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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시 ‘해바라기의 밀어(密語)’의 도달점
---‘질마재 마을’의 동화를 휘감은 ‘바다’ 또는 ‘어느 늙은 수부의 고백’ 이야기
신 범 순
해바라기의 ‘밀어’
미당 서정주의 시편들은 한국현대시의 역사에서 감출 수 없는 진폭을 갖는다. 그는 한 후배시인(제자이기도 했던)에 의해 한때 ‘시의 정부’라고 칭송받았으나 운명을 달리하자마자 모든 공적을 삭제하며 치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후 줄곧 전체 생애 중 극히 짧은 기간에 회절했던 친일적 면모가 부각되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이러한 변절은 무시될 수 없지만 그것이 그의 다른 모든 시적 경력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은 일종의 시적 연좌제가 되는 셈이다. 나는 그의 친일 이전의 성과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사상적 신념을 가지고 일본의 대동아 이데올로기에 기울어지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변절은 자신이 줄곧 치열하게 압제적 역사의 권력, 제국적 국가의 괴물에 대한 강력한 항거와 그것의 극복에 대한 사유를 펼쳤던 시편들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신념을 버린 것도, 그것을 꺾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후세를 보존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로부터 잠시 비켜선 것이다. 이러한 비켜섬은 변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불러오는 아내와 그의 종족적 계승을 위해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모욕적인 회절을 했다. 이 상황이 <살구꽃 필때>라는 시에 드러나있다. <<문장>>이 폐간될 때 이 시가 발표되었으며 이것이 사실상 식민지 시기 그의 치열한 시적 경력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우리는 이 시를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둘째 아이를 밴 아내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칼을 갈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있다. 이미 날이 설대로 서게 칼을 갈았지만 그 칼을 그는 계속해서 갈고 또 간다. 아내가 재촉하지만 그는 아직 들 갈았다고 하며, 저고리와 바지, 양말을 벗어던지며 그 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허공에 격검을 한다. 이 칼은 그의 이전 시 <도화도화>의 칼을 계승한 것이다. 봄에 핀 생명이 불타오르는 꽃들 옆에서 시인은 자신의 원수를 향해 칼을 품고 길을 간다. 이 적대적 원수는 명확하게 지칭되지 않는다. 그것은 초기 시편인 지귀도 시편들의 주제에서도 암시된다. <웅계> 시편 중 상편에서 초인의 용모를 띠는 수탉의 붉은 벼슬은 그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의 깃발과도 같이 펄럭인다. “결의형제같이 의좋게 우리는/ 하눌하눌 국기마냥 머리에 달고/ 지귀(地歸)천년의 정오를 울자.”라고 그 시의 마지막은 노래한다. 제주도 아래 떨어져 있는 섬인 지귀도에서 노래한 것이다. ‘지귀천년의 정오’란 초인들의 삶으로 충만한 미래의 나라일 것이다. ‘땅이 돌아온다’는 것은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는 것이니 ‘지귀천년’이란 일제식민지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건설된 천년왕국의 나라를 은밀히 일컫는 일종의 ‘밀어’인 셈이다. <<시인부락>> 동인들이 ‘해바라기의 밀어’를 암호처럼 사용했던 것은 이렇게 시적으로 은밀하게 자신들의 탈제국주의적 지향점들을 서로간에 소통시키려 했던 일종의 시적인 비밀 언어였던 것이다. 그 유명한 <바다>가 이러한 계열의 밀어를 이어받는다.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동그란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닙처럼 흣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뜨라.....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이 시편은 지귀도 시편의 <웅계>(상)과 긴밀히 연결된다. <웅계>의 초인적 존재의 머리에 달린 육체의 꽃인 닭벼슬에서 시인은 새로운 나라의 국기 이미지를 보았다. <바다>에서는 ‘피에 젖은 국토’를 노래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강렬한 탈주와 새로운 이상적 국가로의 질주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탈주는 자신과 이웃, 우리 민족과 종족의 삶을 억압하고 가둬놓은 제국과 그 제국이 다스리는 식민사회의 울타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존의 억압적 경계로부터의 탈주가 궁극적 목표인 것은 아니다. 초인의 국가는 모든 민족과 종족들의 틀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며 새로운 가치의 목록판을 창조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당은 자신의 시적 출발점부터 이 목표를 향한 질주를 노래했다. <화사>의 꽃뱀을 자신의 발에 꽃대님처럼 두른 것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국가를 향한 초인적 질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웅계>의 수탉이 한밤에 해바라기 꽃으로 솟구치는 자신의 태양의 사상을 울부짖는다. 그것이 자신의 머리에 드리워진 붉은 꽃같은 닭벼슬인 것이다.
