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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후의 簡史
쿵후의 기원을 역사적인 근거에서 찿아 본다면, 기원전 1천년경부터 무술의 형태를 갖추기시작 했음을 몇몇 사서(史書)의 기록을 통하여 엿볼수 있다. 최초의 것으로는 전설상의 황제(黃帝)시대부터 이며, 문헌상으로 시경(詩經)을 들 수 있다. 시경은 기원전 479년에 쓰여진 것으로 문왕(文王)시대에는 격자(擊刺)의 법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격자는 검술(劍術)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기원전 90년경에 쓰여진 사기(史記)에 보면 무술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자객열전(刺客列傳)의 형가(刑軻)가 진시황을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후 이 소식을들은 그의 친구가 격자술(擊刺術)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 당시 검술이 이미 특별한 기술로 존재했음을 쉽게 알 수있다.
또한 史記의 이사열전(李斯列傳) 중에 '진이세(秦二世)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각저(角抵)배우의 놀이(戱)를 보고(見) … ' 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로써 기원전 209~207년사이에 각저라는 무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후한(後漢) 시대에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의 문예지 중에 병기교에 대한 기록이 있다.한서에 기술된 병기교는 무술을 칭하는 말로서 활쏘는 기술이 주로 언급되어 있으나 '手搏6篇', '劍道35篇'등의 기록도 있다. 여기서 手搏이란 무술을 칭하는 말이고, 劍道란칼 쓰는 방법을 총칭한 말이다.
당시 중국의 군사 제도는 징병제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武舞와 蹴鞠이 채택되어쓰였다고 되어있다. 武舞란 무술춤으로, 다시 말하서무기를 들고 뛰고 돌며 춤추는 형태처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고 하기도 하며, 지금의 무술의 형(型)처럼 전체가 통일되어연무를 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축구(蹴鞠)은 발로 차는 것이며, 후에 공을 차는 놀이로 발전되었는데 무술의 효과로는 발의 힘을 기르는데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또한 劍器舞가 행해졌다. 이것은 고대의 검술 기법을 연결하여 행하는 고급 기법이므로 장군들 사이에서 성행한 것 같다.
당(618~907)시대에 들어와서는 검술도 매우 발달하여 검술가의 이야기거리나 특별한 화제를 모아서 집필한 '劍俠傳'이 등장한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李白은 소년기부터 劍術을 익혔으며, 義俠心이 대단히 강하여 가끔 칼을 들고 싸움에 나갔다고 되어 있다. 시인 杜甫는 당시 유행하던 劍器舞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번 칼춤을 추면 사방이 흔들리고 … 하늘과 땅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네… ' 등으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詩는 당시 검기무(劍器舞)로 유명한 공손대랑(公孫大娘)의 제자인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기무(劍器舞)를 보고 지은것이라 한다.
초한시대(秦漢時代)에 와서는 각저의 무술기법을 군사훈련과 유희에 사용하였다 한다. 역대의 많은황제들이 각저의 유희를 보는 것을 대단히 좋아 했다고 되어 있다.
宋代初期(960)의 조로자(調露子)는 각저의 기록과 화제들을 모아서 '角力記'라는 책을 저술했다. 또 다른 책의 주장에서는 각력기가 조로자가 쓴 것과 다르다고 하는 이도 있다. 角力記에서 원시 시대로부터 각력이 발전되어 나온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각력이 지방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것도 해설 했고, 각력에 대한 기록과 역사적 화제를 비교적 체계있게 정리한 셈이다.
그 이전에는 권법을 '수박(手搏)', '백타(白打)', '권(拳)', '권용(拳勇)', '파장(拍張)' 등의 이름으로 불러, 각저와 구분이 되어 있었는데 무술에 대해 잘 모르는 역사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잇는 史書에는각저와 무술이 혼동,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무술의 형태에 어떠한 화려한 기교나 섬세하고 미묘한 권법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미흡한 자료 탓으로 충분한 연구를 할 수 없는 점도 있지만 현존하는 史書들을 종합한다면 어떤 씨름 형태나, 레슬링같은 시합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겠다.
2) 明代 門派의 所성립
명대(1368~1664)에 들어와서는 많은 사서들이 쓰여졌는데 권법등 각 무술의 문파가 기록되어 있다.
당순지(唐順之)는 명나라때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왜구(倭寇)가 침입해 오자 절강성(浙江省)에서 병선들을 직접 지휘하기도 한 무술의 정통인 바, 그가 쓴 무편(武編)을 보면 前卷에 창술, 권법, 검술 등 각종 무술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17편이 있다. 모두 스스로 지어낸 것은 아니며,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무술을 연구하여 쓴 것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특히 권법에 대한 서술은 그 당시 중국에서 행하던 문파의 소개에서 그치지 않고, 기법과 특징 등 내용까지도 상세히 설명하였다. 무편에 실려있는 그 일부를 살펴보면, 溫家長打, 七二行着, 二十四尋腿, 三十六合鎖 등 기록이 있어 장권과 현재의 금나술의 명칭을 나다내고 있다. 또한 온가파의 특징을 장타라 표현하여 그 기술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송나라 태조의 장권은 허벅지를 많이 쓰며, 그 기술에 변화가 많고, 산서 지방의 유단타(短打)는 머리로 받고, 팔꿈치로 치는 등 6개의 형이 있다고 되어 있다. 태조 장권은 산동성 지방에서 주로 유행하는 권법인데, 강남 지방 사람들도 이것을 많이 습득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온가권(溫家拳)은 무기를 사용하는데, 도끼가 그들의 전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 외에 문파에 대한 구분이나 기술이 실려 있는 책으로는 정약증(鄭若曾)의 '江南經略' 이나, 척계광(戚繼光)의 紀效新書등을 꼽을 수 있겠다.
