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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좌(성경의 힘) - 제30강 설교와 교육 1부
오늘은 함께 ‘설교와 교육’, 교육과 설교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는 그런 시간으로 갖겠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우리 여러 목회자 여러분들이 참여해 계시는데, 목회자뿐 아니라 교사들도 혹은 구역장님들도 아니면 또 셀목회를 하는 교회의 셀리더 되는 분들 이런 분들이 다 이따금씩 설교를 하시게 될텐데..
설교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해서 이번에 설교와 교육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설교’ 하면 일반적으로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목사 교사 구역장 또 집에서는 모든 집사님들 가정에서도 장로님들 다 설교를 하실 기회가 있을텐데, 배우지 않고 하는것보다는 조금 배우고 하는게 났겠죠?
오늘 시간이 허락되는데로 설교부분을 다루고, 시간 나면 시간이 허락되는데까지 교육도 같이 연이어서 다룰려고 합니다.
아마 첫시간은 설교쪽을 비중있게 다루는데, 설교와 교육이 사실은 같은 것 같지만 차이가 좀 있어요. 그래서 먼저 설교를 조금 살펴보겠는데,
우리 목회자분들에게는 기본으로 감당해야될 어떤 사역이 있는데 제가보니까 8가지 정도가 주로 힘쓰는 사역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역이 목회자의 아주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고,
그 다음에 전도,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전도는 사람을 향하는 건데, 전도하는 것도 역시 목회자가 감당해야될 일이고,
그 다음에 오늘 우리가 다루는 설교, 설교는 목회자의 사역중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겁니다. 그래서 설교와 아울러 교육을 해야되니까. 교육도 참 중요하죠.
그리고 개인적이고 가정적일때는 상담도 있고, 심방도 따로 있습니다. 상담도 우리가 감당해야될 사역이고, 심방도 해야되고, 그 다음에 인사 행정 이런 것 다 목회자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역인데,
오늘 다룰 주제는 설교와 교육입니다.
아마 제가 가끔 목회자분들이 모였을 때, 목회사역중 가장 큰 비중과 부담이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고 여쭈어보면 설교가 가장 큰 부담이다 싶어요.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하는 것이 항상 부담이 된다 이렇게 말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맨먼저 첫시간에는 설교의 역사, 도대체 설교라는 것은 언제 언디서 누가 시작해서 어떤 역사를 걸어왔는지 이런 것을 살펴볼려고 해요.
제가 성경을 통해서 설교의 역사를 쭈욱 더듬어 보니까, 아마도 모세가 한 설교가 효시가 되지 않는가? 모세가 처음을 설교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가 신명기를 찾아볼려고 합니다.
신명기 1장을 보시면,
신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거기 선포한 말씀이라는데 줄을 그으세요. 기록된 말씀은 성경이죠. 그리고 선포한 말씀이 설교입니다. 설교. 선포한 말씀이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이 성경이라고 할때, 기록된 것으로 만족하다면 설교가 사실 필요없을줄 몰라요.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기록된 성경만 가지고는 잘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는건데요.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신1:2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신1:3 제 사십 년 십 일 월 그 달 초일 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
여기도 줄을 그으세요. 모세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했다. 고한다는 의미도 있고, 4절에,
신1:4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때가 되겠죠. 때와 장소와 인물, 누가 했는냐 무엇을 했는냐 어떻게 했느냐 이렇게 나누는건데, 여기에보면 어떻게 했느냐 하면 5절에,
신1:5.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줄을 그으세요. 율법 설명하기.
그러니까 설교라는 것은 다른말로 하면 율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또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다 고하는 겁니다. 다 알려서 알게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사역은 실로 막중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명과 이런 하나님 말씀이 성경책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완전히 성공을 한거죠? 그래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성경기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경책에까지 옮겨지는 것은 확실히 성공을 했는데, 성경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다면 설교자들은 할일이 없죠.
책만 부지런히 찍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끝날텐데, 그것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해야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도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했다고 할때, 이 율법은 레위기를 두고 한 말이죠. 레위기가 일차적으로 먼저 기록되었는데, 책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읽어봐라 하고 준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만하게 설명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 말씀을 일반 회중이 알아들을 만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대체로 명설교가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다 사표내야돼요.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돼.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성경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원만하게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성경의 부담이 한결 줄어들지 않겠나.
