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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창립
(1964-1997)
간략한 역사
초기 1961 - 1963
성 십자가 관구 예수고난회 소속 중국 선교사였던 분이 1961년과 1962년, 늦은 봄과 초여름에 한국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해 피정지도를 하였다. 그분은 중국 감옥에서 불과 몇 년 전에 풀려났고 1950년 중반에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마오쩌둥에게 항복할 때 그분은 이미 40여 년간 사제 생활을 하셨고 30년 넘게 중국에서 사셨는데 절반 이상은 예수 고난회 원장으로 계셨다. 여름에 피정 지도하러 한국에 오셨을 때 서울에 있는 골롬반 센터와 광주교구의 주교관에 있는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인천에 있는 중국인들을 위해서 계속 피정지도를 하셨다. 인천에 있는 중국인들 중 많은 사람은 그분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하기 9년 전에 끝난 한국 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이었다.
윌리암 웨스트븐(William Westhoven)은 일생 동안 충만한 삶을 사신 잊을 수 없는 분으로 전라남도 광주 대교구의 골롬반 선교사인 헤럴드 헨리 대주교님과 처음 연락이 되었다. 윌리암이 피정 강의 중에 헨리 대주교님은 예수고난회가 광주교구에 자리를 잡고 전라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요청했다. 이미 한국에서는 독일에서 온 베네딕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처음 교회를 설립한 이래 60~70여 년간 선교활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오신 골롬반 사제들이 전라도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후 많은 골롬반 사제들은 교구내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풍요로운 사도적 결실을 맺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윌리엄은 편지를 통해 대주교에게 청원서를 작성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1962년도 성 십자가 관구 총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윌리암의 기억으로 당시 성 십자가 관구 총회는 대주교에게 어떤 인적 물적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하였다.
제임스 패트릭 화이트(James Patrick White)는 1947~1953 그리고 1962~1968까지 성 십자가 관구의 관구장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에 예수고난회를 설립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극동 지역에 수도회를 설립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는 수년간 중국에서 예수고난회가 겪었던 일을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 패트릭은 1963년 일본 공식방문기간 동안 한국에 들러 헨리 대주교가 예수고난회에 정확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알아보고자 했다.
평소에 거침이 없는 헨리 대주교님은 어떻게 관구장의 마음을 끌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교구내의 어떤 특정 지역을 예수고난회에게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중국에서 우리 선교사들을 추방했을 당시 관구장이었던 제임스 패트릭은 중국에서 30여년간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방인 예수고난회 수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 마지막 선교사의 추방으로 예수고난회의 사도직은 끝나게 되었다. 중국에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은 한정된 사도직은 맡았고 전통적인 예수고난회원으로의 수도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원자들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국 선교사들이 먼저 지역 교회를 세운 뒤 그들 각각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사목한다는 것이 당시 포교성성의 방침이었다.
두 분 다 몸집이 큰 만큼이나 마음이 넓었던 대주교님과 관구장은 예수고난회가 한국에 진출한다면 대주교님이 제안한 교구차원의 직무보다는 수도회 차원의 공동생활과 사도직활동을 할 것에 합의를 보았고 그렇게 결정하였다. 헨리 대주교님은 예수고난회 수사님들이 주는 도움은 어떤 것이든 기뻐했고 교구 내에 고난회의 첫 설립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알아보았다.
그동안 제임스 패드릭은 최근 수도회가 기울였던 노력이 거부당했던 아시아 중심지인 새로운 나라에 누가 첫 수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을지 찾아 다녔다. 그 후 4~5개월 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누가 한국에서 이 중요한 첫 발을 내딛게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첫 선택은 원장을 뽑는 일이었는데 좀 더 성숙하고 수도회 안팎에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했다. 제임스는 서품 받은 지 16년 되었고, 20년 전에 예수고난회 수사가 된 레이몬드 맥도나휴(Raymond Macdonough)를 생각하였다.
제임스 패트릭이 제안을 했을 때 레이몬드는 당시 43세였다. 멕시코로 파견될 줄 알았던 터라 처음에 당황하였지만, “한국에 가서 이 큰 일을 시작하는데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였기에 곧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레이몬드는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중서부와 서부에서 성소계발에 함께 협력하였다. 수년간 동료 예수 고난수도회 수사들과 함께 피정지도와 선교를 다녔다. 예수고난회의 사도직 뿐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극동에서는 별로 소용없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학위도 있었다. 1963년 10월 레이몬드는 새로 설립되는 한국 예수고난회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제임스는 패트릭 오말리(Patrick O'Malley)를 레이몬드와 함께 한국에 오게 하였다. 패트릭은 1956년에 입회했고 1963년에 서품 받았다. 이듬해 봄, 저스틴 바르토체크(Justin Bartoszek)도 함께 가도록 임명했다. 1960년에 서원한 저스틴은 부제로서 마지막 양성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180cm가 넘는 장신 패트릭과 다소 키가 작은 레이몬드는 특이한 짝꿍이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팀을 이룬 후, 그 다음 해인 1964년에 새 임지로 출발학 위해 준비 하였다. 저스틴은 사제서품을 받고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인문학을 좀 더 공부하고 1965년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1964년 여름, 패트릭과 최근에 사제가 된 저스틴은 한국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가톨릭 대학에서 선교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레이몬드는 미국에서의 사도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순명의 개념에 대한 다른 차원의 이해와 개개인이 그들의 미래 사도직을 위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하는지 알게 되었다. 먼 동쪽나라로 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이 세 사람은 총장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생각해왔던 미래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고, 성령께서 그들 각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도록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안하십니까? 1964년 - 정착 후 새로운 삶의 시작
레이몬드와 패트릭 모두 일상의 기본 인사를 앞으로 몇 년간 매일 듣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8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트(C. E. Daunt) 라는 배를 타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첫날부터 너무나 다른 문화의 충격은 하루하루의 삶에서 피부로 느껴졌다. 문화적 충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뿐만이 아니라 매일 먹는 밥이었다. 한국은 아직도 전쟁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는 중이고 아직은 기적적인 경제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은 때였다. 9월 16일, 레이몬드가 서울에 가기 위해 황해(서해)에 있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패트릭은 일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하였기에 레이몬드만 고베에서 한국으로 왔다. 처음으로 한국 땅에 발은 내딛을 때, 광주에서 골롬반회 숀 클레리(Sean Cleary) 신부님이 마중 나왔다. 이렇게 한국 예수고난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0일 후에, 레이몬드는 앞으로 수백 번을 오가게 될 광주행의 첫 번째 여행을 시작했다. 예수고난회가 공동생활과 사도직이라는 연약한 나무를 뿌리내릴 곳이 바로 광주였다. 숀 세비지 부주교님은 따뜻한 사람이었고 레이몬드는 그때 처음으로 골롬반 신부님들과 교구 신부님들 그리고 교구내의 수도자들을 많이 만났다. 마땅히 묵을 곳이 없었으므로 따뜻하게 맞아주는 주교관에서 지냈다.
9월 29일, 두 번째 한국에 예수고난 수도자가 될 패트릭 오 말리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서울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하룻밤 머물고 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공동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어디에도 그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 레이몬드와 패트릭은 서울 살레시오회에 머무르라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다음해 한국어 교육을 받을 동안 골룸반회에서 활동하는 왕십리 본당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10월 3일,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서울의 명도원 언어 교육원에서 정식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11월 중순까지는 헨리 대주교와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대주교가 심장병이 위독하여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대주교가 돌아와서, 레이몬드와 패트릭이 수도생활을 시작할 12,536평의 화정동 땅을 보여주었다. 대주교가 예수고난회의 사도직활동을 위해 준비해주신 것이다. 레이몬드와 패트릭은 논에 둘러싸인 언덕이며 도시 한가운데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한적한 곳이 딱 마음에 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12월 4일, 전 총장 말콤 라벨(Malcolm Lavelle)이 처음으로 한국에 오셔서 공식방문을 통해 예수고난회의 삶을 몇 년간 풍요롭게 해주었다. 말콤을 통해 레이몬드와 패트릭은 전 국무총리였으며 가톨릭 평신도로 잘 알려진 장 면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장면 박사는 바로 3년 전에 박정희 정부로부터 지위를 박탈당했다. 장 박사는 이미 예수고난회 일을 돕고 있었고 성녀 젬마 갈가니의 삶과 고난에 관한 것을 번역하였다. 말콤 신부님과는 몇 년 전부터 로마에서 만나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장 박사를 통해 예수고난회 수사들이 오기도 전에 이미 한국인들이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예수고난회와 관련이 있는 성 마리아 고레띠의 삶에 관해서는 후에 청주 교구장이 된 정 니콜라스 신부가 번역했다.
1965 - 1966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어려움
전에 중국에서 선교하던 프란시스 플라헐티(Francis Flaherty)가 단기간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4월에 왔다. 프란시스는 한국과 일본에 있는 메리놀 수녀님들에게 계속 피정 지도를 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한국의 새로운 공동체를 방문하는 두 번째 사람이었다.
5월 경,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예수고난회에 있지만 5월 2일 포교성성의 결정에 의해 교구명의로 했다. 감사하게도 헨리 대주교가 개인 부담으로 땅을 구입하여 기부하셨다. 이 땅은 수년 동안 우리를 위한 조언해주시던 이 요셉에게서 구입하였다.
9월 16일, 저스틴 바토츠젝(Justin Bartoszek)이 일본에서 휴가 중이던 패트릭을 만난 뒤 항공편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저스틴은 요코하마 배에서 내리고, 패트릭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거기에 남았다. 그들은 새로 지은 명도원 어학원에 거주하고 정교하고 낯선 새 언어를 공부하는 동안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아직 언어에 자신도 없고 한계가 있었지만, 레이몬드는 매주일 이문동에서 미사를 드리며 새로운 선교지에서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패트릭도 주일에 여러 본당에서 일하거나 미군부대와 비무장 지대를 다니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강론에 대한 기록은 없다.
패트릭은 ‘예수그리스도고난수도회’에 대한 팜플렛 번역본과 알로이시오 맥도나휴가 쓴 성 가브리엘에 대한 소책자를 확대 인쇄 하였다.
