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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겨울호 수필세계 신인상 심사평
소통과 수용의 미학을 살린 작품들
- 이혜경의 <코다리> 외 4편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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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은 작가의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과 삶의 여정을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는 가치와 울림이다. 따라서 좋은 문학에는 깊고 긴 울림이 있으며 그 울림은 사람의 마음에 공감과 감동을 주게 된다. 특히 수필문학은 작가의 삶에 대한 체험적 이야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경험이 반추될 수밖에 없다.
삶에서의 슬픔과 아픔과 절망, 상처와 시련을 겪은 과정이 겨울을 나는 보리와 같이 인고를 통해 새 봄의 환호를 맞게도 한다. 따라서 한 편의 수필 속에서 작가와 독자는 함께 웃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그것이 수용과 화해와 치유로 이어지는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근래‘힐링’이란 말이 수필에도 붙는 것을 본다. 어쩌면 수필이야말로 힐링문학의 조건을 가장 잘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지난 삶은 기쁨과 감사일 수 있지만 후회일 수도 있고 원망일 수도 있고 안타까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것은 지난 것이다. 하지만 그 지난 것이 현재의 내 걸음과 내 마음을 단단히 붙잡거나 얽매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것은 나를 바로 보는 것일 수 있다. 바로 본다는 것은 사실보다 진실로 본다는 말이다. 사실은 앞으로만 보기, 보이는 것만 보기일 수도 있지만 진실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리지 않는 것까지 보기요 듣기다. 해서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기보단 진실의 문학이다.
이번 수필세계에 응모된 작품은 9명의 60편이나 되었다. 많은 좋은 작품이 있었지만 한 명만 당선으로 한다는 원칙하에 이혜경의 <코다리>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혜경은 이미 글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글감을 붙잡는 법, 그 글감을 어떻게 요리하여 내가 원하는 맛깔스럽고 멋스러운 한 편의 수필이란 요리롤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작이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고 맺음이 시원 통쾌하다. 무엇보다 수필마다에서 수용과 화해를 통한 치유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문학이 갖는 특성 중 독자를 감동시키는 면에서 단순한 공감이나 감동이 아니라 공감과 감동이 수용과 화해를 가져오고 그것이 심적 정신적 치유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이혜경은 매 작품에서 이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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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이 자유로움일 수 있다. <코다리>에선 코다리의 삶과 인간의 삶을 병치시켜 코다리의 변화하는 삶을 통해 보다 나은 내 삶을 추구한다. 삶은 코다리를 만드는 일이면서 코다리가 되는 일이다. 코다리는 노가리가 변화한 것이다. ‘바다향을 머금고 탱탱한 자태를 뽐내던 시절’에는 ‘스스로 바다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며 더러는 ‘보호구역을 벗어나는 일인 줄도 모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만 보며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그 결과 ‘낯선 바다에서 운명의 짝’을 만나고 결혼이라는 황홀한 순간도 맞는다. 그러나 그때부터 ‘끝과 시작이 복잡하게 얽힌 그물’속에 갇히게 되더니 어느 순간‘이렇게 조금씩 시들어가는구나’ 하며 절망도 한다. 하지만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코다리의 삶이 있는 거였다. ‘바람과 햇볕을 번갈아 견디며 굳은살이 생긴 코다리는 뜨거운 불에서도 모양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비록 몸 안의 기름기는 빠져나갔지만 오히려 그 틈 사이로 다양한 양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게 되었다.’
수필 <코다리>는 소통과 화해를 끌어낸 작품이다. 우선 자신에게요, 그 자신과의 화해와 소통이 자연스럽게 주위로 전파된다. 삶은 어떤 맛일까. 제각기 다르겠지만 ‘수시로 온도가 달라지는 결혼생활에서 중심을 잘 잡으면 나 역시 좀 더 맛깔 나는 아내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작가는 달콤 짭조름한 코다리살 맛으로 자신만의 삶의 맛, 아름다운 조화의 맛을 의미화 한다.
‘갈수록 느려지는 아이와 반대로 나의 잔소리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출발선 앞에서 매양 뒤처지는 모습에 조바심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한 템포 앞서 지시나 잔소리를 쏟아냈다.’
<달팽이>는 이 시대 아이를 가진 엄마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의 지식이란 자기 그릇만큼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아이가 가져온 달팽이를 통해 작가는 그 사실을 확인한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달팽이가 문턱을 넘고 또 넘어 베란다에 있는 화분 위에까지 올라가 있는 것이다. 느리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엄마 욕심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을 뿐이다. 빨리 뛰라고 등을 떠미는 엄마 때문에 얼마나 숨이 찼을까? 큰 달팽이와 작은 달팽이가 기특해 두 팔로 힘껏 끌어안는다.’
이혜경의 수필 맛은 그렇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비둘기처럼>은 사회적 문제를 건드린다.
