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역사 제2장 : 푸난 왕국 (부남 왕조)
Kingdom of Funan
푸난 왕국(Kingdom of Funan)은 현재의 베트남 남부지방이자 인도차이나 남부지역인 메콩 삼각주(Mekong Delta)에 위치해 있던 고대국가의 중국식 명칭이다. 베트남어로는 '푸남'(Phù Nam)이라 불린다.
중국의 역사서들은 이 왕국을 지칭하기 위해 '푸난'(扶南, Fúnán, 부남)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그 중 가장 상세한 기술은 난징(Nanking, 南京)을 도읍으로 삼고 있던 오나라(Wu Kingdom, 吳: 229~280)가 파견했던 사신(使臣) 2명이 남긴 기록이다. 오나라 사신들은 3세기 중반 무렵에 푸난에 체류했다. 하지만 원래 이 국가가 위치했던 지역에서 발견된 어떠한 문헌들에도 '푸난'이란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푸난 왕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칭했던 원래의 명칭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일부 학자들은 '푸난'이란 말의 기원과 의미에 관해 보다 진전된 사색을 제안하기도 했다. 종종 '푸난'이란 명칭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어떤 언어를 중국어(=한문)로 음사(transcription, 音寫)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학자인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ès: 1886~1969)는 고대 중국의 학자들이 사용했던 '푸난'이란 말이 크메르어 낱말 '브남'(bnaṃ 혹은 vnaṃ)을 음사한 것이라는 학설을 제시했다. '브남'은 '산'(山)을 의미하는 현대 크메르어 낱말 '프놈'(phnoṃ)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한문 '난'(南, nán, 베트남어로는 '남'[nam])이 주로 '남쪽'을 의미하는 지리적 용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학자들은 이런 의미를 강조하여 '난'이란 용어를 동남아시아의 특정 지역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하곤 했다. 가령 '안남'(安南, Annam)과 같은 용례가 대표적인데, '안남'은 중국 최남단 이하의 모든 땅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특히 현재의 베트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푸난'(扶南)이란 명칭이 음사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평정해야 할 남쪽지방"이란 의미로 사용됐을 수도 있다.
금석문 연구자였던 클로드 자크(Claude Jacques)는 '푸난'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바와뿌라'(Bhavapura), '아닌디따뿌라'(Aninditapura), '슈레스타뿌라'(Shresthapura), '위야다뿌라'(Vyadhapura) 같은 명칭들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명칭들이 당시 이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들에서 발견된 비문에 등장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주1) |
푸난 왕국 (Kingdom of Funan) Kingdom of Phù Nam Kingdom of Nokor Phn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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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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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어 |
고대 크메르어 |
종 교 |
불교, 힌두교 |
정 체 |
왕정 |
주요 국왕 |
Kaundinya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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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ndinya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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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ndravarman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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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ravarman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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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콩 삼각주(현재의 베트남 남부)에서의 건국 |
기원 1세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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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라에 병합 |
550년 |
- |
남 푸난의 패망 |
628년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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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
10만명 |
화폐 |
금, 은, 조개 |
오늘날 푸난왕국의 옛 영토를 포함하는 국가 |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베트남 | |
이 왕국의 국호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를 구성했던 사람들의 인종적, 언어적 근원에 관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있다. 가장 선도적인 가설들은 푸난 사람들이 몬-크메르 어족(Mon–Khmer) 혹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Austronesian), 또는 다인종 사회였을 것이라는 학설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증거만으로는 이 문제에 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수준이다.
중국의 사서들에 근거해, 푸난의 통치조직은 서기 1세기에 메콩 삼각주에서 성립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이 지역에서 사람이 밀도있게 정착생활을 한 흔적은 기원전 4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의 사가들은 푸난을 단일한 통치체계를 가진 것으로 보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푸난이 여러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였을 가능성에 관해 추측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푸난의 도시국가들은 때로는 서로 전쟁도 벌였고, 때로는 단일한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기도 했다.(주2)
이 왕국의 주력 항구로 생각되는 옥 에오(Oc Eo 혹은 O'keo: 현재는 베트남 남부지방)는 고대의 상업 중심지로 보인다. 이 유적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 인도와 그리스의 공예품들까지 발견되었다. 베트남어 '옥 에오'(Óc Eo)는 크메르어 '오 까이오'(Or Gaio, អូរកែវ)에서 파생된 말로서, '오 까이오'는 '유리 운하'(glass canal)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유적의 출토품들을 통해 푸난 왕국이 강력한 무역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주3) 캄보디아 남부의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에 위치한 고고학적 발굴지 역시 이곳이 당시의 주요한 정착지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옥에오에 바다로 통하는 항구가 위치하고 앙코르 보레이까지 운하를 통한 연결이 이뤄지면서, 이 지역은 푸난 왕국의 심장부를 이뤘다.