1966년은 일본 관구장인 제임스 패트릭 화이트(James Patrick White)와 일본 선교사인 데니스 맥고완 (Denis McGowan)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방문 중에 6,810평의 땅을 매입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나중에 이곳에 피정집이 세워졌다.
같은 해 레이몬드와 패트릭의 언어공부를 마치고 레이몬드는 광주 주교좌 성당에서, 패트릭은 나주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사목활동을 할 사람들과 직접 만남으로서 언어구사 능력을 강화하는데 목적은 두었다. 그해 가을 패트릭은 간염으로 몸져눕게 되어 목포에 있는 골롬반 수녀회의 병원에서 한 달간 요양을 하였다.
1966년 7월, 저스틴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더 나은 세상 만들기 피정’(BWR : Better World Retreat)을 맡게 되었다. BWR 은 리카도 롬바디(Ricardo Lombardi)가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돌란(Luis Dolan)과 헬렌 브루어(Helen Brewer) (아시아 협력자)와 함께 창립하였다. BWR과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 되었다. 그 해 가을, 저스틴의 부친이 시카고에서 돌아가셨다. 광주 주교좌성당에서 미카엘 주교와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를 봉헌하였다. 저스틴은 고향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9월, 캐롤 스털무엘러(Carroll Stuhlmueller)가 서울에 있는 예수회 대학과 국내 2개 신학교 중 하나인 광주에 있는 대건 신학교에서 성경에 관한 세미나를 열고 첫 강의 하였는데 그 후 여러 번 더 방문하였다.
1967 - 1969 광주 피정 센터
어려운 언어와 씨름하면서도 항상 수도회의 일이 걱정이었다. 광주에 부동산을 매입하였어도 정확히 어떤 구체적인 건물을 세울지 계획이 없었다. 게다가 건물을 세우고 기초를 다진다 해도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만약 제임스 패트릭의 열정과 비전이 현실이 된다하더라도 이 작은 공동체가 장래 한국예수고난회의 공동생활과 사목활동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은 아이오와 주에 있는 패트릭 가족의 후원으로 제주도 남쪽에 조그만 땅을 매입했다. 그곳에 조그마한 거주공간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 지원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고 조금 더 복잡한 문제였다. 언어의 한계와 문화 차이 때문에 1970까지 미루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초창기 3명의 선교사들이 언어가 좀 더 수월해지고 장래 예수고난회 수사가 될 사람들이 머물 공간이 마련되리라고 여겼다.
사도직 활동으로 패트릭과 저스틴은 한국에 꾸르실료를 들여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패트릭은 첫 꾸르실료를 서울 성수동 본당에서 맡아 하였고 저스틴은 두 번째 꾸르실료를 서울 프란치스코 어학당에서 맡았다. 한국어에 숙달된 레이몬드는 본당생활에서 광주 신학교로 옮겨 신학생들의 영성 지도 팀에 함께 하게 되었다. 저스틴은 언어학교를 마친 뒤 서울대학교에서 문화 인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패트릭은 계속 광주 대교구의 본당에서 활동하였다
광주에 세워질 피정센터에 관하여 레이몬드, 패트릭, 그리고 저스틴이 한국 건축가 엄덕문씨와 함께 서울에서 신중하게 첫 번째 회의를 하였다. 1967년 12월, 제임스 패트릭은 일본의 피터 쿰레(Peter Kumle)와 다시 한국에 와서 피정센터 계획을 검토하고 예산에 맞추어 몇 가지를 수정한 뒤 마침내 12월 15일에 피정센터 계획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첫 단추는 끼워졌다. 이제 곧 한국 땅에 예수고난회 수사들을 위한 집이 마련될 것이다.
1968년 여러 가지 극복해야할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는 올해 안에 마무리 지어야 할 여러 일들을 서로 분담하는 것이었다. 첫 난국은 시카고의 관구에서 한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한국에 건물을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 패트릭은 관구장을 설득하였다. 한국이 지금은 조금 불안정할지라도 앞으로는 문제없고 아주 좋은 관구에서 훌륭한 주교님이 관리할 것이라서 걱정 없다고 하였다.
이에 관련된 내용이 편지가 태평양을 오가면서 결국 제임스 패트릭은 반대 의견들을 거두고 그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건축 설계도를 놓고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저스틴은 거의 날마다 서울에 있는 엄덕문씨의 건축사무소에 가서 입찰회사를 선정하기 위하여 함께 의논하였다. 4월에 이 일을 마무리하고 저스틴은 시카고에 있는 미국 Curia의 승인을 받고 5월 8일 건축 계약에 서명하였다. 5월 20일, 가장 낮은 입찰가로 선정된 김 파트리시오가 운영하는 회사가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건축은 교구내에서 여러 해 동안 경험이 많은 독일 기술자 제럴드 놈로스키(Gerhard Nomrowski)가 감독하였다.
건축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구장은 레이몬드와 몇몇 사람들에게 함께 일할 가브리엘 멀닉스(Gabriel Mulnix)신부가 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가브리엘 신부는 한국에서 일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공사 불과 10일 후에 벌써 함께 일할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1968년 5월, 관구 총회 중에 패트릭은 한국을 대표하여 한국에서 떠오르는 여러 상황과 가능성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패트릭은 몇 달 간 인디애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 하였다. 공사를 시작한 건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사실 새로운 건물은 짓기 위한 계획도 나와 있었다.
저스틴은 올해 ‘BWM :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운동’을 2번이나 진행하면서, BWM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한번은 서울에 있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에서 지도자들을 위한 과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관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주교와 수도회 장상들을 위한 과정이었다. BMW와 관련된 소임 외에도 저스틴은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와 레이몬드가 맡았던 광주 신학교의 영성 지도를 하게 되었다.
패트릭은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며 공부하는 동안 새로 짓는 피정 집을 위한 어마어마한 양의 장비들을 준비하였다. 가브리엘 멀닉스가 화물선을 타고 오면서 시애틀에서 그 장비들을 가져왔다.
9월 24일, 마침내 그 배가 한국에 도착했고 4명의 예수고난회 수사들이 한국에 소임을 받아 함께 왔다. 가브리엘은 곧바로 서울 중심에 있는 프란치스코 언어 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성 십자가 관구의 관구장으로 새로 선출된 폴 보일(Paul Boyle)은 1968년 12월 한국에 첫 방문을 하여 곧 완공될 피정 센터를 둘러보았다.
성탄절에 새 예수고난회 피정센터에서 거행된 첫 미사는 레이몬드, 저스틴, 가브리엘이 공동 집전 하였다.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예수고난회의 삶과 사도직 활동이 함께 탄생하였다. 비록 건축공사가 3개월간 더 이어졌지만 1월 6일에 레이몬드와 저스틴은 신학교에서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였는데 이는 정말로 예수님 공현축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1969년에 한국에서 예수고난회는 서울에 상주할 곳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늦여름에 리처드 톰슨(Richard Thomson)이 동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더욱 다급해졌다. 4월에 서울 돈암동, 골롬반회 센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집을 매입하기로 하였다. 이 집은 서울의 중심부와 아주 가까이 있어서 언어 공부하러 갈 때 버스만 잠깐 타면 갈 수 있고 광주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였다.
4월 28일, 피정의 집 봉헌식하기도 전에 벌써 피정이 시작되었다. 서울대교구 사제이면서 교리신학원의 설립자인 이 루이스 신부님이 45명의 교리교사들을 위해 피정을 하였다. 1969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이 피정이 있었다. 3월 21일 광주 교구의 김 요한 신부님이 피정강의를 위해 피정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시작된 피정집 운영은 한국의 첫 예수고난회 신부가 탄생될 때 까지 7년간 계속되었다.
1969년 4월 28일, 예수고난회 피정 센타가 정식으로 봉헌되었다. 로마 교황청 대사 이폴리토 로톨리(Ippolito Rotoli) 대주교는 야외 미사 주례를 맡았다. 미국에서 온 폴 보일 신부는 광주교구의 미카엘 보좌 주교와 전주 교구의 한 베드로 주교와 함께 장엄한 전례에 참석 하였다. 헨리 대주교는 로마에 가셔서 축복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윌리엄 웨스트호븐 신부는 헨리 대주교의 특별 손님으로 왔고, 일본에서 파견된 와드 비들 신부(Ward Biddle), 폴 플라첵 신부(Paul Placek), 바오로와 가브리엘 수사가 참석 하였다. 필리핀 대표로 성 십자가 관구 소속인 안토니 말로니(Anthony Maloney) 신부도 왔다. 미사 중에 신학교 성가대가 성가를 하고 미사 전후로 살레시오 여고 학생들이 합창을 하고 군악대가 연주하는 그야말로 축제의 날이었다. 5년여에 걸친 힘든 수고와 노력으로 드디어 한국 예수고난회가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여름에 신중한 성소 사도직의 첫 번째 시도로 성소계발 프로그램을 저스틴이 맡았다.