‘한 때는 평화의 상징으로 대접 받았던 비둘기가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먹이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발휘한 덕에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아진 비둘기는 도시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는데 노후 수명은 길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많다. 젊음을 다 바쳐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아낌없이 월급을 쏟아 붓느라 정작 자신을 위한 준비는 하지 못했던 우리 부모 세대들은 마땅히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지만 작가는 희망 하나를 가슴에 품으며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더 이상 비둘기가 정다운 새로 여겨지지 않는 지금, 따뜻한 봄이 오면 저 노인들의 집에 장미꽃이 한 번 더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경쾌한 유행가 가사가 오늘따라 가시가 되어 가슴 한 구석을 찌른다.’
<갇힌 음표> 또한 이 시대를 향한 무언의 호소다. 노래방은 해우소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그곳에도 신세대와 구세대라는 구획이 정해졌다.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어중간한 템포의 곡이다. 한 때는 신곡이었으나 어느덧 세월에 밀려 두꺼운 책자 한 가운데 파묻힌 구닥다리 신세가 됐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을 걸어온 남편 앞에서는 묵은내 나는 노래도 추억을 나누는 공유기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모처럼 노래방엘 가더라도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 밀려 내 노래는 잃고 만다. 그래서‘품에 안고 키우던 아이가 훌쩍 자라면서 똑같은 악보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만의 음표’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좋아하던 노래는 가사도 박자도 그대로인데 노래를 부르는 나는 많이도 변했다.’ 그래도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즐겨 찾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만의 곡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꼭 새로운 곡이 아니어도 좋다. 같은 악보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래도 부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오랜 시간 한 울타리에서 지내며 우리의 호흡도 서로에게 맞추어 편곡이 된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정해진 음정과 박자에서 벗어난들 무슨 상관있으리.’
이거라도 없으면 쉼표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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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의 수필은 적당히 세상을 보기도 하고 적당히 나를 보기도 하며 삶의 가락을 내 가락에 맞춘다. 내가 버리고 포기할 게 무엇인지가 판단되면 바로 그를 수용한다. 자신에 화가 나고 나를 둘러싼 환경들에 속이 상하다가도 어차피 그 속의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것들을 끌어안는다. 숙명이나 운명 같은 거대한 의미로가 아니라 내 삶의 걸음으로 내가 끌어안아야 할 삶의 치마폭을 인정한다. 너그러워서가 아니다. 그게 삶의 지혜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는 게 이 시대를 사는 자기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은 이런 수용과 화해를 통해 내가 치유 받고 남도 치유하는 공동의 삶이다. 문학이 다른 사람들의 삶속 깊이 스며들어 삶의 문학을 이루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눈이 섬세하고 밝고 맑은 수필가 이혜경의 마음 또한 거기에 맞는 맑음과 밝음을 고루 갖추고 멀리까지도 보고 아주 작은 것도 보며 미세한 소리까지도 듣는 좋은 수필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수상 소감/ 이혜경
뱀띠 아니랄까봐 찬바람이 불어오면 온몸이 움츠러듭니다. 두꺼운 스웨터에 코트까지 겹쳐 입고서도 온몸에 한기가 들던 오후,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속에서부터 땀이 삐질삐질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당선 소식인데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가’라는 이름표가 지닌 육중한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뱀은 자라면서 여러 번 허물을 벗는다고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동안에는 촉촉했던 살갗이 마르고, 눈 위로 뿌연 막이 생깁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먹이를 먹지 않았거나 몸에 병이 난 뱀은 허물을 벗지 않습니다. 건강한 뱀일수록 허물을 여러 번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수필을 공부하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제대로 벗어라’였습니다.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진실과 체험에 기반을 두고 써야 하는 장르가 수필이니 당연한 진리이겠지요. 듣고 배운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벗는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기억의 창고에서 추억의 조각을 꺼내와 어설픈 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속살을 드러내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일면식 없는 낯선 이들이 내 글을 읽고 혹시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벗지도 입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갈피를 잡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수필가를 꿈꾸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일 수 없다면 그 길을 걸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망설이고 감추는 글은 나보다 독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고개를 젓는다는 것을 알기에 용기를 내어 민낯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속살을 보이더라도 원색적이지는 않아야 하고, 베일을 살짝 걸치더라도 갑갑해 보이지 않도록, 어떻게 잘 벗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펜을 들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수필 세계에 감사 인사 올립니다. 앞에서 뒤에서 응원해 주시는 에세이울산 문우님들께도 늘 고맙습니다. 뒤늦게 꿈을 찾겠다고 가욋길에 뛰어든 저를 이해해 주고 허물을 눈 감아 주는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허물을 벗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뱀처럼 내면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나가며 조금씩 성숙해지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제 겨울이 찾아와도 땅 속에 숨기 보다는 몸피를 더 단단하게 만들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겠습니다. 내면의 허물을 벗는 일이 나의 허물이 되지 않도록 부끄럽지 않은 수필가가 되겠습니다.
