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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야구는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좋은 기회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의 젖줄이기도 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 28년 만에 누적 관중 1억 명을 돌파했다. 국내 프로스포츠 가운데 최초다. 그러나 야구의 미래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아직 야구는 ‘하는 스포츠’보다 ‘보는 스포츠’에 머물고 있다. 고교 야구부는 해마다 줄고 있으며 인프라 역시 여전히 제자리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야구의 근간인 어린이야구가 부흥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춘추>에서 리틀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집중취재했다. 1편 [굿바이 장충 리틀야구장]에 이어 2편 [야구소년들이 쏟아지고 있다]가 계속된다.
김동찬 씨는 야구광이다. 보는 야구에 그치지 않는다. 직접 야구를 한다. 사회인야구 선수로 잔뼈가 굵다. 그는 주말보다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사회인 야구장을 찾았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그랬듯 그도 아들에게 야구를 세례 했다.
아들이 야구와 친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들의 몸속엔 이미 아버지에게서 세례받은 야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나 야구 하고 싶어.”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들은 진지했다. 결국.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요.” 김 씨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들에게 지고 말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아들이 다니는 학교엔 야구부가 없었다. 있다손 쳐도 초교생 때부터 야구에 올인하는 게 마뜩잖았다. 그러나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그즈음 남양주 리틀야구단을 알았습니다. 야구하고 싶은 아이들이 모여 클럽식으로 운영된다고 하더군요. 학교 수업을 모두 받고, 방과 후에만 모여 훈련한다는 것도 안심됐어요.”
현재 김 씨의 아들 김산(신현초교 6년)은 남양주 리틀야구단에서 뛰고 있다. 야구를 시작한 지 5년째다. 삼진 잡는 묘미에 매료된 김산은 이제 컴퓨터 게임에 집중하는 게임보이가 아니다. 나보다 우리, 짜증보단 예의를 중시하는 어엿한 야구소년이 됐다.
지금은 '리틀야구 전성시대'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는 리틀야구 선수들. 이들이 한국 사회와 야구의 미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지난 5월 30일. 남양주시를 향하는 차 안에서 기자는 한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보낸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이랬다. ‘프로야구 1억 번째 관중에게 평생 입장권과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초청권 지급’
‘1억 번째 관중이라…’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어느덧 1억 번째 관중을 맞을 준비를 하다니 역시 국내스포츠 가운데 프로야구 인기가 제일이긴 제일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프로야구의 인기가 언제까지 지속할지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2006년 이후 해마다 프로야구 관중이 늘었다지만, 고교야구팀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프로야구의 ‘샘’ 역할을 하는 초등학교 야구팀 역시 마찬가지다. 2008년 100개 팀이었던 초교야구팀은 2009년 99개에서 2010년엔 98개로 줄었다. 그나마 야구팀이 있어도 팀원이 10명 미만인 미니 팀이 부지기수다. 1980년대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를 점령했던 야구소년들이 ‘하나 둘’ 다시 등장했어도, 그들을 야구선수로 기를 팀은 정작 주는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남양주 리틀야구장에 도착했을 때. 기자는 깜짝 놀라고 말라고 말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야구소년들로 야구장이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놀라운 건 그들이 초교 야구부원들이 아니라 리틀 야구부원들이었다는 데 있었다.
“57개 리틀야구팀이 참가했습니다.” 한국리틀야구연맹의 한 관계자는 푸른 대지 위에 자라는 새싹을 보는 농부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5월 21일부터 30일까지 10일간 서울 장충리틀야구장과 남양주 리틀야구장에서 진행된 ‘제6회 남양주 다산기 전국리틀야구대회’에는 전국 57개 리틀야구팀이 참가했다.
2005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6년째를 맞는 이 대회에 60개 팀 가까이 출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회 원년 때는 단, 12개 팀이 참가했다. 더 놀라운 건 대부분의 리틀야구팀이 팀원 10명 이하의 미니 팀이 아니라 20명 이상의 제대로 된 팀이라는 것이었다.
2006년 24개에 불과했던 리틀야구팀이 5년 만에 2.5배나 증가한 건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은 손을 저었다.
“2.5배라니요? 그보다 5배가량은 많습니다.”