8월, 리처드 톰슨은 로난 뉴볼드(Ronan Newbold)와 같이 미국을 떠나 배를 타고 각각 동양의 한국과 일본으로 향했다. 여행 중에 하와이에서 내렸다가 그만 출항하기 전에 다시 배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8일 동안 여권도 돈도 없이 꼼짝 못하고 하와이에 묶여 있다가 결국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오게 되었다. 리처드는 사람을 만나느라 일본에 며칠 머물렀다. 9월 5일, 리처드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짐을 가지러 인천 부둣가로 갔다가 광주에 잠깐 들른 후, 역시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 프란치스코 어학원에 등록했다. 한 가지 좋은 점은 예수고난수도회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9월 15일 광주와 서울 집 모두 교회법적으로 창설되었음을 승인 받았다. 광주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를 주보로 모셨고 서울은 복자 도미니크 발베리(Dominic Barberi)의 이름을 따왔다. 서울의 집이 더 작기는 하지만 두 집 모두 피정자들을 받아 수도회의 사도직 활동이 서울과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광주의 첫 원장은 레이몬드가 되었고 가브리엘은 서울의 첫 원장이 되었다. 한국 진출에 대한 꿈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한국에서 모든 수사들은 예수고난회 피정집에서 살게 되었다. 각 수사들은 불과 6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 매일의 삶과 사도직을 통해 점차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양성이 시작되다 - 1970
두 공동체에 나뉘어져 있는 5명의 소그룹 외국인 수도자들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코앞에 둔 사람들의 큰 무리 한 가운데서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은 전쟁의 피해에서 서서히 빠져 나오면서 세상에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개발도상국 중 하나였던 나라가 동아시아의 “호랑이”들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과거 25년을 돌아보면 사실 1970년에는 이 미래의 성장이 어떤 방법으로도 한국인들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기본적 배경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한국을 재건할 패기 있는 젊은이들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 1200년 전에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수 세기 동안 쌓여왔던 문화의 좋은 가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4세기 후반 이씨 조선 왕조 이래로 유교적 윤리관은 개개인을 서로의 관계성 안으로 끈끈하게 묶어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의 합병과 1945년 강대국에 의하여 남북이 분열되면서 예전에는 단일 민족이었는데 정반대의 사회구조를 가진 두 나라로 분리 되었다. 유교적 사회는 여러 가지 방법에서 아직 형식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전에 비하면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1970년대는 나중에 새로운 사회적 조직의 기반이 될 건물들을 짓는 시기였다. 남한에서는 물질적 자본주의가 과거 60년간 한국을 지치도록 지배하던 유교사상을 대체했다. 한반도의 남한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던 비교적 온건한 군사독재 정권이 이 물질적 자본주의를 이끌었다. 비록 이 시대를 표현할 때 예전에 사용하던 용어들을 쓰기는 하였지만 내면의 가치들은 더 이상 유교적이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전통적인 마음의 힘을 좀먹게 하는 변질된 물질주의 모습이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놀라운 성장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영성적인 내용이 없는 새로운 사회조직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온전하게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신의 역할을 찾는데 있어 한국인들에게 도전은 사회적 신분의 안정성이었다. 세상에서 윤리적 정체성의 어떤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는 비록 헛된 노력일지라도 때때로 숭고하다. 이런 사회적 현실 속에서도 아마도 훗날 복음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사회가 이끌어갈 어떤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면서 하느님의 영은 활동하셨고 도와 주셨다.
새롭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분투하는 사람들 중에 서양의 소비중심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각기 다른 민족적 배경의 5사람과 한국인이 함께 모인 곳에는 현실적으로 독특한 도전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어려움들은 바로 토착화이다. 이 토착화는 선교사에게도 힘들지만 엄청난 혼란과 변화로 전통문화를 뒤엎는 시기에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욱 힘든 문제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안정된 자신의 문화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이제 막 수도생활로 들어선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계속 성장해 가면서 만나게 되는 도전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극복한 선교사들은 자신의 문화와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단지 부분적으로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개개인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으로 도전을 받았다. 오로지 사랑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약한 우리의 인간을, 한국에서 자라난 예수고난회원들을 도와주고 보호해주었다. 확실히 자만심, 죄, 이기심, 문화적 제국주의는 모두 한국교회의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보다는 열린 마음, 관대함, 진실한 형제애가 더 크게 작용하여 서로 다른 개인을 연결하는데 어려움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토착화는 결국 개개인의 실재에서 그룹의 힘으로 바뀌는 신학적 순간, 말하자면 현현(顯現)의 순간인 것이다. 토착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방의 낯선 점을 그만의 고유함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오직 믿음, 그것도 살아있는 강한 믿음이 바탕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하느님 사랑의 영으로부터만 온다. 그리고 때로는 이 믿음이 이렇게 서양인과 한국인처럼 매우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1970년 - 예수고난회 지원자 양성의 시작
첫 지원자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는데, 한 사람은 광주에서 가까운 나주라는 곳에서 온 정요한, 그리고 다른 사람은 서울에서 온 김 성종 바오로였다. 그들은 1970년 3월 1일 광주의 대건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기초 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다른 지원자는 아직 고등학생으로 1969년부터 예수고난회 수사들과 연락하는 김 준수 아우구스티노 였다. 이듬해 아우구스티노는 바오로와 요한과 같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것이다. 지원자가 공동체에 들어온 초기 몇 년간은 공동체에서 살지 않고 신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다. 지금도 이 규정을 따르고 있다. 그 이유는 장차 교구 사제가 될 학생들과 관계를 갖고 또 더 큰 공동체와의 생활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랜 기간의 계획 1970 - 1973
예수 고난회가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더 큰 공간과 설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추기경님의 끊임없는 요구에 의해 1970년 늦은 봄, 서울 미아리에 있는 성가 병원을 임시 피정센터로 만들었다. 레이몬드는 심지어 추기경에게 돈을 주면서 로마에 있는 관구장 폴 보일이 와서 이 제안을 승인하기 까지 병원을 잡아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관구장과 한국에 있는 수사들은 병원의 모든 시설을 면밀히 검사한 후 오래된 병원건물을 사지 않기로 결정 했다. 병원을 사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서울에 더 큰 공간을 마련하자는 계획을 미루게 되었지만 서울 교구 내에 예수고난회가 있기를 바라는 추기경의 바램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서울에 있는 우리의 집을 팔고 그 돈으로 서울대교구를 위해 피정 센터를 짓기로 하였다. 공사 중에는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집을 빌려 지내기로 하였다.
1970년 말경, 가브리엘이 담당한 성소계발 프로그램에 4명의 학생이 참여하였다.
1971년 2월 26일 한국 선교의 첫 공식방문으로 데오도르 폴리(Theodore Foley) 총장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폴리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직접 보고 놀라워했다. 서울과 광주 두 교구에서 사람들과 만난 후 폴리 총장은 광주 피정의 집에 마련된 환영식에 참석했다.
3번째 지원자 김준수 아우구스티노는 3월 1일부터 광주 대건 신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4월 28일 십자가의 성 바오로축일에는 패트릭 오말 리가 성가 수녀회의 우이동 땅을 사기로 계약하였다. 이 땅은 9,005평으로 서울 북쪽 끝에 있는 외딴 곳으로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동안 총애와 존경을 받던 레이몬드가 한국 남자 수도회 장상 연합회의 첫 회장으로 뽑혀 5~6년간 활동 하였다.
1971년 5월 15일, 한국 선교는 1972년 1월7일-10일까지 제 1차 지부총회를 함으로써 지부로 승격되었다. 총 참사인 바오로 매리 매든(Paul Mary Madden) 신부가 주관한 이 총회에서 레이몬드를 초대 지부장으로, 패트릭을 첫째 참사로, 가브리엘을 두 번째 참사로 뽑았다. 레이몬드는 광주 공동체 원장으로 저스틴은 임시 머물고 있는 서울공동체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월 28일 이제 막 태어난 지부공동체에 또다시 어려움이 덮쳤다. 리처드는 간염으로 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저스틴도 전염되어 6월 15일 목포로 내려와 골룸바 수녀회에서 1달 동안 병이 나을 때까지 머물러야 했다.
1월 30일, 12월에 가브리엘이 주관했던 성소계발 프로그램을 통해 정 이진 비오와 신 베드로가 우리 수도회의 지원자로 입회하게 되었다. 비오는 첫 한국인 예수고난회 수사가 되었는데 나중에 마리아니스트회로 전출하였다. 초기에 예수 고난회의 수련소에는 4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9월 11일부터 예비 수사인 김 바오로(성종), 정 비오 (이진) 그리고 박 도미니코(영철과는 무관한)는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청원기를 시작 하였다. 이는 외국 선교사들이 시작하여 장차 방인수도자들이 이끌어갈 한국 관구를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레이몬드가 지부장에 선출된 것과 더불어 사제서품 25주년 맞이하여 축하식을 마련하였다. 4월 30일 축하식에는 최근에 임명된 한 베드로 대주교님, 미국 출신의 테렌스 오툴과 일본에서 온 플레이세크 바오로도 참여 하였다. 한국에 있던 모든 예수고난회 수도자들, 광주 지역 사제와 수도자들이 함께 모였다. 그해 년 말에 레이몬드는 일본과 필리핀에 가서도 축하식을 하였다.
1972년 9월, 간호사 자격을 가진 핀 로렌스가 신학을 마치고 1975년 여름경에는 지부 공동체로 합류할 수 있다고 시카고에서 소식이 왔다.
패트릭은 동양학 학위를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유럽을 여행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패트릭은 거의 모든 공부를 하와이 대학에서 했다.
1973년은 여러가지 이유로 뜻 깊은 해였다. 먼저, 광주에 법정 수련자들을 위한 수련원을 세운 것이다. 이 수련원은 장차 훌륭한 예수 고난회 수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곳으로 2월 26일에 김 바오로와 정 비오가 착복식을 하고 저스틴의 지도하에 수련기를 시작한 곳이다. 이 간단한 예식을 통해 새 수련자들은 과거 수천 명이 이미 여러 나라에서 걸어왔던 수도자의 길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김 바오로와 정 비오가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로 예수고난수도회 수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3월 7일, 한 베드로 대주교님이 광주에 머무른 지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 대주교님은 이전에 광주에서 북쪽지역인 청주교구의 주교였다. 한 대주교님은 서울 우이동에 건축 허가를 받을 때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손수 맡아 해결해 준 고마운 후원자였다. 한 대주교님을 통해서 예수고난회 수사들은 청와대 인사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몇몇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73년 6월에는 보일 바오로 관구장이 주재하고 성 십자가 관구의 선교 담당 요한 프란시스 코불러가 참여한 제 2차 지부총회가 열렸다. 총회에서 레이몬드가 지부장으로 재 선출되었고 저스틴이 첫째 참사, 가브리엘이 둘째 참사로 선출되었다. 레이몬드는 서울수도공동체의 원장으로 패트릭을 광주 공동체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즈음에, 패트릭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가브리엘과 리차드가 패트릭과 함께 광주에 머무르며 개인적으로도 또 공동체적으로도 가장 힘든 시기에 패트릭을 곁에서 도왔다.
9월, 서울에 있던 전셋집은 다시 돌려줘야 했고 새로 더 큰 집을 찾아야 했다. 레이몬드는 언어학교 명도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몇 달 동안 집을 찾아 다녔다.
11월, 참사회는 청와대와 교황 대사관에서 가까운 부암동의 큰 건물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4 에이커(약 16,200 평)땅에 있는 이 건물은 도심에서 30분 떨어진 거리의 조용한 언덕에 있었다. 4개 정도 공간은 수도자뿐 아니라 사도직 활동을 위한 작은 그룹모임을 위해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건물의 수리를 마치고 1974년 1월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이 건물은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세련되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시골스러운 곳이었다.