그래서 저는 실제로 제가 지금 목회하면서 옛날 어른들이 하듯이 설교를 인위적으로 설교를 많이 만들거나 그렇지 않고 성경말씀을 내가 바르게 파악했는가 정말 거기에 고민을 합니다. 내가 정말 바르게 파악했는지. 그리고 내가 정말 바르게 이해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고 나면, 내가 알고 깨닫고 믿고 그리고 실천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가는것이냐? 이렇게 해요. 이렇게 하니까, 그리 큰 부담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명 설교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굉장히 부담이 될거예요. 수많은 목사님들이 아주 성도들이 큰 감동을 주는 그런 설교를 만들려고 하니까, 그것은 굉장히 부담이 되는 것 같애요. 저도 목회자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그렇게 한때 그렇게 했는데, 지금은 제가 그런 방법은 지양하고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할려고 알아들을 만하게만 설명하고 과잉해석을 하지 않는, 지나친 하지 않고 그저 알아들을 만하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쪽에 초점을 맞춰서 설교 하는데, 이 설교방법은 모세에게 배운겁니다.
모세를 직접 만나봤다는게 아니고 모세가 율법을 설명했다 하는게 신명기라는 책인데, 율법은 레위기이고, 이것을 설명한게 신명기라 하면, 모세가 어떻게 설명했는가? 어떤 말씀을 어떻게 해설해 갔는가 하는 것을 배울수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지금처럼 하는 설교, 다시말하면 성경을 간명하게, 난해하지않게, 쉽게, 어렵지 않게, 누구나 알아들을 만하게, 이해하고 납들할만하게, 이렇게 설명해가는. 이런 스타일의 설교를, 설교 분류를 할때 맨 나중에 설교의 역사상 가장 나중에 개발된 그런 제목으로 제가 잠깐 말씀을 드릴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교학, 다시말하면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이라는 마당이 있는데, 실천신학의 꽃을 설교라고 해요. 그 우리가 신학을 크게 나누면, 신학교가 아니지만, 신학의 마당이 크게 네 마당이 있어요.
첫째가, 성서신학이 한 마당이고,
둘째가, 조직신학이 있어요. 조직신학.
그 다음에, 역사신학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실천신학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런말을 합니다. 실천신학의 비중을 두어서 하시는 분들은 ‘모든 이론신학은 실천신학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 말도 가능해요. 모든 이론신학이라는 것은 실천신학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니다. 그리고 실천신학의 꽃이 설교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신학중에서도 결론적으로 목적론적으로 볼때, 설교학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도 아마도 교회의 어떤 성장과 성숙과 성화의 성패는 거의 설교에 달려있다고 할수 있을 거예요. 설교와 교육에 달려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외 조직이라든지 전도 열정이라든지 기도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설교라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소원은 한결같은 소원과 바램은 세계에서 최고의 설교자가 되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소원은 다 있겠죠. 그런데 굉장히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설교의 평가라든지 설교의 분류,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룰텐데,
1. 모세의 설교
일단은 설교의 역사를 다룰 때, 모세가 처음으로 설교했다 이렇게 보고.
모세의 처음 설교는 ‘신명기’라는건데, 그 신명기라는 말이 ‘신’자가 일반적으로는 납 신(申)자를 씁니다. 납 신(申)자. 한문 글자로 납 신이라는 말은 ‘납’ 하는 것은 ‘원숭이’를 말해요. 잔나비 나비 잔나비 납하는것은 원숭이 신자 그런뜻인데, 그 신자의 용법 용례가 납 신이라고도 쓰고 성(姓)씨를 두고말할 때 성 신(申)이라고도 말하고, 더 큰 방대한 한문 옥편에 보면 신자가 ‘되풀이할 신(申)’자로 씁니다. 그래서 지금 신명이라할 때 신자가 납신도 아니고 성신도 아니고 되풀이할 신자로 기록된거야.
그래서 ‘신명기(申命記)’라고 하면 ‘계명을 다시한번 재해석한 것이다.’ ‘율법을 설명했다’하는 말과 같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 신명. 명령을 다시한번 재해석하고 재음미 한 것이다. 이런 뜻이 신명기(申命記)란 뜻이예요.