사실이었다. 2010년 현재 연맹에 가입된 리틀야구팀은 총 114개 팀. 2006년 24개 팀에서 2007년 37개 팀, 2008년 58개 팀, 2009년 81개 팀에서 드디어 올해 100개 팀을 훌쩍 넘어섰다. 초교야구팀 98개 팀보다 리틀야구팀이 더 많은 셈이다.
한 회장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리틀야구팀을 지원하고 있다”며 “웬만한 도시엔 리틀야구팀이 하나 이상은 창단한 상태”라고 힘줘 말했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야구와는 인연이 없던 강원도와 제주도에도 각각 6, 2개 팀의 리틀 야구팀이 생겼다. ‘스타 선수’의 산실이지만, 고교야구부가 5개 팀밖에 없는 대구·경북도 리틀야구팀은 20개나 된다.
‘리틀야구의 불모지’였던 한국야구가 어째서 5년 만에 ‘리틀야구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 것일까. ‘기적’같지만, 그 기적 안엔 그럴만한 이유가 숨어 있다.
야구에 올인? 학업과 야구를 병행! 정근우, 김광현(이상 SK), 윤석민(KIA) 등 한국프로야구의 스타선수들은 모두 리틀야구 출신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000년대 초반까지 박찬호(뉴욕 양키스),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 홍성흔(롯데 자이언츠) 같은 유명 야구선수가 되려면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학교 야구부에 스카우트되거나 제 발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엘리트 선수 양성이 목적인 학교 야구부는 아이들의 체격조건을 우선시하기에 쉽게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설령 허용한다고 해도 야구에만 올인해야 하므로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이 때문일까. 대학 야구선수가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쓰지 못하는 건 더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리틀야구팀은 이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아들이 리틀야구팀에서 뛰는 이혁민 씨는 리틀야구 예찬론자다.
“리틀야구팀은 철저히 평일 방과 후와 주말에만 운영돼요. 과거 초교야구팀처럼 평일 수업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훈련하는 법이 없어요. 그만큼 아이들의 학습권이 보장됩니다. 게다가 회비도 비싸지 않아요. 한 달에 15만 원씩 내는데 피아노나 태권도학원과 비교하면 많지 않은 돈이에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야구를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격이 ‘확’ 바뀌었습니다.”
초교 6학년인 아들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게임에 ‘푹’ 빠져 살았다. 이 씨가 이러다 게임중독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게다가 아들은 과체중으로 학교에서 놀림을 자주 당했다.
“안 되겠다 싶었어요.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운동이 거의 없었어요. 가끔 제가 보는 프로야구 중계를 옆에서 시청하는 정도였지요. 하루는 아이를 데리고 야구장에 갔는데 글쎄, 자기도 야구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옳거니’ 하고 바로 리틀야구팀으로 데려갔습니다.”
야구공을 잡자마자 아들이 변한 건 아니었다. 뛰는 걸 싫어했던 아들은 다른 부원들이 달릴 때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을 잡는 것도, 스윙을 하는 것도 미숙했던 아들은 거기서도 뒤처지는가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롯데 이대호의 홈런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단다. “하루는 아들이 그러더라고요. ‘아빠, 저 아저씨도 나처럼 뚱뚱한데 홈런도 치고 수비도 날렵하게 잘해요. 저도 노력하면 저 아저씨처럼 될 수 있을까요’라고 말이지요. ‘분명히 될 거야’라고 했어요.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심어줬어요.”
아들은 그때부터 변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느리지만, 즐겁게 뛰기 시작했다. 짜증과 투정이 일상이었던 성격도 예의 바르게 변했다. 김치와 된장이라면 코를 막았던 아이가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제 손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비며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살이 ‘쏙’ 빠진 건 차라리 덤이었다.
