 불면의 진가를 느끼기엔 혼자가 좋은 거야 속이 든든해지면 냉수를 한 잔 들이켜 담배 한 대 피워도 좋겠지 그 후엔 잠들 수 있느냐고? 그러고 나면 정신이 무지하게 말짱해질 거야 그렇거든 이런저런 걱정을 해보는 거야 말하자면 이런 거지 오늘은 퇴근할 때 우산 가져오는 것 잊지말아야지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새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을 뒤돌아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성에꽃, 그 구멍으로
사람의 방으로 들어오지 못한 겨울바람들 거처 없이 떠도는 물의 씨앗 모아 온실 같은 유리창에 성에꽃을 피운다
태양이 침범하면 성에꽃은 애벌레처럼 창틀에 꾸불텅 기어내려와 앉아 있다가 아무도 몰래 겨울 속으로 날아가곤 하였다 그중 몇 녀석은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담배에 붙여진 불꽃과 대항하다가 작고 둥근 구멍 하나둘 정도 남겨놓고 투명한 혈구를 흘리며 죽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구멍으로 동태가 된 빨래를 밟아 말리는 까치를 볼 때도 있었고 빨간색 구두굽 소리내던 암캐가 여관을 빠져나오고 있는 풍경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오늘 아침엔 그 구멍으로 똥을 보았다 죽을 똥 살 똥 아등바등하는 내 똥을 보았다
소금벌레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머리에 휜 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연신 소금물을 일렁인다
소금이 모자랄 땐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물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 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뜨리며 마른다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동안 소금만 갉아먹다 생을 마감한 소금벌레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도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태산 염전의 늙은 소금벌레 여자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실연
날마다 울고 살기 바란다,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더 이상 나는 시인이 아니었다
나는 엎질러진 물처럼 골방 홑이불에 스며 있었다 막무가내로 번지는 그녀 생각, 묵묵히 삼켜주던 베갯잇은 얼룩만 더해갔다 부어오른 목젖 간질이고 넘어와 비릿하게 터지던 검붉은 꽃봉오리, 손바닥 위로 모가지째 떨구어지던 새벽녘엔 마른 잠이 밀려왔다
마저 뒤틀던 흐릿한 손이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다행히 링거액은 잘 들어가지 않았고 마음은 우겨 먹다가 넘겨낼 만했다 세상에나 실연땜에? 끝끝내 시집 한 권으로 입원비 대신하게 하던 이정선 원장님이 나는 시인일 거라 생각했다
종종 새벽 배웅을 나갔다 허나 어디까지 젖은 것들을 바래다주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참 지질이도 못난 놈이라고 코빼기만 씰룩거렸다 환청과 이명에 시달리던 날들이 즐겁게 지나갔다
입을 틀어막아도 뭉클 넘어오는 기쁜 눈물, 꽃 터트리며 살기 바란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마지막 편지가 고요하게 번지고 있었다
싸라기밥풀
싸라기눈이 윙윙거리다가 닭장 속으로 주걱의 밥풀처럼 달라붙는다 숯검정 같은 오골계 두 마리가 진짜 싸라기밥풀인 줄 알고 허겁지겁 떼어먹는다 별똥별 주워먹으러 강길을 거슬러가다가 긴 해 허기지게 떼어먹던 나처럼 그 싸라기밥풀 눈 더 떼어먹으렴 별로 손해볼 건 없잖아? 뭔가를 굳게 믿고 육신을 바삐 움직일 때가 좋은 법이지 물먹는 셈이지만 어쨌든 허기진 배는 채울 수 있을 거야
어머니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오이를 씹다가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당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 집에 첨으로 놀러온 건 초등학교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다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네 나는 니가 좋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 왔네 하루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리 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는 까치 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태기에다 거시기를 해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갔네 아무리 염병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이다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꼭다리가 요렇코롬 쓰다냐
옹이
느티나무 둥치에 옹이가 박혀 있네 여린 곁가지에 젖을 물려주던 마음 젖꼭지처럼 붙박여 있네 옷을 개거나 쌀을 씻다가도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보네 손가락 사이로 더듬어져야 할 꽃봉오리는 만져지지 않네 상추쌈 먹고 젖을 먹이면 초록 똥을 쌌지 배냇니로 젖을 빨던 정이는 시집을 갔네 감정을 절제해도 切除된 가슴이 우네 癌, 이제는 암시랑 안혀 정이야, 무너질 가심이 없응께 참 좋다 거울 밖의 어머니가 내리쳤을 때 도려져 나간 가슴이 젖을 흘렸네 정이 친정 집 목욕탕엔 거울이 없네 움푹 들어간 가슴이 비치지 않네
자귀꽃
게으름뱅이 자귀나무는 봄을 건넌 뒤에야 기지개를 켠다 저거 잘라버리지, 쓱쓱 날 세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연초록 눈을 치켜뜬다 허리춤에서 부챗살 꺼내 펼치듯 순식간에 푸르러져서는 애써 태연한 척,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 말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 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배달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