그래서 이 신명기라는 것은 최초의 설교일뿐 아니라, 많은 성경학자들이 인류역사의 최대 웅변서라고 해요. 웅변사에 이만한 이렇게 웅장한 웅변이 없었다고 해요. 그만큼 신명기는 설교중의 설교요. 아마 우리가 모세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설교가 나중에 나올텐데, 그것은 산상보훈이죠? 그런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설교가 최고일 것이고, 두 번째로 말하면 신명기, 다시말하면 모세가 레위기를 가지고 신명기라는 웅변적 설교한 것이 위대한 설교가 아니냐.
저는 그렇게 보고있기 때문에 모세의 설교, 신명기라는 설교를 저의 설교의 한 모델로 삼아서 꽤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연구하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 어때요? 우리가 생각할 때, 설교하면 성경 본문은 그저 한두절 하거나 서너절 길어야 다섯절 대개 열절도 안읽죠? 10절 정도도 안되는 것을 한 20분이나 30분 이렇게 설교한다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무조건 설교는 본문보다 5배나 10배 길어지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는데,
제가 모세 설교를 벤치마킹 하면서 감탄해 마지 않는 것은, 본문 레위기 보다도 본문을 해설한 신명기가 더 짧아져 있다는 겁니다. 길어진 것이 아니라 더 짧아져 있어요.
신명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1장 1절부터 4장 43절까지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했던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있고,
4장 44절부터 28장 68절까지가 율법설명 한 거예요. 그야말로 본론과 같은 것인데, 율법 설명하는 그 부분을 페이지수로 환산하면 42페이지밖에 안돼요. 그런데 레위기는 45페이지거든요. 그러니까 본문이 45페이지이데, 해설한 것이 42페이지로 줄었으니까, 이것은 정말 능률적인 설교죠.
이런 설교는 지금까지 설교학적으로 전혀 언급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중에 모세의 설교라는 그런 제목으로 한번 살펴보는 중에 그것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는 성경 한주일에 주일 낮예배 때보면 예배시간이 한시간정도, 조금 길어지는 교회는 한시간 10분 20분 아마 한시간 반까지 하는 교회는 많지않죠.
한시간정도 예배하다보면 설교할 수 있는 시간은 25분 30분이 한계예요. 25분 30분 그 짧은 시간에 설교를 해야되니까, 심도있는 이야기라든지, 내용이 큰 내용은 언급을 잘 못하고 그렇게 너무 짧은 이야기밖에 못하고 너무 엷은 이야기로 끝나고 이렇게 하니까, 설교라는 것이 그저 한 몇절정도 읽고 그것을 많이 해석을 해서 과잉해석도 하고 예화도 끝없이 가져와서 그렇게 되니까, 무조건 설교는 본문보다 5배 10배 이렇게 불어나는걸로 인식을 해요.
그렇게 보편적으로 그렇게 하는데, 제가 모세의 설교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부터 성경안에 있는 설교들을 꽤 관심을 가지고 살펴봤습니다. 그 얘기는 나중에 조금더 언급하기로 하고.
2. 솔로몬의 설교
두 번째 설교를 본다면, 솔로몬의 설교가 아니겠는가? 볼수 잇어요. 솔로몬의 설교.
솔로몬의 설교는 잘 안들어보셨죠? 왜냐하면 솔로몬이 목회자도 아니고 매주 설교한것같지 않은데 뭐 솔로몬의 설교냐 하는데, 우리가 전도서라는 말이 바로 그 ‘설교자’ 그런뜻입니다. 전도서라는 말이 전도서가 솔로몬의 설교죠.
솔로몬은 설교를 따로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록으로 남아있는 솔로몬의 설교는 딱 한편이 남아있습니다. 이른바 전도서라는 책으로 되어있는데, 모세는 자기 체험을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 율례, 법도. 율법을 가지고 해설 한 것이고,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았어요. 지혜를.
성경을 기록할만큼의 지혜를 받은 사람인데, 그 지혜를 가지고 인생이 뭔지, 사람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지,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 이런 문제를 가지고 ,그야말로 인생철학, 그래서 전도서라는 책을 두고 저에게 이책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면 전도서 이렇게 하지 않고 ‘솔로몬의 인생론’이다. 이렇게하면 좋겠어요. 전도서라는 책의 성격을 솔로몬의 인생론, 이렇게 하면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애요.