이 씨는 “리틀야구는 아이들을 운동 기계로 만들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좋은 기회”라며 “아들이 원하고, 재능만 보인다면 야구선수로 키울 용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리틀야구연맹은 학생 선수들의 수업권 보장을 위해 모든 대회의 첫 경기를 오후 3시 30분 이후 시작한다. 수업을 다 마치고, 경기를 하라는 뜻이다. 경기도 주말과 수업이 없는 날에만 실시해 수업 결손을 철저히 막고 있다. 연습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리틀야구팀은 방과 후 2~3시간 정도만 연습한다. 사진은 서울 목동구장 옆 미니축구장에서 연습 중인 리틀야구팀(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운동’하면 체벌을 연상하기 쉽지만, 리틀야구에선 좀체 체벌을 보기 어렵다. 학부모들이 리틀야구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리틀야구 감독은 “리틀야구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만큼 강압적으로 운동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며 “초교야구팀처럼 성적부담도 덜하여서 감독이나 코치 역시 여유를 갖고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부상과 혹사 위험이 적은 것도 리틀야구의 매력이다. 리틀야구 경기는 정규이닝을 6이닝으로 제한한다. 경기 시간이 1시간 40분을 넘으면 더는 이닝을 진행할 수 없다. 투수는 2이닝까지만 투구한다. 그 이상은 던지지 못한다. 결승전은 예외다. 그래도 3이닝까지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혹사를 막고, 더 많은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도루도 엄격하게 제한한다. 모든 주자는 리드하지 못하고, 상대 투수가 투구한 공이 포수 미트에 닿은 후에만 도루를 시도할 수 있다. 이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금지다. 부상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수비수와 타자는 반드시 안전장비를 갖춰야 한다. 타자는 팔꿈치 보호대를 차지 않으면 타석에 서지 못한다. 이런 규정과 제도 때문에 리틀야구 선수의 부상은 극히 적다. 부상 때문에 야구에 흥미를 잃는 아이들이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유 있는 리틀야구의 성장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회장.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리틀야구는 여전히 '리틀'했을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따지고 보면 ‘없던’ 리틀야구의 매력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 아니다. 예전에도 리틀야구는 같은 이유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간명하다.
야구계가 무관심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리틀야구가 프로야구의 샘은 고사하고, 사고단체로 전락했던 까닭이다. 야구계의 대표적인 부패 온상지로 알려진 탓이다.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회장은 2006년 7월 회장직을 맡았을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연맹의 상태를 보고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말이 연맹이지 사무실도, 직원도 없었다. 가뜩이나 당시 연맹은 대한야구협회와 KBO에 사고 단체로 찍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야구계도 어째서 리틀야구가 필요한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일부 야구인은 “초교야구팀이 있는데 굳이 리틀야구팀이 있을 이유가 없다”며 지원을 반대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러니 연맹 통장에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리틀야구하면 ‘심판 비리’와 ‘승부 조작’을 연상하게 마련이었다. 과거만 해도 리틀야구의 승부는 선수들의 실력이 아니라 심판 로비에 의해 좌우된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러나 리틀야구계는 단, 5년 만에 변했다. 그 중심엔 한 회장이 있었다. (주)삼화수지 회장이자 프로골퍼 한희원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한 회장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6년 동안 미국에서 딸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던 2006년 딸이 야구선수 출신의 손혁과 결혼하며 귀국했다.
“귀국하고 얼마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을 만났다. 하 총장은 고교동창, 이 위원장은 대학동창이라 막역한 사이였다. 그때 갑자기 두 친구가 ‘너는 천생 야구인이다. 사업도 성공하고, 딸도 출가했으니 야구를 위해 힘을 써줘야겠다’라고 했다.”
한 회장은 주저했다. 그러나 두 친구는 “리틀야구와 여자야구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라”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결국, 한 회장은 리틀야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말 그대로 ‘지원’이었다.
“야구계가 절대 녹록하지 않은 곳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콜’이 와도 응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뭐하러 야구판에 들어가느냐’고 반대했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로 지원만 한다면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리틀야구연맹 회장을 맡아달라지 뭔가.”
철거가 확실시 되는 장충 리틀야구장. 한국에서 야구장은 '볼파크(Ballpark)’ 즉 공원이 아니라 그저 경기장(Stadium)에 지나지 않는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KBO 쪽에서 한 회장에게 내민 당근은 서울 장충리틀야구장의 증·개축이었다. 실제로 2007년 KBO는 스포츠 토토 지원금 등 10억 원을 들여 최고급 인조잔디를 까는 등 장충리틀야구장을 증·개축했다. 그러나 리틀야구가 정상화하려면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였다.
“리틀야구 감독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경기를 많이 하게 해달라’고 읍소했다. 알아보니 한 팀당 1년에 고작 3, 4경기밖에 하지 못했다. 어느 팀은 감독이 돈을 거둬 경기를 하기도 했다.”
