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월평리(月坪里)
월평리는 황룡면 소재지이며 신시장·월산동·교동·원월평·신기촌·일산동으로 이루어졌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남삼면에 신촌리(新村里)·동림리(東林里)·덕산리(德山里)가 나오고 읍동면에 월평리가 나오는데 신촌리는 신기촌, 동림리와 덕산리는 이미 폐촌된 둥두리와 덕울암인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남삼면 신기리·장기리(場基里) 읍동면에 월평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장기리는 현 월산동 일대로 추정된다. 1914년 신기리·장기리·건동리 일부와 월평리를 합하여 월평리라 하였다. 1926년 신시장이 생기고 1960년경 교동이 월산동에서 분리되고 1980년 일산동이 새로 생겼다. 이상의 기록 등으로 볼 때 월평리에는 월산봉 기슭에 원월평과 신기촌이 있었는데 시장이 옮겨오면서 오늘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ㅇ 신시장(新市場)
원래 하천 강변이었는데 1926년 시장이 옮겨오면서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인구 이동이 심하여 일제때부터 거주해 온 성씨는 장흥고씨와 전씨 등이며 해방후 울산김씨·진주강씨·밀양박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는 일본인 7∼8명이 잡화상·지물·고리대금업·야채상을 하면서 상권을 잡았으며 정미소·병원·약국·약방·음식점 등이 있었다. 현재 182호 595명이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물 : 고윤경(황룡시장 발전에 공헌)·김기중(광주대성학원장)·강대영(유창어페럴대표)·이정수(의사)·정정호(면장)·김형중(성지포장 사장)·조복래(군의회 의장).
ㅇ 월산동(月山洞)
원황룡 마을에 있던 황룡시장이 옮겨오면서 성촌된 마을이다. 그 시기는 고종때로 추정되며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의 황룡전투가 이곳 시장터에서 발발하였다. 1923년경 내장산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26년 장터가 좁아 신시장으로 옮겨갔다. 일제때는 120호 정도였으며 한때 140여호가 살다가 지금은 115여호로 줄었는데 거주 성씨는 나주임씨 5·강릉유씨 4·회진임씨 3·해주최씨 3·여양진씨·남원양씨·밀양박씨·김해김씨·광산김씨·무안김씨·하동정씨·진주정씨·평산신씨·울산김씨·충주박씨·동래정씨·전주이씨 기타 등이다. 동명유래 :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장기리(場基里)로 나온다. 원래 [장터]라 부르다가 장이 옮겨간 후는 [구장터]라 불렀는데 해방 후 마을 앞 월산봉을 본따 월산동이라 했다. 인물 : 변진명(과학기술연구원 교수, 박사)·변진장(판사)·박정봉(중등교장)·김정수(전남대 교수)·박종권(교수 박사)·박종국(여수시장)·최상호(준장, 사단장).
ㅇ 월산동(月山洞)
원황룡 마을에 있던 황룡시장이 옮겨오면서 성촌된 마을이다. 그 시기는 고종때로 추정되며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의 황룡전투가 이곳 시장터에서 발발하였다. 1923년경 내장산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26년 장터가 좁아 신시장으로 옮겨갔다. 일제때는 120호 정도였으며 한때 140여호가 살다가 지금은 115여호로 줄었는데 거주 성씨는 나주임씨 5·강릉유씨 4·회진임씨 3·해주최씨 3·여양진씨·남원양씨·밀양박씨·김해김씨·광산김씨·무안김씨·하동정씨·진주정씨·평산신씨·울산김씨·충주박씨·동래정씨·전주이씨 기타 등이다. 동명유래 :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장기리(場基里)로 나온다. 원래 [장터]라 부르다가 장이 옮겨간 후는 [구장터]라 불렀는데 해방 후 마을 앞 월산봉을 본따 월산동이라 했다. 인물 : 변진명(과학기술연구원 교수, 박사)·변진장(판사)·박정봉(중등교장)·김정수(전남대 교수)·박종권(교수 박사)·박종국(여수시장)·최상호(준장, 사단장).