명나라 시대에는 왜구(倭寇)가 계속해서 중국의 동남해안을 침입했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서도 무술이 권장되었다. 또한 왜구를 잡는 자에게는 후한 상이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주어서 왜구만 보면 서로 앞을 다투어 용감하게 나설 수 있도록 전투 의욕을 높였다고 한다. 왜구들이 사용한 무기는 주로 칼이었는데, 그들의 검술이 훌륭하여 이기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왜구(倭寇)들이 사용한 검술을 왜도법(倭刀法)이라 칭했고, 추에 현재의 일본 도법(刀法)으로 발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정 무예도보통지'에 왜국검술이라 하여 소개하고 있다.
명나라 가정연간에 왜구를 평정하기 위하여 절강성에 척계광 장군이 파견되었고, 그는 중국 각지에서 행하던 무술을 조사하고 각각 유명한 무술을 채택, 재 정리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또한 왜구의 검술을 이길 수 있는 도법을 고안해 내기 위하여 많은 연구를 했다. 또한 척계광 장군은 '원앙진(鴛鴦陣)'이라 불리는 필승의 진법을 고안했다. 그의 저서인 '紀效新書'는 다른 책에서 보다 상세히 기록하려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紀效新書에는 중국 각지에 산재한 무술의 종류나 그들의 공통점 또는 합리성이나 차이점등고 기록하고 있다. 그 예를 들어 권법의 문파를 살펴보면 송 태조 32세 장권(宋太祖三十二勢長拳), 육보권(六步拳), 후권(?拳), 화권(華拳) 등이 나오며, 온가 72행권, 36합쇄, 팔섬번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무술에 대해 논하고 있다.
원래의 중국 무술은 개인 단위로 수련되어 오다가 집단화되기 시작했고 明代에 와서야 門派로 확립되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3) 淸代 拳法의 發展
淸代(1644-1512)에 들어서면서부터 권법은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다.기존의 권법을 연구하여 고도의 기술로 발전시켜 수행하였으며 타 문파의 기술을 습득하여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권법에 그 특징들을 가미하여 새로운 문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두세개 문파의 고수가 서로 교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권법을 만들기도 했다.
하남성(河南省) 진가구(陳家溝)의 진씨들 사이에서 발생한 태극권(太極拳)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太極拳의 특징이라면 원과 전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 하북성 창현의 팔극권(八極拳)은 강대한 발경(發勁)법을 사용하였으며,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을 원위에서 행하는 팔괘장(八卦掌)은 권법의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외형적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형의권(形意拳)이나, 북방의 열 여덟 문파의 기술을 참고하고 편집, 정리하여 집대성한 당랑권(螳螂拳)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권법을 문파의 종류로 보지 않고 그 사용되는 기술들의 특징으로 살펴본다면 장권(長拳)과 단타(短打)로 나눌 수 있다.
장권은 그 연무 동작이 크고 활발하여 원거리 공격법이 있고, 단타는 접근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손 발의 공격이 많이 등장하나 팔꿈치(?), 무릎(膝)등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머리로 치받기도 한다.
淸代 이전까지는 미묘한 發勁이나 내면적인 위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흔적이 거의 없는 편이었으나 淸代에 이르러서는 각각 무술들이 내적인 위력에도 치중하여 연구한 결과 發勁법이 나오게 되고, 방어를 유리하게 할 수 있는 化勁법들도 속속 개발되었다.
淸代의 무술이 고도로 발달하게된 데에는 陳家溝의 진씨 太極拳의 영향이 많은 듯 싶다. 王宗岳의 '太極拳譜' 등에는 상당히 상세한 기록을 볼 수 있고, 槍法의 極意를 전하는 것으로 오수가 쓴 '수비록(手臂錄)'에도 상당한 기록이 있다.
淸代 말기에 일어났던 중국 북방의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로는 어떠한 무력이나 무술의 연습, 권법의 연습을 금지 시켰다. 의화단 사건에 '義和拳 '이란 명칭이 사용하게된 이유는 그들이 나름대로의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독특한 권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청말에 무술을 금지시키기는 했으나 정치가의 경비, 대상(隊商)의 호위를 맡은 보표(保?)라는 직업이 있어서 타 문파와 교류를 하기도 하고 타 문파와의 시합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말에 교통이 발달, 각지의 무술가들 사이에 교류가 빈번해지자 명인과 달인도 속출하게 되었다.