이러한 초인의 길을 위한 연습을 그는 ‘기독연습’ 또는 ‘기독수련’이라고 불렀다. 이 ‘기독’은 짜라투스트라적인 초인적 기독, 디오니소스적 기독을 의미한다. 이 기독수련을 위해 그는 <주문(상)>같은 글에서 거울에서 ‘기독의 쌍판’을 보며, <속 나의 방랑기>에서는 ‘가정을 버려야 한다’는 기독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역여>라는 시는 <바다>의 주제를 더 강렬히 다른 시점에서 노래하며 기독의 명제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초인 기독의 질주라는 주제는 서정주 시편의 첫 번째 단계를 뚜렷하게 특징지우며 당대 시단에서 매우 충격적인 모습을 전위적으로 시위한 것이었다. 이상에게 이미 동일한 주제들이 존재했었지만 그의 기괴한 난해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려져 있던 이것이 서정주로 인해 강렬하게 문단에서 표출되었고 그 충격파가 여러 시인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초인적 개인의 고독한 질주에 과거의 역사가 던지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강렬한 초극적 개인은 우리민족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껴안을 수밖에 없는 약간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그의 질주는 약간의 절뚝임이 된다. 미당의 시편 중에 가장 주목받지 못한 시가 <밤이 깊으면>(인문평론, 1940. 5)이다. 미당의 시중에서 가장 긴 장편시에 속하며 또 저자를 가리고 보면 마치 민중시 계열 시인의 시처럼 보이는 시이다. 이 시를 김지하의 초기 시편에 갖다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주제와 호흡과 문체를 갖고 있다.
밤이 깊으면 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늘같이 쬐그만 숙아
너의 전신을,
낭자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모가지와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모가지의 기럭시를
그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로운 음성을
서러운서러운 옛날말로 우름우는 한 마리의 버꾹이새,
그굳은 바윗속에, 황토밭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시곗소리 시계의 바늘소리
허무러진 돌무덱이 위에 어머니의 시체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 우에
빠앍안 노을을 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떳다가는 떨어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 적시우는 너의 오장육부, 그러헌 너의 공복,
뒤안 솔밭의 솔나무 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른 먹구름을, 먹구름먹구름속에 내이름ㅅ자 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연겊어연겊어서부르는소리를,
혹은 그러한 너의 절명을
혹은
혹은
혹은
여자여 너또한 쪼껴가는 사람의딸, 껌정거북표의 고무신짝 끄을고 그 다 찢어진 고무신짝을 질질질질 끄을고
(중략)
숙아!
이 밤속에밤의 바람벽의 또밤속에서
한 마리의 산 귀똘이와같이 가느다란 육성으로 나를 부르는 것,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비나리는항구의어느내외주점에서,
사실은 내 척추신경의 한가운데에서,
씻허연 두줄의잇발을내여노코 나를 부르는 것,
슯은인류의 전신의 소리로서 나를부르는 것,
한 개의 종소리와같이 전선과같이 끊임없이부르는 것
뿌랰. 쁠류의바닷물과같이, 오히려 찬란한 만세소리와같이
피와같이,
피와같이,
내 칼 끝에 적시여 오는 것,
숙아, 네 생각을 인제는 끊고
시퍼런 단도의 날을 닦는다.
