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누워서 생활해야 하는 이대우 시인...그에게 펜과 종이는 세상과 유일한 소통의 통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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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1급 장애와 무학력이라는 어려움 극복하고 시인과 화가로 활동하는 장애인 이대우씨의 이야기가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달 27일 나사렛대(총장 임승안) 제2창학관에서 한빛회 주관으로 이대우시인의 ‘낙타와 도시락’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2월 3일자 9면 참조> 이날 이대우씨는 “이 시집을 통해 상록수 같은 늘 푸른희망을 담고 싶었다.”고 말하며 “고마운 사람속에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고 싶다.”고 출판소감을 밝혔다.
이씨는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말을 할 수도,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
이씨는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름표와 한글을 맞춰가며 한글을 깨우친 이씨.
이처럼 한글을 깨우친 그가 1974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의 시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며 1989년 첫 문학상 수상의 기쁨을 누리고 1997년과 2002년에 첫 시집을 내기도 했다.
이씨는 이후 장애인 관련 단체를 비롯, 많은 곳에서 원고 청탁을 받는 등 장애인 문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한 것.
또한 이씨는 1999년 뇌성마비 장애인이 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도전, 아마추어 화가 자격도 얻었다.
이씨는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씨는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 모습과 운명에 감사합니다"라며 "젊은이들이 이대로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루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2배는 빨리 꿈을 이룰수 있을테니까"라고 조언한다.
▲이대우 시인은 활동보조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 | |
이씨는 1957년 경북 월성군 현곡면 나원리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3남 3녀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즈음 3일 밤낮을 울어대며 고열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귀로 들을 수는 있으나 입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뇌성마비 장애를 안게 됐다.
찢어질듯한 가난속에 이씨의 두형은 머슴살이를 살게 됐고, 이씨의 어머니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이씨의 어머니는 이름모를 약을 이씨에게 건내줬다. 그약은 수면제 였다. 이씨의 어머니는 몇차례 더 약을 먹이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이씨는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살다가 죽고 싶을 때 저 스스로 떠날게요. 저를 보내려 하지 마세요’라며 속으로 한없이 외쳐댔다고 한다.
77년 봄 이씨의 어머니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씨가 어머니와 화해를 할 수 있게 됐던 것은 종교를 갖게 되면서 부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씨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급히 화장실을 갈 수 없어 조심하지만 가끔 실수를 할 때가 있으면 그때마다 혼자 젖은 바지를 갈아입어야 했다. 회초리를 이용해 바지를 갈아입는데, 일반인이 1분에 입을 바지를 이씨는 한시간 동안이나 걸려야 했다.
이러한 이씨에게 유일한 벗은 라디오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어느 교회 전도사와 인연을 갖게 되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주말에 교회에 가는 것이었다.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씨는 시를 통해 자신의 육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으로부터 갇혀 있고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는 단절된 세상을 향한 소망과 그리움을 매일같이 일기형식으로 토해냈다.
▲이대우 시인은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이씨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에게 펜과 종이는 세상과 이어주는 통로이다. 방 한 쪽에 누워 있는 그의 머리곁에는 항상 펜과 종이가 놓여있다. 말할수 없는 그에게 종이와 펜은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이렇게 살아온 이씨는 결코 지난 세월 자신을 속박한 장애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장애와 싸우다가 지치기도 하고, 결국은 그 장애를 끌어안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시와 그림으로 고스란히 승화시키고 있다.
이씨는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 모습과 운명에 감사합니다. 나에게 ‘장애’란 시적 감수성을 유발하는 특별한 ‘혜택’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이다.
그는 “불확실한 미래와 실패가 두려워서 자신의 꿈에 제대로 도전조차 하지 않는 삶을 살기보다는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산다 하더라도 늘 꿈과 희망을 품고 사는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아픔에도 그는 마지막말에 향후 바램이 있느냐는 물음에 내 힘이 미친다면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소망한다.
더불어 그가 부탁한 것은 같이 늙어가는 지난날의 벗을 꼭 찾고 싶어했다.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시절 서산의 김모씨와 편지로서 인연을 맺었었는데 그때 이씨는 이향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김씨와 연락을 주고 받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꼭 김씨를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표했다.
한편, 이씨는 그동안 전남 목포의 한 시설에서 생활을 해오다 혼자만의 시간을 희망하며 형제들의 도움으로 5년전부터 천안에서 활동보조인과 함께 생활해 오고 있다.
/김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