그래서 매우 철학적으로 기록을 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이런 내용을 끝없이 소개하는데,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 드러내봐요.
부귀 명예 권세 영화 향락 여자 돈 황금 온갖 세상사치하는 것을 다 추구했는데 이사람이 자기 마음과 눈에 원하는 것은 금하지 않고 다 해봤다는 거야.
여러분 우리도 그랬으며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마음으로 눈으로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뭐든지 다 해봤다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솔로몬에게 허락한거야. 전도서 한권 쓰게 할려고. 모든 것 자기 마음에 원하는 것은 안해본것없이 다 해봤는데, 마음과 눈이 원하는 것을 다해보고 남긴 문서가 전도서라는 책이예요.
그 결론은 추구해 볼때 헛되다는 거예요. 저것을 가지면 행복하겠다 싶어서 추구해봤는데, 가져보면 다 허무하고 얼마안가서 시들해버리고 싫증나버리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전도서라는 책을 우리가, 자꾸 전도서라는 것이 설교인데, 설교를 또 설교해봐요. 얼마나 불어나겠어요. 눈덩이처럼.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은 별로 지혜롭지 못하다는 거야. 신명기가 모세의 설교인데, 설교를 또 설교해봐. 그러면 그 설교를 또 설교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중에 해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초점이 흐려진다는 거야.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하는 스타일의 설교는 어떤 때는 성경말씀이 아주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데, 그 안에 핵심, 초점, 그리고 논지, 여기서 말하는 진짜 뼈대는 뭔가? 이런 것을 오히려 찾아내는 그런쪽으 설교를 해보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태까지 우리가 무조건 확대하기만 했던 그런 설교에서 거꾸로 축약 압축해서 논지가 드러내게하는 그런 스타일의 설교를 소개하는 겁니다.
지금 솔로몬의 설교 전도서 안에 있는 솔로몬의 설교를 읽어서 볼때,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것들이 대부분은 다 헛되다는 거야. 헛된줄도 모르고,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살아버리면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이 될까요? 왜 이렇게 조용해요? (헛된 인생) 예 헛된 인생을 사는거죠.
우리가 헛되게 살지 말자는 겁니다. 솔로몬이 하는 얘기는. 전도를 읽어보고 많은 사람이 전도서의 결론이 뭐냐 그러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여러분 그러면 불교가 되고 맙니다. 전도서를 1장이나 2장 3장만 읽고말면 불교가 되어버려요. 전도서는 항상 그렇지만, 특히 전도서는 끝까지 읽어봐야 돼. 맨 끝에 가야 전도서의 결론이 나오는데, 그 결론 한번 볼까요.
전도서 펴 보세요. 솔로몬의 설교. 전도서 결론을 봅시다.
거기 보면, 우리가 이런 책을 보고는, 그 책이 어떻게 결론을 맺는가? 무엇을 우리가 다루어서 보여주는가? 이런 것을 잘 봐야되겠죠?
전도서 11장 9절 보시기 바랍니다. 11장 9절 보면,
전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래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할수 있다는 거야. 할수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우리가 젊은 날에 자기 눈과 마음에 원하는 것을 쫓아서 헛된일에 분요하고 헛된일을 추구하고 인생을 즐기기만 하겠다 할수 있는데, 한가지 알아둘 것은 이 모든일로 인해서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심판 한다는거야.
이것이 결론이고, 또 12장 9절 봅시다.
전12: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12:10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전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거기 줄을 그으세요. 회중의 스승의 말씀. 회중의 스승의 말씀 이것이 설교예요. 성경이 말하는 설교라는 것은 바로 회중의 스승되는 분이 그 제자들에게 베푸는 말씀이 설교라는 건데, 그 지혜자의 말씀도 설교일수가 있고, 그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학생들에게 실감나는 얘기죠? 세상에서 뭐 다 힘드는게 많지만 공부하는 것 정말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그런말도 있는데 사실은 공부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훨씬더 힘들어요. 그래서 솔로몬도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한다고 그랬죠. 그리고,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는 것이 솔로몬 설교의 결론이예요.
그러니까 여태까지 우리가 맨날 좀 보다말때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그게 마치 전도서의 결론인것처럼 봤는데 아니잖습니까? 끝까지 읽고 가서 결론을 보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뭐든지 추구할수 있고 자기 욕심이라든지 향락이라든지 쾌락이나 이런 것 다 추구할수 있지만 그리고 놀고 게으름피우고 할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살아라 하는거야.