미당은 이 시를 <살구꽃 필 때>(1941.4) 바로 앞에 발표한다. 시의 발표는 창작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시편은 선후를 따져볼 필요ㅍ없이 시퍼렇게 날을 가는 칼의 이미지를 동반하며, 자신과 긴밀하게 엮인 여인을 등장시킨다. 하나는 자신의 후대를 잇는 자식을 잉태한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의 어두운 뒷골목을 전전하며 몸을 파는 한 여인이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숙’은 식민지의 궁핍한 어느 여인이 될 수 있다. 그녀는 ‘달래마눌’을 통해 웅녀적인 체취를 갖게 된다. 서러운 옛날말로 울음을 우는 뻐꾸기처럼 연상되는 그녀는 불행한 어머니를 잇는 어둡고 음울한 한의 역사를 감당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식민지 시대의 비애를 따안고 있는 가녀린 여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가정을 버려야 한다’는 기독의 명제, 부모형제와 계집까지 잊어야 한다는 그 명제는 암흑기의 입구에서 그 강력한 억압의 무게 속에서 변질된 것인가? <살구꽃 필 때>의 시편에서 칼을 갈면서 옷을 모두 벗어제끼면서도 허공에 격검술을 해대는 시인이 ‘원수도 없는가’라고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초인적 기독은 아내의 저녁거리를 위해 칼을 간다. 그의 칼날은 본래 적대적인 원수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정에 사로잡힌 기독은 이제 그 칼날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마련한 신부감을 그는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옛날 혼인식을 치뤘고 큰아들을 낳았으며, 식구들을 거느려야 했다. 작은 아들이 임신되면서 그가 등에 짊어져야 할 경제적 생존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초인적 기독은 종족적 피의 흐름 속으로 이끌려온다. 그의 가정경제는 식민지 사회의 경제 구조 속에 편입되며 제국의 강렬한 전쟁의 광기에 뒤흔들리는 파국적 지진을 겪는다.
1941년 7월에 발표된 <조금>에 이 후일담이 마련된다. 이 시편에서 이전의 시편들이 노래했던 바다의 부풀어오르는 만조가 멀리 후퇴한다. “우리 그냥 뻘밭으로 기어다니며/ 거이색기 같은거나 잡어먹으며/ 노오란 조금에 취할 것인가”라고 한탄한다. 그는 이제 가정의 고삐에 사로잡힌 말과 같은 신세이다. <살구꽃 필 때>에서 시퍼렇게 날을 간 칼로 자신의 발톱을 깎아버린 장면은 여기서 ‘며느리 발톱’과 연결된다. 이 갈라진 새끼발톱은 우리 종족의 표지이다. “불기둥처럼 서서 울다간/ 스스로히 생겨난 메누리 발톱,”이라고 했다. 부풀어오르는 바다의 만조가 다가와도 고삐에 매인 채 달려가지 못해 생긴 발톱이다. 한맺혀 갈라진 발톱인 것이다. 신체의 칼은 고삐에 매여 스스로 갈라지고 만다.
