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과 을파소가 이룩한 복지국가, 고구려
'인류 최초의 복지국가, 고조선을 이어 세계 최초 사회보장법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요즈음 인터넷 공간에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그 날의 기록을 담고 있는 영상이 눈에 뛴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 3월 26일이 바로 순국하신 날이기 때문에 더더욱 주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중근 장군이 주목받으면서 대일항쟁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가 소용돌이치던 그때, 수많은 사건과 그 사건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물이 있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사안들이 남아 있기에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 설계에 대한 장애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역사 교육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가 역사교육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역사를 왜 공부하고 알아야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공부는 상급학교 혹은 명문대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업을 보장받고 성공하기 위하여 한다고들 한다. 그러한 인식 및 과정 속에서 필요에 따라 시험 준비를 위해 단순 암기식의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는 답변이 지극히 솔직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역사를 왜 올바르게 알아야만 하는가? 역사는 현실 속 여러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법과 지혜가 담겨져 있는 보고(寶庫)이다. 우리다움의 정체성과 뿌리의식을 통한 자기 존재감이 생겨서 자존감이 향상된다. 이렇게 향상된 자존감은 긍정적으로 인성에 영향을 미치고, 행복지수도 올라가게 된다. 인성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우리 역사의 바탕에 흐르는 중심철학인 홍익인간의 사상적 기반이 단군으로부터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안중근이 위대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에 있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이어받아 ‘동양평화론’으로 완성한 안중근,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알리고자 했던 것은 홍익인간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홍익인간의 역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백포 서일이 정립한 단군민족주의, 백범 김구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우리나라, 도마 안중근이 완성하고자 했던 동양평화사상, 이러한 모든 것의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정신은 그 근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또한 중간에 어떻게 변형이 되었으며, 수많은 세월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본질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 이것이 어쩌면 역사를 공부해야 되는 진짜 이유가 될 지도 모른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역사적 배경과 그것이 어떻게 변천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로,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영토도 넓었지만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했음에도 모두 고구려인이 되어 화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동력은 홍익인간의 사상적 기반이 있어 가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이자 인류사적으로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사회보장법인 진대법이다.
진대법(賑貸法)은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 대하여 양곡을 대여하는 것으로 진(賑)은 흉년에 기아민에게 곡식을 주는 것을 말하고, 대(貸)는 봄에 미곡을 대여하고 가을 추수 후에 회수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제도는 기록상으로는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년)에 3월부터 7월까지 관곡을 풀어서 진대하였다가 10월에 환납하도록 한 것이 최초의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천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6년(194)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질양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았다. “어떻게 우는가?”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부양하여 모셔왔는데 올해는 곡식이 자라지 않아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어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하였으니 나의 죄로다.”고 하고, 옷과 음식을 주고 불쌍히 여겨 어루만졌다. 이에 내외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사는 노인,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널리 찾아 구제하게 하였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이 있게 진휼 대여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이에 서울과 지방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840년 전 고구려시대에 실시한 사회보장제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얼마 전, 송파지역 세 모녀가 가난을 이유로 함께 자살한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복지예산 1조원 시대라고 한다. 결국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무관심이 세 모녀의 자살을 방기한 것이다. 이러한 무관심은 생명존중의 가치와도 연결이 된다.
이미 오래 전 고구려 시대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 주었던 진대법, 그것을 기획하고 건의한 사람은 명재상 을파소였다. 을파소는 평민 출신으로 인재를 알아보았던 고국천왕에 의하여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그가 평민 출신이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 중심의 복지, 백성들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랑했던 고국천왕과 오랜 기간 수행을 통해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백성들의 삶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명재상 을파소의 합작품인 진대법의 가치, 그것은 오늘날에도 그 정신과 뜻을 기리게 되는 이유이다.
인류 최초 복지국가, 고조선, 그 뒤를 이은 고구려, 이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증거가 진대법이었다. 서기 194년, 지금으로부터 1,840년 전 고구려는 복지국가를 실현하였다. 이것은 인재 등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국천왕은 평민 을파소를 파격적으로 국상의 자리에 올리고 말이 많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상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고 왕명을 내림으로써 을파소는 마음껏, 소신껏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 그리고 인재를 볼 줄 알았으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그 사람을 자기 대신에 천거했던 안류, 그들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뒤를 이어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대법은 고려시대의 의창과 조선시대의 환곡으로 이어져 갔다. 이것은 역사를 통한 정신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의 중심도 사람이고, 역사의 중심도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생명존중의 가치와 상생과 조화의 의미, 인류 최초의 사회보장법인 고구려의 진대법이 우리 역사에서 존재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