(주1) Claude Jacques, “‘Funan’, ‘Zhenla’: The Reality Concealed by these Chinese Views of Indochina”, in R. B. Smith and W. Watson (eds.), Early South East Asia : Essays in Archaeology, History and Historical Geograph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pp.371~379.
(주2) Ha Van Tan, "Oc Eo: Endogenous and Exogenous Elements", Viet Nam Social Sciences, 1–2 (7–8), 1986, pp.91~101.
(주3) Lương Ninh, “Funan Kingdom: A Historical Turning Point”, Vietnam Archaeology, 147 3/2007: pp.74~89. |
1. 사 료
고대 국가로서 푸난의 역사를 재구성했던 최초의 현대 학자는 폴 펠리오(Paul Pelliot)였다. 그는 1903년 발표한 자신의 기념비적 논문 <푸난>(Le Fou-nan)에서 중국의 사서들에서만 추출한 내용들을 이용하여, 푸난 왕국이 1세기경 건국하여 6~7세기 사이에 정복당해 사라질 때까지 발생한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펠리오가 사용한 중국 자료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그가 내린 결론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주4)
푸난에 관한 중국의 기록은 3세기부터 나타난다. 진수(陳壽, Chén Shòu: 233~297)는 289년에 정사 <삼국지>(三國志, Sānguó zhì, Records of Three Kingdoms)를 편찬했다. 여기에는 푸난의 사신들이 중국 남부 오(吳, Wú) 왕국 국왕 여대(呂待, Lǚ Dài)의 궁전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2차례 등장한다. 첫번째 사신은 225~230년 사이에 도착했고, 두번째 사신은 243년에 도착했다.(주5)
이후의 자료들 중에는 요찰(姚察, Yáo Chá: 533~606)과 그 아들 요사렴(姚思廉, Yao Silian: 637년 사망)이 대를 이어 편찬하여 636년에 완성된 <양서>(梁書, Book of Liang)가 있다. 이 책은 3세기에 오나라 사신 강태(康泰, Kāng Tài)와 주응(朱應, Zhū Yīng)이 푸난을 방문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두 사신이 남긴 기록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일부 내용이 후대의 사서들에 발췌되어 기록됐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푸난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펠리오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진행된 유적 발굴작업들이 그가 내린 결론을 지지해조거나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옥 에오 유적지의 문화와 관련된 발굴작업은 더욱 더 그러했다. 그리고 베트남 및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비문들 역시 푸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베트남의 '갈대평원'(Plain of Reeds)에 위치한 탑무오이(Thap Muoi 혹은 Tháp Mười) 군에서 발견된 비문이나, 다낭(Da Nang 혹은 Đà Nẵng) 인근의 미선(Mỹ Sơn) 유적지에서 발견된 비문은 더욱 그러하다.
(주4) Michael Vickery, "Funan reviewed: Deconstructing the Ancients."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C-XCI (2003–2004), pp.101~143.