4) 民國時代의 武術
中國武術 의 시작은 각지의 농촌이나 산간이 주가 되어서 스승이 제자에게, 제자가 다시 그의 제자에게 전수하는 시의 개인이 개인을 가르치는 형식이 주체가 되어 명맥이 이어졌다. 그 후 청조 말기부터 민국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각지에서 무술인들이 모여 단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학교를 설집하기도 하여 무술의 광범위한 보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민국이 성립된 청대 1910년에 하북성 정해현(靜海縣)의 곽 원갑(郭 元甲)이 학교를 세운 것이 계기가 되어 무술 교육은 시작되었다. 곽원갑은 미종예(迷宗藝)에 특출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곽원갑이 세운 학교가 발전하여 상해 中央精武體育會로 되었으며, 중국 남방 각지를 거쳐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확산되어 지부가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북파의 무술들이 각처에서 전승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무체육회의 무술 교습은 4대 권법을 위시로 않은 무술가들이 가르쳤다. 정무체육회의 주축이된 무술가는 담퇴(潭腿), 査拳의 명수조연화(趙連和) 螳螂拳의 고수 羅光玉,鷹爪拳의 陳子正 과 吳派 太極拳의 吳鑑泉 등인데, 그 외에도 많은 권법가들이 있다.
정무체육회의 조직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어 각지에서 후진 양성을 위하여 활약하고 있다.
民國 17년(1928) 남경에 위치했던 국민정부는 중국 정통 무술을 보존하기 위하여 새로운 보급 정책으로 중국 무술의 전체적 명칭을 약칭하여 국술(國術)이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무술을 보급할 특출한 교사를 선발하기 위하여 무술 시합을 하기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무술가를 모집하여 '제 1차 전국 무술 고시'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500명 이상의 무술가들이 모여들어서 독특한 기술과 묘기를 선보이면서 시합에 임하였다. 그 결과 八極拳을 배운 마영도(馬英圖)가 실제의 차고 때리는 박격(搏擊) 부문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그는 중앙 국술관의 무술 교사가 되었으며, 그가 우승하게된 八極拳이 훌륭한 무술로 인정 받게 되어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게 되었다.
그 뒤 남경에는 국립 중앙국술관 이후 중앙국술체육전과 학교(中央國術體育專科學校)가 병 설되게 되었으며, 각지에는 중앙국술 체육전과학교의 지부들이 설립되게 되었다.
1940년 중국 공산군과의 정변에서 중국이 갈라지게 되었고, 중앙 국술관 출신의 고수들이 중국 공산군에 반대하여 대만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으므로 대만에도 무술 보급이 활발해 졌다.
5) 現代 中國의 武術
1949년 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하자 중국 본토로부터 수 많은 무술가들이 대만으로 도피 하게 되었다. 대만으로 건너오게 된 무술인 중에는 중국 대륙에서도 고수라고 이름이 나있던 유명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전의 대만에는 거의가 남파 권술을 수련하고 있었던 바, 이로 인하여 일시에 많은 종류의 북파 무술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만은 대륙 각처의 각 문파 무술인들이 모여들어 중국 대륙의 온갖 무술을 전시한 박물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1950년에 중국무술단체[中華國術進修會]를설립.설립자는중국黨元老紐永建와백여명.政界무술계,財界,문화계등인사로구성. 그해11월12일 중국國父孫文先生誕生기념일 창립대회개최하여 쿵푸界名家한경당(韓慶堂) 張詳三(장상삼)于松亭등무술가들이 쿵후시범하였다.第一代會長은 陳俊峰선생선임되었고.1951년에 국민정부의 '대만성국술회(臺灣省國術會)'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에 당랑권의 대가인 왕성장(王成章)이 선출되었다.
1952년에는 대만 전체로 확산되어 각 지방에도 국술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드디어 1953년 '전국국술비교 경연대회'가 열렸고, 1955년에 '중화전국기격위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주임임원 1인과 53명의 위원이 구성 되었다.
1956년에 홍콩 무술계와 교류가 시작 되면서 합동 시합이 행하여지고,
1957년 大韓民國拳法團이 중화민국을방문하여 拳術친선시범대회를가졌다.
1966년에는 '중국태극권학술위원회'가 성립되었고, 이사장에 한진성이 선임되었다. 태극권은 화교를 중심으로 교류가 시작되어서 세계 최대의 組織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중국국술표연대회가 열리게 되어 팔극 6대개권에 유운초, 2로벽괘장에 서기, 당랑란절권의 소욱창 등 명사들이 나오고, 칠성검, 쌍도, 지사권, 연청권, 대성권 등이 선을 보이게 되었으며, 그해 국민정부에서는 새로이 국민학교, 중학교의 필수 과목에 무술을 삽입했다.
1974년 한국(한화국술연합회)이 臺灣에서개최한 대통령배쿵후대회에 參加하였고.
1975년 第一屆세계쿵후대회참가시작으로現在제8차까지참가함.
1991년 臺灣敎育부에서는 팔극권의 基礎권인 忠義拳(劉雲樵노사編)을 학교체육 수련과목으로채택하여. 중화국술회지도자교육必修과목으로지정하였다.
2002년 제9차세계쿵후(중화국술)대회를 臺灣에서개최豫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