*약력*
경남 양산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엄
제4회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 금상 수상(2013)
제11회 동서문학상 은상 수상(2014)
당선작 5편
코다리 외 4편
단단히 코가 꿰였다. 지느러미를 바짝 붙인 코다리가 차렷 자세로 줄지어 매달렸다. 줄줄이 엮여 꾸덕꾸덕 말라가는 코다리들은 애초에 같은 운명으로 태어난 것일까? 지금은 저렇게 굳어버리고 묶인 몰골이지만 한 때는 바다 향을 머금고 탱탱한 자태를 뽐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얼음장 같은 바다를 마구 휘젓고 다니던 어린 노가리 시절에는 두려움을 몰랐을 터이다. 언제 그물에 걸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운명임을 알지 못했기에 거침없는 몸짓으로 더 낯선 곳, 더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물살을 밀어냈을 것이다. 부쩍 덩치가 커지고 흑갈색 등에 번지르르한 기름이 돌 때는 스스로 바다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어부의 그물에 걸려 처음으로 바다를 벗어난 순간, 금빛 햇살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인 줄도 모른 채 눈부신 햇살을 휘감으며 온몸을 퍼덕이다 촘촘한 그물에 갇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처지가 된 것이리라.
어렸을 때, 나를 둘러싼 세상이 좁게만 느껴져 더 큰 바다를 마음에 품었다. 보호구역을 벗어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졸업식장에서 꽃다발을 안고 그저 설레기만 했다. 넓은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만 보며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전력으로 헤엄쳐 도달한 낯선 바다에서 운명의 짝을 만났고, 마침내 결혼이라는 배에 올랐다. 햇살 품은 비늘처럼 여러 겹으로 반짝이는 예식장 샹들리에 아래서 나는 이를 활짝 드러내고 웃었다. 코가 꿰이는 줄도 모르고,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보석 왕관을 쓴 그 순간에 자신만만했다. 새로운 배를 타면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거라고, 둘이 함께라면 파도쯤은 거뜬하게 넘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예상과 달리 결혼이라는 배는 끝과 시작이 복잡하게 얽힌 그물이었다. 차고 넘치던 자유시간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단순히 한 남자에게 코가 꿰이는 차원을 넘어서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지내면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가족을 챙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가정이라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춰야 잡음이 없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가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며 나의 겉모습도 물기를 잃어갔다. 대충 로션만 발라도 윤이 나던 피부는 푸석한 각질에 덮여 비늘 벗겨진 생선 마냥 울퉁불퉁해졌다. 한 번만 매듭을 지어도 단단하게 묶이던 풍성한 머리숱은 간 데 없고 머리끈을 여러 번 감아 묶어도 금세 느슨해졌다. 깊어지는 주름을 감추려고 화장으로 덧칠해 보아도 구겼다 편 종이처럼 접힌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금씩 시들어가는구나 생각 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남은 바다 냄새마저 비린내로 바뀌고 보드랍던 살결이 딱딱하게 변한 코다리를 들고 무슨 요리를 만들까 생각에 잠긴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생태는 무 몇 조각 썰어 넣고 시원한 탕을 끓이기에 좋고, 깔끔하게 건조시킨 포는 결대로 찢어 무침을 만들면 맛이 일품이다. 생태의 싱싱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마른포가 지닌 담백함도 없는 반 건조 코다리는 근사한 요리를 만들기에는 어중간한 재료다.
고심 끝에 조림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양념이 고루 배려면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손질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우선 코에서 입으로 이어진 끈을 풀어 한 줄에 엮인 코다리를 한 마리씩 떼어 낸다. 어깨를 겹치고 붙어있던 코다리들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다. 손질을 위해 잠시 떨어트려 놓긴 했지만 곧 한 냄비 속에서 지지고 볶게 될 터이니 꽤 질긴 인연이다. 아마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동시에 그물에 걸린 부부가 아닐까 싶다.
비릿한 냄새를 잡을 요량으로 향이 강한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등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볼품없는 껍질과 속살에 보정 효과를 주려고 간장과 물엿으로 색깔 옷도 만들어 입힌다. 요리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이려면 불 조절에도 신경 써야 한다. 처음엔 센 불에 올려 살이 풀리지 않도록 하고 한소끔 끓은 후에는 불을 줄여 양념이 졸아들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타이밍을 잘 맞추어 온도를 조절해야 음식의 때깔이 달라진다.
살다보면 단점이라 여겼던 부분이 뜻하지 않게 장점으로 바뀌는 수도 있다. 바람과 햇볕을 번갈아 견디며 굳은살이 생긴 코다리는 뜨거운 불에서도 모양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물기를 잃고 얇게 쭈그러든 껍질은 보기엔 딱딱해도 속속들이 양념이 스며들어 풍미를 더한다. 싱싱한 생태로 조림을 하면 미끈거리는 껍질 때문에 오히려 양념이 겉돌기 십상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거울을 볼 때마다 시간의 중력 앞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문득문득 서글퍼지곤 했다. 수분크림을 발라 윤기를 내고 색조화장품을 덧칠해 푸석한 얼굴을 감추려고 발버둥 쳤지만 물기 잃은 피부는 따로 놀았다.