2. 병든 초인의 회복기를 위한 유년기의 꽃
미당의 시편들 전체를 관통하는 기호는 ‘꽃’이다.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다. 식민지 시기의 생명꽃은 <화사>의 ‘꽃뱀’으로부터 <웅계>의 초인적 닭벼슬의 붉은 맨드라미로부터 출발한다. 이 절정의 꽃이 암흑기의 경계로 들어서면서 <살구꽃 필 때>의 살구꽃이 된다. 원수를 향해 칼을 갈며 질주하던 존재의 복숭아꽃(<도화도화>)과 살구꽃은 위협적인 칼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위기의 표현이며 생존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가 일제와 타협하여 몇 편의 시를 쓴 것, 몇 편의 글을 쓴 것은 그 스스로 밝힌 것이며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치욕을 들춰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으며, 그 전후의 시적 변모상을 살펴보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추락과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시적 주인공인 초인적 기독은 추락했고 병들었다. 그 시적 주인공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이 명제를 그가 어떻게 비켜갈 수 있었겠는가? 진지한 시인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 박힌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거의 주목하지 않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정확한 창작년도를 알 수 없는)라는 긴 제목의 시편이 있다. 오일도의 시 한 구절이 부제로 제목 밑에 추가되어 있다. “빈 가지에 바구니만 매여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 시의 첫줄에 이렇게 썼다. “아조 할수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막막한 삶, 그의 추락한 정신, 죽어버린 초인을 재탄생시킬 방법이 막막해서 무엇도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그가 탄생해서 자란 고향, 그의 유년기를 보듬어주고 키워준 고향이 새롭게 등장한다. 오일도의 시는 그 고향의 소녀들, 순수한 정령들처럼 보이는 소녀들을 암시해준다. 나중에 회갑이 지나서 이 유년기의 고향 이야기들이 본격적인 시인의 마지막 탐색 대상이 된다. 그 후대에 매우 집요하게 탐색되고 시와 산문들로 묘사되고 이야기되는 고향 이야기의 핵심이 해방 직후 발표된 위 시편에 제시된다. 우리는 이 시가 미당의 전체 시에서 갖고 있는 중대한 전환기적 매듭과 고리에 끼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시편을 통해서 두 가지 기획을 마련한다. 하나는 초인적 기독을 우리 민족의 전통적 설화에 등장하는 정도령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초인상을 한국적 초인상으로 토착화시키고, 니체적 지평을 우리의 설화적 흐름 속에서 새롭게 상승시켜보려는 시도가 여기 있다. 정도령은 한국식 초인이 된다. 그는 우리민족의 여러 국가체들의 병들고 추락한 난세 이후 이상향적 국가를 건설하게 되는 예언자적 존재이다. 정도령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파되어 있는데 미당은 자신의 고향인 질마재 마을의 유년기에 소녀들이 불렀던 정도령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이 내재된 신비한 존재가 병든 자신의 시적 주인공을 대체하게 된다. 그는 병든 정도령을 이 시에 등장시키며, 이 죽어가는 정도령을 살려내는 소녀들의 꽃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다.
정해 정해 정도령아
원이 왔다 문열어라,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
푸른꽃을 문지르면
푸른숨이 돌아오고
*
소녀여, 비가 개인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싶은가,
*
멫포기의 씨커운 멈둘레꽃이 피여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다는 단하나의 정령이되야 내소녀들을 불러 이르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병이 낫기만을, 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대리고 있었든 것이다,
미당은 이 시편을 통해서 자신의 유년기 고향마을인 질마재마을을 새롭게 보게 된다. 그는 초인적 기독수련기 시절 기존의 모든 굴레로부터 탈주하던 움직임에 수정을 가한다. 식민지 말기 자신의 기독을 사로잡은 가정의 고삐와 ‘숙’으로 대표되는 민중적 민족이나 종족의 이야기는 이 유년기의 ‘마을’ 속에서 새롭게 전환된다. 그의 초인이 질주하던 새로운 나라의 그릇에 유년기의 마을이 담긴다. 그의 유년기 시선들에 포착된 마을풍광과 마을사람들의 삶의 풍광이 청년기 삶의 풍랑을 모두 겪은 뒤의 어른이 된 시선과 결합해서 새롭게 조명된다. 