사실 솔로몬의 일생을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젊은날에는 참 지혜를 추구했어요. 지혜를 . 그리고고는 한때 부귀영화를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향락을 추구하다가 그러다가 타락을 해버렸어요. 그야말로 형편없이 타락을 했다가 아마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본정신이 돌아와서 전도서를 써 놓고 죽은거야.
하나님께서 전도서라는 설교하나 얻을려고 굉장히 많이 투자했어요. 솔로몬으로 하여금 마음과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다 하게 했는데 좋아 너 하나쯤 해봐. 다. 부귀영화 명예 권세 쾌락 여자 온갖 원하는데로 해봐라. 여자도 1000명씩. 그렇게 다 해본 다음에 남긴 책이 전도서라는 솔로몬의 설교집이죠. 제가 이 솔로몬의 설교라는 그런 입장에서 한번 살펴본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외에 설교가 별로 없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봐도 설교라고 할만한게 없어요. 예언자들의 예언은 예언자들은 대부분 책망이죠. 예언자들의 예언문서는 설교라기보다도 거의 책망 일변도로 가는데, 설교라고 하면,
3. 세례요한의 설교
그 다음에 설교를 보면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있는, 다시말하면 구약 끝나는 자리에서 예수님 나타나기 직전에 말씀을 전했던 세례요한의 설교. 일반적인 설교와는 다르죠.
대체로 세례요한의 설교는 온 국민의 회개를 촉구하는 그런 설교였는데, 그 세례요한의 설교를 우리가 원고없이 그렇게 아주 격한 어조로 그렇게 사자후를 토하듯이 외쳤는데, 그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은 세상에 소개되었고, 그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두고 예수님이 평가할 때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자가 일어남이 없다고 평가 했다 말입니다. 우리가 얼른 볼때 모세라든지 사무엘이라든지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굉장한 인물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주셨던 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 다시말하면 예루살렘의 그 당시 기득권자 고관대작들 다시말하면 율법학자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이런 예루살렘에서 잘나가던 사람들 이런 사람 몇몇 말고는 전 이스라엘 국민들이 다 세례요한에게 와서 다 세례받고 그리고 죄를 자복하고 죄를 회개했다는 거야.
그런 점을 두고 예수님께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셨는데, 세례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른걸로는 찾을수 없어요. 처음에 그 말씀에서 왜 세례요한에게 이렇게 높은 점수를 주셨는가? 하고 백방으로 살펴보고 연구해봤는데 달리는 아무 평가 기준이 없습니다. 딱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하고 죄를 자복하고 돌아와서 예수님을 보게 예수님을 만나게 했다는건데,
그렇다면 우리가 설교도 얼마만큼 재미있게 하느냐 얼마만큼 감동하느냐 그런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하는 것, 이게 중요한거예요.
그는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애가타는 심정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하는 심정까지 과감하게 아주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결과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것이거든요.
저는 성품상 성격상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잘 못해요. 고함을 지른다든지 웅변하는 것은 잘 맞지 않아요. 차분히 앉아서 하는 것은 할수 있는데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외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마도 아모스라든지 세례요한이라든지 미가 같은 이런분들이 아마 비슷한 성품의 소유자 같애요. 굉장히 격하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느 한편만 옳다고 할수 없지요? 반면에 호세아 같은 예언자는 자기 간증 자기 가정의 챙피한 이야기 칠칠맞은 자기 아내 음란한 여자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야기 이런 것을 하면서 설득을 하는 이런 설교도 있어요.
나중에 설교의 유형을 볼때, 살펴보겠습니다.
어떻든 세례요한은 굉장히 과격한 편이고, 예수님의 설교는 세례요한의 설교와 다르죠.
4. 예수님의 설교
예수님의 설교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보면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고 해요. 보통 우리 목사님들은 서서 하죠. 예수님은 앉아서 한거야. 저도 따라서 앉아서 하죠. 차분한 설교는 아무래서 앉아서 해야되겠다.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도 설교는.. 기독교가 아니고 유대교 유대교의 랍비는 앉아서 해요. 사도 바울도 하루종일 서서 설교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볼때,
예를 들어서 바울이 드로아에서 한주간 동안 집회를 하거든요. 한주간 동안 내내 서서 말씀을 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긴 강의나 긴 설교는 앉아서 했을 겁니다.