하지만 탱탱한 피부를 거두어간 야속한 세월로 인해 얻은 것도 있다. 겉은 예전보다 초라해졌을지 몰라도 알맹이는 오히려 단단해졌다. 햇살이 비칠 때면 몸을 느슨하게 풀어 따뜻함을 만끽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힘을 주며 버티는 동안 몸도 마음도 야물어졌다. 인생길에서 만난 크고 작은 파도는 맞서 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물살에 몸을 맡기고 흔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비록 몸 안의 기름기는 빠져나갔지만 오히려 그 틈 사이로 다양한 양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무기는 잃었지만 융통성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얻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뜨거운 김을 쐬며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코다리를 꺼낸다. 접시에 옮겨 담자 구수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냄비 안에서 용케 버틴 덕에 근사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수시로 온도가 달라지는 결혼 생활에서 중심을 잘 잡으면 나 역시 좀 더 맛깔 나는 아내가 될 수 있으려나. 달콤 짭조름한 코다리살이 유난히 혀끝에 감기어 붙는다.
달팽이
걸음 소리만 들어도 아이의 기분을 읽을 수 있다. 경쾌한 왈츠 리듬으로 들어서는 아이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 빛깔이다. 좋은 일이 생겼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찌그러진 종이컵을 내밀었다. 무심코 종이컵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속엔 미끌미끌한 달팽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보기만 해도 점액질이 피부에 닿은 양 불쾌감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컵 안에 갇힌 달팽이는 긴장했는지 미동도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꼬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동작이 얼마나 느린지 잠시 지켜보았을 뿐인데도 숨이 답답했다. 아이는 오후 내내 달팽이 곁을 맴돌며 틈만 나면 달팽이와 눈을 맞추었다. 자기가 책임지고 돌보겠다며 인터넷으로 달팽이 키우는 방법을 찾아내 부지런히 받아 적기도 했다. 아이의 눈이 모처럼 잘 닦은 유리창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큰아이는 유난히 행동이 굼떴다. 밥을 먹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도 한참이 걸렸다. 아침마다 등교 시간이 다가오면 ‘아직 멀었어? 빨리 좀 해라’ 소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 화가 치밀어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바탕 잔소리가 쏟아진 후에야 신발을 반쯤 걸치고 문을 나서곤 했다.
단순히 행동만 느린 것이 아니다. 처음 어떤 일을 익힐 때는 유난히 속도가 더디었다. 운동이나 악기를 시작할 때면 같이 배우는 친구들에 비해 한참 속도가 처졌다. 수영장에 다닌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주구장창 발차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다. 같이 시작한 친구는 제법 물에 떠다니기도 하는데 우리 아이는 수영장 모퉁이에서 한 시간 내내 발만 담그다 왔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를 붙잡고 오늘은 어떤 동작을 배웠냐고 물으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피아노를 배울 때는 음계를 익히는 일에 현기증을 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서 학원에 보냈건만 도통 실력이 늘지 않았다. 땅땅거리며 마음대로 건반을 치는 것은 재미있어 했지만 계이름을 익히고 악보를 계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눈으로 악보를 보며 동시에 건반을 눌러야 하는데 눈과 손이 엇박자로 움직였다.
갈수록 느려지는 아이와 반대로 나의 잔소리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출발선 앞에서 매양 뒤처지는 모습에 조바심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한 템포 앞서 지시나 잔소리를 쏟아냈다. 엄마가 나서서 잡아주지 않으면 아이가 점점 더 뒤쳐질 것 같아 불안했다. ‘비교하지 말자’수없이 다짐하면서도 내 기대만큼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아이에게 원망이 쌓였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짜증이 불쑥 솟구쳤다. 툭하면 잔소리나 핀잔이 쏟아지니 아이는 자꾸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처음에는 내 아이가 느리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아주 어렸을 때는 오히려 또래보다 빨라 보였다. 백 일도 안 되어 뒤집기 쇼를 보여주고 돌 무렵엔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두 돌 무렵엔 간단한 영어 단어도 곧잘 외곤 해서 언어 영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책은 몇 번 반복해서 읽어주면 며칠 후 토씨도 틀리지 않고 책을 술술 읊어댔다. 주위의 엄마들이 그런 아이의 모습을 부러워하면 내심 으쓱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면서 비교 대상이 생겼다. 둘째 역시 큰 아이와 비슷한 시기에 뒤집기나 걸음마를 뗐고 심지어 말은 더 빨랐다. 큰 아이는 영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이였음을 둘째를 통해 깨달았다.
어린 동생을 보살피느라 큰 아이에 대한 관심과 손길이 줄어들면서 아이는 자꾸 같은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다. 그 때 아이가 원한 것은 동화책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다. 엄마에게 거절당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동생보다도 목소리가 작아졌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뒷걸음치게 만든 주범이 바로 나였다.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키우자던 처음의 마음은 흔적도 없이 휘발된 지 오래다.