미당은 이 시편을 통해서 또 하나의 기획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식민지 시기, 광기와 탈주에 사로잡힌 디오니소스적 초인, 질주하는 초인의 사자 단계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포착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초인의 단계를 낙타 단계로부터 사자 단계로 그리고 사자단계로부터 아이의 단계로 구별하여, 그 진화적 여정을 간파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아직 이 아이 단계를 향한 여정에 있었다. 아이는 순수무구하게 스스로 이 세계를 창조하며, 그 창조를 하나의 긍정적 유희로서 하는 존재이다. 미당은 병든 초인을 유년기 놀이에서 소녀들이 노래하던 정도령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그는 소녀들의 노래와 꽃으로 이 병든 정령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하고 있다. 그 치유된 환자는 이제 초인의 아이 단계를 향한 여정에 놓인다. 미당이 회갑에 이르기까지 50-60년대에 화려한 여러 절정기의 시편들을 써댔지만 이러한 초인적 여정의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시편들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회갑에 이르면서 그의 시편들은 노년기의 눌변에 가까운 어조로 변모한다. 그의 시들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려한 수사학들을 버린다. 그저 일상에 가까운 말들과 어눌한 것 같기도 한 쉬운 말들이 주도적인 시의 노년기적 문법이 된다. 그의 유년기가 솟구치면서 회갑 이후의 바다를 향한 여정은 고향 마을인 질마재 마을과 그 주변이 된다. 이 유년기의 마을 이야기 중심에 정도령 노래가 있고 그것을 부른 소녀들이 있다. 그의 회갑 이후 시편들인 <<질마재신화>>와 <<떠돌이의 시>> 이 두 시집이 이 이야기와 그 주변에 펼쳐진다. 그 이야기들의 결론에 <격포우중>과 <어느 늙은 수부의 고백>이 있다. 유년기의 질마재 마을 이야기를 동화적인 시선과 아늑하고 따뜻하게 감싸이는 빛으로 풀어놓은 결론인 것이다. 초인적 단계는 이 유년기의 동화적 이야기를 통해서 짜라투스트라와 구별되는 미당식의 아이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3. 질마재 마을의 하늘고동과 하늘육체에 대해서
미당은 그의 시적 생애를 통해 크게 두 가지 주제를 탐색했다. 하나는 초인적 자화상을 탐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정신사 속에서 ‘하늘육체’를 완성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위에서 대략 첫 번째 주제를 다뤘다. 이제 남은 한 가지를 논의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사 속에서 그가 초인적 자화상을 어떤 맥락으로 이끌어가는지 따져보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한 대략적 스케치가 그의 시 <한국성사략>에 표현되어 있다. 이 주제는 그의 초인의 여정에 놓인 ‘바다’의 주제를 보충하는 것이기도 하다. <격포우중>은 이 두 주제를 절묘하게 취합한 격포 바다의 풍광 속에서 그의 시적 주인공이 가는 마지막 여정을 노래한 것이다.
천오백년 내지 일천년 전에는
금강산에 오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별은, 그 발밑에 내려와서 길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송학 이후, 그것은 다시 올라가서
추켜든 손보다 더 높은 데 자리하더니,
개화 일본인들이 와서 이 손과 별 사이를 허무로 도벽해놓았다,
그것은 나는 단신으로 측근하여
내 체내의 광맥을 통해, 12지장까지 이끌어갔으나
거기 끊어진 곳이 있었던가,
오늘 새벽에도 별은 또 거기서 일탈한다. 일탈했다가는 또 내려와 관류하고,
관류하다간 또 거기 가서 일탈한다.
장을 또 꿰매야겠다.
<한국성사략(韓國星史略)> (<<신라초>>1960에 수록된 것)
미당이 식민지 시기에 제출했던 니체적 초인상은 자연적 육체의 생명력을 모든 사유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다 니체의 초인사상의 별들은 스스로 빛을 내며 스스로의 힘으로 회전하며 운동하는 존재들의 표상이었다. 미당이 정도령을 통해 토착적 초인상을 구축하는 마당에 그의 사상적 하늘은 어떤 별들이 자리잡아야 했던 것일까? 그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화랑의 별들을 이끌고 왔다. 아직 그 별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인 문답을 그의 몇 편의 시에서 구할 수는 없다. 아마 이에 대한 좀더 깊이있는 답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가 회갑을 넘어가면서 질마재 마을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비로소 거기서 찾아낸 ‘하늘육체’ 이야기가 시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별들이 자꾸 체내의 광맥을 통해 흐르다 일탈했던 그의 어떤 결여를 안고 있는 육체에 대한 해결책이 질마재 시편에서 마련될 수 있을지 살펴보아야 한다. 1960년에 제기된 <한국성사략>의 물음을 그는 인생의 이 마지막 시기(?)에 어느 정도의 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었다. 그 이후 미당의 시편들은 자신의 시편들에 대한 해설이며 여행기 정도에 불과하다. 회갑에 들어 펴낸 <<질마재 신화>>와 바로 직후 나온 <<떠돌이의 시>> 이 두 시집이 그 시적 생애의 결론이며 그의 시적 탐색의 결과물이 된다.