장충리틀야구장이 증·개축했다지만, 대회 증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대회를 열려면 돈이 필요했다. 전임 회장들이었으면 KBO나 대한야구협회를 찾아 손을 벌릴 일이었다. 그러나 기업인이던 한 회장은 FILA, 아시아나항공 등 기업체를 찾아다녔다. 연맹이 자립하려면 항구적인 스폰서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 회장은 두 회사로부터 펜스 광고비로 1천만 원씩을 받는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한 회장은 스폰서와 펜스광고업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주머닛돈을 털어야만 했다. 그의 말마따나 “월급보다 주머닛돈이 더 많이 든 시절”이었다.
한 회장의 발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즈음 MBC ESPN을 찾아가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어린이 야구를 살리려면 방송사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설득했다. 한 회장의 진심이 통했는지 MBC ESPN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 연맹이 주관하는 10여 개의 리틀야구대회를 중계하기로 약속했다. 광고가 거의 붙지 않는 상황에서 MBC ESPN의 약속은 리틀야구계엔 큰 힘이 됐다.
5년 전 ‘0’원이었던 연맹 예산은 올해 펜스광고 5개와 대한야구협회 지원금 1천만 원, 선수등록비 5천만 원(1인당 2만 원, 협회 등록선수 2천500명)을 모두 합해 1억 원을 넘었다. 최소한의 연맹 살림살이가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지자체와의 연계해 예산을 확보하라 남양주시는 리틀야구장 건립과 함께 실내훈련장도 지어 지역 리틀야구 발전에 아낌없는 정성을 쏟았다. 덕분에 남양주 리틀야구단은 전국 최강이다. 지역민의 만족도도 무척 높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리틀야구 발전의 외부조건을 확보한 한 회장은 이제 내실을 기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어쨌거나 팀 수를 늘리는 게 중요했다. 이때 그가 앞세운 방법이 있다. 지자체와 리틀야구팀 창단을 연계하도록 한 것이다.
“기존 리틀야구팀의 팀명은 ‘동부 리틀’, ‘서부 자이언츠’등 추상적이었다. ‘구리 리틀’, ‘남양주 리틀’등 연고지명을 팀명으로 쓰는 리틀야구팀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기존 감독들에게 팀명을 연고지명으로 바꿀 것을 설득했다. 그리고 창단을 준비 중인 팀들에게도 시·군·구 지자체와 연계해 창단할 것을 권유했다.”
여기서 한발 나가 한 회장은 아예 시·군·구 지자체의 도움 없이는 창단하지 못하도록 했다. 리틀야구연맹은 이를 위해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우리 지역에서 리틀야구팀을 창단해도 좋다’는 지자체장의 허락을 받아오도록 했다. 두 번째는 지역 내 운동장 사용허가서를 받아오도록 했다. 세 번째는 리틀야구팀의 단장을 가능한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시·군·구의원이 맡도록 했다.”
한 회장이 이처럼 지자체 연계를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지자체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팀 운영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틀야구의 명문’으로 꼽히는 구리 리틀야구단은 시립야구단 형태로 운영된다. 시로부터 해마다 1억 6천만 원을 지원받는다. ‘리틀야구의 모범’으로 불리는 남양주 리틀야구단 역시 시에서 지원해준 덕분에 회비가 15만 원 정도에 그친다.
장충 리틀야구장 심판실 입구에 붙여진 경고문(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한 회장이 마지막으로 빼든 칼은 비리 척결이었다.
“경기 때마다 심판 판정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심판과 감독이 결탁해 승부를 조작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심판부를 바로잡지 않으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땀의 대가보다 부정한 방법을 먼저 터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심판부를 정화하는 데 노력했다.”
한 회장은 학부모와 감독의 심판실 출입을 막았다. 심판들에겐 학부모로부터 김밥 한 줄도 받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심판과 감독이 따로 만나면 엄격하게 처리할 것을 공표했다. 실제로 감독을 상대로 야구용품을 팔았던 모 심판은 적발되자마자 바로 퇴출당했다.
연맹은 심판부 관리·감독과 못지않게 심판의 자질향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연맹 심판부는 8명으로 구성돼 있다. 경기마다 3심제로 운영한다. 여기다 대기심 1명을 추가했다. 이로써 장충리틀야구장과 남양주 리틀야구장에서 동시에 대회가 진행될 시 1개조씩 나눠 심판을 볼 수 있게 됐다.