(주5) Paul Pelliot, "Le Fou-nan."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III (1903), pp.248~303. |
2. 역 사
2.1. 푸난의 기원
2.1.1. 개요
중국측 사료에 기반을 둔 현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훈티안'(混塡[혼진], Huntian, [병음] Hùntián)이란 이름의 외국인이 기원후 1세기경에 현재의 베트남 남부지역인 메콩 삼각주에 푸난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 지역에 인간이 집중해서 살기 시작한 때가 기원전 4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사가들은 이 왕국을 통일된 제국으로 간주했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푸난이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때로는 서로 싸움도 벌였고, 때로는 단일한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기도 했다.(주2)
푸난인들의 인종적, 언어적 기원은 학계에서 논란이 있으며, 현재까지 이용가능한 증거들만으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이다. 푸난인들이 짬족(Cham, 참족)이거나 여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Austronesian)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크메르족(Khmer)이거나 여타 오스트로아시아 어족(Austroasiatic)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들이 오늘날 베트남 남부에 살면서 스스로를 '크메르족'이나 '크메르 끄롬'(Khmer Krom)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조상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푸난이 다양한 인종이나 어족을 포함하는 다문화 사회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지역에 현존하는 푸난 시대의 기록유산들은 금석학적 자료들인 산스끄리뜨어(Sanskrit, 梵語)로 쓰여진 비문들 뿐인데, 이 비문들에 적힌 산스끄리뜨어 문장은 모두 남인도 지역 빨라와 왕조(Pallava dynasty: 2세기~9세기)에서 사용되던 그란타 문자(Grantha alphabet: 일명-'빨라와 문자')로 적혀있다. 산스끄리뜨어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지식인들이나 지배계층이 사용하던 언어이다. 그러나 이 비문들은 푸난인들의 민족적 기원이나 사용하던 언어에 대해서는 정보를 주지 않는다.
2.1.2. 훈티안 : 푸난의 건국자
중국의 <양서>는 외국인 '훈티안'이 이 지역으로 와 푸난을 건국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훈티안은 남쪽 나라인 '요'(徼, Jiào)에서 왔다. (원주: 요는 아마도 말레이반도나 인도네시아 군도에 있던 어떤 지역일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그의 수호신령을 만났고, 수호신령은 그에게 성스러운 활을 건네주면서, 커다란 무역에 임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그는 사원으로 가서 신령한 나무 아래에 놓인 활을 발견했다. 훈티안은 이후 배를 탔고, 수호신령은 이 배가 푸난에 이르게 했다. 푸난의 여왕 리우예(柳葉[유엽-버들잎], Liǔyè)는 훈티안의 배를 빼앗아 갖고 싶어 했다. 이에 훈티안은 성스러운 활을 들어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은 리우예가 타고 있던 배를 뚫어버렸다. 리우예는 놀라서 항복했고, 훈티안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리우예가 나체로 있는 것이 못마땅하여, 어떤 재료를 이용해 천을 만들었고, 그것을 그녀가 머리에 걸치도록 했다. 이후 그는 이 나라를 다스리다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했다. 그의 아들은 일곱 도시의 창설자가 되었다." |
방현령(房玄齡, Fáng Xuánlíng: 579~648)이 648년에 편찬한 <진서>(晉書[Jìn shū], Book of Jin)에도 이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진서>는 외국인 건국자의 이름을 '훈후이'(混湏[혼회], Hùnhuì)로 적고 있고, 그의 원주민 아내는 '예리우'(葉柳, Yèliǔ)로 적고 있다.
2.1.3. 까운딘야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양서>에 등장하는 푸난의 건국자 '훈티안'이 미선(Mỹ Sơn) 유적지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Sanskrit, 梵語) 비문에서 등장하는 바라문(=브라흐만: 힌두교 사제)일 것으로 보고 있다. 미선 유적지의 비문은 658년에 건립된 것으로서, 바라문인 까운딘야(Kauṇḍinya 혹은 Kaundinya)가 나가(Nāga: 전설적 뱀) 종족 공주인 소마(Somā)와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타 학자들(주6)은 '훈-티안'은 2음절 낱말이고 '까운-딘-야'는 3음절이란 점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학자들은 중국의 사가들이 3음절 외국어를 음사할 때 2음절로 표기하진 않았다고도 주장한다.(주7)
그러나 '까운딘야'라는 이름은 독립적 계통을 지닌 많은 자료들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푸난의 역사에 등장했던 어떤 중요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6) Michael Vickery, "Funan reviewed: Deconstructing the Ancients."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C-XCI (2003–2004),p.197.
(주7) Edwin George Pulleyblank, Lexicon of reconstructed pronunciation in early Middle Chinese, and early mandarin, Vancouver: UBC Press 1991, p.135 및 p.306. |
2.1.4.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까운딘야
비록 중국 사서에 나오는 '훈티얀'(混塡, Hùntián)이란 이름이 산스끄리뜨어 이름인 '까운딘야'(Kaundinya)에 대한 적절한 자역으로 보긴 어렵지만, "'까운딘야'(Kauṇḍinya, '꼰단냐'(Koṇḍañña), '꼰딘야'(Koṇḍinya) 등등으로 표기된 이 이름은, 푸난의 역사에서 중국 사가들이 사용했던 이름(=훈티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까운딘야'로 자역하지 않았고",(주8) 이 이름을 '교진여'(僑陳如, Qiáochénrú, 치아오첸루)라고 자역했다.