질마재마을 사람들의 삶과 정신에 적층된 여러 설화적 지층들
단군신화와 견우직녀신화, 여러 역사적 사상들, 선도파와 유학파, 샤만당골파
자연파 실학파 동학파
이러한 여러 유파들의 차이와 갈등과 골들이 마을공동체의 삶 속에서 한데 어우러지며 일구어가는 ‘질마재마을’ 자체의 유기적 생동력
이러한 여러 갈래의 사상들을 알기 이전의 유년기 아이들의 동화적 시선과 마음에서 요동치는 하늘고동 이야기와 하늘육체 이야기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며 그 모든 것을 포괄한 채 질마재마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떤 미묘한 그물망이 있는 것. 질마재마을이란 독특한 단위체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은 마을의 땅과 하늘, 산과 바다와 강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모두 하나로 엮이어지며 만들어진 그물망이 된다. ‘하늘고동’이 이러한 삶 전체를 자연의 진화적 숨결 속에서 맥동시키는 힘이 된다. 모든 생명의 고동은 ‘바다’의 어질머리 파동 속에서 숨겨지고 드러난다.(신라초의 <바다>)
<질마재신화>는 마을사람들의 다양한 계층과 특성 개성들을 유년기의 시인이 바라본 것이거나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창조된 것이다. 물론 이 유년기는 회갑의 나이에 도달한 시인이 회상한 유년이니 사실은 노년과 유년이 결합된 것이다. 회상은 과거의 순수기억이라기보다는 노년의 거울에 비친 기억이며, 그 노년에 도달한 여러 삶의 축적과 깊이와 두께를 가진 거울에 의한 회상이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어 그것을 자신의 생각과 시선으로 전환할 때에도 이 삶의 거울이 작동했을 것이다. 이 시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마을사람들의 진정한 주인공들로 제시되는 것은 주로 심미파에 해당하는 하층적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상산’에 대한 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다. <상가수의 소리>는 바로 상산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다. 예능광대패의 일종인 그의 이야기는 <<질마재신화>>를 대표하는 시이다. 젊은 시절 시인 자신을 이러한 심미파를 계승한 특정종족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가족, 그의 아버지가 한문학을 했고 서생을 했으며 약간의 돈놀이를 했으니 조선적 계층으로 보면 하층 양반이나 중인 정도로 볼 수 있으나, 그는 그 유명한 <자화상>이란 시에서처럼 시인은 자신을 떠돌이 천민으로 부각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실제 신분을 밝힌 것이 아니라 당대 식민지로 떨어진 일반적인 삶을 떠맡은 시적 존재의 상징적 신분이었을 뿐이다. 한때 사람들은 그 시적 표현을 실제적인 일로 오해해서 그렇게 평을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시적 전도는 질마재 이야기 전체에도 적용된다. 러시아 문예학자 바흐찐의 축제론은 사회계층의 전도에서 소설적 화법의 특성을 본다. <<질마재 시편>>의 이야기들에도 어느 정도 이러한 축제적 특성이 보인다. 양반이나 유자들의 지배층은 여기서 매우 편협하고 인색하며 무섭고 쩨쩨하게 묘사된다. 눈들영감 이야기와 황영감 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다. <눈들영감의 명태 이야기>와 <사과하늘>이 여기 해당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이들에 대한 비판적 사실주의에 함몰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쩨쩨한 사실들을 매우 신화적 표현으로까지 상승시킨 것이 이 시편들의 빛나는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이 시편들은 <상가수의 소리>보다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불러낸다. 어떤 모순과 역설적 빛이 이 시편들에 있다. 이러한 역설적 빛은 온전히 시인의 창조적 면이며 그의 노년아이적 사랑의 빛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가장 경멸적인 것들을 그 반대편의 신화적 빛, 풍요로운 삶과 세계의 빛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제적 전도는 단골 암무당과 그 머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하다. <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라는 시가 있다. 