세 살 무렵, 폐렴을 심하게 앓고 난 뒤 천식 진단을 받았을 때는 건강이 제일 우선이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콜록거리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이가 건강해지기만 하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조금만 빨리 뛰어도 숨이 가빠 마른기침을 뱉는 아이를 보면서 제발 튼튼하게만 자라달라고 빌었다. 아이가 숨이 차지 않도록 느리게 키우자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을 계기로 꾹꾹 눌러 놓았던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첫 출발이 중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에 귀가 솔깃해져 학구열이 높기로 소문난 동네로 옮겨왔다. 이사와 동시에 아이를 느리게 키우자고 여유를 부렸던 마음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영어유치원은 문턱은 넘어보지도 않았고 학습지를 따로 시키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버터를 바른 것 같은 영어 발음과 어려운 계산 문제도 척척 푸는 주변의 아이들을 보면 신기하면서 부러웠다. 이미 크게 벌어져 있는 간격을 하루빨리 좁혀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만 커졌다.
받아쓰기 시험이 무슨 대수라고 한 개만 틀려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학교 시험이 다가오면 내가 더 쫓기는 기분이었다. 시험을 앞둔 주말이면 모든 집안일을 제쳐 놓고 아이 옆에 붙어 앉아 문제집과 씨름했다. 쉽게 알아듣지 못해서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 되면 머리에 김이 났다. 아이를 도와준답시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문제 풀이가 나중에는 꼭 눈물 콧물 다 짜내는 비극으로 끝이 나곤 했다. 나는 나대로 빨리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답답했고 아이 입장에서는 날카롭게 몰아세우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는 출발이 느리긴 하지만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었다. 한 달 내내 발차기만 했어도 언젠가부터 물에 둥둥 떠 있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악보에 새겨진 콩나물을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던 시기도 있었지만 더듬더듬 음계를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한 곡을 익히는데 몇 달이 걸리긴 했지만 나중에는 제법 들을만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서는 움츠림이 필요하고, 높은 뜀틀을 넘으려면 도움닫기 과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이는 조금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성질 급한 엄마는 무조건 아이가 빨리 뛰기만을 바랐다.
잠시 학원에 다녀온 아이의 음성이 비명에 가깝다. 분명히 달팽이가 컵 안에 있었는데 없어졌단다. 벌써 달팽이의 이름도 지어 놓았는데 어쩌냐며 빈 컵을 쥐고 울먹거린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라 아이를 안심시키고 방을 헤집어 나간다. 컵이 놓여 있던 책상부터 침대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는다. 그런데도 아무리 뒤져도 달팽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엄마! 여기, 여기에 달팽이가 있어요.”
아이의 목소리를 쫓아간 곳은 뜻밖에도 베란다 귀퉁이다.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다. 작은 달팽이가 문턱을 넘고 또 넘어 베란다에 있는 화분 위에 올라가 있다. 느림보가 얼마나 용을 쓰며 움직였기에 그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나뭇잎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달팽이를 아이 손바닥에 옮겨 주었다. 눈물방울은 간 데 없고 아이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있는 달팽이와 아이의 모습이 어딘가 닮아 보인다. 비록 달팽이처럼 느리긴 하지만 아이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엄마 욕심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을 뿐이다. 빨리 뛰라고 등을 떠미는 엄마 때문에 얼마나 숨이 찼을까? 큰 달팽이와 작은 달팽이가 기특해 두 팔로 힘껏 끌어안는다.
비둘기처럼
오후의 햇살이 부쩍 얇아졌다. 맵싸한 바람 탓인지 공원 안에는 눈에 띄게 여백이 늘었다. 희끗한 머리색의 노인 몇 명이 구부정하게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뿐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찬 기운을 털어내려고 팔을 흔들어가며 빠르게 걷는다. 발끝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비둘기 몇 마리가 앞을 막는다. 공원에서 지내며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비둘기는 눈이 마주쳐도 놀라지 않는다. 도망은 고사하고 과자 부스러기라도 기대하는지 뒤를 졸졸 따라온다. 털 끝 하나라도 몸에 닿을 새라 힘껏 팔을 휘저어 멀찌감치 거리를 확보한다.
한 때는 평화의 상징으로 대접 받았던 비둘기가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먹이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발휘한 덕에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아진 비둘기는 도시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도 비둘기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비 호감 존재다.
새 집으로 이사한 이튿날부터 괴상한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베란다 난간에 비둘기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비둘기 울음이 그렇게 음흉하고 기분 나쁘게 들리는 소리인지 처음 알았다. 방충망을 툭툭 쳐도 꼼짝도 않던 녀석들은 창문을 세게 열었다 닫은 후에야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갔다.
불청객의 방문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 울창한 정원 쪽으로 베란다 창이 나 있어 그런지 수시로 비둘기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뗄 줄 몰랐다. 날이 새자마자 베란다 난간을 차지하고 앉아 울어대는가 하면 날개를 펼칠 때마다 먼지를 풀풀 날렸다. 아무데나 갈겨 놓은 배설물의 악취까지 더해져 푹푹 찌는 날씨에도 베란다 창을 닫고 지내야 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비둘기를 볼 때는 특별히 유감이 없었지만 나에게 작은 불편이라도 끼치게 되자 도브 비누도 싫어질 만큼 진절머리가 났다.