<양서>는 훈티얀의 일화를 다룬 데서 이어지는듯한 이야기 속에 '교진여'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양서>에 따르면, 교진여는 천축전단(Tiānzhú Zhāntán, 天竺旃檀) 왕의 계승자 중 한명이다. '천축전단'이란 이름은 "인도에서 온 짠다나(Candana, 旃檀)"라는 의미이다. 교진여는 푸난의 통치자로서, 357년에 훈련시킨 코끼리를 진(晉) 나라의 목제(穆帝, Jìn Mùdì, Emperor Mu of Jin, 실명-사마담[Sīmǎ Dān, 司馬聃]: 재위 343~361년)에게 조공으로 바쳤다고 한다. <양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교진여)는 원래 인도에서 온 바라문(브라흐만)이었다. 어떤 목소리가 나타나 그에게 '너는 푸난을 다스리러 가거라'라고 말했고, 그는 마음 속에 환희를 느꼈다. 그는 남쪽으로 가서 '판판'(Pánpán, 盤盤)이란 곳에 도착했다. 그때 푸난 사람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왕국 전체가 환희에 차서 그의 앞에 복종했고,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이 나라의 체제를 인도와 마찬가지로 만들기 위해 모든 법령을 변화시켰다." |
(주8) Hackmann, Erklären des Wörterbuch zum chinesischen Buddhismus, p.80, s. v. Chiao-ch'ên-ju. |
2.1.5. 미선 비문에 나타난 까운딘야
까운딘야의 이야기는 짬 왕국의 국왕 쁘라까사다르마(Prakasadharma)가 미선(Mỹ Sơn)에 세운 'C.96호' 산스끄리뜨어 비문에도 간략하게 언급된다. 이 비문은 서기 658년 2월 18일(일요일)에 설치된 것으로서, 푸난 왕국이 멸망한 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비문은 '[운문형] 게송 제16송~제18송'(stanzas XVI-XVIII) 사이에서 까운딘야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주9)
"[바와뿌라(Bhavapura, 브하바푸라)라는 도시,] 바라문 중 최고자였던 까운딘야가 자신의 창끝을 땅에다 꽂았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 창은 그가 바라문들 중 최고의 바라문이었던 자이자, 드로나(Droṇa)의 아들이었던 아쉬와타만(Aśvatthāman)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곳에는 뱀 종족 왕의 딸인 소마(Somā)가 있었도다. 소마는 이 세상에 가족 하나를 형성했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이질적인 세력을 급격하게 성취한 후, 그 남자의 거주처에 살게 됐다. 수승한 바라문 까운딘야는 특별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주10) |
(주9) Louis Finot,Notes d'Epigraphie XI: Les Inscriptions de Mi-so'n, p.923.