과도기 (변화) 그리고 성장 1974 - 1978
1974년은 다사다난했다. 크게 슬펐던 일과 아주 기쁜 일 하나씩 있었다. 1월초에 계속 어려움을 겪던 패드릭이 성소 식별을 위해 사가(공동체를 떠나있음) 신청을 했다. 그 해 5월, 패트릭은 전에 광주 피정 집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 엘리사벳과 약혼을 하며 환속을 청하였다. 패트릭이 공동체를 떠난 일과 또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공동체의 분위기는 불안하였다. 가브리엘이 패트릭을 대신하여 시카고 관구에서 승인을 받을 때까지 광주 공동체 원장 역할을 하였다.
반면 한 가지 매우 기쁜 일은 저스틴이 담당하던 수련자들의 수련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2월 13일, 총장인 폴리 데오도르는 한국에서 바오로와 비오의 첫 서원을 받아들였다. 처음 한국에서 시작한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의 10여 년간의 힘겨운 노력들이 첫 서원을 발하는 한국인 수도자를 통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수사들은 그들의 서원을 통하여 진정한 한국인 수도자가 되었고 토착화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1960년대에 겪은 시행착오들이 계기가 되어 진정한 한국 토착화에 도움을 주었다. 같은 날 가브리엘이 군종사제로의 명을 받고 대령으로 미국 공군에 파견되었다.
이틀 후, 저스틴, 바오로, 비오는 레이몬드가 미리 가서 머무르던 서울의 새 건물로 이사하였다. 바오로는 서울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비오는 경기대학교로 복학하였다. 부암동 집은 작은 피정의 집으로도 쓰였다. 3월 중순경에 처음으로 과달루페 신부들이 모여 며칠 동안 기도하였는데, 이후에 2년 동안 2000명가량의 사람들이 피정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리하여 수도생활과 사도직 활동이 다시 서울 대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건물을 짓는데 여러 역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한 계획을 계속 추진하였다. 9월, 김상오에게 연락하여 첫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여 11월경 시카고 관구 참사회에 보냈다. 저스틴은 다시 김상오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지부 공동체는 얼마 전에 한국에서 바오로와 비오의 첫서원을 주례하셨던 폴리 데로도르 총장께서 10월에 갑자기 선종하셨다는 소식으로 충격을 받았다.
1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 또 다른 문제는 김 바오로가 갑작스럽게 체포된 것이다. 11월, 바오로는 서울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시위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3일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사건으로 바오로는 가끔씩 구름 아래를 걷는 듯 한 느낌이었고 또 이 시기의 불안정한 한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모토로브(Motolov) 칵테일을 사용해 시위하는 요즘과 달리 1970년대에는 아주 엄하게 제재되었다. 사실 김 바오로는 데모에 직접 가담한 것도 아니고 단지 예수회 신학생이 쓴 시를 나누어준 것뿐 이었는데, 이 시에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부정적으로 나타낸 내용이 있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1975년 바오로는 재판에 서게 되었고 1년 반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하지만 항소가 있을 시에만 집행유예를 받기로 되어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오로는 1년 정도 사제서품이 연기 되었을 것이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정치가 개개인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어디든지 여러 사람의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한국의 정치적 불안감이 1974년 말 예수고난회 내에서도 느껴졌다. 보통 정치적 결정에 직접 참여 못하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인들에 비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충돌은 특히 유교사상이 있는 곳에서 더 심하다. 선거를 통해서든, 공권력을 통해서든 권력을 갖게 된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순순히 복종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의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생각할 때,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사상이 배어있는 한국이라 해도 이 시기의 한국 사회는 권력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변화하고 있었다. 1972년에 개정된 유신헌법은 더 이상 변화하는 한국사회에 맞지 않았다. 서양식 소비주의가 소개된 새로운 한국은 과거의 사상이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한 것이건 삶에 방식에 대한 것이건 자신 고유의 선택의 권리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잘 포장된, 그러나 시민에게 가부장적으로 강제적인 제재를 하는 유신 헌법에게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이 때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불안이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만난 수도회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1974년 말, 지부의 모든 회원들이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모였다. 이 전통은 예외 없이 20년 동안 매번 지속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지금 수도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고통스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심이, 그 처음의 열정이 공동체 회원들 안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1975년, 조그만 지부의 일상은 패트릭이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바오로와 비오는 신학공부를 하였고 저스틴은 ‘보다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운동’ (Better World Movement)에 참여하였고 레이몬드는 계속 지부장으로 있었다. 리처드와 가브리엘은 광주에서 사도직활동을 계속하였다.
4월, 서울시에서 피정의 집 건축에 1차 허가를 내주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건물을 지을 건축비 모금과 공식적인 허가였다. 저스틴은 ‘보다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와 관련하여 로마에 가 있는 동안 여러 단체 즉 미시오(Missio), 해외 포교(Propaganda Fide), 성 베드로회(Society of St. Peter) 그리고 가난한 교회 교회 후원회 (Aid of Needy Churches) 와 중요한 관계를 맺기 시작 하였다. 반면 1975년 여름에는 워렌튼 학교가 팔려서 피정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움 되었다. 그래서 초반에 미시오에게 한 요청을 철회하였고 이제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77년 경 8월초, 가브리엘은 미국 공군 사제로 파견되기를 관구에 요청하였다. 반면 핀 로렌스는 8월 3일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한국 순교자들의 지부에 합류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로렌스는 6주 후 부터 다른 프란치스코 수도자들과 함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여야 했다. 로렌스는 레이몬드, 저스틴, 바오로, 비오와 함께 부암동에 살며 명도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시간이 흘러 1975년 말이 되었고, 광주에서 또 성탄절 모임을 하였다. 바로 그 전에, 부총장 카메라 세바스치아노(Sebastiano Camera)와 총 참사인 바오로 메리 매든(Paul Mary Madden) 신부가 필리핀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한국에 방문하였다. 제 1차 아시아 태평양 지역 대표자모임을 가진 후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보았고, 광주에서 하는 가브리엘의 성소 계발 프로그램에도 하루 정도 참여하였다.
1976년 새해에는 한국에 총 7명의 예수 고난회 수사들이 있었다. 2월 14일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당 명도원에서 바오로와 비오의 종신서원식을 함으로써 한국지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총원으로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아 이 두 명의 한국 예수 고난회 수사들은 가난, 정결과 순명을 서약하고 수난 서원(Passion Vow)도 하였다. 수난서원은 모든 예수 고난 수사들이 유기서약 2년을 마친 후에 한다.
1월 초, 시카고 행정체는 서울에 건물 짓는 것을 허락하였기에 공개입찰을 하여 몇몇 건설회사에서 신청서를 받았다. 새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독일의 미시오에서 후원을 해주었다. 또한 광주의 조그마한 소유지들이 팔리면서 서울 피정의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되었다. 공사는 대우 건설에서 해주었고 하와이에서 온 중국계 미국인 죠니 영 (Mr. Johnnie Young)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를 책임지고 총괄해 주었다. 5월 1일 마지막 법적 절차가 통과되고 5월 7일 마침내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에 비오는 경기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봄 학기부터는 동국 대학교에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봄, 바오로의 법적인 문제들이 또다시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가 나눠준 시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1주일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비오도 하룻밤을 감옥에 붙잡혀 있었다. 5월에 재판이 열렸고 바오로는 2년형을 받았다. 즉시 항소가 제기되었고 바오로는 다행히도 1년 반의 감옥 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바오로는 광주에서 5월 3일 윤 대주교에게 부제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2년 전에 시작되었던 것이 마침내 끝을 맺게 되었다.
가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미 공군으로 갈 날이 다가왔고, 리처드는 광주 신학생 담당자와 수련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김 준수 아우구스티노와 박 영철 도미니코는 내년 초부터 수련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12월 부암동 집의 계약이 만료되어 서울 예수고난회 수사들이 갈 곳이 없었다. 아직 우이동 피정집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일단 모든 살림살이를 우이동에 옮겨 놓았다. 저스틴은 공사 중인 곳으로 옮겼고, 레이몬드는 여느 때보다 추웠던 이 겨울 난방이 되지 않는 개인 집으로 가야했다. 레리는 그나마 가장 여건이 좋은 돈암동 골롬반회로 가서 난방과 온수가 나오는 곳에서 따뜻하게 지냈다.
12월 8일, 첫 한국 예수 고난회 수도 사제 김 성종 바오로는 서울 주교좌 명동성당에서 서울 대교구 김 스테파노 추기경을 통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즉시, 바오로와 비오는 예수 고난회 수도 생활을 위해 광주로 갔다. 광주에서 바오로는 피정 지도자로, 비오는 피정의 집 관리자로 임명되면서 피정 집에 적어도 사제가 있기 때문에 교구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가브리엘은 8년간 한국지부에 헌신한 수도여정을 마무리하고 12월 10일 한국을 떠났다. 가브리엘은 1977년 초 미국 공군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노와 도미니코의 두 번째 수련기는 아직 공사 중인 우이동 건물에서 저스틴의 지도로 예비 수련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저스틴은 또한 신축중인 건물을 책임 맡고 있었다. 2월초에 레이몬드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에 이사 왔고 2월 말에는 2명의 청원자가 착복식을 하면서 리처드 지도 아래 예수고난회 수도자로서의 그들의 양성과정을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3월, 모든 서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부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레이몬드는 지부장으로 2년 더 연임되고, 리처드는 첫 번째 고문으로, 비오는 두 번째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관구장으로 선출된 로저 머큐리오(Roger Mercurio)와 지난 10월 총장으로 선출된 폴 보일(Paul Boyle)이 함께 이 총회를 이끌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새 지부장을 기대하였지만 투표를 마치고 나서 대다수가 레이몬드를 뽑았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몬드의 재 선출은 총회가 진행된 광주 회의실의 투표자들에게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새 지부장을 기대했던 것에 대해 실망감이 있었지만, 지난 14년간 단단한 리더쉽을 보여준 레이몬드가 또 책임자가 된다는 생각에 감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재 선출은 한국 예수고난회 초창기부터 예수고난회 수도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그에 대한 회원들의 신뢰와 존경을 보여주었다. 총회 후에 레이몬드는 서울 지역 책임자로, 리처드는 광주 책임자로서 피정지도 하는 바오로와 피정의 집 관리 책임자 비오와 함께 지냈다. 서울 피정의 집에서는 저스틴이 피정 지도자로, 레리가 관리자가 되었다. 이 피정 집은 한국어로 “명상의 집”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새로 짓는 피정 집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갔다. 서울에 큰 피정 집의 준공식을 즈음하여 아시아의 원장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 중에 새 피정집의 봉헌식은 4월 20일에 하기로 하였다. 피정 집 봉헌식은 은인들, 후원자를 포함하여 600명이 넘는 손님들이 오신 가운데, 김 스테파노 추기경이 주례하고 교황대사인 루이기 돌세나(Luigi Dolsenna)주교가 함께 집전하였다. 이로써 피정의 집은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의 사도직을 위해 축성되었다. 새로 선출된 총원장 보일 바오로(Paul Boyle)와 시카고의 성 십자가회의 관구장 로저 (Roger Mercurio) 도 함께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필리핀, 호주, 파푸아뉴기니, 이탈리아, 홀란드, 인도네시아의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도 함께 하였다. 봉헌식 후에는 이곳 피정집에서 제 2차 예수 고난회 아시아 원장 회의가 열렸다.