여기서 그 암무당 집의 개보다 더 하층적 존재인 머슴아이는 자랄수록 점점 더 마을사람들 전체의 정신과 마음을 지배하는 정신적 존재로 상승한다. 이러한 전도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온전히 무형의 정신과 마음의 지층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매우 깊은 것이며 정치경제적 관점을 넘어선 것이다. 삶의 지층은 이렇게 정신과 마음의 지층들의 역동성으로 인해 수많은 변화가능성을 갖게 된다. 질마재 마을 이야기의 끝자락에 소개된 <김유신풍>도 이러한 전도를 희극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내마음의 편력>의 <질마재> 이야기 연작에 들어있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즉 마을의 실학파적 존재인 두부기계로 두부를 만드는 집 아들이 들려준 이야기인 것인데 미당은 이 이야기의 황먹보가 실은 이 집 아들 이야기를 살짝 변형시킨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이집의 실학파적 면모는 이 아들이 ‘실로’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것과도 연관시켜 약간 희화적인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즉 ‘상산’이 같은 심미파의 멋이나 진영이 같은 자연파의 생동하는 생명력에 대한 희열같은 것이 결여된 존재로서 이 두붓집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지리 가난하고 못난 황먹보가 이웃 부자인 장자집 딸을 얻어 장가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황먹보가 다양한 기술적 도구로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환상 장치들로 장자를 꼼짝 못하게 속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근대적 기술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정신을 속이고 굴복시켜 승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인의 관점은 다분히 희화적이어서 약간은 냉소적 어조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분지러 버린 불칼>은 전도의 범위가 마을을 넘어서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덤덤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내력에 대해 이 시는 말한다. 이 하늘의 불칼은 지배계층의 지시, 명령과 벌의 호통소리의 알레고리이다. 변산의 역적 구섬백이와 고부의 전봉준이 이 불칼을 분질러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조 백성들을 벌벌 떨게 했던 권력층의 모든 질타와 호통을 삭제시킨 이야기는 조선과 청국의 관계에도 미묘하게 개입한다. 마을사람들은 벼락이 칠 때 일에서 10을 세는데 이 셈법에 청국 오랑캐들의 짓거리를 암시하는 구절들과 그것들을 경멸하며 극복하려는 어조가 만들어낸 단어들이 들어간다. 희극적인 말들이지만 그 이면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들어있다.
희극적인 극치를 숭고함의 극치로 전도시킨 시는 <소 ×한 놈>이다. 마을에서 가장 으뜸가는 면모를 갖춘 총각놈이 있었는데 몸과 마음이 모두 으뜸가는 이 총각 ‘숫하디 숫한’ 이 총각에 ‘소×한 놈’이란 소문이 꼬리표처럼 달리면서 어디론가 그가 사라져버린 이야기이다. 자신이 키우던 암소하고 다니다 어느 밤 영영 둘이 다 사라져버린 것인데 그의 한 마디 말만 전한다. “4경이면 우리 소 누깔엔 참 이뿐 눈물이 고인다”라고 누구한데 말했다는데 시인은 그가 틀림없이 ‘그 발자취에서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틀림없는 틀림없는 성인 녀석’이었을 것이라고 첨언한다. 가장 순수하고 순결했던 청년이 이상한 소문 한 마디에 밑바닥으로 추락한 이미지로 변신하고 그로 인해 아무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인데 시인은 여기서 ‘성인’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시선과 이야기는 이러한 순수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질시하는 것일까?