(주10) Golzio, "Kauṇḍinya in Südostasien“, pp.157~165. |
2.1.6. 탑무오이 비문에 나타난 까운딘야
'K.5호'로 명명된 탑무오이 출토 산스끄리뜨어 비문은 크메르어로 '쁘라삿 쁘람 로웬'(Pràsàt Prằṃ Lovêṅ) 비문으로도 불린다. 이 석주는 현재 베트남 호찌밍시(Ho Chi Minh City)에 위치한 '베트남 역사박물관'(Museum of Vietnamese History)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문은 자(Ja: 아마도 '자야와르만'[Jayavarman]) 왕의 작은 아들(nṛpasunu—bālo pi)인 구나와르만(Guṇavarman: [역주] '덕승'[德勝]으로 한역 가능) 왕자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까운딘야 계보의 달(月)과 같은 존재였고[... kauṇḍi[n]ya[vaṅ]śaśaśinā ...], 진흙탕에 빠진 세계에서는 우두머리였다."(주11) |
(주11) George Cœdès, "Études Cambodgiennes XXV: Deux inscriptions sanskrites du Fou-nan", pp.2~8. |
2.1.7. 민간설화에 나타난 까운딘야
까운딘야의 전설은 현재의 크메르민족 민간전승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전설은 외국에서 온 왕자의 이름은 쁘레아 터옹(Preah Thaong)이고, 그의 왕후의 이름은 니엉 네약(Neang Neak)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쁘레아 터옹은 바다를 거쳐 거대한 틀록(thlok)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섬에 도착한다. 틀록 나무는 캄보디아에서 자생하는 나무이다. 쁘레아 터옹 왕자는 이 섬에서 나가 종족의 집을 발견하고, 나가 왕의 딸인 니엉 네약을 만난다. 그는 나가 왕의 축복 속에서 니엉 네약과 결혼한 후, 인간세계로 돌아온다. 나가 왕은 섬 주변에 있던 바닷물을 다 마셔버린 후, '껌뿌찌어 팁더이'(Kampuchea Thipdei)란 칭호를 하사했다. '껌뿌찌어 팁더이'이란 말은 산스끄리뜨어 '깜부자디빠띠'(Kambujādhipati: 깜부자-아디빠띠[역주: '아디빠띠'란 말은 '최상'이란 의미로서, 한문으로는 '증상'[增上], '최상승'[最上承] 등으로 번역되곤 함])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캄보디아의 군주'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화의 또 다른 버전에서는 쁘레아 터옹이 [결혼 전에] 니엉 네약과 싸움을 벌였다고 서술하기도 한다.(주12)(주13)(주14)(역주*)
(주12) Rudiger Gaudes, Kaundinya, Preah Thong, and the Nagi Soma: Some Aspects of a Cambodian Legend, p.337.
(주13) Eveline Poree-Maspero, Nouvelle Etude sur la Nagi Soma, p.239 및 p.246.
(주14) R.C Majumdar, Kambuja-Desa or An Ancient Cambodian Colony in Cambodia, pp.18~19.
(역주*) 쁘레아 터옹과 네약 니엉의 전설은 오늘날 캄보디아의 결혼식 관습에서 주요한 모티프로 작용하여, 결혼식의 형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라.
[바로가기] "캄보디아의 청혼과 결혼, 그리고 이혼 관습" |
2.1.8. 푸난 역사의 '까운딘야'라는 이름이 나타난 여타 사례들
'까운딘야'라는 이름은 인도에서 1세기경에 조성된 따밀어(Tamil) 비문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푸난에서는 6세기경에 '까운딘야'라는 성씨를 사용하는 가문이 국가를 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자현(簫子顯, Xiāo Zīxiǎn: 485~537)이 저술한 중국 사서 <남제서>(南齊書, Book of Southern Qi)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푸난의 왕 교진여사야발마(僑陳如闍耶跋摩, Qiáochénrú Shéyébámó, 까우딘야 자야와르만[Kauṇḍinya Jayavarman])가 484년에 불교 승려 나가세나(那伽仙, Nàqiéxiān, Nāgasena)를 보내와,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황제에게 참파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린이(Línyì) 정벌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중략) 이에 중국의 황제는 사야발마의 선물에 사의를 표했지만, 린이를 정벌할 군대는 파병하지 않았다."(주15) |
(주15) Pelliot, "Le Fou-nan, pp.259~260. |
2.2. 푸난의 전성기와 쇠퇴
푸난은 3세기의 판시만(Fan Shiman, [병음] Fàn Shīmàn) 왕 치세에서 그 국력이 정점에 달했다. 판시만 국왕은 제국의 해군을 증강하고, 관료제를 개혁했으며, 준-봉건적 체제를 구축했다. 그가 구축한 준-봉건적 체제는 이 지역의 관습과 정체성에 대부분 손상받지 않은 상태로 보존됐고, 특히 푸난 제국이 세력을 확장한 지역들에는 더 더욱 그러했다.
판시만 및 그 후계자들은 해상교역을 관리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에 사신을 파견했다. 푸난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인도 문화화'(Indianization)를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첸라(Chenla 혹은 Zhenla)와 같이 후대에 탄생한 왕국들은 모두 푸난의 제도를 모방했다. 푸난인들은 강력한 중상주의(mercantilism) 및 상업적 독점체제를 수립했고, 그것은 후대 이 역내에 탄생한 제국들의 모범적 패턴이 되었다.