서울에 새 피정의 집이 마련됨으로써 이제 국내에 2개의 큰 시설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예수 고난회의 더 많은 발전과 공동체 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돕게 될 공간들이었다. 광주 피정의 집은 김 바오로의 피정지도와 정 비오가 피정집 관리책임자로 이미 좋은 특별한 열매들을 맺고 있었다. 봄에는 지부의 미래 사도직활동과 공동생활의 활성화를 위해 그리고 성소자 모임을 위하여 회의를 하였는데 총회에서 제안사항중의 하나인 “삶의 고찰- 쇄신회”가 시작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1977년에 나타난 여러 문제들을 대면하고 해결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갈등과 대립이 있었지만 진솔한 대화가 가능했고 이 삶의 재 조명(쇄신회)은 지부뿐 아니라 미래 수도회 차원에서 회칙으로 제정되었다. 이런 모임을 통해서 갈등과 대립은 사건과 사람에 대해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개개인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가끔은 동양과 서양문화의 대립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러한 대립들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갈등이었지만, 한국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이 원만하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이었고, 이는 절대로 수도자들의 목적인 영성을 잊지 않은 노력에서 오는 대립이었다.
총회의 또 다른 열매는, 향후 지부를 위한 여러 가지 위원회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양성, 재정, 그리고 성소 위원회들은 각각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바람직한 제도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위원회들은 특히 장래 새로운 예수 고난회 성소자들과 양성에 얼마간 기여하였다.
1977년부터 광주에 있는 소유지에 투자의 한 방법으로 나무심기가 몇 해 동안 계속되면서 관리 유지와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비오가 이 계획에 책임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나무 심기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이 계기로 예수 고난 수사들은 좋은 농부도 아니고 훌륭한 사업가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일이 그렇게 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작 소득은 얼마 없었다.
광주에서 1977년 2월에 수련기를 시작한 김 아우구스티노와 박 도미니코는 계속해서 수련과정을 잘 따라갔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렸을 적 앓았던 성홍열로 인해 심장에 문제가 생겼는데 1979년 2월에 미국에서 만들어 홍콩을 통해 수입한 인공 심장 박동 조율기를 삽입(임플란트) 함으로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구스티노는 임플란트 덕분에 일상적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뿐만 아니라 수도가족 모두는 치료 후 좋은 결과에 대하여 기뻐하고 세브란스 병원의 의료진에게 감사하였다.
1977년 11월 조 수산나가 일본으로 떠났다. 수산나는 성소의 날에 명동 대성당에 바오로와 비오가 예수 고난회에 대해 소개할 때 있었던 젊은 여성이었다. 수산나는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와 연관된 예수 고난관상수녀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수산나는 수도생활을 하기를 결심하였고 가장 가까운 수녀원이 일본에 있었으므로 일본으로 갔다. 수산나는 예수 고난 수녀회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이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0년쯤 지난 뒤 수산나의 바램이 이루어졌고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수녀원을 창립하고 수도 생활을 계속 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은 총 11명의 회원이 있는데, 그 중 6명의 종신 서원수녀이다. 이 공동체는 활성화되어 잘 운영되고 있다. 1997년 8월 6일 이후로 이 공동체는 6명의 종신서원자와 6명의 유기서원자로 구성되어 독립적인 수도회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와 도미니코는 1978년 2월 26일 광주 피정의 집에서 서원하였다. 한국인으로서 2번째로 수련기를 마치고 예수 고난회 수사로 탄생한 것이다.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숫자적으로 보면 이제 한국에 있는 예수 고난회 수사들의 절반이 한국인이다. 점점 이렇게 수도회가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서울 피정의 집 봉헌식이 있은 후 한국 지부는 몇 년 간 큰 일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제주도에 있는 수도회 소유의 땅이 새로 공원의 일부분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 말은 곧 그 땅을 팔고 다른 곳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강원도 동쪽에 적당한 땅이 있어 사게 되었다. 그 곳은 수도회 이름으로 있었지만 1996년에 작은 집이 지어질 때까지는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1979년 초, 김 영권 바오로가 5번째로 십자가의 바오로 길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광주에서 수련을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1970년대 초 그의 군복무 시절 광주에 방문한 이래 오랫동안 수도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광주 신학교 학생 이였는데 우리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한 것이었다. 바오로는 우리의 2번째 김 바오로였다! 바오로는 1980년 서울 피정의 집 성당에서 서원하였다. 바오로가 서원함으로써 한국에 있는 수도자 대부분이 토종 한국인이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노와 도미니코는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2년 전에 서울 신학교에서 개설된 사목실습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도미니코는 신학교뿐 아니라 서울에 있는 예수회 대학인 서강대학교에서도 공부하였다.
1979년-1980년: 한국의 위기 - 정치 그리고 교회
1970년대 말,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은 오늘날에 비해 비교적 순탄한 나날을 보냈으나 이후 여러 가지로 한국지부의 각 수도자들을 공격할 문제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이는 1979년 10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살해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놀라운 점은 박정희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관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전에 건설부 장관을 맡으면서 예수 고난회를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다. 김재규는 우리 총장 바오로 보일에게 아름다운 서예작품 족자를 선물하였는데 이것은 10년이 지난 뒤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은 국가와 교회와 예수고난회에 앞으로 새로운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정치적으로 암살사건을 통해 이 나라의 중심 세력을 없어졌다. 비록 헌법에 의해 최규하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약하고 무능하고 특히 군부를 통치할 능력이 부족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대 초에 군사력을 이용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군사의 영향력이 무시될 수 없었다. 불행한 사건들이 뒤를 이었다. 12월 12일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강력한 신군부세력들이 등장하면서 결국 이 나라는 신군부세력에 의해 다스려졌다.
인권의 침해는 1972년 유신헌법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같은 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정치를 시작하여 1980년 군사 정치가 될 때 까지 지속하였다. 유신정권은 반공산주의처럼 가장하여 이 나라에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침해 하고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1980년 5월 광주 항쟁이었다. 데모 진압을 위해 투입된 군사들이 수 백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비록 광주가 향후 저항 세력의 주요 상징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더 큰 시위는 당시 나라를 통치하는 군사법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운동이 부산, 마산, 청주 그리고 남쪽지역의 다른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언론매체의 주권을 잡고 있는 군사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남한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고 가혹한 제제들을 정당화 시켰다. 서울의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광주 시민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거나 심문을 받거나 외국인의 경우 추방당할 정도로 엄격했다.
이 때 교회는 큰 도전을 받았다. 서울의 김 주교, 광주의 윤 주교, 원주의 지 주교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진리와 인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에 용감한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부정과 탐욕스런 군대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끔은 극단적인 개인의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이런 용감한 지도자들 덕분에 한국사회의 정의가 살아나고 유지될 수 있었다.
1979년과 1980년의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선 우리 피정집은 경찰과 국가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가 극대화 되었다. 다행히 광주에서는 그래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감시관이 있었지만 서울의 경우 어떤 때는 정보부 요원들이 피정의 집에 누가 들어오고 무엇을 하는지 감시하기도 하였고 피정자들의 이름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한번은 가톨릭 신문 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경찰이 피정의 집을 차단해서, 그 안에 있던 기자들이 피정 집 뒷문을 통해 산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두려웠던 이런 사건들이 국가와 교회, 그리고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광주 시민운동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나 압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정의를 위해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예수 고난 수도회 내에도,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수도회가 직접 정치적 불의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의 긴장은 향후 몇 년 간 정치권에서, 교회에서, 또 수도회에서 계속되었다.
보호 세력의 변화 - 1980 - 1984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기부터 성령과 수도자들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수도회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말 제 4차 지부총회 열렸다. 총회에서 저스틴 바르토즈제크(Justin Bartoszek)가 지부장으로 선출되었고 김 성종 바오로는 첫째 고문으로, 리처드 톰슨(Richard Thomson)이 두 번째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저스틴은 서울의 원장, 리처드는 광주의 원장이었는데, 리처드는 이제 새 수련장을 맡게 되었다. 레이몬드가 마침내 16년간 활동한 한국 예수고난수도회 책임자의 위치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 탄탄한 기반 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청주로 가기 전에 광주에서 1년 더 있어야 했다. 예전에 청주에서 레이몬드는 빈민 구호 수녀회 (Little Sisters of the Poor)의 상주 사제로 1년간 있었고 청주시에서 가까운 가난한 시골 내수 성당에서 6년간 사목활동을 하였다. 이로서 예수 고난회가 교구 활동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또한 한국 예수 고난회가 공식적으로 교구에서 봉사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비오가 주말마다 레지오 마리애나 예비자 교리 교육을 통해 레이몬드를 도와주었다.
저스틴은 첫 재임 기간 동안 이미 활동 중인 여러 위원회들의 역할을 늘리고 피정 집 사도직 위원회와 은인들의 관리를 위한 은인 후원회도 결성하였다. 또한 한국 예수 고난회 수사들에게 더 진지한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갖도록 장려하였다.
