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
- 함주시초(咸州詩抄) 2
-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둥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
이토록 선량하고 가을 산골이 바스락거리는 시가
곁에 있는 시간은 마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백석입니다
*백석의 가족사진
마지막 가족 사진에서 젊은 나타샤의 노년 모습을 봅니다. 장신의 미남 박식한 청년에게 많은 여성들이 따랐고, 백석 자신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일본과 러시아를 동경했다고 봅니다. 일본녀와 결혼했고, 다음 러시아풍 여인과 백석은 최종 안착합니다.
백석은 한동안 1963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1년 뜻밖에도 이북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가족사진과 함께 소식이 날아 들어와 그가 1995년 11월경 사망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백석은 해방 후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면서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을 번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ㆍ25 전쟁 중에는 중국에 머물다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 파견작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 만주로 홀연히 떠났는데
당시 조선에는 북방정서라 해서 만주를 신천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만주로 간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러시아령인 하얼빈(하르빈)은 국제도시로서 이런 조선인들의 로망을 충족시키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요.
그는 고향 평안도 정주에서 해방시기를 지내고
조만식 선생 비서를 하다 그냥 남았기 때문에
그가 월북했다는 표현은 틀리고 그냥 남았다는 표현이
옳습니다.
성향상 좌익이 결코 될 수 없었던 그는
속세와 연을 끊고 목축을 하면서
꽤 오래살다가 조용히 소리소문 없이 돌아가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