전반적으로 미당은 질마재 마을 사람들을 모두 소중하게 다루고 있고, 비천함의 고귀함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이러한 반대적인 면모를 간파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은 어떤 때는 음모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의 불결함은 윤리적 파탄을 몰고 오기도 하며 간통사건 같은 것을 들춰내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그것을 질책하고 마을 전체에 경계하고 벌을 내리기도 한다. <간통사건과 우물>이란 시에서 ‘마을’은 이 한 개인의 윤리적 파탄에 전체적으로 반응한다. 어쩌다 벌어진 이 사건 때문에 마을의 하늘이 아파하고 벌집쑤셔 놓은 듯이 벌침에 쏘인 사람들은 그 소문에 나팔을 불고 징을 치고 북을 치며 외치고 달린다. 그리고 모든 우물에 가축용 여물을 뿌려댄다. 그렇게 마을 전체에 스스로 벌을 내리고는 생수를 구하기 위해 산골과 들판을 헤매인다. 미당은 어떤 마을에도 있을법 하지 않은 이러한 독특한 분위기를 포착했다. 질마재마을은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처럼 반응하고 움직이고 있다. 아마 한 마을의 이러한 놀라운 유기체적 운동을 이처럼 보여준 예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질마재 신화>> 전체를 흐르는 이러한 전도는 여성적 존재들에게서 더 깊은 에너지를 얻는다. 남성적 존재들에 대한 여성적 존재들의 전도는 페미니스트들처럼 적대적인 증오와 복수 같은 것들로 점철되지 않고 더 높이 승화되어 있다. 이들은 모든 남성적 권력의 억압과 시련을 견뎌내고 더 젊어지고 더 우아해지며 더 섬세해진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을 더 숭고한 존재로 상승시킨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첫 번째 시 <신부>에서 그러한 징후가 엿보인다. <해일>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은 바다에서 실종된 남편 때문에 평생 홀로 된 여인의 일생에 관한 것이니 <신부>의 반대편에 놓인 이야기이다. <<떠돌이의 시>>에 나오는 <당산나무 밑 여자들>이나 <단골암무당의 밥과 얼굴> 같은 시들이 있다. 약간 희극적 면모를 띤 <소자 이생원 마누라님의 오줌기운>이 있고 그 반대편의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부각된 여인인 부안댁을 다룬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같은 시도 있다. 이들은 남성적 존재들로 인한 억압과 비애가 강조되든 그렇지 않든 모두 여성적 영웅적 면모나 고귀함을 보여준다. 이들이 진정한 ‘질마재 마을’의 진짜 주인공들이다.
<까치마늘>과 <박꽃시간>
미당 시 전체의 흐름을 내려다보기 위한 관점은 그가 <한국성사략>에서 노래한 자신의 하늘육체에 대한 이야기의 변주이다. 그것은 <바다> 시편들을 통해 조망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순수한 야생의 삶, 원초적 생명의 바다에 이를 수 있는지를 그 시편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늘의 푸른 빛을 담고 출렁이는 이 거대한 원시적 파동을 그는 바라보고 그곳으로 흘러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상의 <LE URINE>처럼 그러한 초인적 강물의 흐름을 그는 여러 시편들을 통해 변주한다. 우리는 그 주제의 도달점에서 <격포우중>과 <어느 늙은 수부의 고백>을 본다.
‘하늘육체’라는 개념은 그가 질마재의 유년기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란 인내천 개념은 우주론적 인간과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설파한다. 천지가 하나로 통합된다는 개념인 것이다. ‘하늘육체’는 인간론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 지상적인 것에 하늘을 통합한다는 개념을 거치고 넘어서 그것은 모든 삶과 자연을 우주적 하늘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하늘을 지상에 끌어내리는 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육체는 질마재 마을 소녀들의 정령적 입에서 전해진 것이다. <한국성사략>은 하늘육체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의 결여를 노래한 것인데 이후 그는 이 결여을 보충하기 위해 탐색한다.
질마재 마을 시편들은 그러한 흐름의 결론부 바로 앞에 놓인 것이다. 이 마을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바닷가 마을에 펼쳐진 인생들의 요약도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은 그 최상의 상태에서도 바다 그 자체의 삶은 아니며 거기 근접하거나 그것을 향해 있는 삶들이 된다. 미당은 마지막 초인적 존재로의 단련을 위해 이 마을 이야기를 펼쳐낸 것이다. 하늘 육체의 몇 가지 이야기가 질마재마을을 다룬 <내마음의 편력>의 <질마재> 연재글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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