새로운 성소자 모집은 성공적이었으나 그에 비해 입회자들을 위한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1980년 1월에 김 아우구스티노가 수도회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예정보다 1년 먼저 종신서원을 하였다. 1년 뒤에는 도미니코가 종신서원을 하게 되어 한국인 종신서원자 2명이 탄생되었다.
1981년 2월에는 아우구스티노는 일본 여행 중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사제 서품받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리하여 한국 예수고난회에 사제가 2명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첫 미사는 예수고난회 수녀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최근에 서원한 조 수산나가 참석하였다. 저스틴과 로렌스도 함께 첫 미사에 참여하여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1982년 열린 제 5차 지부총회에서는 이제 지부 공동체가 충분히 성장하였으므로 2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총회 규정을 4년제로 바꾸기로 결정 하였다. 총회에서 저스틴은 다시 지부장으로, 바오로는 첫 고문으로, 로렌스는 두 번째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바오로는 서울의 원장으로 로렌스는 광주의 원장으로 그리고 리처드는 계속 수련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바오로는 1984년까지 서울 원장으로 있다가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갔다.
초창기부터 수도회는 이 요셉을 통해 땅 매매를 해왔는데, 1983년 초에 이 요셉이 저스틴과 참사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광주의 땅을 팔아 시내를 벗어난 외곽에 더 넓은 땅을 사면 더 큰 건물을 짓고도 장래를 위한 자금이 충분할거라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요셉이 맡고 있던 광주의 미야자키 자선 수녀회에게 제안한 것과 비슷했다. 그 해 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내수 본당에서 참사회를 하면서 새로운 제안의 가능성들에 놀라워하고 감탄했다. 광주의 공동체는 4명의 수도자와 3명의 수련자(김 안드레아, 박 가브리엘, 김 마티아) 가 생활하면서 이미 공간의 부족을 체감하고 있었다. 서울 피정집은 5명 공동체와 청원자들이 1층을 채웠고 곧 더 많은 방들이 필요했다.
바오로 가브리엘과 마티아는 1984년 2월에 수련을 마치고 광주 성당에서 첫 서원을 하였다. 바오로 가브리엘은 광주 신학교에서 1년을 지내고, 마티아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대신 서울에서 대입 학력고사를 보기로 하였다. 사실 마티아는 평수사를 지원하였다. 대입 학력고사를 합격한 후 마티아는 1년간 광주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사로 돌아왔다. 이후 마티아는 광주대학교 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
부활절 모임을 앞두고 참사회는 이전의 계획을 놓고 계속 논의하였다. 부활절 모임에서 마침내 그 제안이 상정되었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의 필요성을 느끼고 설문조사를 통하여 광주의 새 건물 건축에 대한 초안이 작성되었다. 여름에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 새 건축과 관련된 설문조사 내용을 재검토하였다. 우리의 계획을 광주의 건축가 신정재에게 가져갔더니 이 건축 안을 신출내기 건축가 정원식에게 주었다. 우리는 새로운 건축 안들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는데, 이 계획들은 한국의 예수 고난 수도회의 첫 피정의 집인 화정동 건물이 팔릴 경우에만 가능했다.
1984년 5월, 마침내 화정동 건물이 팔렸고 그 해 말부터 광주에 건축이 시작될 수 있었다. 계약이 체결되고 서명날인 되던 그 때에 교황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그 날 밤 총장 바오로 보일(Paul Boyle)과 저스틴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로렌스가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15년도 채 안된 우리 피정의 집은 그렇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게 되었고 그곳에는 15층과 20층짜리 아파트 건물들로 대체되었다. 1984년 8월말, 후원자들과 수도자들과 윤대주교가 함께 모여 1969년부터 훌륭한 피정 집을 통해 15년간 수도자들이 교구에 베푼 공헌에 대해 감사 드렸다. 이제 새 피정의 집에서 그와 같은 역사가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성장, 변화 그리고 성숙 - 1985 - 1990
광주의 첫 번째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이 매우 슬펐지만 그래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오래된 집이 팔렸을 때 국내에 수도자들이 총 11명이었다. 서울에 9개의 방이, 광주에는 4개의 방이 있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조치가 필요했다. 게다가 광주 피정의 집에는 29개의 방 밖에 없어서 100명 남짓의 소규모 그룹 밖에 수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196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재질이 그리 좋지 않는 건축자재로 지어진 것이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새 피정 집 건축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1984년 8월부터 일곡동에 새 건물 건축이 시작되어서 1985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9월, 로렌스는 미국에 가서 학위를 마치려고 준비하던 김 바오로 신부와 함께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저스틴은 서울에서 바오로가 엮임하던 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바오로와 로렌스는 1년 정도 3개의 방이 달린 작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12월에 바오로가 떠나고 이듬해 봄에 바오로 가브리엘과 마티아가 들어왔다. 총 11개월이 걸려 완성된 새 피정 집은 42개의 큰 방과 수도원은 손님방을 포함한 14개 방으로 구성되었다. 1985년 10월 19일, 십자가의 성 바오로 축일날 수도자들이 이사하였고, 한 달 이내에 피정자들을 받았다. 이번에도 여러 대표들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대의원으로 모였고 뜻하지 않게 그 중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왔다.
1986년 3명의 형제들이 서원하였고, 1987년 3명의 사제가 탄생하였고 1988년 2명의 형제가 입회하였고 1명의 사제가 탄생되어 또 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시작부터 광주 피정의 집은 꽉 차있었고 서울에 부쩍 증가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이 요셉과 수없이 도시를 돌아다닌 결과 서울의 돈암동 첫 피정의 집 근처에 조그마한 땅을 매입하였다. 1986년 비오가 이 작은 집을 짓는데 책임을 맡아 8개의 방과 손님방 2개가 갖추어 졌다. 모든 시설이 적당하게 되었지만, 각 방들이 너무 작고 겨울과 여름철 냉.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가 5년 동안 지내고 난 뒤 지금까지 베네딕도 수녀회가 이곳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저스틴은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공부하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원장의 남은 임기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1991년에 김 영권 바오로가 이 집의 마지막 원장이었다. 이 건물은 특별한 계획 없이 현재까지 베네딕도 수녀회가 쓰고 있다.
1986년에는 마지막으로 지부 총회가 열렸다. 저스틴이 총장 대리로 로렌스가 두 번째 참사로 재 선출 되었고 최근 2년간의 미국 Duesquene 대학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 아우구스티노가 첫째 참사로 선출되었다. 로렌스는 광주의 원장으로, 어거스틴은 서울의 원장으로, 저스틴은 서울 돈암동 원장이 되었다.
1984년 광주의 건물이 팔리고 난 후 대전에 작은 건물을 사게 되었는데, 이 건물은 1990년에 팔려서, 이 자금으로 대전 옆 청주 교구의 오래된 집을 매입하였다. 이곳은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차기 관구를 위한 수련원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수도회에 수도자들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도자들의 급증은 한국 예수고난회의 활동에 물적, 지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7년 총장 바오로 보일(Paul Boyle)은 공동체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참사회와 지부회의에 더 나은 발전을 위한 다음 단계를 위해 숙고하라고 권고하였다.
총장은 이제까지는 시카고의 성 십자가 관구에 속했던 한국 지부를 한국 부관구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로써 한국 예수고난회가 다른 국가 수도회처럼 자체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또 그만큼 국제 수도회에서 큰 책임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참사회는 1986년 국제 수도회 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안건을 제의 하였고 결국 거의 만장일치로 한국 예수고난회가 부 관구로 인정되었다.
1988년 2월 27일, 3명의 젊은이들이 예수고난회원으로 첫 서원 하는 날, 총장은 한국 순교자들의 부관구로 승격되었음을 발표하였다. 그 자리에는 서원자들의 가족과 아시아 태평양에서 온 많은 대표들이 있었다. 다음날 제 1차 부관구 총회가 열렸고 총장이 준비한 제정법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저스틴, 어거스틴, 로렌스의 직책은 1990년에 있을 제 2차 총회까지 계속하기로 하였다. 또한 성 십자가관구와 새 부관구의 계약이 총회에서 체결되었고, 새로운 부 관구장 저스틴 바토즈체크(Justin Bartoszek)와 성 십자가 관구장 세바스챤 맥도날드(Sebastian McDonald), 그리고 총장 바오로 보일(Paul Boyle)이 서명하였다. 이 계약은 한국에 남아있는 외국인 수도자들의 생활 보장과 신학생과 양성자들을 위한 자금 마련, 그리고 성 십자가관구와 새로 탄생된 부 관구간의 사랑과 존중에 관한 것이다.
한국은 24년간의 계속적인 성장을 통하여 이 세상 안에서 아시아의 예수고난회 선교의 중심축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이렇게 한국예수고난회가 성장하는데 공헌한 사람들이 그 행사에 있었다. 제임스 패트릭 화이트(James Patrick White), 세바스챤 맥도날드(Sebastian McDonald), 바오로 보일(Paul Boyle), 레이몬드 맥도노우(Raymond McDonough) 그리고 저스틴 바토즈체크(Justin Bartoszek) 등이었다. 새로 직책을 맡은 부 관구장은 수도회의 뿌리 역할을 담당해준 그분들 앞에서 감사할 점도 많았지만 앞으로 예수 고난회가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도 많다고 여겼다. 새 참사회의에서 김 아우구스타노를 수련장으로 임명하여 지난 12년간 수고하신 리처드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 해에는 새 수련자들이 없어서 아우구스티노는 여유를 갖고 앞으로 바람직한 수련기에 대하여 계획할 수 있었다.
부 관구가 되면서 첫 과제는 로마의 총원에서 세금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게 잘못 전달된 줄 알았지만 총장과 의논한 결과 부 관구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1988년 여름, 모든 양성자들은 큰 녹음 스튜디오가 있는 서울 미아리 성 바오로딸 수녀원에 모였다. 몇 주간에 걸쳐 수녀들과 함께 한국 전통악기 대금 연주자인 강 바오로마리가 작곡한 첫 국악미사를 녹음했다. 강 바오로마리의 국악 미사는 한국 전통가락에 맞추어 작곡도니 것이었는데, 국내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수련소 형제들의 인내와 노력을 통해 전통 가락의 국악 미사가 국내에 퍼져나갔다.