넓은 공원을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점퍼 안이 후끈하게 데워졌다. 광장 벤치에는 아까 보았던 노인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둘기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옆을 맴돌며 사이좋게 햇볕을 쬔다. 어쩐지 둘의 사이가 정겨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염색약의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노인의 잿빛 머리칼과 회색빛 비둘기 털이 유난히 닮아 보이는 것은 둘의 비슷한 처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날씨에도 굳이 노인들이 공원에 나온 것은 단순히 바깥 공기가 그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점점 자기 자리를 잃어가는 마당에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트인 공간이 필요했으리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서로 위안을 건네며 하루하루 지루한 시간을 버티어 간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예전보다 노인 인구 비중이 늘었다. 늘어나는 노인 숫자에 비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 세대별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지만 노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는데 노후 수명은 길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많다. 젊음을 다 바쳐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아낌없이 월급을 쏟아 붓느라 정작 자신을 위한 준비는 하지 못했던 우리 부모 세대들은 마땅히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다. 노인을 공경하던 사회 분위기는 옛말이 되었고 돈이 없으면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환영을 받지 못한다.
늙은 부모를 공경하며 정성껏 모셨던 부모 세대들과 달리 요즘 세대들은 부양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 핵가족 문화에 젖어서 오로지 자기 아내, 자식만 잘 챙기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 세대보다 훨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눈높이가 높아져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남들 하듯이 비슷하게 따라가려면 수시로 지갑을 열어야 해 웬만큼 벌어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
다행히 나는 양가의 부모님을 부양하는 부담에서는 자유로운 편이다. 용돈을 드리고는 있지만 생활비를 책임지는 입장이 아니라 부담감이 크지 않다. 만약 부모님의 가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입장이었다면 지금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초부터 일정한 몫을 떼서 노후 저축에 가입한 이유도 경제적인 부담이 생기면 자식과 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열심히 먹이를 찾아 먹고 부지런히 새끼를 쳤을 뿐인데 감당 못하게 수가 늘었다고 비둘기는 해조 취급을 받는다. 부모 세대들 또한 그저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돌아온 것은 냉랭한 시선뿐이다. 한 평생을 바쳐 자식들을 길러내고 사회의 톱니바퀴로 열심히 일했지만 감사 인사는커녕 점점 찬밥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니 지금의 젊은 세대도 언젠가는 노인들이 겪는 서러움을 똑같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문득 흘러간 노래 한 소절이 스쳐간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더 이상 비둘기가 정다운 새로 여겨지지 않는 지금, 따뜻한 봄이 오면 저 노인들의 집에 장미꽃이 한 번 더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경쾌한 유행가 가사가 오늘따라 가시가 되어 가슴 한 구석을 찌른다.
갇힌 음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으니 처음인 듯 새롭다. 데이트를 하면서는 가끔 노래방을 찾았지만 결혼 후에는 단 둘이 갈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갖는 오붓한 시간이라 설레기도 하지만 남편과 노래방에 와서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어서다.
지긋한 연배의 사람들과 노래방에 오면 참기름 바른 트로트 판이라 마이크를 들기 어렵다.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 봐도 도무지 감정이 살지 않는다. 아직은 구성진 멜로디에 몸이 저절로 녹아들만큼 연륜이 쌓이지 못한 탓이다. 반대로 어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속사포 랩이라도 읊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마이크를 피하게 된다. 빠른 템포의 노래는 취향이 아닐뿐더러 시종일관 뻣뻣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나에게 댄스곡은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하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어중간한 템포의 곡이다. 한 때는 신곡이었으나 어느덧 세월에 밀려 두꺼운 책자 한 가운데 파묻힌 구닥다리 신세가 됐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을 걸어온 남편 앞에서는 묵은내 나는 노래도 추억을 나누는 공유기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익숙한 전주가 깔리자 자신 있게 마이크를 집어 든다.
너무 오래 쉰 탓일까? 첫 박자를 놓치며 시작부터 노래가 삐걱거린다. 자타가 공인하는 몸치이긴 해도 음정은 제법 맞추는 편인데 음이 쳐지다 못해 주르륵 흘러내린다. 클라이맥스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 목소리가 여러 겹으로 갈라져 쇳소리가 난다. 조금 빠른 노래를 부를 때는 목까지 숨이 차서 핏대가 도드라진다. 아무리 공백이 길었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망가졌을 줄이야.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노래를 했던 적이 있다. 새 악보를 받을 때마다 낯선 음표의 배열 앞에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새로운 과제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울퉁불퉁하게 튀던 노래가 부드럽게 다듬어지는 과정은 즐거운 작업이었다. 합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박자와 음정이다. 튀는 목소리를 내거나 박자를 놓치지 않도록 늘 규칙대로, 정해진 박자대로 충실하게 따르려 노력했다. 노래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서도 오선지를 벗어나지 않고 정해진 악보대로 규칙을 따르는 학생이었다.