6세기에 크메르인들이 건국한 첸라는 푸난을 대체하면서 흡수했다. 크메르어로 작성된 최초의 비문은 바로 푸난이 몰락한 직후의 시기에 세워졌다. 후대의 크메르어 비문들이 캄보디아 남부에 집중된 것을 보면, 크메르인들은 그보다 더 일찍 이 지역에 출현했을 수도 있다.(주16) 푸난인들의 인종적 정체성에 관해 확증을 주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대의 학자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존하는 증거를 토대로 보면, 하나의 지역으로서 푸난에서 그 지배적인 거주 그룹이 크메르민족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주17) |
(주16) Michael Vickery,"What to Do about The Khmers",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27, 2, 1996. p.390.
(주17) Michael Vickery, "Funan Reviewed: Deconstructing the Ancients",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C-XCI (2003–2004), pp.101~143. 특히 p.125 참조. |
3. 푸난의 사회
푸난 시대의 기록물이 현존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푸난에 대한 정보 중 많은 부분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캄보디아 남부 및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에는 벽돌을 이용해 구축한 담장, 진귀한 금속류, 도자기 등이 포함된다. 또한 앙코르 보레이의 거주지와 해안 지역들 사이에는 대형 운하 체계도 발견되어, 이 지역에 고도로 조직화된 정부가 존재했음을 시사해주었다.(주18) 푸난은 높은 인구밀도를 지닌 복잡하고도 정교한 사회였고, 진보된 기술 및 복잡한 사회적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주18) Charles Holcombe, Trade Buddhism: Maritime trade, immigration, and the Buddhist landfall in early Japan, p.280. |
3.1. 푸난의 수도
학자들은 푸난이 단일하며 통일된 정체라는 가정 하에서, 그 '수도'의 위치에 관해 다양한 언어학적 견해들을 내놓았다.
- '푸난'이란 국명이 크메르어 '프놈'(='산'이란 의미)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오늘날 캄보디아 쁘레이 웨잉(Prey Veng) 도, 바남(Banam) 읍 인근의 바프놈(Ba Phnoṃ) 지역이 푸난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조르쥬 세데스는 '앙코르 시대'(=크메르 제국)의 비문들이 '위야다뿌라'(Vyādhapura: '사냥꾼들의 도시')로 지칭한 곳이 푸난의 수도라고 제안했다.(주19) 세데스는 중국의 사서들이 푸난의 도읍을 '테무'(特牧, Temu, [병음] Tèmù])라고 지칭한 것을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그는 '테무'라는 명칭이 '사냥꾼'을 의미하는 크메르어 '달막'(dalmāk)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타 학자들은 크메르어 '달막'이 '사냥꾼'이 아니라 '덫 사냥꾼'이란 의미임을 지적하면서, 세데스의 주장을 반대했다.(주20)
불행하게도 지난 수십년 동안 캄보디아 남부에서 푸난 시대의 유적지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은 이뤄지지 않았다. 비록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푸난의 수도가 위치했던 지역은 바로 이곳이다.(주21)
(주19) George Cœdès,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Susan Brown Cowing). Honolulu: East West Center Press, 1968, p.36 ff.
(주20) Michael Vickery, Society, Economics, and Politics in pre-Angkor Cambodia: The 7th–8th centuries, p.36 ff..
(주21) Miriam T. Stark, et al., “Results of the 1995–1996 Archaeological Field Investigations at Angkor Borei, Cambodia”, Asian Perspectives, vol.38, no.1, 1999, on University of Hawai’i, p.7ff. |
3.2. 푸난의 문화
푸난의 문화는 토착적인 신념들과 인도의 관념들이 혼합된 것이었다. 푸난 왕국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국가 행정을 위해 인도인들을 고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궁정에서는 산스끄리뜨어가 사용됐고, 처음에는 힌두교가, 그리고 5세기 이후에는 불교의 교리가 전해져 보급됐다.
