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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덕 (1987.1.3 / 33세) 충남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 동지는 86년 교육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파면당했다. 학교 계단에서 쓰러져 5개월간 투병하다 숨져간 동지는 참교육, 전교조 결성의 새벽이었다.
87년 11월 마산, 창원지역 24개 노조는 연대파업을 통해 택시사업자연합과 공동교섭을 진행했다. 각 단위별 교섭과정에서 정당한 노조활동을 방해하는 우성택시 사측의 고압적 태도와 정부의 공권력의 회사 지원에 항의, 분신하였다. 원진레이온에 입사한 후 ‘이황화탄소 중독증’을 얻은 동지는 회사측의 산재 인정 신청 거부에 맞서 싸워나갔다. 마침내 91년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를 접수 통보를 받은 그날 운명하였다. 동지는 88년 삼미특수강에 입사, 노조 대의원으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활동했다. 4대 집행부 총무부장 당시 위원장의 직권조인과 사측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비상대책위 총무부장을 역임하며 온몸으로 투쟁하여 노동조합을 사수하였다. 92년 임금동결거부 인원감축반대 투쟁시 임파선 암 선고를 받고 혼자 병마와 힘겹게 싸우면서도 감옥에 간 동지들을 먼저 걱정했던 동지는 끝내 투쟁 과정에서 93년 운명하였다. 80년 상호운수에 입사, 노조활동을 한 동지는 ‘택시운송수입금전액관리 법제화’, ‘사납금제의 철폐와 완전월급제 실시’등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영상 정권의 택시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동지는 마지막 투쟁의 방법으로 자본과 정권에 항거,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탄원서’라는 글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후 동지의 자결후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으로 ‘택시운송수입금전액관리 법제화’가 이루어졌으나 대부분의 택시업계는 도급 등의 방식으로 전액관리제의 참뜻을 왜곡하고 있는 현실이다.
89년 한국전력 한일병원지부장이 된 동지는 본격적인 어용노조 퇴진, 노조간부정년연장 무효와 등 한국전력노조 민주화에 앞장서왔다. 이에 어용노조 집행부 ‘규약위반’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1월 12일 한국전력노조 54차 중앙위원회에서 징계를 서둘렀다. 이에 “징계는 부당하다”“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조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 한다”는 말을 남기고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으로 뛰어 들어 민주노조 건설에 자신을 던졌다.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95년 전노협 총무부장으로 노동자들의 기초적인 권익 보호와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동지는 전노협 상근활동을 해오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폐결핵을 앓게 되었으나 민주노총 결성이후 ‘전노협 백서 발간위원회’에서 발간사업 힘을 쏟았다. 97년 군복무(공익근무)중에도 민주노총 충남서부협의회 조사통계부장으로 활동한 동지는 99년 투병 중 운명하였다. 배달호 (2003.1.9 / 50세) 한국중공업을 특혜로 인수한 두산재벌은 2002년 구조조정으로 1,124명해고, 노조간부 89명 징계해고, 78억의 손배가압류 등 극심한 노조탄업을 자행했다. 파업투쟁으로 구속되었던 동지는 재산과 임금이 가압류로 고통받던 동지는 부당한 자본의 횡포와 정권의 묵인에 대해 항거하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였고, 손배가압류로 인한 노조 탄압을 사회에 고발했다. 임영덕 (2003.1.25 / 41세) 평범한 공무원이던 동지는 공직사회에 모순과 무기력감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공무원상을 만들기 위하여 공무원 노동조합 건설을 결심했다. 2001년 경남 시군구 단위에서 직장협의회가 건설되었고, 경남지역 공무원직장협의회(경공련)을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지는 전공노의 견인차 역확을 하였다. 2002년 7월 1일 공무원노조 진해시지부장을 맡으면서 공무원노조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동지는 정부의 탄압에 조합원 총력투쟁, 삭발투쟁, 연가투쟁 등 노조를 사수투쟁 중 과로로 입원한 동지는 간경화 판정을 받고 투병중 두 달만에 운명하였다. 여성민우회 활동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한 동지는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대구지역의 섬유노조 건설과 섬유노동자들의 연대조직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96년에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전면무효화’를 위한 전국노동자 총파업투쟁에 참여하였다. 20000년부터는 동아시아지역 책임자로서 풀뿌리 국제노동자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던 중 2002년 대장암 판정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 42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기본급과 12시간 맞교대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택시노동자인 동지는 생존권 쟁취를 위해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며 63일 동안 파업을 이끌어 월급제 쟁취, 연월차를 유급화시켜냈다. 이후 사측은 활동가 3명을 해고하고 2006년 임금삭감협약으로 탄압했다. 동지는 “임금삭감 절대 반대” “해고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분신, 운명했다. 2009년 1월 20일, 재개발은 생산과 노동 없이 부를 만드는 과정으로 재벌의 이익을 위한 용산재개발 철거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의 공권력 투입으로 5명의 철거민이 살해되었다. 이미 재개발과정에서 수없는 철거민들이 사회 관심조차 갖지 못한채 숨져간 것이 재개발의 역사다. 용산살인만행 사건발생 355일만에 치러진 장례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과제는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