보통 우리가 예배가 한시간이고 설교가 20분 30분이니까 서서 하지만, 예수님이 산에올라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왔다고 이렇게 하고,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이것이 예수님의 설교인데,
이른바 산상보훈이라고 하죠. 산 위에서 진행되었던 보훈, 보배로운 교훈 보석같은 교훈이 담긴 그런 설교라해서 우리가 예수님 설교를 산상보훈이라고 해요.
마태복음 5장과 6장 7장에 걸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황금률’이라고도 하는 말씀도 거기에 있고, ‘팔복’이라는. 정말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오늘 우리 기복주의적 설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은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심령만으로 말하는 것처럼 되어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심령만 아니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거야. 여러분 가난한 사람이 믿음을 갖기 쉬워요.
배가 불러지면 배가 고프지 않으면 진리에도 고프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랑도 고프지 않고, 그래서 여러가지 문제가 배가 너무 부르거나 너무 부요하거나 하면 영적으로 갈급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심령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어요. 그당시에는 잘나가는 부자들이 천국가기 굉장히 어렵다는 말씀을 여러차례 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세속적인 기복적인 것으로 그것만가지고 축복이라 한 것은 잘못된거죠. 그것은 복중에 일부분이지 물질적 세상적 복이라는 것들이 복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그것은 안 믿는사람도 그런복은 받습니다.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의 차원이 달라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웃는자가 복이있는 것이 아니고 우는자가 복이 있다는 거야. 매우 역설적이죠.
자기를 낮추는자가 큰자라는거야. 작은자가 큰자이고 낮추는자가 큰자다. 예수님의 설교를 보면 꽤 역설적이죠. 그런 말씀들이 있어요.
지금 우리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설교하는것과 상당히 차이 날겁니다. 산상보훈 가만히 보시면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듣는것과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낄 거예요. 그 다음에 히브리인들이 갖고있는 개념중에 3대 의(義)가 있어요. 의(義). 그 의가 뭐냐하면, 첫째 기도, 둘재 금식, 셋째 구제입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가 그들 나름대로 3대 의에 속하는데 그것이 너무 형식으로 치우쳐있고 외식으로 치우쳐있다 하는 것을 지적하는 그런 말씀도 산상보훈 속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마쳤을 때에 제자들이 아주 적이 놀랐다는 거야. 왜냐하면 지금까지 바리새인들 내지는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설교와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거야. 너무 차이가 난다 해서 놀랐는데, 그 가르친 내용이 권세있는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는 거야.
시간이 나면 우리가 서기관들 그 당시 랍비들 그런 과잉해석된 설교, 율법을 처음에 가져가서 해석한답시고 한게 ‘미쉬나’라고 해석을 하고 그 다음에 ‘게메라’ 하고 해석을 하고 ‘탈무드’라고 또 해석을 하고 ‘브라이다’ ‘할라카’ ‘하까다’ 계속해서 해석에 해석을 더하고 복잡하게 했던 그런 설교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를 산상보훈에서 그저 읽을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설교한건데, 거기에다 또 설교할 때 너무 많은 말을 보태고 과잉해석을 해버리면 본래 뜻이 많이 흐려져버려요.
그런경우에도 가능하면 많이 해석하지 말고 알아들을 만하게 하고 실천을 하게끔 하는 것.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5. 베드로의 설교
그 다음에 다섯 번째 설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설교인데, 베드로설교를 봐야 되겠죠? 베드로가 예수님께 3년 배운 후에 그리고 성령이 강림한 후에 이루어진 설교인데,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 사도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약성경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설교하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그래서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을 이와같이 이루어졌다 하는 입장에서 설교하는 거야.