이색적인 건 8명의 심판 가운데 2명이 여성이라는 것. 장아름, 김혜란 2명의 여성심판은 KBO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심판아카데미’에서 1, 2위의 성적을 내고 정식심판으로 선발된 이들이다.
한 회장은 “앞으로 여성 심판의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해 의식적으로 두 여성 심판을 영입했다”며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집중력이 판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리틀야구 최초의 여성 심판인 장아름 씨. "여자가 무슨 야구심판을..."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장 씨는 선수 출신의 심판들보다 판정을 잘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연맹은 “리틀야구대회 개최를 고려하는 지방도시가 꽤 많다”며 “지금 추세라면 2012년엔 전국의 리틀야구팀이 200개로 불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진은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실이다. 한 회장은 자신의 직무실을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장충 리틀야구장 내 본부석 2층을 사무실로 활용하는데 매우 비좁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회장은 일언반구없다. 회장의 권위와 사무실 크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맹과 협회는 도덕성이 생명이다.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은 그런 점에서 우월한 이다. 그는 국외 출장 시 자비를 들인다. 연맹에서 회장 몫으로 경비를 배정하지만, 그 돈은 국외 출장 시 리틀야구팀 감독을 동반하는데 쓴다. 한 회장은 "외국물을 많이 맛봐야 국제 감각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 지도자를 '연수위원'으로 자격으로 동반한다. 아시아나항공은 연맹에 항공권을 50%나 할인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KBO도 리틀야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KBO는 2006년 산하에 육성위원회를 신설했다. 유소년야구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이광환 전 육성위원장은 감투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을 돌며 리틀야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KBO도 보조를 맞춰 리틀야구 창단팀에 7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창단을 독려했다.
KBO의 지원은 여전하다. 해마다 리틀야구팀에 400만 원 상당의 야구용품(유니폼 20벌, 배트 3자루, 공 2다스)을 지원한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지원예산이 해가 지날수록 줄고 있다는 점이다.
열악한 인프라, 그나마 장충 리틀야구장도 철거될 판 장충 리틀야구장이 철거되면 국내 유일한 국제 규격의 리틀야구장은 남양주 리틀야구장만 남게 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리틀야구팀의 폭발적인 증가에 비해 야구장은 달라진 게 없다. 그대로다. 여전히 리틀야구 전용구장은 장충 리틀야구장과 남양주 리틀야구장이 유이하다.
지금처럼 팀이 많아져 대회마다 60개 팀 이상이 출전할 땐 2개조로 나눠 장충과 남양주에서 토너먼트제로 치러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2개 구장으론 이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5월 중순에 열린 ‘다산기 전국리틀대회’가 좋은 예다. 당시 남양주 리틀야구장에선 아침 10시 30분부터 첫 경기가 시작해 오후 7시가 넘어서까지 예선전이 치러졌다. 심판 4명이 그 많은 경기를 판정해야 하는 것도 무리였지만, 대회 관계자들도 땡볕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앞으론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서울시가 장충 리틀야구장을 남산의 자연녹지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잠식시설로 규정해 철거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명관 한국리틀야구연맹회장은 “대회라도 치르려면 선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서울 장충동과 남양주를 오가며 경기를 해야 하는데, 장충 리틀야구장마저 사라진다면 그건 리틀야구의 종언과 함께 한국프로야구의 젖줄이 끊기는 걸 의미한다”고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서울시가 장충 리틀야구장을 철거하는 조건으로 서울 강동구 고덕동 부근에 대체구장 2면을 짓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진 ‘고려 차원’일 뿐이다.
한 회장은 “최소 리틀야구장이 3곳은 돼야 패자부활전도 가능하다”며 “지방은 오히려 야구장이 느는데 어째서 서울은 있는 구장도 허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연맹은 안전망과 간이관중석을 갖춘 제대로 된 리틀 야구장 1면을 짓는데 1억 원이면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야구장 건설업자들도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예산문제를 들어 야구장 건설에 난색을 보이는 시 관계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 리틀야구팀의 감독은 “우리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쓰일 1억 원은 큰돈이고, 국내 프로축구팀도 아니고 서울에서 9천km나 떨어져 있는 잉글랜드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후원하는 30억 원은 푼돈이냐”며 서울시의 미온적인 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리틀야구장이 태부족한 현실에서 지금도 많은 리틀야구선수가 축구장과 사회인야구장을 빌려 운동을 하고 있다.