각종 기록들은 푸난 왕국의 조세는 금, 은, 진주, 향나무로 바쳤다고 전한다. <양서>에 기록된 3세기의 오나라 사신 강태(康泰, Kāng Tài)와 주응(朱應, Zhū Yīng)은 푸난이 노예제를 채택했으며, 그 사법체계는 잔혹재판(trial by ordeal)(역주)의 형식을 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잔혹재판에는 붉게 달군 쇠사슬을 운반토록 한다든지, 끓는 물 속에서 금반지나 달걀을 건져내도록 시키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역주) 마땅한 용어가 없어 '잔혹재판'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형식의 재판은 특히 서양 중세시대의 마녀재판에서 유행한 것으로, 고문이나 잔혹행위를 견뎌내면 무죄고 견디지 못하면 유죄로 인정되었다. 가령 서양의 중세시대에는 혐의자를 물속에 담그어 익사하지 않는지 본다든가, 불 속에 들여보내 본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
고고학적 증거들은 대체로 중국의 기록들과 일치한다. 중국 문헌들은 푸난인들이 대나무를 엮어만든 집에 살며, 쌀농사를 짓었으며 금, 은, 상아, 이국적 동물들을 조공으로 바쳐왔다고 기록했다.(주22)
캉 타이의 기록도 푸난 문화에 관해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이지만, 중국 정사에서는 263년에 푸난의 악사들이 중국을 방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당시 중국의 황제는 너무도 감명을 받아 난징(南京, Nanking) 인근에 푸난 음악을 위한 기관을 세우도록 명했다고 한다.(주23) 푸난인들은 대량의 장서를 수집해 나라 안에 서고들을 가지고 있었고,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푸난 출신의 승려인 만드라세나(Mandrasena, 曼陀羅仙)와 상가바라(Saṃghabara, 僧伽婆羅)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국(=양나라)에 주석하면서, 산스끄리뜨어(혹은 쁘라끄리뜨어[prakrit]일 수도 있음)로 된 몇몇 불교 경전들을 중국어(=고전한문)로 번역했다.(주24) 이 경전들 중에는 [훗날 현장(玄奘: 602~664)이 재번역하면서]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Saptaśat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이라 제목을 붙였던 [대승 경전] <문수사리소설 마하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 Mahāprajñāpāramitā Mañjuśrīparivarta Sūtra)도 포함된다.(주25) 만드라세나는 이 경전을 <문수사리소설 마하반야바라밀경>이란 제목으로 한역했고, 상가바라도 <문수사리소설 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이란 제목으로 별도의 번역을 남겼다.(주24) 이 경전에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3.3. 푸난의 경제
푸난은 동남아시아에 출현한 최초의 거시적 경제체제였다. 이 왕국은 무역과 농업을 통해 번영했다. 푸난은 분명히 독자적인 동전을 주조했고, 그 동전에는 왕관푸른목도리꿩(Crested Argus)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주26)
푸난은 당시 인도와 중국의 교역로에 위치한 끄라 협부(Isthmus of Kra, 끄라 지협)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끄라 협부는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끄라 반도)에 위치한 좁은 지협으로서, 인도에서 선적된 물류가 이곳의 육지를 통과할 경우 비용이 대폭 절감되었다. 이후 동쪽의 태국만(Gulf of Siam)에서 다시금 배에 선적된 후, 메콩 삼각주와 베트남의 해안을 따라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푸난의 왕들은 2세기에 끄라 협부에 위치한 정치적 단위들을 정복했고, 그를 통해 말레이 반도에서 오늘날 베트남 중부지방에 이르는 교역로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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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Arch-Atlas) '끄라 협부'(검은 점선 화살표)와 '말레이 반도', 그리고 '말라카 해협'의 해상 교통로(검은 실선 화살표). 오늘날의 '끄라 지협'은 태국 남부지방에 속하며, 이곳에 운하를 건설하자는 계획도 꾸준히 제안되곤 한다. 그러나 현재의 태국 정부는 방콕에서 정 서쪽에 위치한 미얀마의 타워이 항구 개발에 더욱 구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방콕에서 미얀마의 타워이 항구를 이용해 인도 남부의 첸나이 항구로 물류를 수송할 경우 3일 정도가 소요되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할 때 소요되는 일주일 정도의 기간에 비해 현저히 단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크세] |
푸난인들의 정착지였던 옥 에오(Oc Eo)는 말라카 해협(Straits of Malacca)과 가까운 곳으로서, 선박들이 기항할 항구이자 국제교역로의 화물집산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푸난의 상업적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에오에서는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뿐만 아니라 로마의 공예품까지 발견됐다.