ㅇ 교동(校洞)
원래 원월평에 속한 마을 같으며 월산동과도 한 마을이었다. 점거리라 불렀는데 옹기를 만들던 곳인가는 확인할 수 없다. 1920년대 월평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교동이라 불렀으며 이때 20여호가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때 울산김씨·한양조씨·밀양박씨·김해김씨·광산김씨·제주양씨·인동장씨·최씨·이씨 등 60여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2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으나 많은 인구의 이동이 있었다. 철도 너머 동쪽에 20여호가 있었는데 고려시멘트 공장 건립을 계기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최근 아파트가 들어서 현재는 115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영윤(금융조합장, 면장)·최석중(한국병원원장)·양대빈(면장)·장용운(육군소령).
ㅇ 원월평(月坪)
이마을은 읍동면이었는데 1914년 황룡면으로 편입되었다. 300여년전 울산김씨가 입향하여 세거해 왔는데 그전에 기씨가 살았다는 설도 있다. 후에 인동장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남원양씨·광산김씨·평강채씨·파평윤씨·회진임씨, 해방후에 경주최씨 그리고 6·25후에 행주기씨·전주이씨·능주구씨가 들어왔다. 현재 12호가 살고 있다. 1907. 11. 5 의병이 기숙했으며 이듬해 4·18 의병 60여명이 일군과 1시간 동안 교전하여 의병 3명이 죽고 화승총 2정을 빼앗겼다. 이틀후 월평주둔 일본 순사대가 김태원 부대 후군장 김옥현 외 2명을 생포하고 의병을 추격하던 중 의병 50여명이 역습하여 포로를 감시하던 김경시 외 1명이 민가로 도망하는 틈에 포로 3명을 구출하였으며 김경시는 좌측 대퇴부에 중상을 입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안두룩·산정]이라 불렀는데 월산봉을 본따 월평으로 변했다. 인물 : 김시중(월평초등학교 설립자)·양병희(농촌지도소장)
ㅇ 신기촌(新基村)
구전에 의하면 현 신기촌 동남쪽 1.5km에 인동장씨가 터를 잡은 덕울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폐촌되었으며(시기 미상) 남쪽 낙산봉 기슭에 둥두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1989년 8호가 살다가 성지포장 공장이 들어 서면서 없어졌다. 그후에 신기촌이 생겨 신촌(새터)이라 부르다 동명이 바뀌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신촌리·동림리·덕산리가 나오는데 동림리는 둥두리이고 덕산리는 덕울암인 것 같다. 그러나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신기리(신촌리)만 기록되어 있고 동림리·덕산리는 보이지 않는다. 신기촌은 약 380년전 인동장씨가 들어온 후 울산김씨·회진임씨·의성김씨·광산김씨·경주김씨·김해김씨·경주이씨·밀양박씨·광산노씨·파평윤씨·행주기씨가 들어오고 6·25후에 의령남씨·남원양씨·밀양손씨·하음봉씨 등이 들어와 현재 73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일중(황룡면장)·기노훈(북이면장) 신기촌 남쪽에 1920년대로 행주기씨가 입향하여 성촌된 일평(日坪)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곡부공씨·탐진최씨·황주변씨·의성김씨·인동장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새터]라 불렀는데 1960년 월평과 대조되는 [일평]으로 바꿨으나 1989년 공장이 들어와 없어졌다. 인물 : 기우증(장성초대교육장)·기우양(교장)·기수도(장성여고교장)·기항도(독립운동)·기홍도(부군수)·이일현(군의원)·김영안(국민은행천안연수원장)·이종현(광주교육청중등장학관)·기서(광주시교육청장학사).
ㅇ 일산동(日山洞)
일본인 오까모도가 아카시아 밭에 뽕나무를 조성하여 종방을 세웠는데 해방후 밀양박씨·강화최씨·김해김씨·울산김씨·함양박씨·전주최씨·진주정씨 등이 들어왔다. 처음은 종방 건물에서 살다가 새마을 쪽에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이때는 월산동에 속해 있었다. 1978년 건동마을이 고려시멘트 채석장으로 되면서 이곳에 마을을 조성하여 24호가 들어왔으며 1980년 일산동으로 독립하여 8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월산동에 대칭대는 동명을 붙였다. 인물 : 최종삼(유도 국가대표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