한 회장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국가의 책임”이라며 “야구장은 일반적인 체육시설을 넘어 미래를 향한 투자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리틀야구 문제의 대안, 시니어 리틀 '리틀야구계의 괴물' 서의태. 그는 한국 리틀야구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좋은 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5월 30일 끝난 ‘다산기 전국 리틀야구대회’ 우승팀은 남양주 리틀야구단이었다. 리틀야구계는 리틀야구 전용구장과 실내연습장까지 보유한 남양주 리틀야구단의 우승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서울 강서구 리틀야구단과의 결승에서 3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친 에이스 서의태(청량중 1)가 없었다면 1-0 승리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서의태는 리틀야구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185cm 장신에서 내리꽂는 빠른 공과 커브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리틀야구 관계자들이 앞다퉈 “리틀야구계의 괴물”이라고 칭한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중학생인 서의태가 어째서 리틀야구팀에서 뛰느냐는 것이었다. 그 나이라면 중학교 야구부에서 뛰는 게 당연했다. 초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서의태는 그러나 “리틀야구팀이 훨씬 더 편해요. 계속 리틀야구팀에서 뛰고 싶지만, 올해 9월부터는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야구부에서 뛰어야 해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현행 리틀야구 선수의 자격은 중학교 1학년 1학기(9월 말)까지다. 세계리틀야구연맹의 규정이 그렇다. 서의태가 9월 이후 리틀야구팀을 떠나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의태는 왜 진작 중학교 야구팀에 입단하지 않은 것일까.
리틀야구팀의 감독들은 “중학 1년생은 학교 야구부에서 주전으로 뛰기 어렵다”며 “리틀야구팀에서 자신감을 얻고서 그해 동계훈련을 거쳐 2학년 때부터 학교 야구부에서 뛰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중학교 야구팀에서 관심을 두는 서의태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대부분의 리틀야구선수들은 중학교 2학년부터는 야구를 하지 못한다. 초교야구팀과 리틀야구팀을 합치면 212개 팀이 되고 인원도 4천124명에 이르지만, 중학교 야구팀은 79개 팀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야구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구조상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 회장은 이를 “심각한 병목현상”이라고 비유했다. 이 병목현상을 해결하려면 중학교 야구팀 창단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거나 ‘시니어 리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니어 리틀 출범은 한국야구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부와 야구를 병행할 수 있는 데다 재능이 보일 때만 고교 야구부로 진학해 '직업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시니어 리틀’은 중학교 1~3학년까지를 포함하는 리틀야구다. 일반 리틀야구팀처럼 학교 야구부가 아니라 클럽 형식으로 운영된다. 미국은 ‘시니어 리틀’이 중심이 돼 이 안에서 유망주들을 배출한다.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 일본의 리틀야구리그는 일본리틀야구협회의 리틀시니어 위원회가 주관한다. 초등학생들의 리그를 리틀리그로, 중학생들의 리그를 시니어리그로 부른다. 둘을 합쳐 전국에 500개 팀이 넘고 선수는 1만 6천 명에 이른다.
프로야구팀도 시니어 리틀 지원에 온 힘을 다한다. 대표적인 구단이 임창용이 뛰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다. 야쿠르트는 초등학생들로 구성된 리틀야구팀과 함께 중학생들로 이뤄진 시니어 리틀팀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야쿠르트는 시니어 리틀팀이 홈구장인 진구 구장에서 훈련하도록 배려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야쿠르트가 이처럼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건 시니어 리틀팀이 유럽의 프로축구단에서 운영하는 유소년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 리틀팀 출신이 반드시 야쿠르트에 입단해야 한다는 강제조항은 없어도 대부분의 선수는 고교 졸업 후 야쿠르트 입단을 희망한다.
연맹은 시니어 리틀 출범을 당면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한야구협회, KBO와 머리를 맞댈 생각이다.
지금 미래를 향해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한 미래는 제발로 우리곁에 오지 않는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프로야구는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젖줄이 되는 아마추어 야구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현실은 엄혹하다.
29년 후, 프로야구 총관중 2억 명 시대를 열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다. 야구의 근간부터 다지는 것이다. 북극의 빙하처럼 수면 위 얼음인 프로야구는 그대로 보이지만, 수면 아래 얼음인 아마추어 야구는 빠르게 녹고 있다. 무언가를 해야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