부관구가 된다는 것은 부관구장이 로마 총회에 직책상 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 마침 총회가 그해 10월에 로마에서 있었다. 저스틴이 부관구장으로 로렌스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1988년 9월말에 로마로 향했다.
로마총회에서 호세 어거스틴 오베고조(Jose Agustin Orbegozo)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성심의 빌바오(Bilbao) 관구출신의 바스크인 호세는 성심관구 관구장으로서 불과 몇 달 전에 관구 산하 콜롬비아의 지부가 부관구로 되면서 여러 상황에 적절하게 경험 있는 사람이었다. 새 총장으로 호세가 한 일은, 세바스찬 맥도날드(Sebastian MacDonald)의 도움을 받아 로렌스를 로마로 불러서 비서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며칠간 고민하던 로렌스는 3년 동안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이 요구에 응하였다. 호세는 결국 6년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조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새 부관구장은 분원장과 참사의원을 로마에 뺏겼다. 어쨌거나 관구장에게는 적어도 한국을 아는 분들이 로마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스틴과 로렌스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로렌스는 짐을 챙기기 위해 몇 주간만 머물렀다. 성탄절 모임에 리처드 톰슨(Richard Thomson)이 두 번째 참사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새로운 참사회원이 필요했다. 로마로 떠나기 전, 1989년 1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한국의 새로운 원장들이 선출되었다. 실제로 로렌스는 서울 우이동에서 원장직을 맡기로 하였지만 로마에 가야 했기에 리처드가 대신 맡았다. 아우구스티노는 광주 원장으로, 저스틴은 서울 돈암동의 원장이 되었다. 성탄절 모임이 끝나고 로렌스는 미국을 통해 로마로 떠나서 그 후 6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1989년에는 몇몇 사건들이 부관구인 한국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첫째 광주에 자연재해가 있었다. 폭우로 인해서 진흙이 흘러들어와 피정의 집 뒷마당에서 즉 수도원 앞에까지 진흙덩어리들이 가득 쌓였다. 김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에 있는 로렌스와 통화하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로렌스는 정말 운이 좋다고 하였다. 다행히 한국에 마티아가 있어서 이 난국을 속히 수습할 수 있었다. 피정의 집에서 생활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이 기회에 다시 수도원 앞의 언덕을 시멘트와 철근으로 보수하게 훨씬 안전하게 되었다.
25년간 한국에서 지내며 16년 동안 원장을 맡았던 레이몬드 맥도노우(Raymond McDonough)는 1989년 관구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청주 근교의 내수 본당에서 활동했던 레이몬드의 사목활동의 결실이 풍성해서 그 자신 뿐 아니라 우리 수도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레이몬드가 일하는 동안 내수 본당에서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성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레이몬드는 임기 막바지에 관구에서 보내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1년 남짓 로스엔젤레스와 디트로이트의 피정의 집에서, 그리고 5년 넘게 인도에서 봉사하면서 또다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선교를 위해 힘썼다. 한국에서 성심껏 최선을 다하면서 큰 공로를 쌓은 그를 떠나보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다. 비교적 젊은이들의 그룹인 한국 부 관구에서 유일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었는데 짧은 기간이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 다른 사건들은 수사들 개인에 관한 것들이다. 그 중 천 베드로와 유 바실은 각각 1986년, 1988년 서원을 하였지만 후에 수도회를 떠났다. 베드로는 1989년 1월에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들은 1974년부터 지난 15년간 꾸준히 성장해온 한국 예수고난회에서 수도원을 떠나는 첫 수도자들이었다. 한국인 서원자 중에서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다. 이 두 젊은이들은 수도원에 있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직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행복한 결혼으로 이끄시고 수도원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 주실 것을 믿으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저 쉽게 부서지는 질그릇에 불과하고, 이런 나약한 인간성을 통해 하느님께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1989년, 1990년, 1991년에 또 다른 일들이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자신의 나약함에 직면한 몇몇 수사들은 이후 몇 년간도 이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1990년, 한구 부관구는 장래를 계획하며 안정적인 길을 가고 있었다. 자비롭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에 신뢰를 두며 활기 있는 수사들이었다. 저스틴이 원장을 맡은지가 10년 가까이 되었다. 저스틴이 활동한 10년간 눈에 띄게 회원들이 증가하였고 건물이 늘어났고 그리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역 교회와의 관계도 활발했다. 이런 괄목할만한 성장은 저스틴의 훌륭한 지도력 덕분에 가능했다. 우리는 곧 청주 교구로 갈 예정이었다. 광주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있었고, 서울에도 하나 있었다. 1990년에는 10년 전보다 2배인 총 18명의 서원 수사들이 부관구에 있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을 묘한 방법으로 해결하시며 수도회를 성장시키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1990년 12월, 제 2차 부관구 총회가 총장 호세가 주재 하에 광주에서 있었다. 1988년 이래로 형제적 사랑으로 한국에 공식방문을 하던, 총고문인 해럴드 루츠(Harold Reusch)와 로렌스도 로마에서 와 함께 회의에 참여 하였다. 하지만 로마에서 공부 중이던 바오로 가브리엘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총회에서 과거 여러 사건들이 무난히 지나간 것을 감사하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하였다.
첫 투표에서는 한국 예수 고난회의 첫 사제인 김 성종 바오로가 부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 바오로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밝혀진 개인적인 사정으로 부관구장 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의 첫째 참사는 리처드 톰슨이었고 두 번째는 김 영권 바오로였다. 김 아우구스티노는 수련장과 더불어 부관구의 새 수련원 척산리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김 마티아는 광주의 원장으로, 정 비오 서울 우이동의 원장으로, 영권 바오로는 서울 돈암동의 원장을 맡게 되었다. 우리는 리더의 역할을 한국인들이 맡게 된 것에 대해 많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늘날 한국 예수 고난 수도회 – 1991 - 1997
부 관구장을 맡은 지 채 2개월도 안되어 바오로가 책임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지쳐있었다는 것이었다. 바오로는 1991년 5월 부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1991년 6월 12일 부 관구장 직은 자동적으로 리처드 톰슨에게 맡겨졌다. 이로써 리처드는 제 3대 부관구장이 되었다. 한국 부관구 총회에서 김아우구스티노가 첫째 참사로 뽑혔다. 이러한 사건들은 다시 한 번 한국 부관구 차원에서 우리자신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깊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1987년 서원하고 199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알로이시오 였다. 1990년도에 알로이시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수도회와 사제로서의 삶에 불만이 많았고 이 후 1년 내로 공동체를 떠나 결혼을 하였다. 1992년이 되어서야 교황청으로부터 독신서약을 면하는 법적인 허가를 받았다. 이 알로이시오는 한국에서 16년 만에 수도원을 떠나는 첫 사제였고, 이 일로 공동체는 꽤 큰 타격을 받았다.
1991년 말 돈암동 집을 폐쇄하고 새로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때까지 베네딕도 수녀회에게 빌려주기로 하였다. 그 곳에서 숙식하던 학생들이 모두 서울 우이동 피정의 집으로 이사했다. 이는 부관구를 조금 더 체계적이고 견고히 하려는 노력이었다.
1992년 바오로 가브리엘은 광주의 원장이 되었고 리처드 톰슨은 서울의 원장이 되었다. 바오로 가브리엘은 로마의 안젤리쿰(Angelicum)에서 막 학위를 마친 후였다. 가브리엘에게 첫 번째 도전이 되었던 것은 당시 광주에 있는 종신 서약수사 김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힘들어 결국 수도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후 성직을 지망하던 신학생 3명의 유기서원자들도 수도회를 떠났다.
1993년 9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원장의 모임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열렸다. 각 관구, 부관구 그리고 지부에서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PASPAC 이라 불리는 이 모임에는 총 참사였던 해럴드 루츠(Harold Reusch)가 선종한 이후 그 공석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폭발성 간염으로 인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PASPAC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회원들은 내년 총회 때 까지 총 고문의 자리는 일단 비워두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이 모임에서 김 마티아는 차기 총회를 위해 PASPAC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12월, 제 3차 부관구 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재 선출된 호세 아구스틴 총장이 총회를 주재하고 총 참사로 새로 선출된 제프리스 포에일(Jefferies Foale)이 참석하였다. 1993년 2월 해럴드 루츠(Harold Reusch)가 선종하였기 때문에 관행이던 총회 전 공식방문은 하지 못하였다. 또한, 1995년 초, 로렌스가 로마에서 임기를 마치고 한국 부관구로 돌아왔다. 이 부관구 총회에서 리처드가 부 관구장으로, 바오로 가브리엘이 첫째 참사로, 마티아가 두 번째 참사로 선출되었다.
1995년 초, 돌발사태가 발생하였는데 부관구장과 참사회의는 수련장 수련장 김 아우구스티노와 양성 지침에 관하여 의견이 대립되면서 아우구스티노는 수련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래서 부관구장이 수련장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수련장을 사임한 뒤 서울로 가서 다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아우수스티노는 부관구의 13명 수련자를 동반하였다.
1996년에는 시그나의 예수고난수녀회가 한국에 들어왔다. 안젤리카 플로라(Angelica Flora) 수녀와 신 로사리아 (Rosaria Shin) 수녀가 와서 한국 예수 고난 가족 수도회가 이루어졌다. 필리핀에 한국인이 서원수녀와 청원자로 있었는데 향후 춘천교구에서 수도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초창기에 예수고난 수녀회는 32년 전에 예수고난회 수사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겪었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90년대에는 또 다른 서원반 수업이 개설되면서 1997년에 수도회 인원이 26명까지 늘어났다. 1990년대 이래 14명이 서원하면서 주님 포도밭의 일꾼들이 점점 늘어났다. 비록 몇몇이 수도회를 떠나가긴 하였지만 아직은 장래에 희망과 용기를 가진 수도회였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36명의 수도자들 중에 단지 8명이 영원히 수도회를 떠났다. 남은 30명 서원자중에서 7명이 수도생활을 그만 두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세계 각국의 다른 관구와 부관구에 비하면 양호하였다. 현재는 4명의 수련자가 있다.