어떤 면에서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올 뿐 아니라 오늘 이루어졌다는 설교를 하는거야. 그래서 요엘서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거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로 살아오지 못했는데, 그중에 결정적으로 잘못된게 하나님께서 보내신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너희가. 그렇지만 몰라서 그렇게 했으니까 이제는 뉘우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도 우리가 받은 성령을 받을수 있다. 이런 설교를 하는거야. 굉장히 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고, 단순하고, 굉장히 투박한, 지금처럼 그렇게 과잉해석한 그런설교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도.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설교했을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데, 이것은 세례가 지난번에 세례요한이 외쳤던 그 세례가 아니죠? 그때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고, 이번에 받는 세례는 성령으로 세례받는.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는 그야말로 굉장히 능력있는 그런 설교였죠?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는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의 설교가 나타나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초청받아서 그 가정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설교를 했는데, 고넬료 가족과 친지 그리고 몇몇사람이 모여앉은데서 설교를 하는데,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와 그 교훈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이런 것을 증거하는거야. 증거하는데 설교하는데, 베드로의 설교가 옳고 진리라는 것으로 보증하는 것처럼 성령이 임재하는 그런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설교한 유형이었고. 제가볼때 베드로는 어디가든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정도이지, 지금처럼 해석을 해가지고 뭐는 뭐를 상징하고 그렇게 과잉해석하고 예화를 자꾸 가져와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때 사도들의 설교는 거의 ‘보았다’는 겁니다. ‘나는 그때 거기에 있었다’ ‘나는 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그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만져까지 봤다’ 이렇게 증인되는 증언같은 설교를 한 거예요. 증인이 증언같은 설교가 사도들의 설교였습니다.
그리하다가 오늘 처음 우리 교회가 설교하는 것 제목설교, 예화설교, 간증설교 이런 것은 한참 후대에 가면서 점점 설교가 김이 빠지고 맥이빠진 후에 이루어진 설교야.
초대교회의 설교는 우리가 볼때 전혀 우리가 하는 설교와 다르다는 겁니다. 구약시대의 모세의 설교가 다르고, 솔로몬의 설교도 조금 다른데가 있고, 세례요한의 설교도 다르고, 예수님의 설교도 우리설교와 다르고..
그리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의 설교도 오늘 우리 교회가 하는 설교와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거야.
그래서 일단 우리가 성경 안에서 설교의 역사와 흐름을 유형을 살펴본 다음에 정말 오늘 우리 교회에 강단에 흐르는 설교는 바르게 설교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해야 되겠죠?
6. 스데반 집사의 설교
그 다음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봅시다.
여태까지는 사도 예언자 예수님 모세 이런 사람만 설교하니까 그런분만 설교하는가 했는데, 집사도 설교하지 않습니까.
나는 집사니까 못한다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좀 외람된 얘긴데, 저는 초신자때 설교했어요. 소문나면 큰일날 일인데, 믿자말자 설교를 했다니까. 무식하면 담대하다 그런말 있죠. 아무것도 모르는데 시키는데로 했어. 그래서 집사님들쯤 되면 가정에서 가정예배 설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구역에서 설교할수 있고 거의 지금은 일반 지식 상식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집사님들 장로님들 같으면 얼마든지 설교할수 있어야 됩니다. 꼭 목사만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잘못된 것 같애. 초대교회에도 집사가 설교하지않습니까? 가정에서 가정예배 설교하는 것이고 구역예배 설교하고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오늘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은 쓰면서도 만인제사장 행세는 거의 안하는 것 같애.
교회가 교육을 너무 안했다는 얘기죠. 여기 샤론강좌를 듣는 분들, 우리 CTS를 보는분들 설교가 뭔지 제대로 배워 설교 역사를 배우고 하면 어디서든지 설교할수 있어야 돼요. 사소한 일까지도 목사님 달려와서 설교해줘야되고 이렇게 하면 참 피곤한 일이죠.
하나님 말씀을 잘 배워서 교회없는 곳에 가서 전도 설교 교육 다 할수 있어야 교회가 성장하는 거예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설교중에 한 편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인데, 일곱집사 가운데 한분으로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거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보면, 사도행전 7장 한 장 안에 그의 설교가 다 들어있는데, 그 7장이라는 짧은 한 장 안에서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이 엄청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이야기를 역사 이야기를 아주 압축해서 설교해요.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까지. 그러면 한 2000년간 이야기인데, 그 속에 역사를 압축해서 설교를 했다는 거예요.