장독
장 담글 때도 지났는데 투박한 장독 하나가 평상 뒤에 놓여졌다
불룩한 배에는 단아한 山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세 개의 산봉우리를 품고 있던 장독, 뚜껑을 열어 볼까 하다가 담 밖의 아카시아 냄새에 취해 대문 밀쳤다
휴일에 대청소를 하다가 보았다 무릎 높이의 장독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있는 어머니, 아카시아꽃들이 키득키득 하얀 이 드러내어 웃는 줄도 모르고 장독에 오줌 누고 계셨다
장독 안에서 익는 것이 어디 간장 된장 같은 것들뿐이더냐 금간 뚜껑 열어 보니 오줌장이 익고 있다 그 옛날 외할머니처럼 앞니 빠진 장독,
제 맛이 날 때까지 오줌장 익혀서 호박넝쿨, 가지, 고추에게 먹일 거란다 오줌 보탤 것 아니면 뚜껑 닫으라 한다 술독도 아닌데 아카시아꽃잎이 띄워진다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고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면 모가지라는디
친전 - 아버지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
보름달이 떴어요 회백색 분비물이 제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오늘이 성탄전야라는 거
탄일종이 울리고 있어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홍원항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소주 한 병 더 달라는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욕설 가득 퍼담은 뜨거운 국밥을 넌지시 밀어 넣고 담배에 불을 당겨 무는 늙은 작부다 한때 밤마다 몇 송이고 피워 올리던 해당화, 잔뿌리조차 말라 버린 지 오래인 음부를 가진 늙은 작부다 새벽 갯바람에 미닫이문이라도 덜컹거리면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올 사람도 없는데 습관처럼 문을 열어 보는 늙은 작부다 속 쓰린 사내들에게 꿀물을 타 준 적은 뭇별처럼 많아도 정작 자신의 뒤틀리는 속을 위해서는 꿀물을 한번도 타 본적이 없는 늙은 작부다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해서는 안 될 극약같은 사랑이나, 폐선처럼 쓸쓸한 세월이나,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배신이나, 막막한 쓸쓸함과 그리움이나, 어떤 말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며 나는 늙은 작부와 단 둘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삼켜서는 안 될 초승달을 삼켜 배앓이를 해야 했던 얘기와 대책없이 쏟아지는 압정별에 눈을 찔려 충혈되어야만 했던 얘기를 시작으로 늙은 작부와 대작을 시작하고 싶다 술을 마시다 말고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면 늙은 작부는 내게 지나온 내력을 풀어내며 왜 나이를 먹을수록 쌉쌀한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지 연거푸 소줏잔을 비우며 말해 주겠지 자꾸 엉켜 가는 혀로 엉킨 그물 같은 삶을 풀어내겠지 그러다가 늙은 작부는 한숨을 쉬듯 세월이 약이라는 식상한 말로 나를 위로하며 내 등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치겠지 하지만 그렇듯 식상하고 극히 상투적인 대답도 아침저녁으로 색색의 알약을 삼키지 않으면 생이 위태로워지는 늙은 작부가 말한다면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가슴에 와 닿겠지 잘도 들어앉던 아이를 마지막으로 떼 낸 뒤로 아픈 자궁에 쓸쓸한 바다를 가득 채워 넣어야만 했던 늙은 작부가 말한다면, 나는 그 늙은 작부의 손을 잡고 별과 달이 취해 떨어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늙은 작부가 마른 행주로 내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애달픈 사랑 노래를 불러 달라고 칭얼거리고 싶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식은 동태찌개가 제일 먼저 어깨를 들썩거릴 것이고 빈 접시와 빈 그릇들도 금시 흥이 올라 온몸을 달그락거릴 테지만 늙은 작부의 노래소리는 인적 없는 포구의 바람소리처럼 쓸쓸하게 들리겠지 뜬금없이 나는, 선창가에 버려진 장화가 아무렇게나 신는 신발보다 오히려 쉽게 삭고 헐거워진다는 것에 새삼 놀라며 막무가내로 슬퍼지겠지 늙은 작부 또한 후렴구를 채 부르기도 전에 흐느끼겠지 그때쯤 나는 술상을 물리고 늙은 작부와 비린내가 풍기는 쪽방으로 들고 싶다 생선을 담았던 나무상자처럼 비린내 가득한 늙은 작부의 품에 나는 갓 잡아올린 도미처럼 담겨져, 등허리로 바닷가 푸른 달빛이 땀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있는 힘껏 파닥거려주고 싶다 거친 파도가 방안 가득 들어와 철썩철썩, 철썩거리다가 곤한 잠에 빠지겠지 나는 도마 위를 콧노래처럼 지나가는 칼소리나 북어포를 내려치는 방망이 소리에 잠을 깨겠지 늙은 작부는 내가 북어국을 먹는 모습 애써 보지 않는 척 담배에 불을 당기겠지 한술 뜨고 어여가
황홀한 수박
잘 읽은 수박은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혀끝만 닿아도 쩍, 벌 어 진 다 수박물에 떨어져 젖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끝으로 벗겨낸다
수박씨처럼 음모를 뱉어내기도 하면서 마른 침만 삼키곤 했던 수음의 사춘기를 서른에 버린다
박성우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대학교 양식학과 졸업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거미> 당선
* 시집 [거미] (창비사, 2002)
코피를 자주 쏟는다 했던가. 그 깡마른 몸에 쏟아낼 게 어디 있겠는가 싶어 발표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짠해지곤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젊은 시인 중에서 보기 드물게 말을 새기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점 하나로도 그는 믿음직스러운 바 있다. 결이 고운 듯하면서도 매우 당차고, 호흡이 여린 듯하면서도 질기디질긴 게 박성우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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