1996년 12월, 각 공동체의 원장이 바뀌었다. 서울은 김 마티아가, 광주는 오 요셉이 책임자가 되었다. 척산리의 새 원장은 로렌스이고, 제주도에 새로 시작한 표선본당의 사제 겸 원장으로 아우구스티노가 맡았다. 마지막으로, 땅을 매입한지 19년 후에 건축된 동해안의 척산리에 위치한 새 수도원의 총 책임은 저스틴이 맡았다.
새로 설립된 척산리 수도원은 1994년 총회에서 승인되고 총장의 재가를 거쳐 전문 건축가 마티아가 감독을 맡아서 1996년과 1997년 겨울에 완공되었다. 그 집은 4명의 수도자와 손님 2명이 거처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총회의 결정에 따라 이제 한국에도 더욱 고요한 분위기의 피정집이 요구된다는 필요에 의해 “실험적”으로 이 집이 마련된 것이었다. 또한 이 집은 매년 휴가에 더 이상 찾아갈 친지나 가족이 없는 부관구의 회원들을 위해 휴가 집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한국에서의 사도직 활동과 부관구의 역사를 통해 비추어 공동체 삶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부관구의 사도직 활동
한국에서 예수고난회의 사도직활동 시작부터 수사들의 주요 사도직 활동은 서울과 광주의 피정 집이었다. 다양한 계층의 수도자들의 요구에 따라 직접 피정을 지도하고 강론하는 것을 비롯하여 관리와 행정 업무까지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다른 수도회와 교구사제들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된 이 피정 집의 운영은 예수고난회가 한국 교회에 자리 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피정자들 중 남성과 여성의 90% 이상이 한국의 평신도들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김 성종 바오로, 김 아우구스티노, 박 도미니코 그리고 다른 회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어르신을 위한 피정이나 청년을 위한 피정, 가족을 위한 피정 등 특별피정을 준비하여 국내의 모든 계층의 신자들을 두루 아우르도록 노력하였다. 피정집을 시작한 후 28년간 한국 예수고난회 사도직활동을 통하여 몇 십만 명이 넘는 사람이 피정에 참여하였다.
게다가 강론, 고백성사, 상담 등, 그리고 두 개 피정 집의 많은 인원을 관리하고, 방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회계장부를 정리하고 매끼식사를 담당한 모든 사람은 우리 사도직에서 사랑과 선행의 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가족피정과 젊은이 피정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자원 봉사해 준 평신도들의 공이 크다. 자원 봉사자들 중에는 아주 바쁜 전문인들이나 혹은 부모들이 피정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준 대학생들, 큰 그룹을 위해 자신들의 특별한 재능으로 레크레이션을 담당해준 분들도 있었다. 자원 봉사자들의 수고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했다. 대부분은 주님께 봉사한다는 만족감 이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늘어나는 평신도 직원을 감당하기 위해 피정 센타가 커지게 되었다. 직원들 중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수고난회 사도직과 수도자들의 활동에 동참하려는 마음이었다. 종종 센터에 일하러 오는 분들이 처음에는 신앙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떠날 때쯤에는 거의 다 세례를 받았다. 우리와 함께 활동했던 젊은 여성 중 7~8명 정도는 수도생활을 갈망하고 수녀가 되었다. 한국에서 우리 예수고난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이런 좋은 사람들을 통해 축복을 받았다.
한국 예수 고난회는 초창기부터 특별 피정 프로그램들을 제공했다. 저스틴은 좀더 나은 세상 만들기 운동(the Movement for a Better World in Korea)의 창설자 중 하나였고 10년 간 국내에서 대표로 활동하였다. 패트릭 오 말리 (Patrick O'Malley)와 저스틴은 지금도 활발한 꾸르실료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함께 활동하였다. 김 성종 바오로와 김 아우구스티노는 ME(Marriage Encounter)에 참가하고 봉사자로 활동하였다. 이 ME 활동을 바탕으로 청년을 위한 '선택 피정'이 생겼다.
부관구가 시작되면서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영적지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랑의 시튼 수녀회, 보혈 수녀회, 예수 고난 수녀회와 또 다른 수녀회에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도와주는 것이 부관구의 일상중의 하나였다. 특히 리처드는 수녀들의 고해성사와 면담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개개인의 영적인 생활을 돕는 노력들이 퍼져나가서 청주의 가톨릭 센터와 서울, 광주의 신자들을 위한 정기적으로 고해성사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또 다른 특별한 사목은 지난 10년간 광주 교구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예수고난회가 주관한 리더십 여름 캠프였다. 이 여름 캠프는 몇 주간씩 계속되었는데 수련소에 있는 형제들과 적어도 1명의 사제가 열성을 다하여 그들을 동반하였다. 이 캠프는 멀리 떨어진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고 신앙과 교회에 대해 또 서로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이었다.
1982년 말에 부관구는 본당 사목을 시작했다가 1989년 총장의 권고에 따라 철수 했다. 이 본당사목은 한국공동체의 활동 중 가장 가치 있게 여겨졌기 때문에 이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994년 최근에 있었던 총회는 다시 본당 사목을 하기로 결정 하였다. 1997년 초에 김 아우구스티노, 김 영권 바오로와 새로 서품 받은 김 루이스가 제주도에 새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이 본당 사목은 사제로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양성자들에게도 좋고 본당사목을 통해 예수고난회 수도생활을 알리고 성소자를 발굴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순회설교(본당선교등)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부관구에서는 활발하지 않았지만 몇몇 수도자들에게 사도직의 출구 같은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 가능성이 있는 분야는 더욱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수녀들과 성직자를 위한 피정은 몇 년간 정기적으로 저스틴, 리처드, 성종 바오로, 김준수 어거스틴, 오 성균 요셉이 맡아서 진행되었다. 앞으로 이런 사목이 더 활성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방송 매체도 이용하려고 몇 년간 많이 노력해왔다. 가장 최근에는 오 요셉과 김 아우구스티노가 한국 가톨릭 미디어인 평화 방송에 출연하고 라디오도 녹음하였다. 사순절이나 특별한 시기에 오 요셉과 김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론요청이 있어 시간과 자료를 나누었다. 앞으로 이 방송 매체를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회복지 면에서는, 비록 수도회 시작부터 추진되었지만 비로소 요즈음에야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에이즈 감염 환자 같은 말기 환자들을 위해 뭔가 봉사하자는 의논이 있었지만, 한 명의 형제를 빼고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고 파비아노는 사회복지학과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정 비오는 청주의 장애 아동의 집, 무료 급식소, 그 구역 성 빈센트 드 폴 봉사회 등에서 몇 년간 봉사해왔다. 이러한 귀한 봉사는 개인적으로는 도전이 되었지만 그 공동체와 사회에는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또한, 비오는 민 요한과 함께 청주 교도소에서 교정사목도 하였다.
공동체 삶
시초부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던 공동생활은 부 관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부 관구 차원으로 매년 3차례의 회의가 열린다. 성주간에는 수도회 형제들이 모두 모여서 온전히 전례적 삶에 헌신한다. 또 성탄절에는 모두 모여 주님의 탄생을 경축한다. 여기에 더해서, 부 관구 차원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기회도 가지고, 형식적으로든 비형식적으로든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통하여 기쁨을 누린다. 앞으로는 멀리 떨어진 본당과도 더욱 헌신적으로 관계를 맺어서 연중 모임들을 보완하고 더 굳건하게 해야 하겠다.
지역적으로는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아침과 저녁 기도는 함께 모여서 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주중에는 다른 행사들을 함께 했다. 부관구에서 이어오는 한 전통이 있었는데, “공동체 서약(Community Covenant)”이다. 각 공동체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정의하고 활동을 설명하였다. 각 공동체의 일원들이 이 서약에서 서로에게 봉사할 것을 서명하였다. 또 다른 활동은 정기적으로 “쇄신회” (Review of Life)를 통해 공동체 개개인이 지키고 따르기로 서원한 회헌과 규칙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큰 피정 집에서는 어렵지만 보통은 정기적으로 공동체 차원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함께 외식을 하거나 등산이나 다른 분원으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공동체 삶의 큰 부분은 예수고난회원으로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새로운 성소자를 모집하는 초기 단계이건 종신서원이나 사제서품을 준비하는 단계이건 간에 예수 고난 회원으로 삶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부관구의 의무이다. 당연히 각 양성자들에게는 담당 지도자가 있지만 부 관구 전체가 젊은 회원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양성 초기부터 공동체 삶과 사도직활동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평생교육은 부관구에서 안식년을 시작하면서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박 안드레아, 안 크리스토퍼, 김두진 바오로 그리고 강 바오로는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방 사비오는 로마에서 공부하였다. 김영권 바오로는 대만과 중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하였고 미국에서도 한 때 수학하였다.
부관구는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과 북한에서 선교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 매주 공동기도 시간에 기억하고 기도하며 과거에 예수고난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수고한 것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한국예수고난회가 중국에서 사목할 기회를 주실 것을 기다린다.
끝으로
어떤 공동체이건 간에 흠(결점)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 예수고난회 부관구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에서, 맡겨진 소임을 하는데 있어, 공동체로써 어떤 사도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와 의견 차이에서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 주어진 역할에 대한 혼란과 책임자들의 결정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갈등과 오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아시아의 한 모퉁이에 함께 살고 있는 이 형제들 간에는 감동적인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닥친 문제들이 완화되거나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견디어 내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서로간의 믿음은 결국 예수고난회를 여기까지 이끄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내일에 대한 믿음은 오늘 예수 고난회를 이끌어 주시는 주님이 미래에도 여전히 같은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데에서 온다. 예수 고난회가 희망을 갖는 이유는, 어떤 수도자가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 큰 은혜에 힘입어 인간적으로 또 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바오로가 영적인 유산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래 예수 고난회의 모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 유산을 남겼다.
십자가의 바오로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형제들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해주기를 “땅에 머리를 대며” 청하였다. 바오로는 또 자신에게 베풀어준 형제들의 친절에, 수도회에 베풀어준 후원자들의 자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머무시도록 자리를 마련하신 교회에 감사했다.
한국 예수고난회는 풍요로운 유산과 생동감 있는 사도직과 그리고 살아있는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예수고난회는 이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후손들을 지켜주는 특별하고 은혜로운 창립자도 있다. 이 글을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용기를 갖기 바란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감사고 그들에게 교회 안에서 충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란다.
로렌스 핀 (Laurence Finn) C.P.
척산리에서
1997년 8월 3일