아가씨 때는 여럿이 소리를 맞추는 하는 합창보다 혼자 부르는 노래가 더 좋았다.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뗀 순간부터 정해진 음정과 박자를 따르는 것이 따분하게 여겨졌다. 나만의 소리와 박자로 멋을 부리며 돋보이고 싶었다. 유행가 가사들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도, 사랑이 끝났을 때도 설렘과 슬픔을 실은 노래로 가슴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 때뿐이었다. 또 다른 신곡에 금방 밀려나는 유행가처럼 화려한 청춘의 시간은 짧게 끝나버렸다.
결혼이라는 악보를 받아든 뒤부터는 내 마음대로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시계 볼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곤 했다. 반복되는 생활이 지겹다고 느낄 새도 없이 아내와 엄마로서의 연주에만 몰두했다. 오선지에 갇혀 그저 남들이 살아가는 음표와 박자에 비슷하게 맞추어 똑같은 음에 머물며 지내왔다.
품에 안고 키우던 아이가 훌쩍 자라면서 똑같은 악보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터라 사이사이 쉼표가 생겼다. 정해진 오선지에서 벗어날 순 없더라도 더러 박자를 바꾸기도 하고 군데군데 쉼표를 그려 넣고 싶었다. 생활에 쫓겨 밀쳐두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도 나만의 음표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살림밖에 모르던 주부가 새롭게 일을 벌이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아무리 중요해도 가족이 우선순위라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원칙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쳐야 하는 크고 작은 집안일과 아이들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짬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괜찮다가도 내가 나갈 일이 생기면 아프다고 하는 아이와 가정의 울타리에 충실하길 원하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느라 몸과 마음이 두 배로 바빠졌다.
생활에 떠밀려 지내느라 자각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는 작은 불씨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공부라 그런지 몸과 마음이 바빠져도 힘든 줄 몰랐다. 과제를 하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을 때도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설렘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욕의 속도만큼 따라주지 않는 굳은 머리 때문에 가끔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또한 행복한 고민으로 받아들이니 한결 편해졌다.
좋아하던 노래는 가사도 박자도 그대로인데 노래를 부르는 나는 많이도 변했다. 엊그제 일처럼 옛 추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건만 내 목소리는 기억에서 간격이 한참 벌어져 있다. 중간에 끊어 부르지 않으면 호흡이 가빠져 노래 뒤쪽은 몽땅 날아가 버릴 정도가 되었다.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즐겨 찾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만의 곡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꼭 새로운 곡이 아니어도 좋다. 같은 악보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기분에 따라 사분음표를 십육분음표로 바꾸기도 하고 그러다 숨이 차면 쉼표를 넣어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면 좋겠다. 고음이 힘들면 내 목소리 톤에 맞게 키를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화음을 넣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만들기도 하면서 나만의 악보를 그려나가고 싶다.
한 시간이 훌쩍 흘러 벌써 마지막 곡이다. 어떤 노래로 마무리 할까 고민하다 예전에 같이 불렀던 듀엣 곡을 고른다. 좋아하는 가사가 나오면 불쑥 끼어들어 낚아채기도 하고, 내가 숨이 차면 남편이 받아서 노래를 이어간다. 오랜 시간 한 울타리에서 지내며 우리의 호흡도 서로에게 맞추어 편곡이 된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정해진 음정과 박자에서 벗어난들 무슨 상관있으리.
딸기꽃
딸기 소쿠리에서 번져 나온 달콤한 봄 향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물기를 털어 접시에 담으려는데 실오라기 비슷한 것이 손가락에 매달린다. 자세히 보니 꼭지 옆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버린 작은 꽃송이가 붙어 있다. 붉은 열매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딸기꽃처럼 평생을 그늘에서 지내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슬픈 삶도 있다.
일 년을 꼬박 손꼽아 기다린 아홉 번째 생일날이었다. 처음 반장이 된 것을 핑계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감투 약발이 통했는지 어머니는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로 큰 상을 가득 채워 주었다. 밥 한 공기를 너끈히 비우고 케이크까지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오래 놀았지만 그날따라 헤어지기가 아쉬워 이웃해 있는 선화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더 놀기로 했다.
선화어머니는 불쑥 들이닥친 꼬마 손님들을 인자한 미소로 반겼다. 아까 먹었던 생일 음식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우리들은 삶은 감자를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선화어머니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비닐하우스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가서 딸기를 따보라는 것이었다. 딸기밭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던 우리들은 신이 나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섰다.
바람 끝자락이 서늘한 바깥과 달리 비닐하우스 안은 후텁지근했다. 뛰어놀았던 땀이 마르기도 전에 절로 갈증이 났다. 선화 어머니가 딸기를 따는 방법을 꼼꼼히 설명해 주었지만 들리지 않았고 먹음직한 딸기만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여물지 못한 우리들은 마구잡이로 딸기를 꺾었고, 바구니에 담을 새도 없이 제 입으로 밀어 넣기 바빴다. 그래도 선화 어머니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오늘 혜경이 생일이라면서? 아줌마가 줄 건 없고 이거나 가지고 가.”