이런 설교를 설교학에 안나오는 설교인데, 압축설교 혹은 요약설교 혹은 역사설교 이렇게 할수 있어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설교 스타일이예요. 자주 스데반 식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강의할 때 할수 있겠고. 시간이 모자라서 압축하는, 성경의 방대하게 기록된것을 압축해서 설교를 가끔 하는데, 그 분야에서 스데반이 대가라고 생각해요. 정말 놀랍죠. 이 역사적 사실, 압축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설교 했는데, 그 설교를 들으면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말하니까.
그래서 다 스데반을 때려죽인 사람들이 들으면 곤란하니까 귀를 막고, 스데반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에 넘어갈 것 같으니까 안들을려고 귀를 막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때려 죽였다는 거야. 그 중에 한사람이 귀를 안 막았어요. 귀를 막아야되는데, 귀를 안막고 설교를 들어버린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야.
사도바울은 스데반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보자 하고 들어본다고 귀를 안막고 있다가 들었는데, 그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를 듣고 나니까 부인할 수가 없죠. 역사적 사실을 말하니까. 그러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이론으로 말로 꺾을수 있었다면 바울이 반박하고 꺾고 했을텐데, 도무지 꺾을수 없는 말이야. 사실을 말하니까.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말하니까.
그래서 결국 스데반을 죽일때,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저놈은 죽어야 한다고 스데반을 죽게 했지만 그 스데반으로부터 들은 설교는 사도바울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이 아주 깊이 각인된 거예요.
뭘 두고 그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 사도행전 7장을 누가 썼느냐하면 누가 썼느냐? ‘누가’가 썼어요.
누가는 사도행전7장의 설교를 들었느냐? 안들었거든요. 그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 설교를 들었던 사람이 바울이고, 바울에게서 누가가 듣고 옮겨썼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 것을 볼때 바울이 스데반 설교를 얼마나 야무지게 들었으면 그것을 누가에게 그대로 옮겨줘서 사도행전7장이 나오냐고 이게.
그러니까 스데반의 설교는 장황하게 그저 과잉 확대해석 뻥튀기 했으면 다 날아갔을텐데, 압축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머리에 다 남아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압축설교 요약설교가 마음속에 잘 남아있을수 있습니다. 너무 부풀려서 누룩을 너무 많이 타서 너무 부풀어져버리면 초점이 다 흐려져버려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 시간에 가서 대하설교라는 요약하는 설교, 핵심을 논지를 파악해서 그런 설교를 소개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스데반이 아니겠는가. 요약을 하는 거예요. (2부에 계속...)
[정리]
◎ 목회자의 사역
- 기도, 전도, 설교, 교육
- 상담, 심방, 인사, 행정
- 설교와 교육은 비중이 크다
◎ 설교의 역사
1. 모세의 설교
- 모세의 설교는 신명기라는 책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레위기를 본문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함.
-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회고, 율법 설명, 추가된 율법
2. 솔로몬의 설교
- 솔로몬의 체험 설교를 철학적으로 하고 있다.
- 솔로몬의 설교는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 솔로몬은 사람이 살아 가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헛된 것이라고 설교
-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결론짓는다.
3. 세례 요한의 설교
- 세례 요한의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였다.
- 그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 그의 설교는 성공을 추구하지 않았다.
- 세례 요한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다.
- 예수님의 평가 :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4. 예수님의 설교
-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마태복음 5, 6, 7장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마태복음 5, 6, 7장은 산상수훈, 산상보훈, 황금률이라고 하는 귀한 말씀을 하셨다. 그 내용은 팔복과 새로운 교훈들이었으며, 구제와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다.
- 예수님의 말씀의 결과는 마태복음 7장 28절에 잘 설명되었다. 마태 7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들은 그 가르침에 놀랐다.
-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5. 베드로 설교
-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 주변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약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설교하였을 때에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을 때에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말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날에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게 되었다.
- 베드로 사도는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모인 고넬료의 친구, 가족, 친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데 그 설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전하였다.
-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죄사함에 대해서 전했을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강림하셨다.
6. 스데반의 설교
- 그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분으로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를 행하였다. 스데반 집사는 지혜와 성령으로 설교함으로써 종교 지도자들이 당할 수가 없었다. 스데반 집사는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할 때에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 스데반 집사는 평신도 사역자로써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을 잘 알고 있었다.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시내산 소명과 출애굽 사건, 광야생활,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를 인용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조상들처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비판하였을 때에 이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이 이를 갈면서 스데반 집사를 해치려 하였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였다. 설교자라면 때로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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