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심(68세)과 성연이(60세)는 문화센터에서 함께 영어를 배우는 사이였다. 나이는 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에 두 사람은 매주 수업을 기다렸다. 영어 공부가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 격려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 이자심이 성연이에게 말했다.
"성연 씨, 영어 발음이 좀 안 좋네. 더 연습해야겠어."
이자심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조언이었다. 하지만 성연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날 이후, 성연이는 문화센터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그다음 주에도 성연이는 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이자심은 성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연 씨, 왜 안 와? 어디 아픈 거야?"
전화기 너머로 성연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냥…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남들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닌가 싶어."
이자심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 말 한마디가 성연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가벼운 조언을 한 것뿐이었지만, 성연이는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안해, 성연 씨. 그런 뜻이 아니었어. 우리 같이 배우는 거잖아. 나도 틀릴 때 많은데!"
하지만 성연이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자심 씨. 하지만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갈게."
전화를 끊고 이자심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작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이자심은 성연이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손에는 작은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거, 우리 같이 공부하자.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해. 같이 연습하면 더 좋잖아."
성연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노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문화센터에서 다시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자심은 배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바로, 말의 무게와 친구의 소중함이었다.
발음 싸움
문화센터 영어 수업이 끝난 후, 김춘애와 도기순은 평소처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고, 특히 발음에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봤을 땐, 내 발음이 더 정확한 것 같아."
김춘애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니지! 내가 선생님한테 더 많이 칭찬받았어. 내 발음이 더 좋아!"
도기순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냥 농담처럼 끝날 줄 알았던 대화는 점점 격해졌다.
"기순 씨는 R 발음을 제대로 못 하잖아. 그렇게 굴리면 안 된대!"
"뭐? 그럼 춘애 씨는 TH 발음 제대로 돼? 늘 ‘더’라고 발음하잖아!"
서로의 약점을 들추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수강생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그래도 네이티브가 들으면 다 알아들을 수 있어!"
"그래? 그럼 한번 선생님한테 물어볼까? 누구 발음이 더 좋은지!"
그 순간, 도기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뭐 하러 그런 걸 따져. 그냥 잘난 춘애 씨 혼자 공부하세요!"
도기순은 그 길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그 후, 도기순은 문화센터에 나오지 않았다. 김춘애는 처음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았다.
며칠 뒤, 김춘애는 용기를 내어 도기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순 씨, 미안해. 그냥 장난처럼 한 말이었는데… 너무 심했지?"
도기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좀 흥분했어. 근데… 왠지 기운이 빠져서 당분간 쉬고 싶어."
김춘애는 도기순의 마음을 완전히 풀어주지는 못했지만, 다음 수업 날 조용히 도기순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함께 웃으며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중국에서 영어로?
문화센터 영어 수업이 끝난 후, 안해순이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 중국을 다녀왔잖아. 근데 거기서 영어로 진짜 많이 말했어!"
수강생들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정말요? 어디서요?"
"호텔에서! 식당에서도! 길에서도! 중국 사람들하고 전부 영어로 대화했지!"
안해순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손짓까지 곁들이며 말했다.
"처음엔 좀 긴장했는데, 다들 내 말을 잘 알아듣더라고. 역시 영어는 실전이야!"
그 말을 듣던 김춘애가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근데 해순 씨 발음 들어봤어? 완전 짱갱이 발음이야!"
곁에 있던 도기순도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아까도 ‘땡큐’가 아니라 ‘땡큐우~’ 하던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수강생들은 장난스럽게 안해순의 말을 따라 하며 놀리기 시작했다.
"아이엠 프롬~ 코리야~"
"캔 아이 헬류~?"
"웰캄 투 차이나~!"
사람들은 깔깔 웃었지만, 안해순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뭐야, 다들? 나 진짜로 영어로 대화했다니까!"
하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일부러 과장된 억양으로 말하며 따라 했다.
안해순은 씁쓸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겼다.
"됐어. 나 먼저 갈게."
그렇게 교실을 나서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영어로 대화한 게 그렇게 웃긴 일이야?"
다음 주, 안해순은 문화센터에 나오지 않았다. 수강생들은 처음엔 별생각 없이 놀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춘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너무 심했나? 해순 씨 그냥 자랑하고 싶었던 거잖아."
도기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좀 미안하네. 다음에 오면 우리가 먼저 말 걸자."
그렇게 문화센터에서는 안해순을 기다리며, 다음번에는 서로를 좀 더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로 했다.
콩가루와 검은들깨
몇 주 동안 보이지 않던 안해순이 문화센터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를 본 수강생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해순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안해순은 활짝 웃으며 손에 든 봉지를 흔들었다.
"나 지난번에 중국에서 좋은 거 좀 사 왔어. 콩가루랑 검은들깨인데, 몸에도 좋고 고소해!"
수강생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안해순은 준비해 온 봉지를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거 맛있어요. 미숫가루처럼 타먹어도 되고, 요거트에 넣어도 좋아요!"
사람들은 고맙다고 하며 봉지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김춘애와 도기순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해순이 자기들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도기순이 슬쩍 물었다.
"해순 씨, 내 건 없어?"
안해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다 나눠줬네? 미안~ 다음에 가져올게."
김춘애가 눈을 찡그리며 속삭였다.
"설마… 일부러 우리만 빼놓은 거야?"
도기순도 팔짱을 끼고 말했다.
"지난번에 우리가 놀린 거 아직도 삐친 거 아니야?"
안해순은 모른 척 다른 수강생들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콩가루 맛있게 드세요~"
김춘애와 도기순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진짜 너무했나 보다. 해순 씨 아직도 기분 상했나 보네."
"그러게. 그냥 장난이었는데…"
그날 수업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안해순에게 다가갔다.
"해순 씨, 지난번에 우리가 좀 심했지? 미안해."
안해순은 잠시 둘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알았어. 그럼 다음 주에 콩가루랑 검은들깨 가져올게!"
그제야 김춘애와 도기순은 안도하며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엔 좀 더 조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