독일의 고전학자 알브레히트 딜레(Albrecht Dihle: 1923~ )는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살았던 고대의 지리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y: 90~168)가 말한 카티가라(Kattigara)가 바로 옥에오였을 것이라 믿었다. 카티가라는 중국과 로마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만나던 상업중심지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Alexander)라는 그리스-로마계 상인이 로마 제국의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카티가라에 도착하기까지의 항해기를 상세히 묘사했는데, 딜레는 옥에오야말로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라고 생각했다.(주27)
조르쥬 세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푸난은 해상교역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장악했다. 그곳은 말라카 해협으로 가려는 항해자들에게 기항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보다 더 많은 수였을 말레이 반도의 끄라 협부 통과자들을 위한 기착지이기도 했다. 만일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카티가라가 태국만 연안의 인도차이나 서편 해안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푸난은 심지어 동 지중해 지역에서 온 항해자들의 종착지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주28) |
한편, 푸난은 정교한 영농체계를 통한 농업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여기에는 잘 조성된 저수지 및 관개수로도 포함된다. 푸난의 인구는 주로 메콩 삼각주 지역의 강들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은 어업 및 벼농사에 기반을 둔 경제를 발전시키기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주26) Lương Ninh, “Óc Eo - Cảng thị quốc tế của Vương quốc Phù Nam (Óc Eo – International Trade Port of Funnan Kingdom)”, Khảo cổ học / Vietnam Archaeology, 2011년 3월, pp.39~44.
(주27) Albrecht Dihle, “Serer und Chinesen”, in Antike und Orient: Gesammelte Aufsätze, Heidelberg, Carl Winter, 1984, S.209.
(주28) George Coedès, Les Peuples de la Péninsule Indochinoise: Histoire - Civilisations, Paris, Dunod, 1962, pp.62, translated by H.M. Wright, The Making of South East Asi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6, p.58-59). |
3.4. 푸난의 외교관계
중국과의 관계를 제외하곤, 푸난의 정치적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는 편이다. 푸난은 중국 남부에 위치했던 오(吳, Wú) 왕조 및 양(梁, Liáng) 왕조와 외교관계 및 교역관계를 갖고 있었다.(주18)
푸난이 서기 270년에 이웃국가엿던 린위와 연합하여 통킹(Tongking, [베트남어] Đông Kinh: '동쪽의 서울'[東京]이란 의미)을 공격한 짧은 분쟁도 기록되어 있다. 통킹은 현재의 베트남 북부지방으로서(=하노이가 위치한 수도권), 당시에는 중국의 식민지였다.
중국측 사료에 따르면, 푸난은 자국의 제후국이었던 첸라에 의해 병합되어 흡수되었다. 첸라는 크메르 민족의 국가로서, 첸라 시대의 비문들은 산스끄리뜨어 및 크메르어로 조성됐다. 푸난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인물은 루드라와르만(Rudravarman, 留陁跋摩 [Liútuóbámó])으로서 514~545년 사이에 재위했다.

(지도) 푸난 시대의 세계 지도. 서기 4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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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쥬 세데스는 한때 푸난의 통치자들과 인도네시아 지역에 위치했던 사일렌드라 왕국(Sailendra dynasty)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세데스는 중국 사료에 음사된 '부남'(=푸난)이란 국호가 '산'을 의미하는 크메르어 '프놈'(phnom)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점에서, 사일렌드라의 왕들이 사용했던 '산의 군주'란 칭호를 푸난의 왕들도 사용했을 것이라고 믿었다.(주29)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세데스의 가설을 반대하면서, 그러한 이론을 입증하기엔 캄보디아 역사의 초기에 조성된 금학석학 증거들(=비문들)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주30)
푸난의 해안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말레이 반도로 건너가 붉은 땅의 왕국(Red Earth Kingdom, 치뚜[Chi Tu])을 건국하기도 했다. 붉은 땅의 왕국은 푸난에서 파생된 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주29) George Cœdès,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Susan Brown Cowing). Honolulu: East West Center Press, 1968, p.36.
(주30) Vickery, "Funan Reviewed," p.103, pp.132~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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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재번역 아티클은
사실상의 전면 개정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간 새로운 연구성과들이
많이 첨가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