딸기 줄기를 길게 엮어 만든 동그란 딸기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선물에 내 입이 벌어졌고 친구들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하나 더 만들어 주면 안 되냐고 조르는 철부지도 있었지만 어림없었다. 오로지 생일의 주인공인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잊은 채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자랑에 빠졌다. 가족들이 딸기 좀 먹어 보자고 졸랐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눈으로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목걸이를 먹어 없앤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딸기 목걸이는 내가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특별했다.
생일 이후로 선화와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친구 엄마의 호의가 어린 마음에도 전해져 그 아이가 특별한 친구로 느껴졌던 것이다. 딸기목걸이를 다시 볼 순 없었지만 선화네 집에 놀러갈 때면 비닐하우스에 들러 먹고 싶은 만큼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 해 봄은 딸기 익어가는 향기만큼이나 달콤했다.
그 날은 어째서 새벽에 잠이 깼는지 모르겠다. 옆 자리에 누워계시던 부모님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잠결에 귀를 세웠다.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독한 농약을 마실 생각을 다 했겠어요?”
“간 사람도 안됐지만 남은 아이들은 어쩌라고 그랬는지 참.”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농약을 마시다니 무슨 얘길까? 자세한 것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불길한 소식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쩐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 때문에 다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불행한 소식은 기쁜 소식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마을을 뒤덮었다. 평소 선화 아버지의 술주정에 어머니가 괴롭힘을 많이 받았다는 소문이 한참동안 동네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졌다. 어린 내 깜냥으로 불행의 크기를 짐작할 순 없었지만 며칠 간 비어있는 친구의 책상을 보니 마음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다시 선화가 돌아왔다. 친구는 한동안 툭하면 눈물을 보였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단정하게 땋아 다니던 긴 머리는 어수선하게 흩어졌고 같은 옷을 며칠씩 입고 오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의 당부로 한동안은 친구들이 선화를 배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녀의 상처를 잊어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도 없는 단짝이었지만 나는 친구의 걱정과 불행을 조금도 나눌 수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선화는 집으로 가서 동생을 보살피고 엄마 대신 살림을 돌봐야 해서 같이 놀 시간이 없었다.
어느 날은 엄마로부터 우리 남매들이 입다 작아진 옷을 선화네 집에 한보따리 갖다 주고 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선화의 동생이 내 옷을 입고 학교에 왔을 때 애써 모른 척 넘겨야 했다. 그런 크고 작은 일들은 우리 사이를 점점 어색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우리 집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선화와도 헤어졌다.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친구들 속에 둘러싸여 가끔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려보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유년 시절의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버린 선화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한참 시간이 흘러 사춘기가 끝날 무렵, 다시 선화를 만나게 됐다. 내가 다니게 될 고등학교는 인문계 고교와 상업계 고교가 같은 재단이라 운동장을 함께 사용했는데 입학식 날 마주친 것이다. 같은 운동장 안에서도 학교 별로 줄이 갈라졌다. 다른 팻말 아래 서 있는 친구를 보며 떨어져 지낸 세월만큼 우리 사이에도 큰 운동장 지름만한 거리가 생겨났음을 실감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한 때 그렇게도 친한 사이었지만 사춘기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우리 둘 사이에선 더 이상의 공통분모를 끌어내기가 힘들었다. 노란 염색기가 남은 친구의 머리칼과 날렵하게 다듬은 얇은 눈썹이 낯설었다. 둘 사이의 대화는 삭은 고무줄처럼 자꾸 툭툭 끊어졌다.
그 후로 매점이나 운동장에서 친구들 틈에 섞여있는 선화를 종종 마주치기도 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색한 눈인사만 건넸고 졸업과 함께 더 이상 같은 공간에 마주 설 일도 없어졌다.
기억 뒤편으로 밀려났던 친구의 이름이 다시 생각난 것은 입덧 때문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기뻤던 마음과는 달리 몸은 음식을 거부했다. 밥 냄새도 거슬리고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떤 음식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얼마 못 가 다시 게워내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미의 입덧 때문에 덩달아 굶고 있을 뱃속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속에서 밀어내지 않을 음식을 찾아야 했다. 그 때 자꾸만 당기는 것이 딸기였다. 통 먹지 못해 쓰라린 속도 딸기만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찾았다. 제철이 아니라 값이 비싸서 몇 통 사면 지갑이 홀쭉해졌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입 안 가득 딸기향이 퍼질 때 문득 잊고 지냈던 선화네 딸기밭 풍경이 떠올랐다.
이젠 봄이 아니라도 사계절 내내 딸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제철이라야 고유의 맛이 난다. 아홉 살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생일 무렵이면 선화 엄마가 만들어 주었던 딸기목걸이가 떠올라 추억의 향기에 취하곤 한다.
지금 선화는 어딘가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내 친구의 현재는 부디 제 이름처럼 활짝 핀 화려한 꽃송이 같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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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